선동하는 음악과 음악의 도덕성 논고

2025-10-16 0 By 커피사유

이하의 내용은 2025학년도 2학기, 청강으로 듣고 있는 서울대학교 《음악론입문》강좌의 〈선동하는 음악〉에 대한 학생 발표에서 제시된 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토의 이전에 기록해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I.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이 있을까?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나쁜 음악이 존재한다면 이를 제한해야 할까?

  • 청중이 개개의 미적 기준에 따라 음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는 있고, 또 이를 종합하여 보편적으로 어떤 음악이 좋다/나쁘다에 대한 이론을 확립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할 수 있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비록 나 자신은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가르는 보편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나쁜 음악을 제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 좋다/나쁘다의 기준은 시대나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대단히 주관적 · 상대적인 것이다. ‘나쁜 음악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주요한 근거는 통상 어떤 음악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위협하거나 개인에게 부정적 영향을 심대하게 미칠 수 있는 경우에는, 음악이 가지는 특유의 호소력과 파급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공동체에 대한 위협’, ‘개인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의 기준은 모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부조리한 체제 자체를 지탱하는데 있어 역이용될 수 있다.
  • 이를테면 군사정권 시절 상당수의 음악들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역사를 되돌아보자. 김민기의 ‘아침이슬’부터 시작해서 ABBA의 ‘Money, Money, Money’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곡들이 왜색풍, 창법 저속, 불신 풍조 조장, 퇴폐성 등등의 다양한 (그리고 전혀 일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잣대를 근거로 출판, 방송은 물론이고 듣는 것까지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즉 이들 음악들을 당시 정부에서 금지한 이유가 정확히 ‘공동체에 대한 위협’, ‘개인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이었던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날은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우리가 특정한 음악을 ‘나쁜 음악’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배제시키려고 할 때, 그 태도가 1970~80년대 일어났던 이 촌극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 시대를 앞서간 음악들, 즉 오늘날은 그 독창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또 새로운 장르를 열어젖힌 창의적인 음악들이 대체로 처음 사회에 공표되었을 때는 ‘나쁜 음악’이라는 악명에 시달린 역사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클래식에서는 초연 전후에는 연주자들이 마치 박자를 군데군데서 놓치는 것 같으며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푸짐한 비판에 노출되었지만 후대에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대푸가(Great Fugue in B flat major, op.133)’나 비슷한 역사를 가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이 있고(이 음악은 아예 초연 당시에 관객들의 야유와 욕설은 물론, 패싸움까지 벌어진 이후 며칠 뒤 생상스 등과 같은 음악가들은 아예 스트라빈스키가 음악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원색적 비난을 내기까지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받았으나 근래에는 독자적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기 시작한 이박사의 음악들도 있으며, 오늘날 대중 음악의 대표 장르로 자리잡은 힙합도 초기에는 마약 혹은 범죄와 주로 연루된 갱들 사이에서나 향유되는 퇴폐적인 음악 장르라고 평가받기도 했다. 당대 대중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특정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악들을 금지하거나 검열하는 행위는 잠재적으로 이런 창의적인 음악 작품들의 창작이나 공표를 중단 · 억압시킬 우려가 상당하다.
  • 즉, ‘나쁜 음악’을 금지 · 제한하는 행위는 그 행위가 자칫 현재의 사회 질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옹호나 체제 방어로 남용될 가능성이 충분하고, 또 미래에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을 가능성이 있는 작품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음악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히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II. 음악 멜로디만으로 어떤 형태의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가사가 없는 노래도 선동하는 노래가 될 수 있을까?

