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바깥은 정말 날씨가 좋아요.” 나는 둥근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말했다. “가을인 데다 일요일이고 날씨도 좋고, 어디를 가도 사람으로 가득해요. 이런 날은 이렇게 방 안에서 느긋하게 지내는 게 제일 좋아요, 피곤하지도 않고. 복잡한 데 가 봐야 피곤하기만 하고 공기도 안 좋고. 전 일요일에는 대체로 빨래를 해요. 아침에 빨아서 기숙사 옥상에서 말리고 저녁 전에 거둬서 착착 다림질을 해요. […]
“고독한 게 좋아?” 그녀는 턱을 괸 채 물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 먹고 강의도 혼자서 뚝 떨어져 앉아 듣는게 좋아?”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그녀는 선글라스 다리를 입에 물고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실망하는 게 싫을 뿐이야. […]
기즈키가 죽은 후 졸업할 때까지 열 달 남짓, 나는 주변 세계 속에서 내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한 여자애와 사이가 좋아져서 같이 자기도 했지만 결국 반년도 가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어떤 흡인력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도쿄의 사립대학을 선택해서 시험을 쳤고, 딱히 별다른 감흥도 없이 입학했다. 그녀는 내게 도쿄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무작정 고베 거리를 떠나고 싶었다. […]
조금 전, 대략 6년 전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학들을 톺아보러 올라온(또는, ‘끌려온’) 경남과학고등학교 학생들과 대면하고 왔다. 그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15분 남짓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설 수 있게 된 것에는 총 5년의 시간이 걸렸음을 나는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씁쓸했다. 5 ~ 6년이 지나서 그렇겠지만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연단에 도열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새내기거나 이제 막 2년차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나는 마치 아스라이 멀리 떨어진 이름 모를 공간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민음사. 2024. p. 567. 조금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두 문장.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두 문장이 어쩌면 최근 나에게 벌어진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 어떤 응어리를 요약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조금 전 《노르웨이의 숲》의 10장을 모두 읽은 뒤, 제11장으로 넘어가면서 첫 장을 읽은 직후에 내가 직감했던 바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제11장의 첫 마디가 나오코의 〈죽음〉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10장까지만 하더라도 레이코 씨의 편지에서 ‘나오코는 빨리 회복되고 있다’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급격한 반전이 아니라 할 수 없다. […]
조금 전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것처럼 새벽에 소설을 읽을 때면 문득 처음 내가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상상력의 결여’. 그 당시 나의 이러한 의사의 바탕에 깔린 문제 의식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만으로도 벅차다고 생각했던 (실제로도 극한을 향해 가고 있었기도 했다) 그 때의 나는 어느 사람을 보든, 어떤 텍스트를 보든, 아니면 어떤 문제를 보든 그 상황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노르웨이의 숲》은 이 문장에 담긴 인간 존재의 근간에 자리한 두 개의 항에 주목한다. 〈죽음〉, 그리고 〈삶〉. 인간은 이 둘의 경계에 놓인 존재이기에 가운데 자리한 〈우물〉 옆에서 질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마침내는,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