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1. 2025. 10. 21. ~ 2026. 1. 6.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짧게 노트에 휘갈긴 것을 그대로 옮겨두는 공간입니다.
#1.
근래 들어 언어 및 문학에 대한 관심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과 관점에서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소설을 읽을 때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여러 삶의 모습들과 정동들을 탐하며 읽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고 억지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에너지가 빨리곤 했던 나는 스스로의 사색을 위해 투자할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 조금 더 간접적인, 그러나 제약도 없고 위험 부담도 적은 방식의 경험을 선호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을 위시한 문학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것이 일차적 · 이차적 사료(史料)라거나 세계의 단면에 대한 기록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학 생활 동안의 저 철학적 여정을 거쳐 글쓰기는 나에게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에게 글쓰기란 이제 단순한 창작을 넘어, 인간이 본래의 창조력 즉 생의 본능을 발휘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자 예술 활동이 되었다.
조형 예술은 시각적으로 눈 앞에 표현 또는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세워 놓음으로써 이야기하지만, 글쓰기는 이와는 조금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가진다. 글은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의 원형에 가깝다. 어떠한 상상도 추론도, 우리가 배우고 익힌 언어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 같다. 소쉬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약 사고의 근저에 언어가 있다고 한다면, 즉 우리가 생각할 때의 그것과 글을 읽을 때 그리고 말을 할 때 내부에 세워졌다 스러지는 저 표상들의 변동이 뿌리하는 출발점이 동일하다고 한다면, 이 원점에 가까운 글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내리는 저 해석을 최대한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글의 경우는 감상자에 따른 구체적 영상, 즉 그것을 본 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 떠올리는 심상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아폴론에 대한 그리스 신화를 읽을 때 우리의 인상은 그 기술에 사용된 술어와 보어들에 구속된다. 이들은 해석이기에, 즉 대상의 특성 중 일부의 추출이요 강조이기에 여러 특성들이 동시에 표현되어서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 회화 · 조형과는 달리 전달하는 바가 좀 더 명료해진다. 예술 활동이, 아니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라면, 그 해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는 그 작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매체인 글이야말로 제격이 아닐까?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어떤 문장을 구성할 때 사소한 차이들부터 개념 · 단어의 구체적 배치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기법들이 어떻게 독자에게 다른 인상을 주게 되는지에 보다 집중하게 되었다. 최근 피어오르는 번역서가 아닌 원서를 보려는 충동도, 더 다양한 문체 내지는 형식의 고전을 갈구하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상이한 글쓰기가 보이는 ‘해석하는 인간’ 내지는 ‘가치를 부여하는 인간’의 여러 모습들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의 연장선일 듯 싶다. 이러한 정동 위에서 나는 프랑스어를 조금씩 연습해보기도 하고, 카뮈처럼 단순명료하고 단절된 문체를 시도해보기도 하며, 프루스트나 발자크처럼 끝나지 않는 만연체로 사유를 전개해보기도 한다.
이제부터의 글을 기존의 소위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문체와는 다른 방식들로 써 내려가야 할 이유가, 보다 명백해졌다고 정리해도 충분할 것이다.
#2.
고등학교 독서모임 《날적이》에서 내가 진행하게 되는 금월의 모임 계획서를 탈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실존주의와 관련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몇몇을 교정하고 나의 사유를 더욱 정교히 다듬게 되는 것 같다.
선정한 도서는 3년 전에 내가 이미 한 번 읽은 바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처음에는 그 회의주의적 · 염세주의적 입장에 이끌려 고르기는 했다. 졸업만을 앞두고 있는 지금 나는 대학의 땅 위에서 느꼈던 바가 무엇인지 복기할 때마다 슬픔 내지는 답답함을 떠올리게 되니까.
