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화수월 #4. 《OMORI》, 제3주차 ‘이틀 전’ 모임 질문지
경화수월(頃話輸越)은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게임 · 뮤지컬 등 종합 예술 작품이나 심도 깊은 텍스트들을 체험한 뒤, 잠시의 말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의 것’들을 실어 나르는 장으로써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지난 글 말미에 나는 《괴델, 에셔, 바흐》의 제20장 귀퉁이에 적어둔 다음과 같은 문장을 공개한 바 있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의 바로 밑에 적어둔, 단 하나의 단어만을 바꾸었을 뿐인 다음의 또 하나의 문장만큼은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다.
인간은 영원히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단절이 그를 인간으로 만든다.
호프스태터는 분명히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는 기호들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영역,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다.1… (전략) … 그러나 이 로봇 프로그램이 자신의 과정을 완전히 속속들이 추적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일종의 직관적인 감각은 있다. 이처럼 자기-지식과 자기-무지 사이의 균형으로부터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 이미지에 포함된 어떤 관념들을 전해주려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작가는 그 이미지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에는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실험해보고는 최종적으로 어떤 설명 방법을 정한다. … (후략) …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 986. 지난 글에서 나는 이 참신한 학자만이 아닌 여러 정신분석학자들이 일찍이 인간의 이러한 불가해성, 스스로의 내부에 존재하는 특유한 심연에 주목해왔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비단 ‘무의식’이라 불리는 이 수수께끼적 존재 자체만은 아니다. 조금만 물러서서 되짚어보면 언제나 인간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그것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꼈고 그리하여 시지프스가 그러했듯이 다시 한 번 바위가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그 바위를 처음부터 밀어올릴 운명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바로 이 영원회귀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수수께끼가 아닐까 싶다.
《OMORI》의 플레이를 마친 지난 해 여름 이후 반년 동안 내가 빠져든 생각도 이러한 운명적 역사의 연장선 상에 있다. 나는 분명히 게임에서 제시되는 수많은 시니피앙들이 그들끼리 엮고 엮인 덕에 어느 하나가 기폭되었을 때 연결된 구조를 따라 연쇄적으로 폭발하여 마음 속 깊은 어느 한 곳에서 강력한 울림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최초의 폭발을 발생시킨 ‘무언가’의 정체만큼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프로이트와 라캉 개론을 정독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OMORI》에서 묘사된 여러 층위에서의 문이 나의 정신 세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자신의 자리에 장엄하게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 나는 지금까지의 나 자신이 저 문 반대편에 위치한 기억들과 감정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는 희미한 느낌을 포착했고, 동시에 《OMORI》가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묻고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질문은 검은색 그림자를 드리웠고,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움(玄)이 눈동자에 가득 담기는 순간에 전율하면서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다.
… 그랬다. 처음에 던졌던 바로 저 질문, “문을 열 것인가?”라는 바로 그 질문.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어 존재마저 잊어버렸던 저 문을 다시 눈 앞에 세우게 되었던 것이며, 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열어보는 것을 망설이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이 괜찮을지” 되뇌이는 것을 되풀이하더라도, 매 순간 내가 깨닫게 되는 잔인한 진실이란 문은 저 자리에 있다는 것,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가정, 뒤섞인 수많은 이미지를 품고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 앞에서 여전히 망설이던 스스로를 기억한다. 들어간다면 빠져나올 방법을 몰라 한참 헤맬 수도 있고, 니체가 그러했듯 경우에 따라서는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위에서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나 내 운명은 아무래도 가장 불가해한 것일수록 그에 이끌리는 인간의 저 잔인한 운명,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본질 위에 서 있는 모양이었고, 결국 나는 닿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탐하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욕망을 따랐다.
… 하얀 문의 놋쇠 손잡이 위에 희미하게 떨리는 작은 손 하나가 놓인다. 손은 스스로가 움츠러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지만, 그를 움직이고 있는 저 불꽃만큼은 여전히 응시하고 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철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절되었던 두 공간 사이를 잇는 통로가 열린다. 빛이 도달하지 않기에 하얀 문짝이 있던 위치에는 이제 검고 깊은 심연만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그 심연 앞에서 누군가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손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불꽃을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시간 뒤에 검은 공간은 다시 한 번 하얀색으로 조용히 뒤덮인다. 철그덕거리는 소리가 지나간 뒤에도 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움츠러들었던 손과 발걸음이 조심스레 나아가는 소리만이 간혹 들릴 뿐이다.

