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속의 학문
대학에서 나는 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일 내가 확실히 죽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
지금까지의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내가 내일 죽을지 아닐지는 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 지금의 이 순간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바로 그 직감, 〈알고 싶다〉고 외치는 합리에의 향수 바로 이것들이다. 식인(食人)의 욕구, 식세(食世)의 욕구라 불릴 수 있을 바로 그 강력한 욕구들이다.
내일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눈을 감은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내가 사유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으며 느낄 수 있는 순간이란 오직 현재 뿐이다.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시간은 지금이다. 나는 현재 속에서 살고, 현재 속에서 바라보며, 현재 속에서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정의내리고 이해하려 한다.
내일이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오로지 나는 ‘호기심’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이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 오래 전부터 지극히 〈독일적인〉 철학과 관념들은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을 경멸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했지만, 그들은 틀렸다. 욕구에 따르는 인간이 〈방탕한〉 인간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다. 욕구에 따르는 것이 그에게 〈건강하지 않은〉 것은 될 수도 있겠지만, 〈죄가 되는〉 것은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니 〈독일적인〉 철학을 거부하면서, 나는 〈건강한〉 방식으로서의 욕구에 따르고자 한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바로 그 강력한 무지와 무능으로부터의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합리를 향한 나의 강력한 그 의지, 바로 그것 속에 나의 자유와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