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과 실존적 지탱에 대한 소고

2026-01-05 0 By 커피사유

죄의식을 통한 마조히즘에 대한 실존주의의 견해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황혜경,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에 나타난 구원요구와 마조히즘.」 픽션과논픽션. 1. 2019. pp. 89-105. 을 주로 참고하였음.

  •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조히즘은 자아 내부에 있던 성적 욕망이 아버지로 대표되는 초자아의 억압 · 금지에 부딪혀 충족되지 못하고 주체 내부로 돌아와 자아를 공격함으로써 발생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죄의식 · 양심의 가책은 외부로 표출되지 못한 인간 특유의 힘에의 의지가 방향이 전환되어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현상이다. 즉, 자아 내부의 욕망이 외부의 억압에 부딪혀 주체 내부로 돌아와 공격하는, 일종의 사디즘의 방향 전환이 죄의식과 그에 동반되는 마조히즘이다.
  • 질 들뢰즈: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방향 전환, 즉 자아가 초자아에게 당하는 침략 혹은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가 초자아에게 항거하는 반항의 일환으로, 자아가 초자아를 놀리고 무력화시키는 작업이야말로 마조히즘이다.
  • 장 폴 사르트르: 마조히즘은 주체가 자신이 승인받기 위해 타자의 욕망 대상으로 주체 스스로를 사물화(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즉,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주체가 타자에 의해 스스로를 사물로써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다. (스스로를 핍박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닌 것으로 먼저 격하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라!)

죄(罪)란 무엇인가?

  • 기독교의 입장: 인간은 처음부터 가장 선조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야훼의 뜻을 정면으로 위반하였고, 따라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이어진 태초의 원죄(原罪)를 가진다. 즉,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이다.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설화처럼 소위 악(惡)의 유혹에 손쉽게 넘어가 죄를 손쉽게 짓고 산다. 이 죄는 유한자이자 필멸자인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완벽히 끊어낼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의 양심만으로는 죄의 여부에 대해 완벽한 판단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그 속의 인간의 긴장 관계는 오직 신의 은혜 · 자비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과 그의 은총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서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여야 한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불신자들이 행동하는 경우도 그 양심은 불완전하며, 유일한 준거 기준이자 선 자체인 야훼에 대한 오만한 도전이므로 죄가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입장: 우선 죄의식은 기본적으로 부채 의식이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원초의 경우 지배-피지배자의 관계 혹은 채권-채무자의 관계에서 채무자에 대해서 채권자는 그의 신체나 권리 · 재산의 일부에 대한 처분권을 획득했고, 채무자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가 되었다. 기독교는 이러한 원초적 죄의식을 교묘하게 발전시킨다. 이들의 전통적인 죄에 대한 견해는 정복의 질서에서 패배한 피지배계급과 성직자계급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지배계급에 대해 꾸민 일종의 복수이자 계급 역전의 술책이기 때문이다. 상기의 죄에 관한 견해는 인간을 태초부터 상환 불가능한 부채 의식에 속박시키고, 구제불능의 죄인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을 ‘신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격하시킨다. 지배계급을 피지배계급과 마찬가지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있으며, 성직자계급은 이 와중에 신과의 매개로 스스로를 지목함으로써 은밀한 관계의 역전을 꾀한다. 이들은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선하기 때문에 저항하지 않고 이렇게 고통받을 뿐이며, 지배계급의 경우 신의 질서를 모르고 오만하게 행동하므로 필연히 처벌받을 악이라는 자기기만을 행하기까지 한다.
  • 지금까지의 나의 입장: 죄는 부채 의식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견해에 동의함) 그러나 인간을 괴롭게 하는 죄의식은 상환이 불가한 부채 의식이다. 상환이 가능한 부채는 상환을 통해 그 고통과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상환이 처음부터 불가하게 설계되어 있는 경우는 그 구덩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고, 외부에 대한 책임 지우기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주체는 좌절 경험의 누적으로 원인을 내부에서 찾게 된다. (외부에 대한 공격, 즉 사디즘의 실패가 방향을 전환하여 마조히즘으로 전환됨, 프리드리히 니체와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함) 그러나 인간이 가지는 상환 불가의 부채란 통상 그 자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주체는 타자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지 않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명한다. 대체로 주체에게 부과되는 상환 불가한 부채는 외부에 의하여 강제된다. 그러나 주체는 부조리하고 자신의 아우성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세계에 소리를 치더라도 그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주체는 체념하고, 그 방향성을 외부에서 내부로 돌릴 뿐이다. 주체에게 죄의식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오직 바로 이 방향 전환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이다. 즉, 주체는 체념과 그 체념을 죽음 충동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죄(罪)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罪。罪のアントニムは、何だろう。 (…) 罪と祈り、罪と悔い、罪と告白、罪と…… ああ嗚呼、みんなシノニムだ、罪の対語は何だ?
죄, 죄의 반의어는 무엇일까. (…) 죄와 기도, 죄와 회개, 죄와 고백, 죄와…… 아아, 전부 유의어야. 죄의 반의어는 대체 뭘까?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人間失格)》 中

