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화수월 #5. 《OMORI》, 제4주차 ‘하루 전’ 모임 질문지
경화수월(頃話輸越)은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게임 · 뮤지컬 등 종합 예술 작품이나 심도 깊은 텍스트들을 체험한 뒤, 잠시의 말로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의 것’들을 실어 나르는 장으로써 마련된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문이란 무엇인가?”
쓸모없고 당연한 것을 묻는 것 같은 질문일수록 핵심을 찌르는 법이다. 이 질문도 다를 것은 없다. 그러나 질문을 막연하게 던지면 대답하기 어려운 법이니,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시니피앙에 얽힌 수많은 시니피에들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일상 속에서의 경험을 되짚어보는 것에서 출발하면 편리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건물과 그 속의 방들을 출입해왔다. 건물의 안과 밖을 드나듦에 있어 우리는 역시 마찬가지로 수많은 문들을 통과해왔다. 너무나도 자주 반복되는 경험이었기에 우리는 문이 특별히 어떤 사물인가를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열거나 닫고, 또 그 속을 통과해왔다.
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기능면에서 비슷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 차이가 있는 다른 구조물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벽이다. 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을 두 범주로 가르는 하나의 경계이자, 반대로 넘어갈 수 없게 둘 사이에 세우는 단절이다. 벽을 기준으로 원래 하나였을 공간은 안과 바깥, 혹은 이쪽과 저쪽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은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싶은 공간마다 마음 가는데로 벽을 세웠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수많은 벽들을 드나들게 되었다.
잠깐, 벽을 드나든다고? 벽의 주요한 특성들에는 반대편을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도 그럴 것이 반대편을 볼 수 있다면,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벽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어떤 집에 외부인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외벽은 더 이상 외벽이 아닐 것이며, 우리 자신의 방이 완전히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지나가는 누구든지 그 내부를 볼 수 있다면 우린 그것을 더 이상 방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벽이 분리하는 두 공간을 어떻게 드나들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의 주제, ‘문’이라는 사물이 등장한다. 문도 크게 보아서는 벽과 거의 같은 기능을 한다. 문을 닫아 놓으면, 특히 자물쇠를 걸어 놓는다면 사람들은 그 반대편으로 이동할 수 없다. 문도 벽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문은 벽과 비교하여 단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가진다. 그것은 열 수 있다. 즉, 문은 벽과는 달리 그 개폐를 사람들이 조절할 수 있다. 문은 닫는 경우에는 벽과 같이 공간을 둘로 나누지만, 여는 경우에는 그 벽이 갈라놓은 세계를 하나로 화해시킨다. 문이 벽과 가지는 이 중대한 차이점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갈라놓은 공간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사려 깊은 독자들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게임 《OMORI》 위에 만들어온 글들에 공통적으로 ‘문’이 하나의 시니피앙으로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글에서도 ‘문’은 예외없이 반복된다. 삶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지혜대로, 반복은 그저 우연히 발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복을 지각하는 인간은 그것이 왜 발생했는지 묻게 되며, 그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어느 순간에 그 반복은 인간 정신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인지되지 못하던 벽이 사실은 열릴 수 있는 벽이 아닌가, 즉 ‘문’이 아닌가 하는 희미한 추측으로 이어진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문을 열 것인가, 열지 않을 것인가.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질문 위에서 인간은 시험에 오른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반년 전 혼자서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OMORI》의 모든 서사를 탐험한 이래로, 나는 점점 더 많은 문들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어떻게 생겼느냐도 중요했지만, 나의 관심은 그 문이 어디에 위치하느냐는 쪽에 집중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1‘모든’ 공간이라고 한 이유는, 그 공간이 내 몸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다르는 곳들에 문들이 서 있음을 발견했고, 종종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들에 문이 있음을, 나에게 봉쇄되어 있었기에 반대편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장소들에 그것들이 오래 전부터 서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몇몇 문들은 손쉽게 열고 반대편을 확인해볼 수 있었지만, 몇몇 문들은 열고 반대편을 들여다보는 것이 몹시 두려울 정도로 장엄하게 서 있었다. 너무나도 중압적으로 서 있었던 그 문들이 열고 들어갔을 때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강렬한 직감을 풍겼기 때문이다. 물론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해서 거기서 끝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문 뒤에 또 다른 문이 있는 경험들에는 익숙하니까.
