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 난장판 그리고 미학
나 자신의 문학적 취향에 대해 조금 남겨볼까 한다.
한때는 단순히 비극 그러니까 슬프거나 씁쓸한 이야기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난 학기부터 곧 끝날 여름 방학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부터 김애란의 《비행운》, 마침내는 근래에 유명한 모바일 게임 《트릭컬 리바이브》의 서사 구조에서 내가 무엇에 이끌렸는지를 되짚어보았기 때문이다.
어둡고 가슴 아픈 이야기인지가 충분 조건이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의 부조리를 보여주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순간의 희로애락이든 영원한 윤회 속에서의 설움이든, 지나치게 밝거나 어두운 모습을 가장하기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의 사소하지만 불편한 모든 장면들을, 누구 하나도 비난할 수 없는 딜레마 속의 난장판을 그려내는 쪽이 아무래도 내가 추구하는 미학인 듯하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등장시키는 여러 인물 중 어느 하나를 옳고 다른 하나를 그르다고 그려내는 작품을 나는 세련되지 못하다고 느끼니까.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작품의 말미에 성급한 결론을 내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소설이 채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삶 내부에 자리하지만 우리가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사소한 〈부조리〉들을 그려내는 작품. 그쪽이 나의 선호라고 말할 수 있을 증거들이 충분히 쌓이는 듯하다.
‘누구 하나도 비난할 수 없는 딜레마 속의 난장판’이라는 표현은 나의 문학 · 예술적 감각 기준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의 화자 와타나베 도루가 든 에우리피데스의 희곡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해당 대목을 그대로 옮겨오자면 아래와 같다.
내일 아침에 세탁을 하고 10시에 강의를 들으러 갈 겁니다. 이 강의는 미도리하고 같이 들어요. ‘연극사 2’인데 지금은 에우리피데스를 합니다. 에우리피데스, 아세요? 옛날 그리스에서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비극의 빅 3로 알려진 사람인데요, 마지막에는 마케도니아에서 개한테 물려 죽었다고 하는데, 다른 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에우리피데스입니다. 전 소포클레스가 더 좋지만, 취향 문제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말하기 힘들어요.
그 사람 연극의 특징은 이것저것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하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요. 그건 그럴 수밖에요. 모든 사람의 정의가 실현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 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 넌 저쪽으로, 넌 이쪽으로, 넌 저놈이랑 같이, 넌 거기서 잠깐 가만히 있어, 그런 식으로요. 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합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서는 자주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는데, 바로 이 언저리에서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평가가 갈립니다.
만일 현실 세계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곤란한 상태에 빠져 옴짝달짝도 못 할 지경에 있으면 신이 하늘에서 하늘하늘 내려와 전부 처리해 주니까요. 이렇게 편한 일도 없죠. 아무튼 이게 ‘연극사 2’입니다. 우리는 대학에서 대충 이런 걸 배워요.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375-377.
내가 강조하고 싶은 대목은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요.”라는 두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선역과 악역을 명확하게 나누어 제시하는 종류의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데, 적어도 생각하기로는 오래 전 에우리피데스가 포착했듯 우리 삶 속에서는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를 수 없는 경우가 거의 모두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다 나의 입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해 얼마 전 남긴 독서 노트의 일부를 가져와야 한다.
검토해야 할 질문은 세 개다. 첫째,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왜 계속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는가?’. 둘째, ‘작중 인물들의 침묵은 책임을 회피한 것인가?’. 마지막 셋째, ‘이 침묵은 죄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첫 순간 대답이 명료하다고 간단히 단언하고 입을 떼려 한다. 그러나 문장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수포로 돌아간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침묵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잔인하게도 되새기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작중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가장 쉬운 것은 주인공 펄롱과 태도 면에서 반대에 서 있는 아내 아일린이다. 그녀는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펄롱이 식사를 해결하는 식당의 주인인 케호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일린과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삶의 고개들에 지쳐 있고 당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속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망설인다.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 되는 거야.”라는 케호 부인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펄롱에게 건네는 조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독자를 단말마도 지를 틈조차 주지 않고 일격에 끝내버리는 참격이라고 해야 한다.