5년 내내 나는 별종이자 이방인이었다. 혼자 남아서 질문하고 교수와 밥을 먹었으며 혼자 공부하고 사색했으며 산책했다. 동기 대부분은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선후배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인간실격》의 화자 요조처럼 나는 연구실과 강의실, MT와 과방에서 서로 쓰고 있는 가면에 일찍이 질려 버렸다. 삶과 세계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저 장엄하고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를 나는 기대했지만 언제나 그것은 좌절되었다. 요컨대 나 역시 요조처럼 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했고 그 세계를 더할 나위 없이 낯설어하면서도 스스로가 타자를 절실히 갈구했기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현태(現態) 앞에서 비탄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이러한 이방인적 서사는 결과적으로 니체로부터 시작하여 카뮈로 이어지는 실존주의 사조로 나를 이끌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유리감(遊離感)이 없었더라면 나는 스스로의 진정한 창조의 자유 내지는 내 안에서 왕성히 불타오르는 힘에의 의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요조와 같은 결말 내지는 니체가 말한 말세인과 같은 거세를 택했을지도 모르니까. 5년의 여정을 통과하며 나는 하나의 태도를 선택했다. 이 태도는 한때 내가 알베르 카뮈가 말한 〈반항〉과 같은 것이라 이해했었지만 이번 독서 모임을 준비하며 나는 자신의 귀결이 카뮈보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것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을 지각하게 되었다.
카뮈의 〈반항〉에서는 창조를 거부하고 수용과 묘사만이 논의된다. 무의미한 세계에 대한 그 어떠한 의미 부과 시도도 그는 〈부조리〉의 양항(兩項) 중 하나인 ‘세계의 비합리 · 무(無)성’을 제거함으로써 부조리를 해결하는 활동으로 보아 부정적으로 평한다. 그는 진정으로 ‘반항하는 인간’은 이처럼 문제로부터 도피할 것이 아니라 이 구도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서 사막같이 건조한 세계를 그대로 살아나간다고 본다. 이 같은 인식 위에서 카뮈는 기획 ·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옮기는 묘사야말로 진정한 〈부조리의 창조〉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묘사’도 순수하지는 않다. 대상을 언어적 기호로 옮기는 과정은 언제나 그것의 모든 특징을 옮기지 못한다. 세계의 어떤 사물이든 그것을 언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일부를 생략하거나 왜곡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놓여있는 방식, 그것을 보는 우리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 이 모두를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한다면, 결부된 경험과 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을 사실상 무한히 열거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사물에 대한 재단 내지는 일부로의 주목은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평가하는 것, 애착을 가지는 것, 의미를 부과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 조건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 인간 자신과 이 행위 내지는 이 행위를 하고픈 욕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카뮈는 자신의 논증 전개에서 인간 실존의 조건, 즉 그의 〈부조리〉를 구성하는 양항 중 하나를 잘못 파악했다고 보아야 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욕구인 이상, 즉 인간이 무의미가 자신에게 선사하는 고통만큼은 참을 수 없어하는 동물인 이상 우리는 이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병리적인 삶을 결코 살 수는 없다. 오히려 올바른 〈부조리〉에 대한 〈반항〉 내지는 〈저항〉이란 이러한 동인에 따라 삶의 몸짓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닐까? 즉 무의미한 세계에 맞서 그 세계를 자신만의 의미로, 저 흑백의 스케치 위에 자신만의 색을 입히는 것이다.