문은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앞에서 서성거리든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잔인한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니체가 오래 전에 남겼던 문장 하나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中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f Abgrund auch in dich hinein.)
그러나 열지 않고서 되돌아간다면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다. 상술하였듯 벽과 문을 구분하는 핵심적인 차이는 인간이 자신이 마음대로 그어둔 경계를 드나들도록 그것을 열 수 있는지의 여부에 있으니까. 인간은 다시금 일어나 선다. 그리고 자신 앞의 문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러면 문도 인간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누구도 이 잔인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문이 있고 또한 인간이 있기에 이 운명은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게임 · 예술 · 인간 정신 이 셋을 하나로 이어주는 최후의 ‘문’이, ‘무언가’가 우리 눈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질문은 여전히 간단하다. 그러나 치명적이다. 나는 그 영원회귀를 다시 한 번 읊조린다.
“문이란 무엇인가?”
Stand-by Playlist
제4주차 ‘하루 전’ – ‘사흘 전’ 질문지

1.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시니피앙들’을 다시 되짚어보며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가 한 달 동안 입문서로써 함께 읽었던,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의 초대》에서 소개된 개념들 중 가장 흥미로웠거나 자신의 인상에 깊이 남은 개념은 무엇인가? 왜 그 개념을 스스로가 꼽았다고 생각하는가?
- 정신분석학은 근 · 현대의 철학 · 예술 사조를 완전히 전환시켰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즉 자신이 들고 있는 기호들로써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부분인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함에 따라 이성과 합리로써, 즉 일종의 형식 체계로 포착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또 다른 부분인 의식에 초점을 맞추어온 전통이 무너지고 이 둘의 이율배반적인 공존으로 그 관심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이성과 현재라 생각하고, 그 반대의 것 즉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그 바깥의 것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철학과 예술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자 우리의 처음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무언가를 획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게임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해 수많은 의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게임의 깊이가 우리의 가장 심연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예술의 깊이에 비해 너무나도 얕은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게임 《OMORI》가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묻는다. 게임 · 예술 · 인간 정신. 이 세 가지 요소를 이어주는 ‘무언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생각해보는 것이 권장되는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선택적으로 포함하시기 바랍니다.
- 반복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질문지의 가장 맨 위의 그림을 포함하여, 2월 한 달 동안 진행된 우리의 논의에서 ‘문’이라는 시니피앙이 지속적으로 제시되어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모두 읽은 지금 우리는 이 ‘문’이라는 시니피앙에 결부되는 시니피에가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을 획득했다. ‘문’이라는 이미지를 상상계에서 재현해보고, 이 때 우리가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는지 잠시 음미해보도록 하자. 오래 전 나는 ‘문’은 두 공간을 가르는 경계이지만 동시에 선택적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경계임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독서 모임에서 다음의 두 문장이 하나의 쌍을 이룬다는 점도 확인해왔다: 1)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2) “당신은 문을 오랫동안 들여다봅니다. 문도 당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한 달 동안 지속되어온 미묘한 느낌의 정체를 규명해보자. ‘문’에 결부된 시니피에가 무엇이었길래, 내가 왜 ‘문’을 《OMORI》의 핵심적인 시니피앙으로서 제시해왔을까?