추론은 유비가 하나의 문고리가 됨에 따라 시작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서사에 비추게 된다. 일년 중 가장 ‘기쁘게 보내야 하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펄롱과 아일린의 대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사소한 불편함이 일찍부터 우리의 이목을 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펄롱과 아일린의 입장이 어긋나기 시작함을 알게 된다면 부조리함을 견딜 수 없는 우리는 두 입장 중 하나를 택하기를 바라게 된다. 즉 자신의 처지가 더욱 비참해지거나 어려워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구한 선택을 하는 펄롱의 행동을 옳다고 옹호할 것인지, 당장 창문조차 교체할 여유 자금도 없는 빠듯한 가계를 인정하고 손 쓰기 어려운 일도 있다고 말하는 아일린의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사소한 대화, 지극히 사소한 사건에 대한 논의임을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 결정이란 말인가? 우리 사회의 도덕률은 당연하게도 펄롱이 옳다고 말하지 않던가? 게다가 작품의 결말도 펄롱의 선택으로 매듭지어진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지극히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지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펄롱의 입장만이 아닌 아일린의 입장도 우리는 삶에서 누적된 수없는 좌절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 꿈꾸었던 세계와 우리가 자라 마주한 세계라는 같지만 화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세상을 떠올린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는 대학 1학년 때 썼던 글 한 편을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오래된 갈등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글에서 나는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곱씹는다. “아무 것도 알지도 못하고 그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로 세상에 부딪혀봐야 바뀌는 것은 없고 너만 아플 뿐이다.”라는 목소리를. 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에, 당장의 경제적 · 사회적 생존으로 분투해야 하는 것이 세상이기에 네가 꿈꾸는 세계는 네가 꿈꾸는 그 사소한 방법들로는 불가능하다던 어느 심야의 단언. 가정의 보호를 받던 초 · 중학교 시절에는 가끔 등장하던 그 말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 각종 아동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나는 배워 왔으니까. 애초에 초등학교 〈바른 생활〉과 중학교 도덕 교과에서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가르쳤기에, 어떤 의미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자연스러웠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의 악몽을 통과하고 대학에서 온갖 사건들을 겪은 나는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때론 사회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부정의하고 부조리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처벌받고, 처벌받아야 한다고 배웠던 사람들이 풀려났다는 뉴스들과 기록들을 읽으면서 명백해 보였던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들은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꺼져 들어갔다. 치명적으로 가벼워진 도덕관은 처음에는 분노가 되어 바로잡아야 한다는 외침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발견하게 된 것이란 막상 내가 무언가를 하기에는 그렇게 용감한 인물도 아니며 여유가 있는 이도 아니라는 뼈아픈 사실 뿐이었다. 정치에 뛰어들자고 생각해보던 밤에는 청문회에서 사촌의 사소한 행위까지 모조리 털려나가 패가망신한 이들의 사례들이 목을 졸랐고, 결사나 집회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한 밤에는 당장의 학점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은 것이 있다는 고언(古言)은 참으로 사소하고 친숙하기 이를데 없던 것이었지만, 막상 그 문장이 탄생한 수렁에 휩쓸려보니 사소함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인지를 나는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아직도 나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이 곤경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 뿐일 것이다. 여전히 나는 때때금 생각한다. 우물거리면서 밥과 함께 뉴스들을 삼키는 저녁 때마다, 야구 경기의 결과나 넣어두었던 주식 계좌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심야와 같은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마다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내가 과거에 겪었던 고통보다 더한 날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름 모를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폭염 속에서, 열차에 치여서, 안전 펜스가 없는 현장에서 추락해서, 기계에 짓눌려 죽은 평범한, 나처럼 퇴근하고 사소한 일상을 보낼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당장 내가 처한 문제들을, 이를테면 대학의 졸업부터 독서 노트의 제출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나의 문제들을 곱씹고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스스로를 재발견한다. … 나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침묵하는 것으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인가? 여전히 나는 답을 알지 못한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끔찍하게 죽어가거나 유린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떠한 대답도 내지 못하고 있다. 침묵 앞에서, 나 또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커피사유,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제2차 독서 모임 노트〉 中 ‘침묵 앞에서의 침묵’ 전문.
상술한 것처럼 내 미적 기준의 기초는 도덕적 기준에 의거하여 다른 이를 비판하려고 하는 순간, 조금만 곱씹어보면 나도 문제 삼는 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도덕적으로 누군가의 행위를 문제 삼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 죽을 위험이 적은 일터에서 일할 수 있는 ‘더 나은 세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위한 세금 인상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에 위배된다고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전통적 여성과 남성성의 화신으로 제시되는 게임 캐릭터나 영화 속 인물, 아이돌들에 대해 문제 삼기를 꺼려한다. 스스로가 영위하는 출근길이 지하철 기관사나 버스 기사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 위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파업으로 인해 지각할 것 같으면 욕을 한 마디씩 뱉는다. 이러한 경험들을 되짚어볼 때 우리는 한때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마음과 함께, 과녁으로 삼았던 인물이나 그의 행실을 향해 거침없는 말들을 쏟아낼 전의를 상실해버린다.