Stand-by Playlist
제3주차 ‘이틀 전’ – ‘사흘 전’ 질문지

1.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질문들
제3주차 모임에서는 아래의 질문들 외에도, 사전에 각 구성원에게 할당된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의 쪽들에 대한 A4 ½장 이상, 1장 이하의 요약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하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간략히 답변하셔도 무방합니다.
부문 I.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 관련
- 자신이 요약한 부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혹은 문장을 고르시오. 왜 그 대목 또는 문장이 가장 인상이 깊었는가? 관련해서 연상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이나, 목격한 현실 · 구체적 사물이 있는가?
- 라캉은 ‘욕망하는 주체’의 형성을 ‘상실’ 또는 ‘결여’로 설명한다. 언어를 통해 상징계에서 사고하는 인간은 대상의 모든 특성을 포함하지 못하고 일부만을 상징화하는 언어의 한계상 반드시 외부의 ‘실재’와 격리되게 되는데,2조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니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나 자신이 가장 자주 쓰는 컵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 사물을 ‘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과연 그 사물의 모든 것을 포착할까요? ‘컵’이라는 이름은 가장 자주 쓰는 바로 그 사물이 무슨 색상인지, 내가 그 사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손잡이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질료로 만들어졌는지 등, 실제 사물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 통념적 모양새와 용도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폭력’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말을 비롯하여 수많은 언어 체계에서 사물들에 대해 이름을 붙일 때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를 확장해, 언어 일반이 사물의 모든 특징을 포괄하기보다는 그 일부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격리시키는 속성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실재를 향한 갈망이 ‘욕망’이라고 보는 것이다. 라캉의 이러한 ‘욕망’에 관한 견해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대상을 실제로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를 매우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좋은 가방을 사고 싶다는 욕망’이 수십 만원 짜리 가방을 산 이후에도 수백 만원 짜리 가방이 탐나는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곤 하는 경우 말이다. 라캉 주장의 핵심은 ‘욕망’은 ‘대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영원한 결여’를 향하는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 같은 라캉의 ‘욕망’ 기원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의 ‘욕망’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취약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부문 II. 《OMORI》 관련 ‘정기’ 질문들
- ‘2일 전’ 파트까지의 경험 중에서, 《OMORI》에서 가장 흥미로웠거나, 인상 깊었거나,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연출 · 대사 · 묘사는 무엇이었는가?
- ‘2일 전’ 파트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할 때, 주요 등장인물에는 누가 있는가? 각각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나? 다른 등장인물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 같나? 주요 등장인물들에 각각에 대해 간략히 요약해보라. (가능하다면, ‘3일 전’ 파트에서 답한 내용에 견줄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답하라.)
- ‘2일 전’ 파트까지의 내용 중에서, 뭔가 미심쩍거나 ‘문 뒤에 더 큰 것’이 있을 법한 것들, 즉 의미가 있을 법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었나?
2. 생각해보는 것이 권장되는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선택적으로 포함하시기 바랍니다.
- 아래의 글은 더글러스 호프스태터가 쓴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이 질문지의 맨 위에 실린 르네 마그리트의 〈두 개의 신비〉에 관련하여 설명한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마그리트가 그린 일련의 파이프 그림들은 기발하고 당혹스럽다. “두 개의 신비”(그림 138)를 음미해보라. 안에 있는 그림에 초점을 맞추면, 당신은 기호와 파이프가 다르다는 메시지를 얻는다. 그런 다음에 당신의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진짜” 파이프 쪽으로 이동한다. 당신은 그것이 실제이고 다른 파이프 하나는 그냥 기호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물론 이것도 전적으로 틀렸다 : 두 파이프 모두 당신의 눈앞에 있는 같은 평면 위에 있다. 파이프 하나는 두 번 중첩된 그림 속에 있고 따라서 왠지 다른 파이프보다 “덜 실제적”이라고 보는 생각은 완전히 오류이다. 일단 당신이 기꺼이 “그 공간에 들어서려” 한다면 벌써 속아 넘어간 것이다. 즉 실제라고 생각한 이미지에 속은 것이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은 기꺼이 한 층위 아래로 내려갈 테고 ‘이미지-속에 있는-이미지’와 실재를 혼동할 것이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두 개의 파이프를 단지 당신의 코앞 몇 인치 앞의 평면에 채색된 얼룩들로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오직 그런 다음에 당신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자 메시지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얼룩으로 되는 바로 그 순간, 쓰인 글씨 또한 얼룩이 되고, 그로 인해서 의미를 상실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순간 이 그림의 언어 메시지는 그야말로 괴델적인 방식으로 자기-파괴를 감행한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p. 968-969.위 설명에 따르면, 르네 마그리트의 상기 작품을 바라볼 때에는 세 개의 상이한 층위가 존재한다. 각각의 층위는 어떤 층위인가? 작품의 감상자는 어떤 층위에서 어떤 층위로 내려가게 되는가?
