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2025-12-19 0 By 커피사유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홍안령(興安嶺)1만주의 실질 경계 역할을 하는, 만주 북부의 산맥. 흥안령 산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2만주의 북쪽 경계를 흐르는 강의 이름(아무르강)으로, 헤이룽강(黑龙江) 또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를 숭가리3백두산의 천지에서 발원하여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 지역을 흐르는 강인 송화강(松花江)을 말한다. 아무르강의 최대 지류이기도 하다.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4잎갈나무.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부 등지에 널리 분포하는 낙엽침엽교목을 말한다.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으나 상록수가 아닌 낙엽이 지는 종이기에, “잎을 가는 나무”라는 뜻으로 잎갈나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이북의 높은 산지 능선 및 고원에서 자라며, 특히 백두산과 개마고원 등 최이북의 원시림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남쪽 지역에서는 보기 어렵다.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5만주 지방에 살았던 소수민족 중 하나다.이 멧돝6멧돼지의 이북 방언.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것도
쏠론7마찬가지로 만주 지방에 살았던 소수민족 중 하나다.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8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세 개의 도인 충청 · 전라 · 경상도를 함께 묶어 이르는 삼남(三南)을 가리킨다. ‘앞대’ 자체가 어떤 지방에서 그 남쪽 지방을 이르는 말이다.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9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 또는 사방으로 뻗친 햇살. 맥락상 아침 해의 빛을 말하는 것 같다.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잦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10돌 비석.는 꺠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11까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 〈북방에서-정현웅에게〉

백석과의 만남은 갑작스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회에서였다.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기절이든 오락이든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사고 자체를 중단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질 때면 늘 가는 경운궁 안 말이다. 전시회의 주제는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였고, 시는 바로 옆에 전시된 정현웅의 〈대합실 한 구석〉처럼 전시실 한 구석에 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그 둘뿐만은 아니었다. 일부만이 발췌되어 기록되어 있던 시가 나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향수란 널리 사용되는 뜻, 즉 내가 나고 자란 지역(鄕)에 대한 그리움 내지는 애틋함(愁)의 의미가 아니다.

고향은 어떤 공간에서 존재가 뿌리내린 지점이다. 여기에서 착안하여 우리는 한 사람의 정신이 이리저리 떠돌다가도 돌아가게 되는 어떤 기저점을 ‘실존적인 고향’이라고 부르자. 나는 정신적인 한 지점을 목놓아 그리워하는 의미에서의 ‘실존적 향수’, 즉 ‘실존적인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탄을 백석의 시로부터 느꼈다. 도망칠 수 없는 깊고 푸른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외딴 섬. 그 가운데에서 수영을 할 줄 몰라 고립된 어떤 이가 목놓아 부르는 단 하나의 쓸쓸한 비명. 그런 것들을 나는 떠올렸다.

