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타 예술 결합의 특성 논고
이하의 내용은 2025학년도 2학기, 청강으로 듣고 있는 서울대학교 《음악론입문》강좌의 〈타 장르와의 결합〉에 대한 학생 발표에서 제시된 논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토의 이전에 기록해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I. 대중음악은 향후 어떤 예술과 결합하게 될까? 미래에 대중음악은 어떻게 전달되고 배포될까?
-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예술과 대중음악은 이미 결합되었거나 결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사가 있는 노래가 지시하듯 문학과 음악은 당연하고, 앨범 커버의 예시에서 살펴보았듯 미술과 음악도 이미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시회의 예시에서 살펴볼 수 있듯 조형도 대중음악과 이미 결합된 사례가 충분해보인다. 연극 · 춤의 경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음악과 결부되어 전통적인 희극과 비극은 물론이거니와 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컬의 형태로도 오늘날 발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영화 또한 무성 영화 시기부터 어울리는 음악이 큐 시트로 선곡되었으며 유성 영화 시대에 들어서도 장면마다 음악으로 ‘표현되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 그나마 주목해볼 수 있을 만한 최근의 사례는 예술에 해당하는지 해당하지 않는지가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비디오 게임에 음악이 결부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이 경우조차도 대중음악이 이미 결합되어 있다. 사운드 트랙은 이미 비디오 게임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아무런 음악이나 소리가 나지 않는 게임을 원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화 사운드트랙이 인기를 얻어 대중적으로 널리 연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예 게임의 사운드트랙이 인기를 얻어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어 다수의 청중 앞에서 연주되거나 라디오에서 선곡되는 경우도 자주는 아니지만 증가하고 있다.
- 따라서 예술의 모든 하위 분과가 대중음악으로 결합한 것으로 보이는 이상, “대중음악이 향후 어떤 예술과 결합하게 될까?”에 대한 질문은 해석을 달리 하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이 뻔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새로운 예술 장르가 생긴다면, 그것과 결합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여 ‘어떤’을 ‘어떻게’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후속 질문과 연계하여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싶다.
II. 시 · 청각적 분위기가 대조되는 경험이 감상자에게 가져다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시도들은 미학적 · 도덕적으로 바람직한가?
- 이를테면 잔인한 장면에 지나치게 아름다운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1번 D장조(“Land of Hope and Glory”)를 삽입한 〈킹스맨〉의 ‘폭발하는 머리’ 장면이라던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엔터테이너가 결국 실성하고 살인을 저지르러 가기 전에 춤을 추는 〈조커〉의 ‘계단 춤’ 장면과 같이 적지 않은 영화에서는 펼쳐지는 장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을 종종 선곡하곤 한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지나치게 가벼운 듯한’ 선곡은 주로 잔인하거나 심리적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영화의 장면의 자극성을 의도적으로 절감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당장에 열거한 두 장면에 클래식이나 쫀득거리고 리듬감 있는 펑크가 아닌, 단조로 구성되어 심각하거나 장엄한 성격의 음악, 혹은 분노를 표현할 수 있도록 시끄러운 프로그레시브 록/그런지 록 등이 삽입되었다고 생각해보면 장면이 상당히 섬뜩해질 것 같다.
- 이 같은 대조되는 음악의 삽입은 장면의 폭력성이나 비인간성을 지나치게 유희적이거나 가볍게 만들어 그 심각성을 감상자가 ‘감정적으로는’ 과소평가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함 자체가 ‘논란이 된다’는 점에 역으로 주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킹스맨〉의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들에 지금의 클래식 음악들이 삽입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해당 장면들이 지금처럼 감상자의 기억에 남아 널리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조커〉의 ‘계단 춤’ 장면에 처음부터, 그 중반부의 잔인할 정도로 슬프며 느린 음악이 삽입되었다고 한다면, 이 장면이 지금만큼 널리 회자될 수 있었을까?