  • 가사가 없고 음악 멜로디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이나 규범에 따르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사 없는 음악도 충분히 선동하는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카페,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 등에서 어떤 음악을 틀어주는지, 그리고 그 음악이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를 검토해보자. 매장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은 카페에서는 재즈(특출난 비밥/하드비밥 등은 아무래도 대중적이지 못하므로1물론, 아예 즉흥 연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찬 프리 재즈의 경우에는 대중적이기를 따지기 전에 음악인지 아닌지의 여부부터 따지기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난한 보사노바가 주로 선곡되곤 한다)를, 레스토랑에서는 재즈 혹은 클래식, 하다못해 최소한 시끄럽지 않고 잔잔한 음악을, 백화점에서는 주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반대로 패스트푸드점, 할인마트의 경우를 고려해보자. 맥도날드에서는 종종 최신 팝, 아이돌 그룹의 인기곡이 흘러나오고, 할인마트의 경우 주부들이 즐겨 듣는 가요나 적당히 흥겨운 곡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장소 모두 공통적으로 손님들이 몰려드는 피크 시간대에는 주로 박자가 빠른 음악을 틀어주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이마트에서는 아침 시간대에는 뉴에이지 · 발라드 등의 템포가 느린 드라마 삽입곡를 종종 듣게 되지만,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는 빠른 댄스 · 리믹스 음악을 듣게 되는 것 같다.
  • 카페, 고급 레스토랑, 백화점과 패스트푸드점, 할인마트의 선곡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각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에 대해 나 자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되짚어보면 명백하지 않은가 싶다. 카페 · 레스토랑 · 백화점에서는 잔잔하거나 조용한 클래식 음악 때문에 뭔가 ‘엇나가는 행동’을 하기 대단히 어려워진다. 점잖게 품위를 지켜야만 할 것 같고, 조금 더 조용히 대화해야 할 것 같고, 뭔가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거나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반대로 패스트푸드점 · 할인마트의 경우 빠른 박자를 타면서 살 물건을 재빨리 찾아 카트에 집어넣고 계산대를 향해 질주하거나, 음식을 조금 더 빨리 먹고 나가게 되는 것 같다. 음악이 더 신나면 신날수록, 빠르면 빠를수록 이런 암묵적인 강박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 물론 경우에 따라 이 장소들에서 틀어주는 음악들의 적지 않은 수는 ‘가사가 있다’. 최신 발라드나 팝, 아이돌 음악 중 가사가 없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이들 장소에서 우리가 이 음악의 가사에 집중하지는 않는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 지금 들리는 음악에서 가수가 사랑하는 상대의 손을 잡고 있을 때 감정이 뿌옇게 된다고 조용히 고백하든지(Ella Fizgerald – Misty), 아니면 해변에서 보이는 어떤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지(Stan Getz – The Girl From Ipanema)는 솔직히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할인마트나 패스트푸드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오는 음악이 애절한 실연의 경험을 노래하든, 청춘의 꿈이나 야간대의 흥을 노래하든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에 묻혀서 가사를 알아듣기 어려운 것도 있고, 애초에 가사를 듣기 위해 그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장소들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을 다르게 유도하는데 있어 여기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가사가 아닌, 멜로디 혹은 박자 등 가사 외적인 요소라고 해야 한다. 게다가 가사가 없는 음악들도 상술하였듯 특정한 행동을 취하게 하거나, 좀 더 여유로워지거나 급해지게 만드는데 종종 쓰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사가 없는 음악이라 하더라도 이상의 사례를 본다면 충분히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다고 결론내려야 하지 않을까?

III. 선동하는 음악은 예술인가, 아닌가? 선동하는 음악을 어떻게 정의하고, 또 예술로서의 가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 음악은 그 목적, 표현 대상과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 예술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또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등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기호에 따라서는 널리 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바흐 · 베토벤 등의 클래식은 물론이거니와 대중 음악들이 사람에 따라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동하는 음악은 그 목적이 불순하거나 위험해보인다고 하더라도 예술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도, ‘기미가요’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을지언정 모두 예술이라고 본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예술이 가지는 사회 · 정치적 효과와 무관하게 전체를 인정함으로써 예술 비평 일체를 봉쇄하는 지나치게 관용적인 입장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예술이다/아니다’와 ‘좋은 예술이다/아니다’, 즉 예술에 포함되는지의 여부의 판정과 그 가치에 대한 판정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 자신이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선동하는 음악들도 ‘예술’이라는 것이지,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 아니다.
  • 선동하는 음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명확한 정의가 대단히 힘들다고 생각한다. 발표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음악은 모두 선동하는 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아주 신나는 EDM과 같은 댄스 음악의 경우 청중들이 댄스 플로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조금이라도 몸을 까딱거리면서 리듬을 타거나 춤을 추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는 정확히 선동하는 음악에 대한 방금의 정의에 부합하는데, 그렇다고 그럼 EDM 음악은 모두 선동하는 음악이라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굳이 댄스 음악뿐만이 아니라, 앞서 ‘II. 가사가 없는 노래도 선동하는 노래가 될 수 있을까?’에서 살펴본 것처럼 작곡가가 전혀 대중을 선동할 목적으로 짓지 아니한 음악도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지에 따라서 ‘선동’에 사용될 수 있다. (대중가요와 팝 음악가들이 음악을 만들 때, 이 음악이 사람들이 더 빨리 걷게 하거나 장을 더 빨리 보게 만들게 하겠노라고 생각하면서 작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방금 설명한 사례까지 설명할 수 있도록 정의를 수정한다면, 선동하는 음악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행동을 취하도록 할 목적이 있는’ 음악으로 정의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물론, 이 정의 역시 특정 음악이 가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우며, 감상자에 따라 그 의도를 다르게 판정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부적합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소한 ‘선동하는 음악’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오는 바에 조금은 더 가까워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 선동하는 음악의 예술로서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각자 나름대로 평가하는 것이 최선이다’가 대답이 될 것 같다. 상술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술에 대한 보편타당한 좋고/나쁨에 대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어떠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주거나 이해하는 것’이 도덕적, 사회적, 미학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견지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랄 것 같기에 이 글(‘딜레마, 난장판 그리고 미학’)을 참고하라는 정도만 달아 둘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맥락 생략에 따른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후설의 〈에포케(epoché)〉와 비슷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주석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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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아예 즉흥 연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찬 프리 재즈의 경우에는 대중적이기를 따지기 전에 음악인지 아닌지의 여부부터 따지기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