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말하는 것은 민주공화정의 수호가 아니다

2025-09-01 0 By 커피사유

오늘 아침 여당 대표는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적 변곡점에 놓여 있다”, 그리고 “흡사 해방 정국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이다.

정기국회가 개원하는 오늘 여당의 공개석상에는 “아직도 탄핵 반대를 외치는 국민의힘! 그들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판넬이 등장했다. 요컨대 ‘헌정질서를 유린한 대통령을 배출한 책임과 반성마저 제대로 지지 않고, 이제는 그 지도부 중 일부가 공개적으로 탄핵 인용이 잘못되었다거나 석방을 주장하는 정당’ 내지는 ’12 · 3 사태에 대통령의 행동과 공조한 의심이 있는 정당’은 정치적 협상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1948년 제헌국회가 일제강점기 때 정권에 협조하여 다른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처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파 척결이라는 시대 정신에 충실했듯, 여당은 내란 세력 척결을 시대 정신이고 과제로 간주하며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 단언은 너무나도 단호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정 대표가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역사로써 더 이상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거나 민주공화정에 대한 수호자를 자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포용과 타협이 절실한 시기〉라는 글에서 강조한 바 있듯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비록 그가, 그리고 주변 이웃과 우리가 이룩한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력이라 하더라도 이 정치 집단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람들에 의해 선거되어 당선된, 민주적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동체의 파괴에 기여했거나 적어도 그 파괴 행위에 찬동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하여 이들과 대화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있지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숙의민주주의의 기본 전통을 무시하는 행위다. 물론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여 볼 때 나 또한 제1야당의 주장을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며 몇몇 주장은 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12 · 3 사태에 일어났던 일이란 국가 운영에 책임 있는 정치 세력이 그 반대자와 대화하지 않고 일방적이고 또 독단적으로, 자신만이 옳다고 믿으면서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치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2024헌나8 판결문에 적시하였듯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하는데 이 본질을 완전히 망가뜨린 사건이 바로 작년의 겨울 어느 밤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옳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을 넘어 자신 이외에는 모두 추방되어야 한다는 광기가 된 공동체에서는 공존도 자리를 잃는 것은 별도의 논증이 필요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나는 그 광기의 현장을 지난 겨울로 목도하는 것이 마지막이기를 희망했으나, 비록 군은 동원하지 않았지만 대한국민이 합의한 최소한의 전통과 자랑스러운 문화를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다. 정 대표는 개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해온 지배 카르텔이고, 권력에 기생해 온 부역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자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인식과는 별개로 그는 여당의 대표로써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법안들을 놓고 반대 세력의 의견도 충분히 경청하고 반영할 의무가 있다. 한 정당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법안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지의 사례는 차고 넘친다. 크리스마스 날치기로 통과한 비정규직 노동법 개정안, 충분한 권력 및 수사 주체 배분에 대한 고려 없이 통과한 고위공직자수사처법, 위성정당이라는 선거제의 크나큰 흑역사를 남긴 선거법 개정안 등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고 의회를 통과해버린 법안들은 통과 이후 그 법안이 기대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많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해왔다. 애초에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반대 의견이 밀어붙여진다고 할 때, 그 양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물론 상대 정당에 대한 범죄 혐의와 수상한 구석들, 논란이 될만한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권자의 평가는 다음 선거라는 민주적 제도에 따라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수사를 통해 이 정당이 우리가 합의한 기본적인 질서에 위배된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음이 밝혀진다면, 정당해산을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청구할 수 있다. 개별 의원들이 12월 3일의 밤에 가담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면 검사가 기소하고 법원의 판결을 받으면 될 일이다. 검사는 믿을 수 없지 않냐고? 이미 그렇다는 여론을 반영하여 특별검사를 마련했지 않은가? 문제에 대한 처벌은 별도로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이 문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은 주권자의 의사를 대리하는 국회의원들의 의무이긴 하지만, 동시에 주권자는 그와는 별개로 다양한 정치 집단을 대표하는 사람들과 협의하여 법안을 합의하고 제정하라는 의무도 부여했다. 다수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에 언제나 단독으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상대 정당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주장을 한다는 사실이 합의와 협치, 양보의 전통과 미덕으로부터 그들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괴랄한 결론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사법의 영역은 사법의 영역이고, 입법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입법의 영역이다. 나는 그것이 현대 국가에서 우리가 삼권분립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 위에 세운 정신이라고 믿는다.


