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025-11-02 0 By 커피사유

오늘 큰 결심을 하고 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시간이 꽤 걸릴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2개의 졸업연구와 동시에 하기에는 상당히 빠듯하고 또한 수고가 많이 들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내딛은 걸음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그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결국 펼쳐들었다는 이야기다. 독서회를 통해 인연을 계속 맺어오고 있는 두 문학 선생님께서 상당히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고 평가하셨기에 충분히 준비가 되면 읽으리라 생각하며 계속 미루어오고 있었는데, 결국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과 더불어 요 몇 년 사이에 상당히 서가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대표적인 증거물이 서양철학 베스트셀러 코너의 한켠을 차지하게 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니까. 사람들은 이 책이 자신에게 위안을 가져다주었다거나 세계나 삶을 달리 볼 수 있는 어떤 시각을 제공해주었다고 연신 칭찬하지만, 글쎄. 나는 이 평가가 온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이 평가에 대해서 뭐라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평가들이 올바른지 판단하려면 그 책을 읽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언제나 사상가의 사상 그 자체다. 물론 사상은 그를 읽은 다른 사람의 시각과 요약을 통해 받아들일수도 있겠으나, 청춘의 패기로 나는 직접 그의 저서를 읽고 판단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1물론 내가 읽는 서양철학서는 ‘번역본’으로, 역자의 시각과 판단이 개입된 결과물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어와 그 뒤에 계획하고 있는 독일어에 대한 학습은 바로 이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한 결단이 아니던가. 직접 그들과 대화하는 것, 그들이 남긴 문장들을 헤집어 그 행간과 진의를 밝혀내는 작업을 결의한 이상 나는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이 어학 능력이 확립되기 이전까지는 차선책으로라도 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지 않고 쇼펜하우어에 대해 논하는 것은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타인이 요약한 바를 단순히 가슴에 새기는 것에 대해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언제나 나를 가슴뛰게 하는 저 무엇이란 시대를 풍미한 자가 남긴 저 문장들의 미로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나갈 때, 그리하여 그 미로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나만의 지도를 완성하는 저 순간이 아니던가.

철학적 여정의 한 진보를 앞두고 있는 나는 발걸음을 신중하게 내딛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두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의 경고를 상기하고 있었기에 나는 역서 판본 선정부터 아주 신중을 기했다. 나의 선택을 받은 것은 근래 서고를 채운 최신 판본이 아니었다. 나는 1994년, 을유문화사에서 곽복록 선생이 옮긴 판을 선택해 중고로 매입했다. 최신 번역의 경우 조금 더 나은 해제가 붙어 있을 수 있고 또 이전 번역에 대한 교정을 상당히 보았을 것임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난해한 책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가독성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의 평가들이나 일찍이 이 종류의 서적에 도전한 용자들의 평가를 보면 근래에 나온 판본들은 글자가 너무 작아서 보기 어렵거나, 문장 자체가 지나치게 딱딱하게 번역된 것 같다. 몇 가지 오역도 지적되어 있었다. 물론 오역의 문제는 예전의 판본이 더 심할 수도 있지만, 나는 쇼펜하우어와의 만남에서부터 얻을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을 망칠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는 고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좀 더 부드럽고 친절한 문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조금 더 오래된 판본을 택했다. 이 선택에는 또 다른 이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꽤 오래된 책이라 중고 매장에서 신판보다 상당히 싼 가격에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하나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 전에 문제의 책은 내 방에 박스와 신문지에 싸여 도착했고, 오늘 새벽에 드디어 나는 책을 펼쳐들었다.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이 책의 첫 날개에 날짜를 기입했는데, 쇼펜하우어를 읽는 목적을 기억하기에 다음과 같이 부언해두었다: “pour Nietzsche … 그의 사상의 기반이 되는 자를 검토하여, 그의 철학의 계보적 맥락을 제대로 살피기 위하여.” 책 귀퉁이에 내가 적은 이 문장들은 중요하다. 내가 쇼펜하우어를 읽는 것은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방법’이라던가 ‘인생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함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저 철학과 사상의 계보, 즉 세계와 그 속에 처한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고 자신만의 답을 내렸는지 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들의 도식이 각각 어떠했고, 어떻게 비판하거나 대립되었고 또 수정되어 왔는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대중이 말하는 의미와 다른 의미에서의 ‘마음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흔히 쇼펜하우어에게서 원하는 것, 즉 ‘마음 제어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내가 쇼펜하우어에서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란 ‘마음 구조화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시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들었던 〈불교철학의 이해〉 과목은 붓다 이후 대승불교 전통에서 관심이 된 주된 바 중 하나로 인식론, 즉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인식으로부터 얻은 표상이나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논하는 것을 꼽았는데, 내 관심사도 정확히 여기에 있는 셈이다. 