寡學

2026-01-12 0 By 커피사유

그대들은 실로 신학적 천문학의 패배가 금욕주의적 이상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신학적 천문학의 패배 이래로 사물들의 가시적인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더욱더 임의적이고, 하잘것없고, 쓸모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존재의 수수께끼에 대한 피안적인 해결을 덜 필요로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인간의 왜소화와 아울러 왜소화를 향한 의지는 끊임없이 증대해온 것이 아닐까? 아, 존재의 서열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유일성 그리고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신앙은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동물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물이 되어버렸다. 인간은 이전의 신앙에서는 거의 신(‘신의 아들’, ‘신인(神人)’)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인간은 경사면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갈수록 빨리 중심에서 벗어나 굴러간다. 어디로? 무로? ‘뼈에 사무치는 허무감’ 속으로?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이상으로 곧장 통하는 길이 아닌가? 모든 과학(결코 천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이 인간의 자만심을 꺾고 인간을 비하하는 경향에 대해서 칸트는 “과학은 나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라는 주목할 만한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자연과학이든 비자연과학이든 이 모든 과학은 ― 나는 이것을 자기비판적 인식이라고 부른다 ― 오늘날 자신에 대해서 인간이 이제까지 품었던 존경심이 한낱 기묘한 자만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인간을 설득하려 하고 있다. 과학의 고유한 긍지, 즉 스토아적인 아타락시아(부동심)의 고유하고 준엄한 형식은 이렇게 힘겹게 획득된 인간의 자기 멸시를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갖는 존경심의 최후의, 가장 진지한 요구로 견지하는 데 있다(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경멸하는 자는 언제나 ‘존경하는 것을 잊지 않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286-288.

오늘날 논박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학문에 대한 믿음이 그 기원을 유용성에 대한 타산에 두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진리를 추구하려는” “진리에의 의지”의 무용성과 위험성이 입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에의 믿음은 고수되고 있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 이것은 우리가 다른 믿음을 차례로 하나씩 이 학문의 제단에 바쳐 도살해왔다는 것을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결론적으로 “진리에의 의지”는 “나는 기만당하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나는 기만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까지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 ―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도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 삶이 가상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 실제로 그렇게 보인다! ―, 다시 말해 삶이 오류, 기만, 위장, 현혹, 자기기만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 삶의 위대한 형식이 언제나 주저하지 않는 “다재다능한 임기응변(polytropoi)”의 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왜 너는 기만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것은 관대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돈키호테이거나 가벼운 정신착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고약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삶에 적대적인 파괴의 원칙으로서 “진리에의 의지”, 그것은 숨겨진 죽음에의 의지일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왜 학문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된다. 삶, 자연, 역사가 “비도덕적”이라면 도대체 왜 도덕이 존재하는가? 저 과감하고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성실한 인간, 학문에 대한 신앙이 전제하고 있는 성실한 인간이 바로 이를 통해 삶과 자연과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하나의 세계를 긍정하려 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리고 그가 “다른 세계”를 긍정하려 하는 한, 어떨까? 그는 그 반대의 것, 이 세계, 우리들의 세계를 ― 부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지 이제 파악했을 것이다. 즉 학문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신앙에 기초하고 있으며, ― 오늘날의 인식자인 우리들, 무신론자이며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우리들도 수천 년간 지속된 낡은 신앙이 점화시킨 불길에서 우리의 불꽃을 얻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 낡은 신앙이란 다름 아닌 저 그리스도교-신앙, 또한 신이 진리이며 진리는 신성한 것이라고 믿었던 플라톤의 신앙을 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안성찬 · 홍사현 공역, 책세상, 2005. pp. 322-323.

사람들은 오늘날 Mythos(뮈토스)적 사고가 Logos(로고스)적 사유로, 즉 현상을 더 이상 신적 존재 없이 이성적 · 합리적으로 지각한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과학과 이성, 합리를 울부짖는 이 땅에서 신은 추방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신은 추방되었는가? 그가 앉아있던 저 왕좌에 대신 인간이 올라섰는가? 그렇지는 않다. 근대 학문의 발전과 과학에 대한 강조는 신을 영구적으로 추방했다기보다는 인격신을 추방한 자리에 비인격신을 들였다고 평가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상기와 같은 니체의 지적은 따라서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이다. 인간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언제나 문제가 되었던 세계 속 인간의 왜소한 저 아랫목의 배치는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신의 죽음으로 꾀해져야 하는 것은 그동안 자신을 믿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지함으로써 도피했던 저 인간을 원래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가치의 전도였지만, 그러한 전복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만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즉, 학문(學)은 인간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느 새부터인가 인간 자신으로부터 독립하여 또 다른 신적 존재로 등극함으로써 우리의 가치를 더 적게(寡) 만들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