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판 라오어 2, “아바타 2: 물의 길(Avatar: The Way of Water)”
#1.
다른 말은 필요없다. 딱 한 문장으로 영화 “아바타 2: 물의 길”에 대한 평가는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
“영화 〈아바타 2: 물의 길〉은 그냥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이다.”
#2.
나는 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올바르게 표현한 영화만이 진정으로 ‘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고집에 비추어볼 때, 〈아바타 2: 물의 길〉은 영화라 불릴 자격이 없다. ‘삶’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리와 영상이 동반된 문학 작품이 바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The Last of Us Part II)처럼 문학적으로는 졸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 같다. 두 졸작은 모두 시간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선 변화, 관계의 개선은 마치 돌다리를 건너뛰듯 간간히 다룰 뿐이며, 사건 사이의 유기적 연결관계를 구성하기 보다는 억지로 끼워넣은 서사에 통일성을 강제로 부여하기 위해 모종의 테마를 공통적으로 염불하는 괴상한 플롯을 가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아바타 2: 물의 길〉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플롯이 과연 뭐가 있는가? 왜 제이크는 자신들을 사냥하는 지구인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나비족 추장 자리에서 내려와서 이웃 부족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관한 플롯이 그러한가? 제이크는 이미 한 번 그들을 물리친 전적이 있는 이른바 ‘전쟁 영웅’인데? 왜 네이테넘은 아버지에게 순종적이었던, ‘위대한 전사’ 형과는 달리 반발하는 아들이 되었는가에 대한 대답도 충분히 제시되었는가? 전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플롯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는 시간선상에 있는 개개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구성하는 것에도 처참하게 실패한다. 영화는 오직 단순히 ‘가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모든 등장인물의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순종적인 아들 ‘로아크’ 대 반항적인 아들 ‘네이테넘’의 대립을 해결하는 방식은 기본이고, 그 흔하디 흔한 ‘가족의 죽음’ 혹은 ‘위협’에 의한 부모의 각성까지. 절정은 스파이더가 제이크와의 싸움에서 익사의 위기에 처한 마일스 대령을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을 가진 생명체랍시고 구하는 장면에 있다. 불과 십분 전의 장면까지만 해서도 “저 애는 내 아들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나와 저 아이는 아무 관계도 없다”라고 선언했으며, 대령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여러 부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직접 목격하며 강력한 반감을 가진 스파이더가 과연 ‘아버지’라고 부를리 없는 그를 구하는 행위가 ‘가족’이라는 불가항력, 강제력으로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스토리, 이 영화의 서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는 ‘서사’가 들어있는 문학 작품이 아니며, 단지 자연 보호의 중요성이라던가 자연의 아름다움 따위를 과시하는, 자본을 매우 많이 들인 한 편의 거추장스러운 다큐멘터리에 다름 아니라는 깊은 인상을 성공적으로 남기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 유명한 망작 라스트 오브 어스 2처럼 말이다.
#3.
이 영화의 ‘가족’이라는 불안한 중심 서사도 따져보면 구시대적 유물관에 다름 아니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 ‘보좌하는 어머니’와 같은 분리된 남성상과 여성상의 강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할 것을 ‘가족을 지키는’ 제이크는 영화 내내 강조하고, 덕분에 반항적인 아들 네이테넘은 오히려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사건을 더욱 키워간다. 혹자는 이렇게 일이 잘못되어가는 것의 원인을 아버지의 말에 순응하지 않는 네이테넘의 성격에 있다고 대답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족관의 산물이다.
영화는 ‘무엇이 가족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오직 강압적인 아버지 제이크처럼, 관객들에게 ‘가족’에 대한 정해진 답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서슴치 않는다.
#4.
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인터뷰들을 보면,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모종의 ‘환경 보호’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만행’을 확인하면 그러하다. 일본 등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포경을 생각나게 하는 작살잡이와 같은 장면이라던가, 영화 초반에 행성의 생태계를 다 파괴하면서 착륙하는 지구인들의 모습이라던가, 그들이 구축한 도시의 삭막하고 녹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던가.
그는 생태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생물들을 살생하는 모습을 뒤집으려고 한 것이다. 살생당하는 생물들을 어느 외계 행성의 토착 민족들과 생명체들에 투사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히 노화 방지라던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다른 삶과 생명의 고통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오직 끝없는 ‘작살’을 쏘는 생명체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성공적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여러 단면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는 법인데, 그는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는 인간의 편리하고 풍족한 생활이나 이권은 물론, 사회 · 문화적으로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문제이다. 그가 강조하려고 하는 ‘생물의 고통’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살생의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나 내면을 모두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살생의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불쾌한 이미지로 점칠함으로써, 메시지의 성공적인 전달은 고사하고 영화 자체를 보는 내내 관객들을 혐오와 구역질에 시달리게 한다.
#5.
결국,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영화 〈아바타 2: 물의 길〉을 통해 자신의 커리어에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한 획을 그은 셈이다. ‘영화’를 만든다고 호평받아온 유명 감독이 서사를 엉망진창으로 뒤엎은 ‘영화’를 자신의 작품이라고 내 놓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을 나는 하나의 기만이자 직업윤리 위반이라고 본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 영화는 라스트 오브 어스 2에 다름 아닌 희대의 망작이다. 영화관에서 나가고 싶었던 영화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곧이어 공개한다는 후속작도 전혀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