- 개인적으로 이러한 ‘어울리지 않는’ 두 예술 요소의 결합은 감상자의 인지부조화를 유도, 그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부조화가 일어나는 원인에 성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역으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즉 시 · 청각적 분위기가 대조되는 경험은 ‘블랙 코미디’가 제공해주는 기능과 유사하다. 들을 때는 잠시나마 그 무겁고 불편한 진실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아 무게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계속해서 곱씹으면서 쓴웃음을 짓게 되지 않던가. 문제의 심각성과 잔혹성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무결한 정보 전달’에는 중요할 수 있지만, 정작 사람들의 생각과 참여, 논의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에는 오히려 진중한 장면에 가벼운 음악을 삽입하는 수가 관객의 각성을 이끌어내는데는 더욱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III. 음악을 다른 장르에 넣을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무엇인가? 어떤 예술 분과와 음악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 개인적으로는 음악은 ‘행간’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각종 수식어와 의성/의태어를 동원한 문장으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선을 몇 초 듣는 것만으로 전달해주는 것 같으며,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부터 데포르메1미술, 특히 회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변형 · 과장 · 축소 · 왜곡해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게임 · 만화 캐릭터를 실제 사람이 생긴 것과 다르게 아주 귀엽고 단순하게 그리는 기법을 생각해봐도 되고, 아니면 유명한 5분 캐리커쳐를 생각해봐도 된다.되거나 완전히 추상화된 그림에 이르기까지 각종 조형 시도가 상당히 자주 실패하는 장면의 분위기나 맥락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고 생각한다.
- 다른 말로 하면, 조형 예술 · 문학 작품 등은 대상을 재단하거나(조각과 건축은 모두 재료를 다듬어서 한다) 경계를 나누어 (그림은 선으로, 건축은 벽으로 공간을 나눈다) 표현 대상을 관조적 형태에서 관찰하도록 하지만(‘아폴론적인 것’) 음악은 작용 방향이 반대가 아닐까 싶다. 음악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파괴하는 예술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들을 때 느껴지는 고양감 앞에서는 천국을 묘사한 그 어떤 그림도 각각의 차이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처럼 음악은 특유의 도취감을 청자에게 제공, 이전까지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물의 차이들을 단번에 ‘별 거 아닌 것’으로 떨어뜨려버리는 것 같다.(‘디오니소스적인 것’)2눈치챘겠지만, 이러한 시각은 니체의 예술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더욱 정확하게는 백승영 교수의 니체 예술론에 대한 해석이 되겠지만 말이다.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의 제6부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 조금 참고가 될 것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예술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폴론적-형상적 예술, 디오니소스적 예술, 그리고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 예술. 이 구분은 니체가 예술가 유형을 ‘아폴론적 꿈의 예술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가’, ‘도취와 꿈의 예술가’로 구분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구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니체의 예술 충동(혹은 예술적 힘) 규명을 토대로 하고 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Das Apollinische)와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을 인간의 두 예술 충동에 대한 심리적 고찰로부터 획득한다. 아폴론적 예술 충동은 형상과 형태를 만들고 제공하는 충동이자 척도를 설정하고 틀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를 사용하여 구분 가능하고 산정 가능하며 인식 가능한 조형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폴론적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완전한 고립으로, 전형적인 ‘개체’로, 단순화하고 강조하고 강화하고 명료하게 하며 전형적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향하는 갈망.” 이 예술 충동을 니체는 꿈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꿈의 세계는 형상의 세계이자 가상의 세계다. 꿈꾸는 자는 형상과 형태를 만들어내며 그의 꿈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이해된다. 하지만 꿈꾸는 자에게 꿈은 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래서 꿈꾸는 자는 꿈을 ‘가상’으로서 즐길 수 있다. 꿈의 이런 가상적 성격은 아폴론적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인간 안에서 무매개적으로 솟구치는 예술 충동으로서, 울타리나 제한이나 형태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여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지향한다.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통일에의 갈망, 개인이나 일상이나 사회나 실재를 넘어섬, 망각이라는 심연으로서, 더 어둡고 더 충만하며 더 유동적인 상태로 격정적이고도 고통스럽게 고양되는 것으로서…… 창조와 파괴의 필연성에 대한 일체감으로서.” 아폴론적 예술 충동이 꿈의 비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도취의 비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도취는 꿈과 예술적 가상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구별을 없애고, 개별성의 제한을 지양하며,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융해시킨다. 이때 예술가는 자기 이웃과 하나가 되고 화해하고 용해되어 있는 것을 느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 모습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이 두 예술 충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에 있으며,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 활동은 이 두 충동이 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예컨대 음악에서는 디오니소스적 힘이, 조형 예술에서는 아폴론적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이 두 예술 힘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합일의 상태를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찾는다.」
―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pp. 632-634. - 음악은 통일하고, 조형 예술은 나누는 이 대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예술 분과는 조형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문학’이 가장 음악과 맞닿을 때 효과가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II.의 질문’에서 답한 것과 동일하다.
