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quisse de Sisyphe
새 공책을 펼쳤다. 제일 앞 표지에는 〈L’Esquisse de Sisyphe〉라고 적었다. Esquisse 란 미술 용어로, 프랑스어에서 그림의 밑그림 내지는 스케치를 일컫는다. 그러니 이 공책에는 그 시작부터 ‘시지프의 스케치’라는 이름이 붙은 셈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다분히 의도하고 붙인 이름이다. 올해 봄에 묘사하였듯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텅 빈 하얀 캔버스 앞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저 모습, 그 캔버스 앞에서 ① 스스로의 목을 졸라오는 공허함을 느끼면서도 ② 그 캔버스의 광활함과 무궁무진함에 압도되어 그 위에 펼쳐질 질료들과 색감들을 의욕하는 인간의 이 두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화 · 조각 · 음악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무기는 언제나 단어와 문장들이며, 이들을 조합하여 구성된 문단들로 나는 어제의 자신에 대해, 또는 오늘의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항거한다.
언제나 펜이 날카로운 것은 아니다. 무언가의 속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단면을 깔끔하게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잘 벼려진 칼이 필요하다. 따라서 서늘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대상을 따져보고 그것에 대해 나만의 작위를 수여하며 ‘좋다(gut)’와 ‘나쁘다(schlecht)’의 질을 부여하는 정신을 부지런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2025년의 나는 도피를 택했다. 스스로가 처한 사회적 환경을 견디지 못했고, 자신이 명했던 기준에 미달한 스스로에게 경멸을 보냈으며, 그 경멸은 지독한 자기파괴가 되어 정신에 마비독을 뿌렸다. 사고하는 것 자체가 존재를 갈갈이 찢는 듯한 격통이 되었고,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동물인 나는 일종의 철학적 자살, 그러나 카뮈가 말한 종류와는 달리 ‘사고의 중단’이라는 더 위험한 종류의 철학적 자살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사회적 불만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역사를 나는 지나치게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동류 문화에 속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하는 욕구를 언제나 거의 대부분 죽은 이들이 남긴 종이 위의 활자를 통해 대신 채울 수 있기를 갈구했고, 부가적으로 그 과정에서의 소위 ‘어른들’의 인정으로 연명해왔다. 이 모든 나의 역사는 스스로에게 쫓겨 도망친 기나긴 일대기이자, 굴러떨어지는 바위에 당황해서 바위를 밀어올리는 일 자체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느낀 시지프스의 재현이다.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느낄 수 있는 첫 번째의 것, 즉 ‘스스로의 뿌리마저 뒤흔드는 공허함’ 위에 서 있는 기록들이다.
그러나 다시 적어두건대 나의 도덕이 지향하는 바는 회피가 아닌 직시이다. 지난 해 봄에 얻은 위대한 전환, 즉 캔버스 앞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두 번째의 것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이다. 같은 현상에서 출발한 두 개의 상반된 철학. 하나는 부정과 도피로 이어지지만 다른 하나는 긍정과 직시로 이어진다. 삶의 추악한 모습 마저도 모조리 긍정함을 통해 만약 내가 이전보다 더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획득할 수 있다면, 이 정신적 전환의 과정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적 자살은 중단되어야 하며, 카뮈가 올바른 길이라 믿었던 그 ‘부조리 속에서 서 있음’, 즉 ‘반항하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러하므로 새 공책에 붙은 저 이름, 〈L’Esquisse de Sisyphe〉 내지는 ‘시지프의 스케치’는 재활의 출발지요, 다시 한 번 바위를 밀어올리는 저 위대한 여정에 대해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찬사다. 이 찬사는 스스로의 운명이 전설 속의 시지프와 같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그리고 그 모습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표상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인간이 보내는 찬사다. 공책에 적히게 되는 것들은 끓어오르는 문장들이 될 것이다. 침묵하는 세계에도 불구하고 그 침묵을 고집스럽게 상대하면서 여전히 응답을 요구하는 끈질긴 대결. 길지 않더라도, 흐름이 중간에 조금씩 끊어지더라도 마주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공책은 펼쳐지고 펜은 움직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위한 저항의 기록. 사유(思惟)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될 여기에서 단상들은 긴 글로써 생명력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에게 새긴 가장 날카로운 고백이 되어 ‘살아있는 정신’을 위해 서슬 푸른 단언들을 뿜어낼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마련된 토양 위에 튼튼하고도 바람과 볕이 잘 드는 집 한 채, 날조된 희망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눈동자 깊게 새길 수 있는 마루가 있는 그런 집 한 채를 짓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