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 에셔, 바흐’ 독서 모임의 장기간 중단
금일 저녁 이후로 한 가지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보통 아쉬움과 같은 종류의 감각이란 어떤 대상의 상실에서 온다는 프로이트의 말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에게는 정확히 그 말이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름이 아니라 금년 초부터 진행해온, 그러니까 대학에 합격 원서를 받은 거의 직후에 쭉 지속하여 온 ‘괴델, 에셔, 바흐’ 독서 모임이 장기간 중단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학우들과 선생님들과 함께 호프스태터의 이 책을 함께 읽어나가고 있던 것이, 가장 길었던 중단인 2주 정도를 가볍게 넘겨서 이제는 내년까지 중단하기로 조금 전에 결정된 것이다.
이 모임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시금 되새겨보면 아쉬움은 아무래도 배가 되는 것만 같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사실상 대학 생활이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통하여 보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낯선 다른 학생분들과 교수분들을 가끔 보는 것이 위주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아리 활동이란 사실상 불가능했고, 대학이라는 지적 공동체에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다는 치명타를 나라고 회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이러한 코로나-19가 가져다준 나의 자칫 우울한 길로 선회할 수 있는 대학 생활 자체를 긍정적인 영역으로 인도해주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공동의 지성을 통하여 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누군가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의미 중에서 무엇보다도 학문의 기본 속성에 대하여 고심하게 해준 방아쇠를 당긴 것이 이 모임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솔직하게 여기에 선언해두건대 나는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그 광활한 영역에 처음 던져졌음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와 급작스럽게 달라진 환경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학기 동안에는 정서적으로 잠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질문에 나는 마주해야 했다. 대체로 대부분의 질문은 ‘나’에 관한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학문’이라는 것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예컨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하려고 하는 학문이란 무엇인가?”, “내가 하려고 하는 학문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학문은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학문은 어떤 방식으로 시작되며 또 진행되어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 이러한 질문들은 끝없이 제기되었고 또한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나에게 대답을 요구하였으므로, 갑자기 대학(大學)이라는 현판 아래에서 이러한 현장을 마주하게 된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 개월 동안 ‘괴델, 에셔, 바흐’를 타자와 함께 읽은 경험은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방향성을 나에게 일러주었다. 나는 함께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함께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사상(思想)이 나의 영역으로 들어올 기회의 장이 그곳에 서-있음이고, 함께 읽는다는 것은 여러 생각들이 한 군데에 놓여서 비교되고 또한 상호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고, 함께 읽는다는 것은 나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리하는 것이고, 그리고 함께 읽는다는 것은 그곳에 바로 학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수 개월에 걸친 시간동안의 여러 사람과 함께한 체험 – 서로 다양한 이야기를 가졌으며 따라서 가치관과 시각 그리고 아는 것이 모두 다른, 그래서 같은 책을 읽고서도 다른 시각들과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한 체험 – 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지난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해왔던 ‘괴델, 에셔, 바흐’가 내년까지 당분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토록 아쉬울 수가 없다. 이렇게 중대한 의미를 지닌 ‘괴델, 에셔, 바흐’ 독서 모임이기에 더욱이 그러하다. 마르틴 하이데거도 지적하지 않았던가.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러한 사물을 얼마나 많이 사유하고 그리하여 그 사유 속에서 사물과 세상, 자신의 관계를 발견하는지가 궁극적으로는 그 사물과의 가까움을 규명하지 않느냐고.
혹여 이 장기간의 공백이 모임의 해소로 이어지지는 않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약된 내년 초의 모임 일정을 보면서 이 모임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을 생각하려고 한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러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의 방향성을 찾는 출발점이 되어 준 바로 이 모임이 나에게 가르쳐준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아쉬움과 불안감, 그러나 인간이 그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여전히 품을 수 있는 희망의 연장선 위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오늘 해당 ‘괴델, 에셔, 바흐’ 모임의 장기간 중단을 알리면서 내가 첨언했던 ‘드리는 말씀’을 다음에 붙이며 이만 말을 줄인다.
드리는 말씀
금일(2021. 10. 10.) 논의된 일정에 의하면 금년(2021년) 중에는 추가 세션이 없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당분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독서 모임이 금년 중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다소 아쉬운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상기 안내드린 바와 같이 내년 초에 다시 만나 뵙는 것을 기약하였으므로, 그 때를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오랜 기간 동안 모임이 열리지 않는 만큼 다소 간에 두려운 심정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 이 모임은 하나의 대학 생활에서의 활력소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대학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지식이란 무엇이며 왜 타인과의 교류와 대화가 중요한지, 그리고 학문이라는 과정에서 논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 중대한 역할을 이 모임이 해 주고 있는 중이라, 개인적으로는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다시 논의의 장이 열렸을 때 원래대로 회귀할 수 있기를, 따라서 저에게 있어 이 모임의 역할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여, 장기간의 공백이 단초가 되어 내년의 모임이 혹시나 해소되지는 않을까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모쪼록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란,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본 모임의 모든 구성원들께 다음을 당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분들께서 동의하시듯 ‘괴델, 에셔, 바흐’는 혼자서 읽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을 가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읽으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더라도 그 본래의 의미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금년의 모든 모임에서 저는 이러한 것을 직접 느낄 수 있었으며, 아마 다른 분들 또한 다르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부디 장기간의 오랜 공백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은 잠시의 ‘멈춤’으로 생각해주시고 모쪼록 이 모임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다음 모임에서 다시 만나뵈었을 때, 공백이 있었던 긴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여담으로 상호 간에 공유할 수는 있더라도 내용과 맥락의 공백까지는 허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모두의 일정이 금년 중에 한 번 더 맞는 기회가 생겨 금년 중에 어느 형식이든 한 번 이상의 모임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아직 비우지 못한 개인적인 아쉬움을 마지막에 잠깐 비추어봅니다만, 모든 분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므로 아쉬움은 이만 뒤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드리는 말씀이 길었습니다. 모쪼록 남은 2021년을 평안하고 무탈하게 보내시기를 소망해봅니다. 내년 모임에서 인사드리겠습니다.
– 2021. 10. 10. 커피사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