Übermensch und die Welt

2025-11-10 0 By 커피사유

지난 목요일의 일이었지만 조금씩 미루다가 결국 오늘에서야 쓴다.

11월 6일, 이화여대에서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학기 중에, 그것도 주중에 열리는데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이런 종류의 공개 강좌는 참기 어려웠다. 칸트 철학을 전공한 미학과의 〈음악론입문〉 강좌 교수에게 정보를 들었을 때 오래 지나지 않아 결정할 수 있었음은 당연했다. 공개 강좌의 주제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었고, 그 연사는 페미니즘과 진보 철학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The New Humanities, between Critique and Affirmation in the Era of Great Transformation”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 강좌에서 내가 얻은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① ‘인간(Men or Human)’이라는 용어의 배제적 역사에 대한 인지, ② 니체 이후의 생성 철학의 계보가 오늘날 사회에 여실히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 ③ ‘관계맺음으로써 존재하기’에 대한 인식이 실제 현대 철학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직감. 이 세 가지를 얻은 것만으로 이번 도박은 성공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왕복한 2시간과 현장에 앉아 들은 2시간의 시간이 아깝지 않았으니까.


① ‘인간(Men or Human)’ 용어의 배제적 역사에 대한 인지부터 이야기해보자. 브라이도티 교수는 기술과 사회적 변동기 속에서 도전을 마주하고 있는 인문학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했다. “전통적으로 인문학에서 전제된 저 ‘인간’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 여기서의 인간은 ‘종으로서의 인간(Anthropos)’인가, 아니면 평등과 동등함이 전제된 저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Homo Universalis)’인가, 이 질문 위에서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출발한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어떤 백만장자들이 ‘우리가 화성에 가면 모든 사람 들이 기술적 진보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거에요!’라고 이야기할 때의 사람 은 벌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이나 그 기술 개발로 인한 환경 오염에 시달려야 할 제3세계 사람들을 암묵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서양학의 저 인문학적 계보에서 ‘인간’은 동등성이 언제나 전제되어 왔음을 비판한다. 18세기 올림픽 초기 헌장에서 사용되는 human 이라는 단어가 초창기에는 백인 위주의 남성을 가리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인문학에서 인간의 지평은 그 학문의 주류였던 유럽 민족들에게, 주로 학자 계급을 차지했던 남성들의 경험에 지나치게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이 문제 의식에서 출발해, ‘더 넓은 외연의 인문학(humanism)’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사조라고 그녀는 말한다. 기존의 ‘인간’에 대한 인식에서 문제점과 한계점들을 발견하고, ‘인간’의 외연을 더욱 넓혀가며 매 순간 새롭게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 그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인 셈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지향하는 방향이 확장적이기에 그 철학적 배경은 니체 이후의 생성 철학의 계보가 되었음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주로 질 들뢰즈를 통해 지난 수 년 동안 내가 니체를 읽으면서 추론한 것 중 하나는, 그가 ‘급진적인 귀족주의정’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생각했다는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힘에의 의지’와 ‘위버멘쉬’의 개념은 전적으로 다원주의(Heterogenerity)적인 철학이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페미니즘,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등 당대의 철학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무엇보다도 이들 담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계보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뿌리에 있을 법한 니체에 천착하면서 이 추측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쪽으로 오랫동안 사유를 이어온 학자가 ② 니체 이후의 생성 철학의 계보가 오늘날 사회에 여실히 적용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전통 철학에서의 ‘피안’, 붓다가 허상이라고 비판한 저 ‘고정점’ 혹은 ‘영원’, ‘보편’이 철학적으로 소외되어 역으로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했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추론한 나 자신의 현명함이 증명되었으니까.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가 대학에서 나의 철학적 여정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었다는 씨앗은 프리드리히 니체 뿐만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그 어떠한 강의와도 맞바꿀 수 없는,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가장 크게 배웠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존재’에 대한 인식 전환이었는데, 이 역시 포스트휴머니즘의 뿌리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있음의 방식’에 대한 나의 고찰은 이전의 어느 글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된 바 있었음을 고려해보자: “단어가 지시하곤 하는 현실의 사물들이, 구체적인 실재자들이 추상화되어 탄생하는 개념들이 으레 그러하듯 어떤 것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존재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존재는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있음을 세계에 보이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그리고 우리의 상식에서는 보통 우리는 ‘아(我)’는 ‘아(我)’이고 ‘타(他)’는 ‘타(他)’일 뿐이다는 이분법적 시각 위에서 그 ‘경계’ 긋기에 주목한다. 니체의 용어를 빌리자면 아폴론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러한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학에서 내가 철학과 문학을 통해 배운 것이란 이 시각이 경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온전히 주목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방식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나’는 나 자신이 된다는 점에 공평하게 주목해줄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의할 때 있어 우리는 타인과 나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내가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좋아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는지’의 여부를 생각한다는 점에 말이다. 그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의 고통 때문에 경시되기 쉬운 이 사실에 다시 한 번 주목하는 것의 필요성을 나는 먼저 이 세계를 살다 간 사람들이 남긴 책 덕분에 깨달았는데, 이는 비단 포스트휴머니즘의 계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셈이다. 즉, 포스트휴머니즘의 담론으로부터 나는 ③ ‘관계맺음으로서 존재하기’에 대한 인식이 근 · 현대 철학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술한 것처럼 도합 5시간의 외출 여정에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를 확인했다: ① ‘인간(Men or Human)’이라는 용어의 배제적 역사, ② 니체 이후의 생성 철학의 계보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 ③ ‘관계맺음으로써 존재하기’에 대한 인식의 적용에 대한 중요성. 이 세 가지의 결합 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니체의 말을 상기해본다. 일차적으로는 두 개의 졸업 논문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오는 28일까지 마감해야 하는 나 자신을 다잡기 위해 SNS 프로필 메시지로 선정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해석을 획득한 저 문장을.

나의 형제여, 그대의 눈물과 함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 창조하려고 파멸하는 자를 사랑한다.
Mit meinen Thränen gehe in deine Vereinsamung, mein Bruder. Ich liebe Den, der über sich selber hinaus schaffen will und so zu Grunde geht.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