- 개인적으로 문학은 ‘조형 예술’ 중에 가장 명확하게 경계를 나누는 예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문장 구성과 배치, 장과 절의 상대적 길이나 전체적 어감 등 수많은 요소들이 ‘미묘한 뉘앙스’를 구성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문학은 구체적 대상 혹은 그들을 묶은 추상적 개념을 먼저 준비한 뒤 그들을 재구성하여 대상을 파악하는 예술이기에(소설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우리는 특정한 시각적 이미지나 사전에 분류된 성격적 특성을 가져와 그것을 끼워맞추는 형태로 그 인물을 재구성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된다) 전체적인 이미지를 한 번에 지각하고 그 뒤에 각각을 뜯어볼 수 있는 건축이나 미술과는 달리 독자가 반드시 적혀있는 바에 따라 명시적인 ‘내적 재구성’의 과정을 직접 거쳐야만 한다.3이 입장을 내가 이전에 고등학교 후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음을 붙여두면 이해가 편할 것 같다.
「글을 작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내는 것, 단어와 단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문단과 문단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 뒤엉켜있는 머릿속 인상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것, 그것이 글을 작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글이 만일 이런 것이라 할 때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후속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의미란 무엇인가요? 지난 번 대면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때 학생께서 학문함을 지하철 노선에 비유했던 기억이 납니다. 환승역 이야기도 나왔고, 역과 역 사이에 스윽 선을 그어서 ‘나만의 지하철 노선도’를 그리는게 학문하는 과정이라고 했던 것 같군요…. 점이 하나의 개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수많은 점들입니다. 개념 하나에서 다른 개념으로 우리의 사고가 이동할 때 스윽 거쳐 지나가게 되는 수많은 개념들이라는 이야기지요. 미술에서는 선들이 모여 하나의 조형을 이룹니다. 캔버스 위에 그어진 수많은 선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를 보고 “어? 저건 파이프야.”라고 어느새 그 그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말해버리는 식이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볼 때 그 선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에서 슬쩍 벗어난다는 점입니다. 선을 수채 물감으로 그리든, 만년필로 긋든, 데셍 연필로 긋든 선은 다른 선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전체적인 의미를 형성합니다. 만일 화가가 자신이 살던 집의 뒷골목에 굴러다니던 반쯤 타고 남아버린 담배꽁초를 들고 와서 그 재로 선을 그었다고 하더라도 선이 그림의 의미에 기여하는 바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아, 물론 그 사실을 즉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독자가 알게 된다면 의미가 좀 더 색다른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글을 보고 상대가 도대체 이 글을 어떻게 썼는지 우리는 사실상 추측하기 어렵지 않던가요?) … 제가 다시 한 번 또 ‘문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눈치챘나요? 이번에는 미학적인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긴 하군요. 다시 한 번 ‘철학적’ 서술로 돌아가봅시다. 저는 점을 개념에 비유했고, 선은 점들의 연속이니 선은 개념들을 나타내는 각각의 글자들을 적절히 배열해놓은 것, 즉 문장 혹은 그 문장을 보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들의 복합체를 나타낸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글은 문장들이 적절한 배치 관계 하에 떨어진 연속이며, 우리는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들이 쭉 배치되어 있는 관계를 보고 그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입니다. 지금 학생께서 보고 있는 이 글도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이잖아요? 특정 형태가 하나의 음소에 상응하는, 이상야릇하게 배치된 검은 선들. 그림을 해석하는 것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낮은 층위에서 동형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문학 작품을 읽는 경험이 다른 조형 예술과는 달리 독자의 적극적인 사유, 즉 ‘구분짓고 자리를 다시 찾아주는’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작용을 하는 음악은 문학과 결합했을 때야 말로 가장 큰 인지부조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미술, 특히 회화에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변형 · 과장 · 축소 · 왜곡해서 표현하는 기법을 말한다. 게임 · 만화 캐릭터를 실제 사람이 생긴 것과 다르게 아주 귀엽고 단순하게 그리는 기법을 생각해봐도 되고, 아니면 유명한 5분 캐리커쳐를 생각해봐도 된다.