이 불편한 감각은 일종의 도덕적 딜레마에 우리가 처했기에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에서 우리는 출근길에 불편하니 그쯤 하라고 소리지르는 시민들을 보면서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시위를 이어가는 장애인들 입장에서는 헌법에 의해 모두에게 보장되는 평등한 권리를, 그것도 몇 센티미터의 문턱이라거나 경사로의 부재, 작은 홈들로 인해 멀리 빙글 돌아가야 하거나 매번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한참 멀리에 있어 탑승장으로 향하기 위해 아주 긴 시간을 이동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출근길의 혼잡함과 직장에 지각했을 때의 다른 이들의 눈치와 불편함을 알기에, 열차가 지연되었을 경우 곤란해지는 자신의 입장상 불쾌감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다. 양쪽의 배경과 입장을 스스로의 경험과 결부지어 비교해보는 이런 경험들의 누적으로, 나는 어떤 사안이든지 완전한 잘잘못을 가릴 수 있다거나 저쪽이 옳고 이쪽은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는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마치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특징처럼, ‘누구 하나도 비난할 수 없는 딜레마 속의 난장판’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주목해야 할 구조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없고, 교착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미적으로 더욱 훌륭하다고 믿는다. 물론 동시에 나는 교착 상태의 해소를 위한 어떤 초월적 존재를 꿈꾸는 인간의 기본 심리가 나에게도 자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도 안다. 그러나 문학 작품과 예술이 해야 할 일이란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애시당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세계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는 오늘날 강력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계보적인 맥락에서 볼 때,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통해 여실히 부숴버렸듯 사랑이나 연민과 같이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규범이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옳은 것’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기에는 의심할만한 정황들이 충분히 많다. 게다가 이러한 도덕 규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꺼이 도덕 규범을 위배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나 또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분별을 넘어선, 경계의 자의성과 분류의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이같은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준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중요도를 가진다고 평하고 싶다.
특히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식의 문학 및 예술의 제시는 정치적 양극화와 자기 편향으로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고려할 때도 절실하지 않을까 싶다.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발 현상들의 양상을 살펴볼 때마다 나는 나의 주장만이 옳고 당신의 주장은 틀렸다는 고성을 목도하게 된다. 삶의 부조리함 속에서 겪었던 고통이 외부의 대상에 투사되고 집요한 공격이 가해지며, 그 공격을 이해할 수 없는 상대는 그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치열하게 앙갚으려 한다. 달아오른 긴장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와 나 자신은 명백하게 다르다고 선언하고, 그 결과 우리는 정치적 교착 상태와 사회 불안정을 동반한 민주정의 위기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 편향, 즉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이를 설득하기 위한 유효한 전략이 무엇이었는가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면, 나는 어렵지 않게 상대의 확고한 믿음을 흔들어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를 닫기로 결정한 이에게는 아무리 스스로의 논리적 근거를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상대의 확신을 흔들어두는 것, 명백하다고 생각한 논리가 애매하거나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배타적 태도가 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버리고, 또 자신에게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직감을 철저하게 격리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을 제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적 개종도 우선 믿음을 흔든 뒤에 다른 믿음을 제시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고려해보라. 정치 · 사회 · 철학적 사상도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크게 다를 바는 없지 않을까. 갈등의 완화를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으로 어떤 이론이 더 현실을 잘 설명한다거나 어떤 이론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을 들어 상대를 물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이 적대하는 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에서 출발하는 바로 그 방식, 즉 ‘흔들리는 믿음’에서부터 공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안정의 측면에서, 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는 ‘어느 한쪽도 편들 수 없는 딜레마 속의 난장판’을 그려내는 작품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예술 작품이라 생각한다. 물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제한되어 있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잔인하게도 우리는 상대의 입장을 알면서도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게 되지만, 최소한 우리가 나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맹목적으로 믿는 참사만은 피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부조리를 견딜 수 없어하는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문제 인식과 해결책 또는 통일의 갈구란 언제나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이 눈앞에 멀쩡하게 동시에 제시되는 경우에 발발하는 욕구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답을 내리거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통해 흐름을 정리하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환기하고, 바로 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을 독자 또는 감상자의 몫으로 남기는 바로 그런 작품들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