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공동체의 구성 계획
… 최근 들어서 나는 스스로가 지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사람과의 의사소통의 기회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시작은 생각치 않은 곳이었다. 금년 1학기 때에 일종의 소진(Burnout) 증후군이 온 덕분에 만사에 의욕이 당기지 않던 문제를 해결하고자 심리 상담을 받았었는데, 진단 결과가 궁극적으로는 내가 나 자신이 토의와 토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해당 욕구에 대하여 욕구불만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소진 증후군이 발생하였다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서 나 자신의 이러한 사회적, 그리고 동시에 성격 상의 특성에 따른 이러한 지적 동반자를 요구하는 특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나름의 해결책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한 달에 걸쳐 나는 동아리와 같은 각종 방책을 고민해보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어떤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는 분명히 방학 중에 읽었던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이었다. 개인적으로 읽게 된 동기는 현재 사회의 형법에 대한 존재 근거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러한 동기에서 목표한 바 외로, 책의 서문에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이 책을 옮긴 서울대학교 법학교수인 한인섭 교수의 서문 뒤 주석에 따르면, 『범죄와 형벌』은 체사레 베카리아가 혼자서 집필한 것이 아닌, 그가 주로 토론 및 토의를 즐기던 한 학술 서클인 Academy of Fairs에서 공동 논의 및 집필한 뒤 베카리아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교수는 그 주석에서 또한 피에트로 베리와 같은 해당 학술 서클에서의 토론과 논쟁, 그리고 첨언과 자료 제공, 의견 교환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범죄와 형벌』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붙여 놓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문득 『범죄와 형벌』 같이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고전이나 사상들의 탄생 과정에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범죄와 형벌』을 읽기 전에도, 나 자신이 중학교 때에 시청하고 고등학교 때에는 책으로 읽었던 EBS 다큐멘터리 ‘빛의 물리학’의 내용에도, 그리고 오늘날 알려진 대부분의 과학의 발전 과정에도, 그리고 굳이 과학의 발전 과정 뿐만이 아니라 거의 지금의 수준에 이른 모든 종류의 지식들 중 대부분에서 나는 힌트를 얻어, 나는 그 공통적인 요소란 결국 어떤 ‘지적 공동체’가 그러한 고전과 사상들의 탄생 과정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나가고 새로운 문명과 기술, 문화와 정책을 개척한 위대한 업적은 그러한 사상을 창조한 이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고 자유로이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갖춘 어떤 지적인 공동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쟁취될 수 있었고, 또한 그러한 지적 공동체의 존재 때문에 바로 그러한 사상들이 다양한 의견과 경험, 반론들을 토대로 다듬어지며 보다 정교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더욱이 이러한 자유로운 지적 공동체를 내가 창조해보는 것이 더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직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나는 이제 그러한 지적 공동체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적 공동체를 창조한다고 한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 것인가? 우선 나의 지적 공동체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명쾌히 서술하여야 하는 것이 첫째일 것이고, 둘째로는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를 기술해야 할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다행스럽게도 명확하다. 즉, 나의 지적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것이란 ‘자유로운 논의’임이 아주 명백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에 의하면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혹은 책이나 문헌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한 모든 것들 말이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사상 또는 가치관이란 대개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서 창조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한 국가에서 문화적 및 과학적 황금기는 그 국가의 통치자가 자유로운 연구, 교역, 예술 활동을 지원하였을 때에 발생하였다. 오히려 과학이나 문화적으로 발전이 더뎠던 경우는 어떤 정권이나 권력이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하고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들이었다.
