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 Sols · 도가(道家) · 니체
오래 전 나는 동양 철학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내 눈에는 삶은 껍데기에 불과하므로 죽음과 삶이 일체(一體)라고 논하는 불교는 니체가 말하는 데카당으로 보여서 즉각적인 거부감이 들었고, ‘길이 길인데 길이 아니라는’ 자기모순적 문장을 학파의 대표 문장으로 삼고 있는 도가 사상의 경우 애시당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대략 일주일 전 즈음에 모종의 계기로 접한 게임이 내 생각을 바꾸어놓은 것 같다. 시간 때우기용 게임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직접 해 본 것은 아니고(애초에 가격이 너무 비싸기도 했다), GCL(지씨엘) 리뷰를 통해 그 서사의 흐름을 살펴본 것이었다. 《나인 솔즈(Nine Sols)》라는 게임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장르가 이른바 ‘정신병자들을 위한 장르’라는 변태같은 수집요소 숨기기와 딱딱 박자에 맞게 키보드를 연타해야 하는 빡빡함으로 유명한 메트로베니아 장르이기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 철학에 심취해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절망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한 나로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많은 게이머들은 연출의 탁월성이라던가 조작감, 특유의 게임성에 주목하곤 하지만 게임을 예술 작품으로 여기는 나의 시각 하에서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과연 이 작품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통상 서사에서 메시지를 표현하는데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단은 서로 다른 두 가치관을 가진 인물의 대립인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게임을 할 때에는 선역이 누구이고 악역이 누구인지를 따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게임에서도 그런 시각이 적용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확연한 선역과 악역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통상 악에 완전히 잠식된 세계에서 선에 해당하는 주인공이 세계를 구원한다느니 아니면 악의 위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협력하느니 하는 전형적인 서사로 가득찬 근 · 현대 게임의 세계에서 종종 클리셰를 깨는 게임들이 인디 시장 등을 통해 시장에 진출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크게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게임들이 클리셰를 비틀기 위하여 사실은 ‘주인공이 악역이었다’라던가 ‘상대도 좋은 사람이었다’던가와 같은 인물적 설정을 추가로 도입하는데 주목하는데 반하여, 이 게임은 게임의 연출 전체가 선과 악이 혼합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들의 설정과 관련해서는 주인공인 ‘예(例)’가 마치 원인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처럼 행위하지만 애시당초 원인들을 죽여가면서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고자 한 신선로 계획을 입안한 것이 주인공이었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의 스승인 ‘역공(易公)’이 질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구왕들을 모은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그 질병을 창조한 인물이었다는 점 등을 지적하는 측면에서 그치기로 하고, 여기서는 연출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박애의 구왕인 부접(蚨蝶)과 예가 대면할 때 부접이 처한 세계를 묘사한 점이었는데, 몇몇 리뷰어들은 이 장면이 메트로베니아 게임에 공포 게임을 접목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치는 모양이지만 아무런 걱정 없이 신선들이 살 것만 같은 무릉도원에서 갑자기 죽음에 대한 암시 그리고 기괴함으로 가득찬 세계로 전이하는 연출은 내리막길 앞에서 도피할 것인가 아니면 직시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인 철학적 대립을 다시 한 번 제시한다는 점에서 몹시 중요하다. 이전에 니체 철학에 심취해있던 나는 이 문제를 ‘죽음 앞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니체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요약한 바가 있는데, 가장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이 게임은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니체적 태도를 취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게임이 전반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메시지, 즉 ‘극복의 철학’을 전파하고 있는가하면 그렇지도 않다.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는 마치 주요한 대립이 아닌 것처럼 ‘예’의 과거와 관련하여 간간히 스쳐지나가는 예의 동생 ‘항아(恆)’와 예의 대립이다. 게이머들은 이 대립이 예의 서사에 대한 배경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제시된 단순한 장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대립이야말로 이 게임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아는 작중 생명을 재생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는 고목과 연결되어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며, 천화라는 질병이 유행할 때 치료법을 찾기 위해 행성을 떠나려고 한 예와는 달리 고향에 남는 것을 선택한 인물이기도 하다. 행성의 질서로 자리잡은 도가의 가르침을 따른 항아는 ‘생과 사가 결국 하나이고, 결국 우리는 우리가 별에서 온 것처럼 다시 별로 돌아갈 것’이라며 아예 종족의 보존을 위협하는 질병의 유행 가운데에서도 남는 것을 선택하면서, 도가의 가르침은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고 기술과 과학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예와의 대척점을 구성한다. 항아와 예의 대립은 어떤 측면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도가 사상과 니체 즉 내가 막연히 여겨왔고 또한 너무 자포자기라고 여긴 동양 철학과 지금까지 내가 속해왔던 과학과 서양 철학의 정면 충돌로 보였다.
문제는 과학과 서양 철학의 상징인 예를 옹호하기에는 예의 발자취가 그리 찬동할만한 것이 못 된다는 점에 있었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사태였지만 한 행성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생물적 근본을 조작하고 가축을 사육하듯 손쉽게 죽여가면서 그 몸과 뇌를 에너지원이나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발상을 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즉각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항아가 선택한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용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독하게도 거부해온 다자이 오사무적 태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생존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와 (혹은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면) 의지가 죽음이라는 절망을 마주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게임이 제공하는 대답은 역설적이게도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으로 보였다. 결국 항아가 선택한 길이든 예가 선택한 길이든 둘 다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고 일갈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 대답이 다자이 오사무든 니체든 모두 생과 사라는 동일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또한 가장 결정적인 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을 뿐이며 어느 길이 옳다는 이분법적인 틀을 깨고 둘 다 인정하는 새로운 선택지도 있음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자이 오사무와 불교 그리고 도가 사상 일체를 전적으로 ‘하강은 물론이고 상승 국면에서도 하강을 기도하거나 택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타협과 이해의 여지 없이 거부하려고 했던 나의 고집이 꺾이는 것은 당연한 결말이었다. 지금 나는 도대체 선과 악은 애초에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 도가 사상과 다자이 오사무가 심취했던 불교, 즉 동양 철학 일체에서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어떻게 규정했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호기심이 피어오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이 구분될 수 없다는 사상이 니체가 주장한 주지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것인지에서부터 ‘놓는다는 것’이 ‘포기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고집과 편견의 벽이 무너짐에 따라 밀려들어오는 물음표의 파도 위에서 나는 알고자 하는 욕구가 바닥부터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다.
비록 나의 착각으로 판명될지라도, 내가 이 게임을 잘못 평가했거나 바라보았다고 하더라도 고집을 꺾은 서사를 제공해준 이 작품은 나에게 나름대로의 가치를 획득한 것만 같다. 남은 것은 이제 이 게임이 던져준 질문들과 때려부순 벽 뒤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구석구석 확인하며 나아갈 일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