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민음사. 2024. p. 567.
조금 전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두 문장.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두 문장이 어쩌면 최근 나에게 벌어진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 어떤 응어리를 요약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의 마지막 해에 벌어진 수많은 우연들이 그동안 내부에 쌓여온 기억들, 그리고 애절하게 붙들었던 죽은 사람들의 문장들과 기묘하게 결합하면서 뭉쳐버린 이 응어리, 이것은 〈죽음〉과 〈삶〉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아마 지금이 대학에서 (적어도 학부생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해라는 점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 내내 나는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마음 속에 자리한 공허들, 즉 수많은 〈상실〉들을 꺼내서 마주했다. 《노르웨이의 숲》의 첫 번째 독서 노트에서 나는 대략 십오년 전 나의 근본적인 〈고독〉, 즉 쓸쓸하고 우울했던 (따라서 나 자신이 ‘너무 빨리 늙어버린’) 초등학교에서 조용히 울고 있던 나와 고등학교의 끔찍한 구조 그리고 가정사로 인해 격렬하게 괴로워했던 나를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독서 노트에서는 나의 본질적인 저 트라우마들이 즉 〈죽음〉들이 지금 나 자신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내가 지금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무엇을 채우려고 그토록 비틀거리고 있는지도 고백했다.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 위치한 ‘나’, 와타나베처럼 나 또한 죽음의 상징으로 가득한 붉은 〈숲〉과 삶의 상징으로 가득한 푸른 〈초원〉 사이의 〈우물〉에 나 자신이 서 있어왔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확인한 것이다.
나는 대학 입학 당시의 질문, 아니, 어쩌면 그 초등학교 당시부터 나 자신의 한켠에 자리한 저 의문이 여전히 나에게 유효한 질문임을 알고 있다.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바로 그 질문.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반복적인 의문 제기가 가지는 의미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찰하지 못했음을 느낀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변형태와 얽혀서 덩어리를 구성해왔음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죽음〉과 〈삶〉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둘째, “〈삶〉 속에서 나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 두 질문들을 마침내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 속 깊은 저 진흙 수렁에서 꺼내어 봄에 따라, 나는 다시 한 번 수많은 〈죽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생각의 사슬은《노르웨이의 숲》에 사용된 시니피앙과 나 자신의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참으로 비논리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흥미진진한 동일 간주 덕분에 다음과 같이 길게 이어진다. 죽음 – 자살 – 나오코 – 교수(絞首) – OMORI – 정신분석학 – 라캉 – 주이상스(Jouissance) – 프로이트 – 무의식 – 불꽃 – 부조리 – 카뮈 – 이방인 – 다자이 오사무 – 마츠코 …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의 시작점이었던 프리드리히 니체까지.
그래, 니체. 나는 도대체 왜 프리드리히 니체에 그렇게 매달렸던가? 청강으로 〈불교철학의 이해〉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주름’이 많아진 나는1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레이코 씨를 생각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수많은 질문들로 뒤척이는 밤을 보낸 내 미간에도 ‘주름’이 늘어나긴 했다. 레이코 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주름이 ‘아름답다’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주름이 오늘의 나 자신이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대략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것이다. 수많은 의문들, 나 자신의 존재를 시시각각 위협해오며 스스로를 안으로부터 허물어뜨리는 저 우울하고도 격렬한 진동을 견딜, 청춘의 자신에게 닥친 심각한 실존적 위기에서 버틸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상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 외로웠던 것이다. 오래 전의 〈죽음〉들로 인해 영원히 채워질 수 없게 되어버린 저 자리에 무엇이라도 좋으니 가져다가 넣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절실히 갈구했지만, 그 〈죽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나는 죽은 사람들과 그렇게 오랫동안 대화했던 것이다. 즉, 나 또한 우물 속에서, 진흙 수렁 속에서 어떻게든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 일 아니라는 듯 앞으로 나아가지만, 나만큼은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바로 그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자기 자신을 뛰어넘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를 악물고서 하루하루를 뼈를 깎는 기분으로 버텨나가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절해보이는 ‘위버멘쉬(초인)’ 사상이 있었던 니체를 오독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두 번째 사랑의 정체가 니체였다는 사실을 안다. 첫 번째 사랑은 고백했듯 초등학교 1학년 때 끝나버렸고, 나는 스스로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초대했던 그녀의 공간이 비어 있음에 오랫동안 시달렸음을 기억한다. 