그러나 둘째는 숙고의 여지가 있다. ‘지적 공동체’라는 말이란 어떤 학문적 성격, 그러니까 어떤 주제에 대한 논의 혹은 의견 교류를 진행한다는 매우 두리뭉실한 활동 방향성만을 제시할 뿐이지, 정확히 나의 공동체가 어떤 활동을 진행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을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지난 몇 주 동안 생각해보았는데, 그것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글을 주고 받는다. 글을 주고 받는 것은 예전부터 학문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 오던 의견 교류의 한 방식이었다. 뉴턴과 로버트 훅이 편지로 맞붙은 사건과 같이, 편지를 통한 의견의 충돌과 다양한 토론이 이어진 것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이제는 그 방향을 바꾸어 이메일과 논문을 통한 의견의 교류가 오늘날 학계에서 일반적인 풍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글을 통해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은 분명 상호 간의 사상의 증진 및 발전에도 중대한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예전부터 학문의 영역에서 행해져온 검증된 의견 교환의 방식을 연습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고, 동시에 최근 들어 강력히 요구되고 있는 글쓰기 능력까지 함께 함양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글은 대체로 논설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도 좋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종의 비유법과 인용을 동원해도 될 것이리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내가 이 블로그에 종종 올리곤 하는 그 글들을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에 대한 답글을 받은 뒤 나 자신이 그것에 대한 답글을 보내는 형태, 즉 예전부터 해 오던 바로 그 방식을 행한다면 분명히 나 자신의 지적 욕구가 충족됨은 물론이고 나와 공동체의 구성원, 나아가 학문에 대하여 큰 발전이 있을 여지는 충분해 보인다. 게다가, 이러한 글들에서 공통 견해가 있다면 이들을 묶던가, 아니면 그 모든 주고 받은 글들을 종합하여 공동체의 이름으로 발표하거나 투고해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분명히 존재한다.
둘째. 같은 책을 읽고 독서 세미나를 한다. 오늘날은 사실 사람들이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뀌고 있기는 하다. 예전에는 물론 문자의 형태로 제공된 도서를 통하여 사람들이 지식을 전달하고 받아들였지만, 요즘에는 멀티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음성과 영상, 그리고 나아가 가상 현실이나 증강 현실과 같은 직접적 시청각적 체험을 통하여 사람들은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책, 즉 글을 읽고 다른 사람과 그에 대하여 견해를 교환하는 것은 그러한 멀티미디어 컨텐츠에서 얻을 수 있는 그것 이상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경우는 보여지는 것, 즉 정보를 받는 자에게 제시되는 정보가 아주 직관적으로 제시되어, 해석의 과정을 크게 복잡하게 거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경우는 도서에 비하여 그 제작 비용이 압도적으로 높다. 오늘날 상업화된 도서와 멀티미디어 시장을 생각해보면, 제작 비용이 더 높은 멀티미디어 시장은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대체로 어떤 중요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더 많은 소비자, 즉 대중의 관심을 이끄는 데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내용이나 조직에서의 질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도서가 훨씬 중요한 가치와 정보들, 나아가 사상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것 외에도, 대부분의 고전들, 즉 시대를 통과하며 검증받고 살아남은 사상들의 집합체는 도서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고전을 읽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다지 상업적이지도 않은 이러한 고전을 굳이 멀티미디어 컨텐츠로 제작한다는 것은, 상당한 금전적 손실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고전은 오로지 도서의 형태로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므로, 역사를 아울러 다양한 사상을 접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도서를 선택하여 이에 대하여 공통적인 견해를 교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도서 이외에도 문학 작품, 즉 어떤 극이나 영화 등을 함께 시청하는 방식도 고려해볼 수 있다. 하지만 도서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같은 책을 읽고 주석을 함께 완성한다. 즉 공동체 전체가 한 도서에 대한 주석서를 집필하는 시도를 해 보자는 것이다. 주석서는 한 개인 혹은 집단이 한 서적에 대한 견해를 집대성한 것이다. 그런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 도서에 대한 주석을 단다는 것은, 특히 그 도서가 고전이라면 그 도서에서 기술된 사상과 오늘날의 사람들의 경험을 보편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석을 함께 달고, 상반되는 해석에 대하여서 토론하면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도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이렇게 완성된 주석서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공유한다면, 그러한 공동체의 논의의 결과로 도출된 하나의 지적 산물의 배포라는 성취도 기대해볼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이 크게 3가지의 활동을 생각해보고 있는데, 여기에 조금 더 부가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달아두고도 싶다.
