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5.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I
2024-10-22니체, 알베르 카뮈,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 혹자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키치〉라는 가장 인간적인 결과물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여정이 중간 기착지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읽은 책과 관련된 이야기 및 생각들을 모은 공간.
니체, 알베르 카뮈,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 혹자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키치〉라는 가장 인간적인 결과물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여정이 중간 기착지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니체는 ‘힘’과 ‘의지’를 이야기한다. 용어 선정이 가져다주는 일차적 인상 때문에 세간은 그의 사상이 야만적이고 파괴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니체가 공격하는 것은 언제나 비인간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가 꾀하는 것이란 우리와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저 무거운 짐의 위치를 바꾸어, 그 위에 올라선 인간이 맑은 삶의 공기를 즐기는 장면이니까.
수많은 이들은 니체가 사용한 ‘강자’, ‘약자’, ‘지배’라는 용어에 천착하여 그를 오독한다. 니체가 ‘강자’ 그리고 ‘약자’로 가치를 나눌 때 그것은 ‘선’과 ‘악’으로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질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바로는 말이다.
대학에서 지난 3년 동안 나는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왔다.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의 말을 곱씹은 끝에, 마침내 나는 그에 대한 평가, 그의 사상에 대한 비평 준비가 만족스러운 수준에 달했다는 직감에 도달했다. 니체에 대한 부분적 〈침묵〉을 중단할 때가 된 것이다.
“미스터리 · 스릴러 · 연애라는 통속적인 수식어보다는 여성성 · 가면 · 탱고라는 세 개의 열쇠로 파악할 때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영원한 대립의 촌철살인.” –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레베카》의 진정한 메시지는 특유의 서스펜스에 주목한 나머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저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 여사가 당시의 사회적 물결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으면서도 무엇을 궤뚫어 보았으며, 이들을 어떤 탁월한 표현들로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느냐는 것이 원작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정치 · 경제 · 문화의 전반에 걸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그 원인을 탁월하게 짚어내는 철학적 안목, 그러나 대중 강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은 무성의한 도서” – 김누리 교수는 탁월한 안목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를 짚어내고 있다. 비록 그가 책에서 구체적인 근거 자료를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정치 이야기’가 금물로 여겨지기 시작할 정도로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되새겨야 할 가치만큼은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달의 방법은 탁월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품은 독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레프 톨스토이” – 톨스토이는 좋은 예술 작품이란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는 좋은 가치 · 감정’들을 최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작품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기독교적 가치들, 즉 〈사랑〉 · 〈정직〉 · 〈성실〉 등이 바로 그 좋은 가치들이자 감정들이라고 주장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니체가 비판한 바 있듯, 이들 가치관과 뗄 수 없는 〈양심의 가책〉 또는 〈죄〉란 다름 아닌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의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오가는 우리들의 삶을 그려낸 정교한 초상화” – 마츠코는 전 일생에 걸쳐 그녀를 덮치는 삶의 〈하강〉 속에서 비틀거리며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오사무의 분신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라는 두 ‘철학’은 결국 같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죽음과 삶,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태도라는 측면에서 두 철학관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 모두는 ‘인간’에 대한 고찰의 산물이며 ‘인간’이 가진 여러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을 정확하게 관찰했지만, 직시하지는 못한 다자이 오사무” – 다자이 오사무의 관찰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요조는 스스로의 인간됨을 기각하지만 그것은 ‘요조 자신’과 인간의 차이,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조의 ‘이상적 인간’과 현실 속의 인간의 차이로부터 일차원적으로 기원하는 오류이다. 불행히도 요조는 자신의 존재가 정확히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깊은 회의를 느끼는 자라면,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현실 그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도피이지, 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어른’이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선물받는 이야기”.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부자’라든지, ‘미담’이라든지 하는 평가는 이 책에 대한 올바른 감상일 수 없다.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대로 “줬으면 그만이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물’이 더 이상 “줬으면 그만이지”가 아닌 시대에서 한 사람이 일생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잊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던지는 강력한 경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