시 전체를 놓고 보면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아득한 옛날”로부터 “아득한 새 옛날”로의 전이를 생각해보자. 시에서 “아득한 옛날”은 떠나던 때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떠나던 때인가? 부여로부터, 발해로부터, 홍안령으로부터, 음산으로부터 떠나던 때다. 이들은 모두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즉 백석의 고향에 존재했던 국가들이거나 그 고향 땅을 이루는 산천에 붙은 이름이다. 한 사람의 기억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어서 아무리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존재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향(離鄕)을 통해 일시적으로 배반된다. 시인이 그러하였듯 오랫동안 머물렀던 지점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경우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서 정신은 떠나게 되고 따라서 이 모든 이름들은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의 그림자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아득한 옛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아득한 새 옛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득한 옛날”과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는 ‘아득한’과 ‘옛날’이 ‘새’라는 낯선 단 하나의 글자로 인해 완전히 단절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 단절은 시에서 화자의 ‘실존적 고향에 대한 배반’이 완전하게 달성됨에 따라 오는 것이다. 고향은 스러지고 있는데, 즉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까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그곳을 떠나온 이방인(L’Étranger)은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고 한다. 현재의 안락함이라던가 꾸며진 만족에 가려져 실존적 고향이 자리한 저 ‘옛날’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에서의 ‘아득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옛날’에 대해 이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란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 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느끼게 되는 일종의 위화감 내지는 공허감 뿐이다. 당초에 문제가 되었던 ‘실존적 고향에 대한 배반’ 자체가 배반됨으로써, 그렇게 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속임으로써 이제 “아득한 옛날”은 “아득한 새 옛날”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기만의 거대한 장막 아래로 들어갔으니 이제 우리는 여기 “먼 앞대”에서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김윤식 교수가 지적하였듯12김윤식, 〈살아있는 정신에게 ― 자유인의 표상에 부쳐〉. 대학신문, 1994. 3. 1. “어느 순간 군은 마침내 운명의 순간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간교한 전략을 간파하는 순간이 오고 만다.” “사랑이란 위선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던” 모든 것들을 알아채고, “여기 ‘나’가 있되, 혼자 있다는 것, 무섭다는 것,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이 지점에 이른 인식은 이제 그동안의 가식 앞에서 부끄러움은 물론이거니와 메스꺼움까지 느끼며,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으로” 추락하게 된다. 장식한 깃털 날개가 꺾여버린 이카루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 것을 하염없이 볼 수밖에 없다. 도망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도망해서는 안 되었던 곳으로부터 꿈꾸었던 비상(飛上)이 실은 비상(砒霜)이었음을 알게 된 자는 그의 배반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되니까.

그리움은 그 대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기 무서울 때 우리를 옥죄는 저 감정의 이름이 ‘수(愁)’인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백석의 시로부터 떠올렸던 것을 상기해본다. 도망칠 수 없는 깊고 푸른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외딴 섬. 그 가운데에서 수영을 할 줄 몰라 고립된 어떤 이가 목놓아 부르는 단 하나의 쓸쓸한 비명. 정신적인 한 지점을 목놓아 그리워하는 의미에서의 ‘실존적 향수’, ‘실존적인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탄.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오랫동안 배반하면서 살아왔기에 뒤늦게 그 단단함을 꺠달은 스스로가 뿌리하는 단 하나의 지표(地表).

그렇다. 마지막 연처럼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없다.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이들 모두는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만주의 실질 경계 역할을 하는, 만주 북부의 산맥. 흥안령 산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2
    만주의 북쪽 경계를 흐르는 강의 이름(아무르강)으로, 헤이룽강(黑龙江) 또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한다.
  • 3
    백두산의 천지에서 발원하여 중국 지린성, 헤이룽장성 지역을 흐르는 강인 송화강(松花江)을 말한다. 아무르강의 최대 지류이기도 하다.
  • 4
    잎갈나무. 우리나라와 중국 동북부 등지에 널리 분포하는 낙엽침엽교목을 말한다.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으나 상록수가 아닌 낙엽이 지는 종이기에, “잎을 가는 나무”라는 뜻으로 잎갈나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이북의 높은 산지 능선 및 고원에서 자라며, 특히 백두산과 개마고원 등 최이북의 원시림을 이루는 대표적인 나무이다. 남쪽 지역에서는 보기 어렵다.
  • 5
    만주 지방에 살았던 소수민족 중 하나다.
  • 6
    멧돼지의 이북 방언.
  • 7
    마찬가지로 만주 지방에 살았던 소수민족 중 하나다.
  • 8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세 개의 도인 충청 · 전라 · 경상도를 함께 묶어 이르는 삼남(三南)을 가리킨다. ‘앞대’ 자체가 어떤 지방에서 그 남쪽 지방을 이르는 말이다.
  • 9
    해가 처음 솟을 때의 빛, 또는 사방으로 뻗친 햇살. 맥락상 아침 해의 빛을 말하는 것 같다.
  • 10
    돌 비석.
  • 11
    까마귀.
  • 12
    김윤식, 〈살아있는 정신에게 ― 자유인의 표상에 부쳐〉. 대학신문, 1994.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