이 입장은 카뮈가 이야기한 〈비약〉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비약〉은 〈부조리〉가 주체의 내적 세계에서 폐기될 때, 즉 그 무의미의 긴장으로부터 주체가 벗어날 때에 발생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방식은 〈부조리〉의 폐기가 아니다. 이것은 〈실패할 줄 알면서도 지속되는 바위 굴리기〉이다. 즉 자신이 부과하는 의미는 결국 세계가 본질적으로는 무뚝뚝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바꾸지 못하는, 일종의 발버둥임을 알면서도 캔버스를 칠하는 화가의 태도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반항〉이다. 이는 주어진 구도에서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두 선택 중 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바위를 굴릴 것인가? 굴리지 않을 것인가?” 이 물음에서 상황을 관조한다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저 의미를 향한 욕망을 억압시키고서 회색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그의 본성과 야성이 명하는 유일한 실존적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폐기되어도 또다시 그리는 것을 반복한다. 이때 화가 즉 시지프의 기쁨은 카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굴러떨어진 바위를 따라 비탈길을 걸어내려갈 때’ 발생하는데, 이는 그것이 그의 운명임을 알기 때문에 내쉬는 수용의 미소라기보다는 다시 바위를 밀어올리는 그 대결의 과정을 기대하기에 짓는 미소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카뮈를 거쳐왔으면서도 그와는 입장을 달리한다. 모든 여정을 거친 오늘의 나는 기꺼이 3년 전 《인간실격》에 대해 내렸던 해석을 폐기하고 갱신하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큰 틀에서의 평가는 다르지 않다. 요조는 똑같이 이방인이자 도망친 자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으며 녹아들기를 원하는 세계에 대해 은밀히 자신의 우위를 설정하는 자이며, 그 때문에 다른 ‘순수하지 않은’ 것들을 경멸하는 자다. 이러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나는 3년 전과는 다르게 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그가 범하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닌 잘못에 불과하니까. 그리고 그러한 그의 모습이 지금의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나르시시즘을 가지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에 맞지 않는 것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잘못이 아니다. 유일한 그의 잘못이란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가 경멸하고자 하는 것들을 계속 경멸하고, 평가하며, 자신의 언어로 세계와 대결하는 그 몸짓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힐난하기 시작한 것에 있을 뿐이다. 이 잘못은 언제든지 청산 가능한 것으로서, 그는 스스로에게 벌이 떨어지기를 갈구하는 대신 욕망의 방향을 올바른 방향 즉 바깥으로 다시 돌림으로써 언제든지 비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는 그리고 나는 무죄이자,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인간이다.
Appendix.
Mili – SAIKAI(再會)의 가사
When I was young and lost
(어리고 정처 없이 헤매던 시절)
You showed up, and had my doors unlocked
(네가 찾아와서는, 굳게 잠긴 내 문을 열어버렸지)
Like threads, petals unfold
(실타래처럼, 펼쳐지는 꽃잎처럼)
A red kawara-nadeshiko
(붉은 술패랭이처럼)You have shown me that I am still
(너는 알려주었지, 여전히 내가)
capable of caring for someone else
(누군가를 아낄 줄 아는 인간이라는 걸)
That I still bare the same innocence inside
(여전히 내가 똑같은 천진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Cause now I know that
(왜냐하면 나는 이제 알거든)Pain cannot define the past
(고통으로 과거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We are built to overcome endless mishaps
(우리는 끝없는 시련을 이겨내도록 된 존재라는 것을)
You know, it is not so bad
(그거 아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When you are with me
(네가 곁에 있던 때 말이야)Cherish as long as we last
(우리가 살아가는 한 소중히 간직할게)
Cause S is not for sayonara
(S가 사요나라를 말하는 게 아니니까)
Let memories play back
(추억들을 되감아 보는 거야)I knew I must step up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You deserve the world and more
(넌 세상 그 이상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The truth is that you’d rather
(하지만 진정으로 네가 바랐던 것은)
Spend our limited time together
(한정된 우리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었지)Protection alone is not enough
(지켜주는 것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Providing cannot fill an empty cup
(주는 것은 사랑에 목마른 빈 잔을)
thirsting for love, I questioned my self a lot
(채우지 못하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어)What do I know about love?
(내가 사랑에 대해 알기는 할까?)
How can I recreate what I’ve never had?
(가져본 적이 없는데도 다시 만들 수 있을까?)
All I know is that I must keep you thriving
(하나 확실한 것은 너를 계속 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뿐)If nutrients are what you lack
(네게 부족한 것이 양분이라면)
I will water you with every drop of blood I have
(내가 가진 마지막 피 한 방울마저도 물이 되게 하리)
But now I know that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아)Sacrifice is the easy path
(자기희생이야말로 가장 안이한 길이었다는 걸)
My absence cannot ever change the fact
(내가 없었다 해도 진실은 같았을 거라는 걸)
I wanted the very best for you, believe me
(믿어줘, 너에게 최고의 것들만을 주고 싶었어)Our threads in red can never be cut
(우리를 잇는 붉은 실은 결코 끊어지지 않아)
And S is not for sayonara
(그러니 S는 사요나라를 말하는 게 아니야)
Will you forgive me at last?
(비로소, 나를 용서해 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