알베르 카뮈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나의 흥미를 끄는 쪽은 세계와 인간의 대립에서, 인간과 대립한다는 저 ‘세계’란 무엇인지, 어떤 속성을 가지는지, 어떻게 인간과 대립하는지를 따지는 쪽이라고 할 것이고 칸트 등의 인식론의 전통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란 결국 무엇인지, 그 세계 속의 각 개별자 혹은 표상들은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되는지, 그 관계를 인간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 표상 간 관계의 인식을 지배하는 별도의 규칙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등의 여부이다. 즉, 내가 지금 의욕하는 것은 인식론, 나 자신이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인식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이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용어가 등장하고 철학적인 개념과 추상화들이 내 앞에 제시됨에 따라 나는 앞으로 상당한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니체를 처음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몇 년이 걸리든지 읽고 또 다른 이들의 해석을 접하고 토론하며 또 다시 읽는 일을 반복한다면 알베르 카뮈가 그러했듯 텍스트는,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저 문장들은 분명히 또 새로운 해석을 획득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만약 내가 어느 날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무엇을 계승했으며 또 무엇은 반대했는지, 그리고 왜 반대했는지에 대해 꽤나 구체적이고 정교한 하나의 설명 내지는 구조를 얻게 된다면, 쇼펜하우어와 나의 만남은 분명 또 하나의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오독과 오류의 위험을 나는 경계하면서도 경계하지 않는다. 우선 나는 이쪽 길을 먼저 가서 나에게 이 위험들을 피해 갈 길을 일러줄 수 있는 사람들을 대학에서 알게 되었다. 이미 이 책에 대한 독서회를 진행하고 계신 고등학교 두 은사님은 당연히 포함된다. 지난 학기 〈불교철학의 이해〉 강좌에서 만난 교수자는 불교 철학의 인식론 전통을 전공하고 또한 연구해왔으니 쇼펜하우어 사상의 불교적 배경에 대해서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스스로도 계승하고 있음을 밝힌 칸트에 관해서는 금 학기 청강으로 듣고 있는 〈음악론입문〉 강좌가 독일에서 칸트 철학을 전공했으며 미학과에서 칸트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교수자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저도 안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니체와 쇼펜하우어 등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해 학식이 높고 또 이들과 불교 철학 간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다수의 논문을 출간한 박찬국 교수님에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서양철학의 고전〉 강좌를 수강한 인연이 있다. 다음으로 나는 철학의 독창성은 일정한 수준의 ‘오독’을 동반한다는 점을 상기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칸트 철학의 일부를 오독한 결과물이라는 칸트 전공자의 평가를 나는 떠올려보고, 니체 철학에 대한 초기의 해석, 이를테면 ‘권력에의 의지’에 대한 여러 독창적인 평가들이나 재해석이 그를 오독한 것에서 기원했다는 역사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오독이 지나치면 죽은 이들의 생각을 곡해하고 그들의 과업을 폄하하는 실례를 범하게 되겠지만, 그들의 사상을 나름대로 요약하고 평가하는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오독은 불가피할 것이다. 결국 개념화나 추상화라는 것, 대상을 정의한다는 것이란 그 개별자들이 가진 속성 중 일부를 잘라내고 그것을 규정짓는 일종의 폭력 혹은 왜곡 행위가 아니던가. 적정한 수준의 가지치기는 언제나 철학에 필요한 법이며,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하기도 좋아하지 않는 인간에게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용기내어 뻗은 이 발걸음에 담긴 저 무게들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다시 한 번 의욕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는 칸트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나는 들은 바 있다. 나도 이 입장에 동의하지만, 그의 생각이 나와 같을지의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쇼펜하우어는 나에게 타자이며, 나는 그의 문장이 겹겹이 쌓인 저 뭉텅이를 이제 막 펼쳐들 참일 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 문장에 대한 나의 함의를, 그리고 내가 지금껏 니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맛을 본 바를 회상한다. 그 계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며 따라서 내가 의욕하여 얻는 것들로 구성되고, 그 쟁취물 속에서 나만의 구조를 쌓아올리는 일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의 저작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이란 그 속으로 뛰어들어, 그가 한 작업물 위에서 나만의 구조를 새롭게 창조하는 바로 그 일뿐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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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내가 읽는 서양철학서는 ‘번역본’으로, 역자의 시각과 판단이 개입된 결과물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공부하고 있는 프랑스어와 그 뒤에 계획하고 있는 독일어에 대한 학습은 바로 이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한 결단이 아니던가. 직접 그들과 대화하는 것, 그들이 남긴 문장들을 헤집어 그 행간과 진의를 밝혀내는 작업을 결의한 이상 나는 멈출 수 없다. 그러나 이 어학 능력이 확립되기 이전까지는 차선책으로라도 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