이하의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하였음.

기도 · 회개 · 고백은 모두 상기의 문장대로 죄와 유의어이다. 이 셋은 죄의식의 현존을 전제한다. 자기 자신은 누군가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부채를 지고 있다는 인식을 전제할 때에서야 죄는 성립하며 기도와 회개, 그리고 고백이 가능하게 된다.

오사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저 유명한 소설 《죄와 벌》에서 벌(罰)이 죄의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로 제시되었을 가능성을 작중 화자 요조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죄가 있는 곳에 당연히 벌이 있어야 한다는, 공적(公的)으로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처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일종의 수단이라는 성격에 따르는 저 인식, 사적(私的)으로는 자신이 당한 위난에 대한 복수심에 기원하는 저 징악(懲惡)의 인식은 죄와 벌을 부여하는 대상이 타자 또는 외부라는 점에서는 유의어로 분류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 부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즉 실질적 부여가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를 보면 둘은 반의어다. 죄(罪)의 경우는 상술되었듯 외부의 억압에 의해 사디즘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조히즘으로 전환됨으로써 발생하는 감각이다. 출발점은 외부에 의해 강제된 갚을 수 없는 부채에 대한 인식의 조건이겠으나, 그러한 인식에 저항하는 대신 이를 수용해버린 주체에 의해서 죄는 완성된다. 반대로 벌(罰)의 경우는 주체의 수용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주어지기만 해도 곧바로 완성된다. 형벌과 개인적 복수는 그 벌의 대상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집행되며 언제나 주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져 완성된다.

《인간실격》의 화자인 요조의 심리와 배경을 고려하여 죄(罪)/벌(罰)의 반의성을 논의해보면, 두 과정의 현시성(現時性)이 그 핵심이 된다. 자신을 구제불능의 죄인이자 실세계(實世界)에 대한 영원한 이방인으로 여기는 요조에게 죄(罪)란 당장 지금 주어져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통 뿐만이 아니라 공포의 감정을 느낀다고도 진술한다. 공포는 죄에 의한, 갚을 수 없음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이 자신을 힐난하는 마조히즘적 기작에 의한 고통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이는 기약을 알 수 없는 어느 때에 채무자가 자신에게 닥쳐 고통을 가할 것임을, 즉 채무 상태에 따를 것으로 생각되는 벌(罰)을 인식함으로써 발생하는 감정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지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과정으로 발생하는 고통이 아니다. 죄(罪)는 요조를 지금 진행되는 기작에 의해 고통스럽게 하지만, 벌(罰)은 요조를 나중에 진행될 기작에 의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요조는 자신의 죄에 대한 구원을 바라기에 신에게 기도도 하며(“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회개 · 고백도 한다(“남들한테 호감을 살 줄은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등등). 그러나 여기서 기도 · 회개 · 고백은 작품 내의 시점에 곧바로 그 죄의 파괴적 기작과 동시에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 요조가 두려워하는 벌(罰)은 현재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구제 불능의 죄인이라 여기기에 다가올 벌만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도피하는데 급급한 요조에게 있어서 벌은 피하고 싶은 미래의 고통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갈구하는(그렇게 하여야 채무 상태가 해소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죄(罪)란 결국 벌이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요조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지 않던가), 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싶으면서도 현재 그가 가장 멀리 떨어진, 작품의 마지막까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죄의 가장 반대에 있으며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된다.

