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 2025. 1. 12. ~ 2025. 1. 31.
2025-02-01끝없는 사유 그리고 관찰은 마음과 현실 두 층위에서 뿌리 깊은 부조리를 발굴해낸다. 철학의 힘은 개인이 치명적인 물음에 노출되도록 해서 그를 위태롭게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각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물음으로 된다.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커피와 사유(思惟)가 있는 공간.
카페지기 커피사유와 함께하는, 일상 속 쉼의 ‘순간’들입니다.
끝없는 사유 그리고 관찰은 마음과 현실 두 층위에서 뿌리 깊은 부조리를 발굴해낸다. 철학의 힘은 개인이 치명적인 물음에 노출되도록 해서 그를 위태롭게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각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물음으로 된다.
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 속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검은색(玄). 실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바로 그것과의 조우. 심연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사다리 앞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있다.
오래 전 보낸 편지다. 글은 때로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담는데 제격이다. 우리의 삶, 그 중간에 가는 길이 잠깐 달라져도 글은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개하는 법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 우연이 가져다준 알베르 카뮈의 이 문장은 나 자신의 ‘악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대학 위에서 대학을 부정하는 지난 4년의 시간을 되돌아볼 때, 나는 뫼르소 · 니체 · 오사무 세 사람이 여전히 형태를 바꾸어 반복되고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선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Ma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ären zu können.”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똑같이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온전히 느끼기 때문이다: “Veritas Morbus Mea.”
실로 모든 것을 흔들어놓는 음악은 그 주제 앞에 장엄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법이다. 지금 돌이켜볼 때 나에게도 삶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깨달음 앞에 일종의 ‘전주’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번개가 치고 모든 것이 새롭게 정의되기 바로 직전의 양태, 이 기록은 그런 기록이다.
막혔던 만년필의 잉크가 조금 녹아 다시 흐르기 시작하듯, 학문하는 자 · 탐구하는 자로서의 명민함과 철학함이 다시 되돌아오는 듯하다. 그러나 하루라도 잉크가 흐르지 못하면 쉽게 펜촉이 막혀버리듯, 사람의 정신 또한 수양하지 않으면 금세 퇴폐되고 맘을 지난 학기의 경험으로 나는 잘 알고 있다. 개강이 눈앞이다. 다시 일어나 읽고 쓸 때인 것이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SNUPO 제62회 정기연주회에서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클래식의 ‘어떤’ 특징 때문이었다.
한 구석에서 2년 동안 묵은 편지다. 이제는 기록해두어도 될 만한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 선물하던, 편지를 부치던 그 마음 그대로 여기에서도.
오랜만에 다시 몇 줄들을 휘갈긴 듯 하다. 2월 15일부터 20일까지 써 둔 글들을 조금씩 다듬어 다시 옮겼다. 여행에서 느낀 괴상한 느낌들부터 연구실의 숨막히는 일상에 대한 발단-절정-위기-결말까지. 다사다난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