사회가 정한 법률을 위반하였다면 헌법에 따라 구성된 사법부에서 재판을 받고, 상응하는 형벌을 받으면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합의라는 점도 부언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근래 사법부의 판결이 지나치게 가볍다거나 자신의 판단과는 반대로 나왔음에 기초하여 삼부요인 중 하나를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증가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당장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부터 무작정 때려부수는 일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이를테면 여당은 내란 혐의가 있는 전직 대통령을 재판하고 있는 재판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근거로 반민특위 때 설치된 바와 유사한 특별재판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꺼내고 있는데, 이는 입법부와 애초에 분리되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것이 본질인 사법부의 근간을 크게 흔드는 행위다. 하다못해 장기 집권을 꾀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와 대립한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선생을 좋아하지 않았을지언정 삼부요인 중 하나로서 존중했는데, 지금 집권 정당은 그들이 비판해마지 않는 인물보다도 더 저열한 일을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재판부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합리적인 사유를 들어 법관에 대한 기피 신청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최대 2번에 이르기까지 법원의 판단을 다시 받아볼 수 있는 3심제도 우리 헌법은 마련하고 있다. (헌법소원이나 재심 제도까지 고려한다면 기회는 3회 이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전체 재판부 자체가 이미 전임 정권에 의해 오염되었거나 이권 카르텔 집단이라고? 그 주장이야말로 우리가 항거한 전임 정권이 누누이 사용해오던 단어이자 인식이 아니던가? 민주주의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저항한 자부심이 있는 우리가 그들의 저열한 방식으로 똑같이 앙갚아주자는 것만큼 바보같은 도덕적 타락이 있을까?


다시. 여당 대표는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적 변곡점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정말로 그러하다. 민주공화정의 기본이 되는 정신인 다원적 세계관과 동료 시민들 간의 대등성과 존중 및 박애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이 정신을 잘 지키기 위한 절차로 규정된 것이지, 절차를 지킨다고 하여 민주정을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3제국이 태동하던 시기 히틀러 또한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민의를 대변하며 민주적인 질서에 따르고 있다고 외쳤다. 정말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하는지의 여부는 그들이 외치는 구호나 절차 준수의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본 정신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그 정신에 따르는 이가 할 수 없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판정될 수 있다.

지난 글의 아래와 같은 마지막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셈이다.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각각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대등한 동료시민들 간의 존중과 박애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협력적인 공적 의사결정을 본질로 한다.” 이 문장들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 대한 해석이다. 민주공화국의 기본 정신이 이러한 상호 존중과 대화 · 포용 · 타협 위에 서 있다고 한다면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수 의석을 가졌으며, 상대의 결정적 실책으로 인해 정권을 획득한 한 정치적 결사가 상대를 무조건적 악으로 매도하면서 협치조차 거부하는 태도가 얼마나 민주주의에 치명적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정확히 그 태도가 현재의 집권 여당 대표가 비판하는 전직 대통령과 전 집권 여당의 문제였고, 대화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충돌이 이어진 결과 제6공화국 최초의 비상계엄이라는 헌정사적 중대사건으로 국회가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계엄 선포의 행위 자체는 분명 반헌법적이고 불법적인 독재의 기도기는 했으나, 우리의 민주공화국에 뿌리내려야 할 기본 정신이 위태롭다는 관찰이 존재하는 이상 이 행위가 어느 한 진영이라던가 개인에게 전체적인 책임이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해야 한다. “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이라는 구호가 절실히 울려퍼질 때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그 구호가 아니고, 그 소리들이 뿌리내리는 정신이다.

커피사유, 〈포용과 타협이 절실한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