- 2눈치챘겠지만, 이러한 시각은 니체의 예술관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더욱 정확하게는 백승영 교수의 니체 예술론에 대한 해석이 되겠지만 말이다.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의 제6부의 다음과 같은 대목이 조금 참고가 될 것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제시하는 예술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아폴론적-형상적 예술, 디오니소스적 예술, 그리고 아폴론적-디오니소스적 예술. 이 구분은 니체가 예술가 유형을 ‘아폴론적 꿈의 예술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예술가’, ‘도취와 꿈의 예술가’로 구분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이 구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니체의 예술 충동(혹은 예술적 힘) 규명을 토대로 하고 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Das Apollinische)와 디오니소스적인 것(Das Dionysische)을 인간의 두 예술 충동에 대한 심리적 고찰로부터 획득한다. 아폴론적 예술 충동은 형상과 형태를 만들고 제공하는 충동이자 척도를 설정하고 틀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충동이다. 이 충동은 ‘개별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를 사용하여 구분 가능하고 산정 가능하며 인식 가능한 조형 세계를 만들어낸다. “아폴론적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완전한 고립으로, 전형적인 ‘개체’로, 단순화하고 강조하고 강화하고 명료하게 하며 전형적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향하는 갈망.” 이 예술 충동을 니체는 꿈의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꿈의 세계는 형상의 세계이자 가상의 세계다. 꿈꾸는 자는 형상과 형태를 만들어내며 그의 꿈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이해된다. 하지만 꿈꾸는 자에게 꿈은 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래서 꿈꾸는 자는 꿈을 ‘가상’으로서 즐길 수 있다. 꿈의 이런 가상적 성격은 아폴론적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인간 안에서 무매개적으로 솟구치는 예술 충동으로서, 울타리나 제한이나 형태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파괴하여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지향한다.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 통일에의 갈망, 개인이나 일상이나 사회나 실재를 넘어섬, 망각이라는 심연으로서, 더 어둡고 더 충만하며 더 유동적인 상태로 격정적이고도 고통스럽게 고양되는 것으로서…… 창조와 파괴의 필연성에 대한 일체감으로서.” 아폴론적 예술 충동이 꿈의 비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면, 디오니소스적 예술 충동은 도취의 비유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도취는 꿈과 예술적 가상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구별을 없애고, 개별성의 제한을 지양하며,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융해시킨다. 이때 예술가는 자기 이웃과 하나가 되고 화해하고 용해되어 있는 것을 느낄 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 모습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이 두 예술 충동이 대립적이지만 서로를 요청하는 관계에 있으며,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즉 예술 활동은 이 두 충동이 같이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예컨대 음악에서는 디오니소스적 힘이, 조형 예술에서는 아폴론적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할 뿐이다. 이 두 예술 힘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합일의 상태를 니체는 그리스 비극에서 찾는다.」
―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2005. pp. 632-634. - 3이 입장을 내가 이전에 고등학교 후배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음을 붙여두면 이해가 편할 것 같다.
「글을 작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내는 것, 단어와 단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문단과 문단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 뒤엉켜있는 머릿속 인상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것, 그것이 글을 작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했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글이 만일 이런 것이라 할 때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후속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의미란 무엇인가요? 지난 번 대면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때 학생께서 학문함을 지하철 노선에 비유했던 기억이 납니다. 환승역 이야기도 나왔고, 역과 역 사이에 스윽 선을 그어서 ‘나만의 지하철 노선도’를 그리는게 학문하는 과정이라고 했던 것 같군요…. 점이 하나의 개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수많은 점들입니다. 개념 하나에서 다른 개념으로 우리의 사고가 이동할 때 스윽 거쳐 지나가게 되는 수많은 개념들이라는 이야기지요. 미술에서는 선들이 모여 하나의 조형을 이룹니다. 캔버스 위에 그어진 수많은 선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를 보고 “어? 저건 파이프야.”라고 어느새 그 그림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말해버리는 식이지요.
중요한 건 그림을 볼 때 그 선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에서 슬쩍 벗어난다는 점입니다. 선을 수채 물감으로 그리든, 만년필로 긋든, 데셍 연필로 긋든 선은 다른 선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전체적인 의미를 형성합니다. 만일 화가가 자신이 살던 집의 뒷골목에 굴러다니던 반쯤 타고 남아버린 담배꽁초를 들고 와서 그 재로 선을 그었다고 하더라도 선이 그림의 의미에 기여하는 바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아, 물론 그 사실을 즉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를 독자가 알게 된다면 의미가 좀 더 색다른 층위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글을 보고 상대가 도대체 이 글을 어떻게 썼는지 우리는 사실상 추측하기 어렵지 않던가요?) … 제가 다시 한 번 또 ‘문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눈치챘나요? 이번에는 미학적인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것 같긴 하군요. 다시 한 번 ‘철학적’ 서술로 돌아가봅시다. 저는 점을 개념에 비유했고, 선은 점들의 연속이니 선은 개념들을 나타내는 각각의 글자들을 적절히 배열해놓은 것, 즉 문장 혹은 그 문장을 보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들의 복합체를 나타낸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글은 문장들이 적절한 배치 관계 하에 떨어진 연속이며, 우리는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들이 쭉 배치되어 있는 관계를 보고 그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입니다. 지금 학생께서 보고 있는 이 글도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검은 선이잖아요? 특정 형태가 하나의 음소에 상응하는, 이상야릇하게 배치된 검은 선들. 그림을 해석하는 것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낮은 층위에서 동형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