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와 유언의 실존적 동등성
이하의 글은 ‘일기와 유언의 유아론적 동등성’이라는 글을 보고 난 뒤 생각했던 바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임을 밝혀둠.
사람이 의식이 있는 매 순간 줄곧 한 가지 사고에 묶일 수 있다는 것은 선거운1순우리말인 ‘선겁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풀이를 가진다: ① 감동을 일으킬 만큼 훌륭하거나 굉장하다. ② 재미가 없다. 후자의 뜻은 사고의 깊이 또는 ‘보지 못함’에 대한 조소이기에 부정적인 가치 평가를 암시하지만, 전자의 의미는 긍정적인 가치 평가를 내포한다. 나는 첫 번째 뜻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일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날마다 자살에 대해 ― 윤리적 사고실험으로서, 실존적 극한으로서, 미학적 알레고리로서 ― 생각한다.
윤리가 얼마나 공허하고 모순적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이 항상 읊어대는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이 실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상기해본다. 생명의 소중함은 이미 두 개나 진행되고 있는 전쟁의 사례, 그리고 그 전쟁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관심 위에서 논거가 될 가능성을 간단히 상실한다. 존엄성에 대한 논의에서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나는 개인의 층위가 아닌 사회적 층위, 그러니까 개인을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바라볼 때의 이득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공리주의는 자살을 잠재적 노동력 혹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시민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손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호소는 내가 가장 죽음과 가까웠던 시기에서는 그저 ‘내가 죽는 모습을 보기 싫은’ 사람들 혹은 사회의 이기적 푸념으로 들렸다. 단신으로, 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유럽 사회에 가져다준 효과를 똑같이 담습하지는 않을까 싶어 의도적으로 맥락과 방법을 생략한 보도 밑에 ‘상담 센터의 연락처’를 달아두는 형태로 자살이 기사화되고 소비되는 시대에 사람들이 과연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기는 할까 싶었던 것이다.
이 환멸을 나는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자살을 규탄할 수 있는 논고는 쓸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은 마땅히 그에게 선고된 사형을 스스로 집행해야 할 것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이 니힐리즘의 상태, 즉 신이 남긴 십계명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수천 개의 날카로운 조각들로 비산한 장면을 추하고 끔찍하다고 평가해볼 수도 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저 처참한 몰골에 경악하고, 그 몰골에 도달한 현재를, 그런 인식에 도달한 스스로와 세계를 저주해볼 수 있다. 모순적인 세계에 대해 통일성을 부과할 수 없다는 사실, 저 잔인한 운명에 대고 고함을 질러볼 수도 있고, 이미 무너진 기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신’이라던가 ‘도덕’이라던가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오늘을 나쁘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허무한 인식의 상태, 세계와 나 자신의 화해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의식의 상태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 무너진 세계, 비어버린 캔버스, 처참하게도 가루가 되어 버린 저 폐허 앞에 서 있는 인간을 상상해보자. 한때 매끈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이 저기 서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형체가 그리워지곤 하지만, 반대로 그 형체가 오히려 지금 여기에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나는 무엇이든지 세워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따라서 나 자신의 건축물도 어느 순간 깔끔하게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의 가슴을 뛰게 하는 순간은 완성된 구조를 관조하는 순간이라기보다는 그 구조를,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저 토양 위에 과감히 세우기를 의욕하는 순간이다.
이 관점의 전환은 중요하다. 아무리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더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와 죽어야 하는 이유 둘 모두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세계를 더할 나위 없이 낯설고 나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는 것이라 여기는 결론에 치우치기 쉬운 우리의 정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에 대한 이해와 화해를 갈구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동력에도 공평하게 주목해줄 것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방인을 저주하고 싶다는 욕망과 이방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욕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이율배반적 상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서져버린 나의 체계들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것을 상상하는 스스로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우리는 추함에 ‘참을 수 없는 이끌림’을 느낀다. 그러나 그 이끌림의 정체란 내가 인식하는 저 개별자들의 끊임없는 변화에 ‘추하다’, ‘악하다’, ‘무질서하다’라는 가치 평가를 통해 피로함을 표현하는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일차적 가치 평가를 내린 뒤에도 영원을 꿈꾸고 피안을 꿈꾸며, 세계가 합리적인 체계와 이론들로, 나에게 친숙한 무언가로 환원되기를 여전히 바란다. 이것이 달성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더없이 멍청하고 무의미한 일이라는 결론이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무의미한 질서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반복되는 카프카의 영안실에서 곯아 있던 사자가 처음으로 삶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사건은 다시 한 번 ‘그 무의미한 질서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하며 반복되는’ 영안실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건이다.
한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여 노벨문학상을 받은 문호가 이야기한 바는 인간을 구속하는 어떠한 논리 체계도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논한 바는 모든 사람은 세계에 대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점, 즉 설명을 바라는 자기 자신과 그에 대해 아무 대답도 내어주지 않는 세상 사이의 갈등을 이어나갈 운명에 처한 그런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미지의 것을 부둥켜안고서 대결을 이어나가는 사람, 침묵하는 상대를 향해서 여전히 계속 대화를 걸고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을 과연 수사학의 가면 뒤에 숨은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논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미묘한 행간을, 죽은 신의 시체가 겹겹이 쌓인 세계 위에서도 인간이 결단할 수 있는 바를 치밀하게 구성된 알레고리를 통해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사학의 재주란 이토록 강력한 것이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동전처럼 무게가 없고 경박한 짓이기 때문에 재주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동전임에도 불구하고 거기 있어 가장 흥미롭게 되기에 재주인 것이다.
이상의 문단들은 철학적 자살2〈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자살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 실제로 목숨을 끊는 육체적 자살, 둘째. 의미가 없는 세계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철학적 자살. 나는 이같은 카뮈의 의미에서 정확히 이 단어를 쓰고 있다.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는가? 즉 논리적 탐구가 의미의 부정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드러내줄 수밖에 없을 것임에도 이 모든 갈등들을 지나친 수사학으로 덮으려는 시도였는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명제는 물론이거니와 대다수의 도덕 · 상식 · 가치관, 마침내는 진리 일반의 절대성에도 제대로 동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방금의 문단도 감정의 발현과 언어의 유혹에 이끌려 쓴 문자열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안다. 다만 나는, 여기에 내 나름대로 구축한 의미나 진리가 들어 있다고 믿으며 이 일을 마지막까지 기꺼이 다하다 갈 생각일 뿐이다(물론 이 믿음이 어느 순간에 산산조각날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주석 및 참고문헌
- 1순우리말인 ‘선겁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풀이를 가진다: ① 감동을 일으킬 만큼 훌륭하거나 굉장하다. ② 재미가 없다. 후자의 뜻은 사고의 깊이 또는 ‘보지 못함’에 대한 조소이기에 부정적인 가치 평가를 암시하지만, 전자의 의미는 긍정적인 가치 평가를 내포한다. 나는 첫 번째 뜻으로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 2〈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자살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 실제로 목숨을 끊는 육체적 자살, 둘째. 의미가 없는 세계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 거짓말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는, 철학적 자살. 나는 이같은 카뮈의 의미에서 정확히 이 단어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