즉 요조의 기도: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저항은 죄가 아닌 잘못이라는 것이며(죄와는 달리 잘못은 청산 가능한 부채 혹은 문제이므로), 만약 그의 질문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뒤바뀌어 “죄는 무저항입니까?”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저항이 곧 죄는 아니지만, 죄를 완성하는 데 있어 무저항은 포함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절망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 앞의 인간이 택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실존주의의 견해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경희,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에 나타난 절망과 죄의 문제: 키에르케고르의 관점으로 읽기.」 리터러시연구. 14.5. 2023. pp. 493-519. 을 주로 참고하였음.

  • 쇠렌 키에르케고르: 인간은 양극적 두 요소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합적 일치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는 무한성을 탐하는 유한자이고, 가능성을 탐하는 필연에 묶인 자이며, 영원성을 탐하는 시간에 묶인 자다. 즉 인간의 정신은 무한성/유한성, 가능성/필연성, 영원성/시간성이라는 모순적 요소들을 끌어안는 존재다. 인간의 절망은 이 요소들의 통합에서 균형이 무너져 주체가 어느 하나에 몰두하여 정신에 분열이 일어난 상태다. 이러한 절망은 그 절망의 상태에서 그가 욕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선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욕구하는 ‘반항적 절망’. ② 절망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기를 욕구하지 않는(욕구하기를 포기하는) ‘나약한 절망’. 후자인 ‘나약한 절망’의 경우 그 절망이 무엇을 향한 절망인지에 따라 또 두 가지로 세분할 수 있다. ⓐ 전체적으로 자신이 처한 유한성과 필연성이라는 한계에 묶인 세계에 대한 절망인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 ⓑ 유한성과 필연성이라는 한계에 묶인 스스로에게만 국한된 개별적인 절망인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한성과 필연성에 묶였으면서도 무한성과 가능성을 탐하는 존재이므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유한성과 필연성에 묶인 세계에 염증을 느끼는, 소위 절망하는 인간이다(절망의 보편성). 절망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①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 → ②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 ③ 반항적 절망으로 이어진다. 즉 우선 세계의 유한성/필연성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한 뒤에, 무한성/가능성에 대한 욕망이 좌절된 경험의 원인을 이러한 세계 속에 위치한 자기 자신으로 결부시킨 뒤, 그것이 주는 고통을 이기다 못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추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절망은 인간이 혼자의 힘으로 벗어나기는 어려운 조건 상태이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기와 자기 자신이 맺는 관계를 자기 자신과 신의 관계로 확대하는, ‘신을 통한 자기회복’이다. 필멸자인 자신이 아닌 영원성, 즉 신을 척도로 삼고서 자신이 신 앞에 현존한다는 것을 의식하면, 자신과 세계에 대해 갈구한 영원성과 존재 의의,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함으로써 절망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
  • 장 폴 사르트르: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처한 세계와 그 속에 위치한 사물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며 절망하는데, 이는 일종의 ‘구토(Nausée)’로 실존적 불쾌감에 해당한다. 즉 인간의 절망 내지는 실존적 절망이란 세계에 대한 의미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기대가 배신당하는 것으로 인해 발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해 주어진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부터 의미를 부여할 책임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인식의 전환에 도달할 수 있다. 즉, 구토에서부터 자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환에 도달하고 나면 인간은 의미가 없는 세계 인식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세계 위에 형식과 의미를 창조하는 실천적 행위와 현실에 대한 능동적 참여로써 절망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