- 라캉은 세 계(Three Systems) 즉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써 인간 정신의 세계(World)를 이해한다. 이상의 설명에서 감상자가 ‘그 공간에 들어서려’ 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중에서 문자 메시지의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적어도 이 중 두 개의 계 사이에서의 정신적 탐색이 필요할 것임을 손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 계들은 무엇인가? 다른 하나 남은 계는 무엇인가? 그 계는 감상자와 붙어 있는가, 단절되어 있는가? 감상자가 위 그림을 볼 때, 그 계는 어디에 있게 되는가?
3. 심연을 향하는 민감한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포함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혼자서 주의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 “나는 누구인가?”
- ‘상실’, ‘결여’는 인간 정신에게 어떤 효과를 야기할까? 라캉의 주장에 크게 개의치 않고, 여기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들을 회상해보기로 하자. 나 자신이 과거 경험에서 중대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경험들을 떠올려보자. 그 ‘무언가’는 사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던 당시 어떤 감정이 들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은 현재의 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 앞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시 한 번 검토해보라. 인간은 과연 잃어버린 대상을 ‘그만 욕망할’ 수 있을까? 심리학의 유명한 효과인 스트라이샌드 효과는 “인간은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그것을 탐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욕망’은 무엇을 통해 생기게 되는 것인가?
-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하기 싫은 과거 경험이나 그와 결부된 감정들은 무의식으로 ‘유배’된다. 조금 비틀어서 본다면, 심리학적 기제는 의식하기 싫은 대상들을 금지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라캉이 ‘욕망’은 이러한 금지를 통해 형성된다고 주장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의 주요한 욕망은 과연 나 자신에게 금지된 기억들, 즉 트라우마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여기서 우리는 인간 정신의 가장 아랫 부분, 즉 심연과 그 심연을 들여다보는 나 자신 사이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얻는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자.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는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가?
제3주차 ‘이틀 전’ – ‘하루 전’ 질문지
‘어둠이 내려오지 않는 밤’은 하얀 공간이다. 이 공간은 인간 정신의 ‘우연을 가장했던 운명이 막다른 벽에 닿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그런 공간이다. 물론 삶의 굴곡 속에서 힘겹게 나아가는 인간은 주저앉아 자신이 비겁하게 속인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수록 인간은 바로 그 거짓말을 맴돌게 된다. 그 회귀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라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 여기서 나는 ‘최후의 긍정’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처음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모인 사회, 이 모든 운명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2. 2025. 1. 12. ~ 2025. 1. 31.〉 中
1.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질문들
제3주차 모임에서는 아래의 질문들 외에도, 사전에 각 구성원에게 할당된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의 쪽들에 대한 A4 ½장 이상, 1장 이하의 요약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하의 질문들에 대해서는 상세히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부문 III. 《OMORI》 관련 ‘특수’ 질문들
- ‘2일 전’ 현실 세계 파트에서, 모든 등장인물에게 있어 ‘상실의 대상’은 무엇(누구)인가?
- 앞에서 답한 ‘상실의 대상’이 각 등장인물에게 미친 영향을 정리해보라. 각 등장인물은 상실의 직후,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그를 이용해 상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는가?
- 꿈속 세계 파트에서, 주머니 → 중요 아이템 → 감정 관계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라. 바로 이전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토대로 할 때, 이 ‘감정 관계도’라는 시니피앙(기표)은 어떤 시니피에(기의)3시니피앙 · 시니피에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 우리 모임 책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의 131-133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를 표현하고 있는가?
- ‘2일 전’ 꿈속 세계 파트에서 우리는 ‘깊은 우물’을 내려가 ‘최후의 도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더 아래인 ‘험프리의 몸속’까지 들어간 이후 다시 〈아름다운〉 층위인 놀이장과 숲의 층위로 도착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오모리와 일행들은 바질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도달한 바질의 집에서 말라죽은 화초들 그리고 폐허들로 가득한 광경, 그리고 그 가운데 자리한 아주 거대한 검은 구멍을 목도하게 된다. 검은 구멍으로 뛰어들어 도달한 검은 공간에서 우리는 각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바질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마침내는 오모리 자신에 의해서 말이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라고 말했으며, 그 과정은 압축과 전치로 일어나고, 또 꿈의 사물들은 과거 기억과 그에 결부된 감정들과 결합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수많은 써니의 주변인물 중 ‘바질’에 대해서만 꿈은 유달리 가혹한 서사를 보여주는 것일까? 써니와 바질 사이에 존재하는 ‘무언가’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 생각해보는 것이 권장되는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선택적으로 포함하시기 바랍니다.