나는 다른 복잡한 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고 또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그 공허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총 15년의 도피 끝에, 그리고 그 도피 과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을 떠올리는 경험의 누적을 통해 나는 다음의 문장을 깨달았다. 인간은 영원히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렇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내가 처음으로 주목했던 저 문장, 제2장의 문장대로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는 그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소망 위에서 어떻게든 〈삶〉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과 함께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수많은 과거사의 인물들 그리고 서사 속의 등장인물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생각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토리노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운 운명의 날 뒤 10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떠난 프리드리히 니체 – 다시 한 번 살아보려고 도약을 시도하다 십대 몇 명과 이십대 몇 명에게 맞아 죽은 혐오스러운 마츠코 – 다섯 번의 자살 시도 마지막에 결국 세상을 떠난 다자이 오사무 – 어머니가 죽은 날 애인과 섹스와 코미디가 들어간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사고가 아닌 흉악한 살인자로 몰려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이방인 뫼르소 – 수많은 실존적 위기 가운데에서 부조리를 직시하려다가 결국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 –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원래 활동하던 독일을 떠나 영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결국은 후두암으로 떠난 프로이트 – 수많은 죽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원한 상실들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 누나를 실수로 죽인 뒤 나무에 목 매달아 자살로 위장한 OMORI의 써니 – 그리고 마침내, 《노르웨이의 숲》에서 자신의 누나처럼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나오코까지. 나는 이제 이들 모두를 연결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살아있는 나는 결국 이 〈죽음〉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따라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고 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 내가 대학 생활에서, 어쩌면 지난 23년의 삶 전반에 걸쳐 익힌 것들 중 가장 귀중한 삶의 교훈일 것이라 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전환을 상기할 때, 나는 마침내 내가 니체의 오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저 영원회귀와 운명애 사상을 마침내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저 문장,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된 것이며,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죽음〉과 〈상실〉들이, 그리고 그러한 〈숲〉의 경계, 반대편에 〈초원〉이 위치한 이곳에서 내가 서성거렸던 모든 시간들이 오늘의 나, 〈삶〉을 구성하고 있음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장에서 ‘나’와 레이코 씨가 기타 그리고 위스키와 함께 노래한 〈나오코〉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한다. 물론 그 장례식의 쉰번째 곡은 《노르웨이의 숲》이고, 마지막 곡은 바흐의 푸가지만 나는 레이코 씨가 나오코가 죽은 뒤에 마스터한 곡,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을 청하고자 한다. 조용히 울려퍼지는 피아노 선율 위에서 나는 모든 〈죽음〉을 다시 한 번 추억한다. 초등학교의 외로움, 고등학교의 부조리와 고통, 대학의 실존적 위기 그 한가운데 있었던 나들을 다시 한 번 추억한다. 나를 위로해주었던, 내가 본질적인 ‘비어있음’을 채우기 위해 그토록 욕망했던 수많은 죽은 이들 ― 니체, 카뮈, 라캉을 또 한 번 추억한다. 나는 한때 내가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벽의 마지막 턱을 뛰어넘고 땅으로 올라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노르웨이의 숲》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나오코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녀와 나를 잇는 가느다란 실 그리고 ‘나’에게 그녀와 미도리가 왜 대립항을 이룰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한다. 나오코가 죽은 마지막 장에서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어느 순간, 나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이곳은 〈숲〉과 〈초원〉 사이에 자리한 어느 경계, 모든 인간이 떠돌아다니는 경계, 어느 곳도 아닌 장소, 그러니까 〈우물〉이라는 사실을.
주석 및 참고문헌
- 1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레이코 씨를 생각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수많은 질문들로 뒤척이는 밤을 보낸 내 미간에도 ‘주름’이 늘어나긴 했다. 레이코 씨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주름이 ‘아름답다’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주름이 오늘의 나 자신이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