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Two Worlds

2026-08-31 0 By 커피사유

심경이 복잡하다. 탓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탓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가 무엇에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 무엇을 격렬하게 거부헀는지를 되짚어본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반쯤 강요되었던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긴 했지만, 나는 문제는 그 밑에 차곡차곡 쌓여 농후하고 되기막하게 되어버린 인식의 괴리 내지는 좌절된 이해일 것임을 안다.

나에게 허락된 한 해의 휴지기가 얼마나 많은 것 위에 서 있는지, 얼마나 운이 좋은 경우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나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의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광경들을 상상해본다.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근로장학금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는 학생들, 경제적인 사정으로 자신의 꿈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좌절되는 수많은 이카루스들을, 아예 꿈을 가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이름모를 누군가들을.

나는 지난 반 년 동안 목격한 만만치 않은 취업 시장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기억해본다. 경력직을 선호하는 기업들 덕분에 그 어떤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초년생들, 그럭저럭 자부심을 가지고 도전해보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문턱 때문에 결국 자괴감을 감수하고서라도 눈을 낮추고 애써 자기위안으로 침잠해야 했을 수많은 내 또래들과 몇 살 많은 청년들을, 아예 선택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당장의 생존이 급한 누군가들을.

나는 기억과 상상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저주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내가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내가 영위한 일상이, 나의 지난 몇 달이 어떤 기반과 사회적 모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또는 운이 좋아서 가능한 것인지를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어느날 밤에 문득 떠오른 인식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리라.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누군가의 삶과 사회적 구조들에 대해 깔끔하게 재단하고, 판별하고, 분류한 다음 소비하는 프로크루스테스적인 행위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수 있었으리라.

어머니께서는 종종 내가 스스로가 너무 많은 것을 신경쓰고 있다고, 쓸데없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걱정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살아남는 것도 불확실한 마당에 다른 누군가의 삶과 고통에 신경쓰는 일이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종종 나 역시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조야하기 짝이 없는 틀에 누군가를 끼워맞추고는 은밀한 도덕적 자기효능감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위선인지 위선이 아닌지와의 판단과는 무관하게, 나로서는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내가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사슬의 이 발판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저기서 누군가가 아프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물음은 물론이거니와 미래에 대한 안정적인 구조도 담보하지 못하는 나는 침묵을 지키거나 최소한 그 광경을 방관하고 있다. 나는 죽어가는 누군가를 구조할 수 없는 무력한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주먹을 꽉 쥐고서 부들거리다가 결국 머리를 감싸쥐고 무너지는 그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나의 경제적 계급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일종의 저주로 간주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 그들이 진술하는 바를 그저 언어적으로 재해석하고 상상하는 것만이 가능하지 나의 경험에 온전히 비추어 그들이 느꼈을 감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저 짐작. 치열하게 싸우며 타들어가고 있을 이들, 그들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어떤 감각과 생각을 가지는지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짐작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찾겠다며 방황하고 있는 스스로를 볼 때면,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한가해도 되는 것인지, 이렇게까지 편한 것이 정말로 떳떳한 일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심경이 복잡하다. 탓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탓하게 된다.

조금만 더 듣는다면, 조금만 더 이해하려 한다면.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올라서 있는 이 구조적 비극과 그 속의 이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텐데. 나 자신조차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때때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기에 그렇게나 떳떳한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의 이 착잡한 심정도 일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기억하고 있고, 내가 겪지 않은 수많은 삶과 그 속의 고통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나이가 들면 내가 다음 세대에게 어머니와 똑같이 말하게 될까봐 두렵다. 더 깊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서 간편하게 생각하는 것에 안주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것이 어머니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내가 이미 몸담고 있는 사회의 구조의 책임임을 짐작하기 때문에 그것에 내가 물들 것만 같아 더욱이 두렵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고 썼다. 나는 지금껏 내가 기울여온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식하지도 못했을 껍질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껍질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필요한지 알기에 나는 추락한다. 나는 애탄이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알에서 나오려 투쟁하는 새를 여전히 기억하려 몸부림치면서…….


Mili – Between Two Worlds (Let’s Lament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