- (이 부분에 대한 인터넷 검색은 예외적으로 허용함) 이 질문지의 맨 위에 실린 JANE POP의 〈백야(midnight sun)〉의 가사를 찾아보라. 이 음악에서 나는 몇 가지 시니피앙이 《OMORI》와 겹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비겁하게 너를 속여야만 했던 나’, ‘밤새 지는 걸 잊은 태양’, ‘어둠이 내려오지 않는 밤’, ‘머무르던 기억 밖으로 잠시 벗어나 돌아가지 못하게 될까’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OMORI》의 서사 위에서 이 음악을 다시 한 번 조망해보라. 왜 이 음악이 질문지 맨 위에 실렸는지 알겠는가?
3. 심연을 향하는 민감한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포함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혼자서 주의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 통상 우리의 과거사에 자리하는 공포들은 여러 종류로 나눌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공포는 ‘상실’에 대한 공포이다.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무언가를 잃어버릴만 같다는 그 직감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증폭되어 마침내 스스로의 정신을 온전히 집어삼키는 경우 발생하는 이 상실에 대한 공포. 지난 2주차에 걸쳐 나는 당신의 공포스러웠던 경험을 상기할 것을 요청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지 현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주차에 나는 당신에게 있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공포, 즉 당신이 지금 두려워하는 바를 묻고자 한다. 자, 묻는다… 지금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들 중, 일종의 ‘상실’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공포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 즉 ‘무언가’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 앞에서 답한 ‘상실에 대한 공포’는 상실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이 존재할 때 비로소 가능한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공포는 당신이 잃고 싶지 않아하는 어떤 것, 소중한 어떤 것에 대한 위협이 현존하거나 당장은 현존하지 않더라도 그 위협이 언제든지 닥쳐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당신이 위협받고 있는 그 대상은 무엇인가?
- 우리는 라캉의 이론으로부터 개인의 욕망은 ‘상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엄밀하게 말해 그 ‘상실’은 언어로 인해 주체로부터 격리된 사물 자체의 주체로부터의 ‘상실’이기는 하지만, 약간의 위험한 유추를 동원한다면 현재 나 자신에게 ‘상실’된 대상이나 ‘상실‘될 것 같은 대상이 존재하는 경우 그로부터 욕망이 발생할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가설이 유효하다면, 지금 나 자신이 바라거나 원하는 바는 우리가 지금 직면하려 시도하고 있는 ‘상실에 대한 공포’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당신이 지금 욕망하는 바가 과연 스스로의 가장 심연에 위치한 그 ‘무언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당신이 욕망하는 바는 위협받고 있는 대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 자, 다시 묻자.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는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가?
- 그렇다면, ‘나’의 ‘심연’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그것은 ‘나’를 들여다보고 있는가?
주석 및 참고문헌
- 1… (전략) … 그러나 이 로봇 프로그램이 자신의 과정을 완전히 속속들이 추적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일종의 직관적인 감각은 있다. 이처럼 자기-지식과 자기-무지 사이의 균형으로부터 자유의지라는 느낌이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작가가 자신의 마음속 이미지에 포함된 어떤 관념들을 전해주려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자. 작가는 그 이미지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에는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리저리 실험해보고는 최종적으로 어떤 설명 방법을 정한다. … (후략) …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박여성 · 안병서 공역, 까치, 2013. p. 986. - 2조금 이해가 어려울 수 있으니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나 자신이 가장 자주 쓰는 컵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 사물을 ‘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과연 그 사물의 모든 것을 포착할까요? ‘컵’이라는 이름은 가장 자주 쓰는 바로 그 사물이 무슨 색상인지, 내가 그 사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손잡이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질료로 만들어졌는지 등, 실제 사물에 관한 수많은 정보들을 생략하고 단순히 그 통념적 모양새와 용도에 초점을 맞추는 일종의 ‘폭력’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말을 비롯하여 수많은 언어 체계에서 사물들에 대해 이름을 붙일 때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를 확장해, 언어 일반이 사물의 모든 특징을 포괄하기보다는 그 일부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격리시키는 속성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 3시니피앙 · 시니피에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경우, 우리 모임 책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의 131-133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