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 #3. 너 자신의 사유가 싹트도록
2025-02-19반년 전 즈음 보낸 편지다. 처음과 끝이 맞닿는 순간을 인식하노라면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깊어지고 솔직해지곤 한다. 대학의 토양 위에서 처음과 끝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더더욱.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일기’와 ‘일상’을 모은 공간입니다.
반년 전 즈음 보낸 편지다. 처음과 끝이 맞닿는 순간을 인식하노라면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깊어지고 솔직해지곤 한다. 대학의 토양 위에서 처음과 끝이 엇갈리는 순간에는 더더욱.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근대 이후의 철학과 예술 모두는 바로 이 부분과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사이의 공존에 주목해왔다. 《OMORI》는 이 가장 흥미로운 모순적 지탱을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느끼게 한다. 우리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고 있다. 카뮈의 ‘부조리’는 분명 그 핵심에 있다.
《OMORI》는 의도적으로 침묵함으로써 말한다. 그러한 시도들은 과학과 논리, 이성이 강조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장엄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반대의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OMORI》가 그러하듯, 나 역시 의도적으로 침묵하고자 한다.
비록 작은 창 속에 펼쳐진 여러 층위의 세계였지만 나는 기꺼이 뛰어들었고, 주인공을 따라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다시 한 번 인간 정신의 취약성을 깊게 음미했다. 게임 《OMORI》를 통해 내 정신이 어떻게 ‘심연’을 돌아다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낸 조각들, 이들을 이제 하나씩 풀어낼 때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금지에 대한 이의가 제기됨을 목격한다. 아래로 내려가서 보았을 때, 이것은 ‘문을 열고 나가는’ 과정이며 스스로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만나는 과정이다. 〈페미니즘〉은 금지가 목표하는 일원성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 철학은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도덕의 절대성에, 마르크스는 경제질서의 절대성에, 프로이트가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졌다면, 페미니즘은 ‘젠더(gender)’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으로 평가할 수 있어 보인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의심없이 전제해왔던 명제들에 대한 재고를 권유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페미니즘의 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래 전 보낸 편지다. 글은 때로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담는데 제격이다. 우리의 삶, 그 중간에 가는 길이 잠깐 달라져도 글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법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무슨 사랑을 말하는가?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초인의 사랑을 말한다. 책을 마무리하며 나는 단 한 가지의 질문만을 남겨두게 된다. “영원회귀 속의 인간은 가능한가?”
진정으로 철학적이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질문.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인간 존재가 처한 가장 심오하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부조리, 그것은 쿤데라에게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립으로, 나에게는 혼돈과 질서의 대립으로 간주된다.
니체, 알베르 카뮈, 질 들뢰즈 그리고 밀란 쿤데라. 혹자는 이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유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키치〉라는 가장 인간적인 결과물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철학적 여정이 중간 기착지에 도달했음을 인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