첫째 부언. 우선 첫 번째 활동으로 제시된 글로 견해를 주고 받는 것은 완전히 완결된 형태의 글, 즉 예전의 편지 형태로 주고받아진 정형적 형태의 글을 제출할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다만 어떤 주제에 대하여 (주제는 자유로울 것이다. 지적 공동체에서 애초에 어떤 주제의 방향성을 제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어떤 문제이든지 자유롭게 제시하고 토의할 수 있어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될 것이다) 첫 번째로 문제를 제기, 즉 토의의 장을 발제하는 경우는 완결된 하나의 글을 요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완결되지 않은 글의 경우는 생각의 토막을 제시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을 발제자가 토의의 참여자들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 번째 글에 대한 논의는 그에 대한 완결된 답글로 제시되어도 되고, 그 글을 논평하는 일반적 ‘덧글’의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 부언. 첫째 부언에서 논의한 바 때문에, 그러한 글들의 교환과 ‘덧글’들을 기록해둘 공간의 필요성이 제시된다. 나는 이러한 점을 오늘날 온라인 SNS 플랫폼을 이용하여 해결해볼까를 생각해보았으나 이윽고 포기했다. 오늘날 SNS 플랫폼은 멀티미디어 컨텐츠의 공유에 최적화되어 있지, 글을 공유하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SNS 플랫폼은 이미 너무 많은 어그로성 글들과 덧글 문화가 자리잡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새로운 플랫폼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Flarum이라는 Open Source 토의 및 토론 플랫폼을 찾아두었는데, 일종의 Thread에서 시간 순대로 논의를 이어나가는 기능을 이 플랫폼이 지원하므로, 아마 나의 지적 공동체만을 위한 별도의 플랫폼을 이 Flarum을 이용하여 구축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부언을 살펴보았으면 마지막 문제인 어떻게 이 공동체를 운영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대답하기 난해하다.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된 『범죄와 형벌』, 그리고 내가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 상에서 목격하는 바가 꽤 오랜 기간의 검토와 숙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지적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을 영입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잘 굴러간다면) 그렇다면 다양한 가치관과 과거 경험, 성장 배경을 가진 제각각의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규정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대부분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이나 각종 규정을 준비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규정이 너무 복잡하면 안 되며 동시에 각 개인의 이상 행위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벌칙을 포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와 형벌』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방책인 형법에 대한 사상적 논의를 담고 있는데,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형벌은 범죄, 즉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손해 인자로 작용하여, 그러한 질서 파괴 행위로부터 개인이 얻는 심리적 이익의 상반 요인으로서 그러한 범죄 행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이 자신의 행위가 어떤 벌칙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사전에 아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너무 복잡한 규정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린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면, 그러한 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행위에 대한 억제로서의 벌칙 규정이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규정만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규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나는 나무위키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의 규정을 참조해보고 있지만 죄다 복잡한 것들 뿐이어서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답을 찾아내어야만 한다. 만약 내가 이 공동체를 폐쇄적으로 운영한다면, 즉 내가 아는 지인들만을 제한적으로 초대해서 잠시 동안 운영할 것이라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결국 확장을 원하는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한 숙고는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특정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위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사람들이 덧글로 의견을 교환할 때 상호 간의 예의를 갖추지 않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과 각종 혐오의 표현, 편견이 섞인 표현을 사용하여 상대를 비방하고 서로 물어뜯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어그로를 끌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러한 인터넷 상의 행위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먼저 탐구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떠한 사람의 마음의 기작이 이러한 인터넷에서의 사람들의 ‘이상한’ 행위들을 유발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이를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규정을 구성할 수 있을 리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 누군가는 ‘망상’ 혹은 ‘이상한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의 현황은 바로 이러하다. 하지만 나는 고집이 더럽게 센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을 존중하므로, 지금 나 자신이 상상하는 이 지적 공동체를 꼭 구성해야만 할 것 같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중대한 실험이 될 것이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이 기다리던지 간에, 시도를 처음부터 포기하기보다는 나의 지적인 호기심과 직관이 가리키는 바를 따라 도전해보는 것이 마땅히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임은 더없이 자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