  • 알베르 카뮈: 인간의 절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장 폴 사르트르와 의견을 같이 한다. 즉, 인간은 의미를 바라는 자기 자신의 욕망이 침묵을 지키는 세계에서 좌절됨에 따라 절망하며, 이 합리를 지향하는 인간 대 불합리하고 침묵하는 세계의 이항 구도가 부조리다. 주체는 이 부조리의 두 항 중 어느 하나를 폐기하거나 모두를 폐기하지 않는 총 세 가지의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우선 ‘인간’이라는 좌항을 폐기함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 이것이 ‘육체적 자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하는 세계’라는 항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답으로 제시한 ‘신’ 또는 사르트르가 제시한 ‘자유’ 혹은 ‘의미 창조’가 해당한다. 사르트르가 제시한 의미의 창조는 유지되어야 할 긴장 상태인 부조리를 해소해버리는 것이다. 바람직한 태도는 부조리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세계를 정당화하지 않고, 결론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질문을 질문인 채로 남겨두는 것. 세계의 있는 그대로를 폐기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서 기꺼이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반항, 그러나 의미를 창조하지 않는 반항을 인간은 택할 수 있다.
  • 지금까지의 나의 입장: 사르트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접했기에 카뮈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으나, 개인적 입장은 사르트르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 주체의 절망은 설명과 합리, 즉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친숙하게 만들고 싶은 타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배반하고 낯선 것으로 남아 있으려 해서, 즉 침묵을 지키기에 발생한다. 의지할 수 있는 타자를 구성하는 것은 카뮈가 지적하였듯 자기기만이자 비약이다. 주어진 부조리 속에서 있는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나 외부 형이상학 · 도덕률에 의존하는 것은 도피이지 직시가 아니다. 그러나 텅 빈 캔버스를 보는 인간은 그 캔버스가 비어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안에 무엇이든지 스스로 그려낼 수 있다는 자각에 도달하게 된다(사르트르). 무너진 폐허 위에서 그는 의욕할 수 있음을, 오히려 자신을 억눌러오던 모든 것들의 기만성과 공허함을 인식함으로부터 오는 특유의 자유 내지는 힘에의 의지를 느끼고 그것의 충만함에 따라 행동할 열정을 느낀다(니체). 이 열정에 따르는 것은 부조리의 해결이 아니다. 의미의 직조와 창조 과정에서 주체는 자신의 입법/가치 부과에 저항하는 타자를 만나고 그 의미의 부여가 실패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의미의 부여라는 과정을 통해 역으로 주체는 세계의 무의미함과 잔인할 정도의 침묵을 매 순간 인식하게 된다. 도피는 그가 창조를 멈추고 어제의 자신의 저작으로 도피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지, 바위를 밀어올리는 저 시지프스의 위대한 노동의 순간 즉 부조리한 바위와 경사, 그리고 그의 운명과의 대결이 펼쳐지는 저 순간에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의미를 생산하는 행위는 세계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정당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카뮈의 제안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가 제시한 의미를 부과하지 않는 묘사하는 예술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미 기의에 묶인 기표들의 묶음을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의미에 어느 정도 결속되어 있으므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카뮈가 제시하는 ‘희망 없는 인간’은 그것이 ‘반항’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는 하였으나 스스로가 부조리의 이항 구도 중 하나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구도에서 분리된 인식을 전제하므로 형이상학적 분리를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허무주의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니체의 말세인에 가장 가깝다. 진실한 반항은 그 부조리의 이항 구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며, 계속해서 패배하게 될 여정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을, 저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구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