- 질문지 맨 위의 그림 〈승리(La Victorie)〉는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경계라는 ‘문’의 전통적인 시니피에를 무너뜨린다. 안과 바깥이 전혀 구분되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림에서 문은 어느 바다 위의 드넓은 지평선이 보이는 절벽을 구분하려 시도하는 듯 하지만 결국 문의 안쪽과 바깥쪽 모두는 하나라는 근본적인 실재를 부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언어가 근본적으로 문과 같은 속성, 즉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안과 바깥으로 가르는 폭력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논한 바 있다. 그리고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주체는 근본적으로 상징계 속에서 언어의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고 있는 것들의 세계 즉 실재계로부터는 소외되어 있기에 이 실재를 향하는 욕망 즉 ‘주이상스(Jouissance)’가 발생한다. ‘주이상스’는 분명 상징계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 즉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공계열 교육들을 받아오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지각하고 설명하기’를 연습해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직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각하고 설명하기’도 존재한다는 바로 그 느낌이다. 자, 묻자.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무엇이 상실, 또는 결여되어 있었는가?
3. 심연을 향하는 민감한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포함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혼자서 주의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 “나는 누구인가?”
- 지금까지 내가 던져왔던 수많은 질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사실 그 질문들은 모두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려는 것들’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되어 온 질문들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여정이라는 전체적인 구조를 통해, 그 과정(모임 계획서, 질문지, 카페의 게시글, Zoom으로 진행한 모임 그 자체 모두)에서 제시된 수많은 시니피앙들 모두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했다. 우리는 《OMORI》를 통해 예술과 인간 정신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의 정체가 무엇인지, 특히 《OMORI》의 주제가 정신분석학이 주목해온 트라우마와 인간 정신의 관계라는 점 덕분에 조금이나마 더 직감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이 직감이 바로 내가 게임 · 예술 · 인간 정신이라는 세 요소 사이에서 지금까지의 위험하고도 흥미로운 모임 여정을 이끌어온 핵심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질문을 논의하지 말라는 ‘금지’와 기존 관습과 도덕에 구애받지 말고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는 ‘자유’라는 이율배반적인 논의 구조를 착상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충분한 부언이 제공된 지금, 나는 당신에게 가장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 게임 · 예술 · 인간 정신 모두의 가장 ‘심연’에 자리하며, 동시에 나아가 내가 이 모임을 통해 당신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무언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시간이 된다면, 당신에게 지금까지의 모임 여정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 것을 권하고자 한다. 이 모임의 ‘모임 계획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질문지’, 그리고 카페 게시글, 나아가 각 모임 맨 앞에 선곡되어 재생되었던 음악들을 모두 떠올려보길 바란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장을 통하지 않고, 즉 ‘말하지 않고서’ 당신에게 더 많은 것들을 지금까지 전달하려고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고서’라니? 그렇다. 나는 그림들을 통해, 음악들을 통해, 글의 구조들을 통해, 마침내는 2월 한 달 동안의 모임 전체의 구조와 진행 방식을 통해서 당신에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가 가닿기를 간절하게 희망했고, 그로써 나는 예술이 표현하는 방식으로써, 특히 《OMORI》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했던 정확히 그 방식을 재현함으로써 당신에게 말하고자 했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각각의 글에서 숨겨두었거나 말하지 않은, 그리고 답하지 않은 모든 의미들을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나는 의도적인 침묵을 택한다. (물론, 모임이 끝난 뒤에 묻는다면 나는 결국 대답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말이다.) 왜 내가 침묵을 택한다고 이야기하는지, 이제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 “정신분석학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게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4. 군말
아래에는 제가 지난 1월 12일, 《OMORI》의 사운드트랙들을 믹싱한 음악들을 엮어 구성한 플레이리스트 「Jouissance」를 공개하면서 썼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말하는 주체는 그것을 통해 성에 대한 관계를 맺는 이 기관이 가진 죽음의 의미를 폭로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니피앙 자체가 주체에 빗금을 치면서 최초의 의도화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주체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문자가 죽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조차 문자를 통해서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충동은 잠재적으로 죽음의 충동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에크리(Écrits)》, 〈무의식의 위치〉 中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주이상스(Jouissance)〉는 쾌락 원리를 ‘넘어서는’ 쾌락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쾌락 원리’라 함은 인간이 고통 등의 부정적 감정을 최대한 적게 두고 빠르게 방출 · 제거하고자 하는 심리적 본성을 가리키기에 〈삶〉의 영역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쾌락 원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이상스〉는 종종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Todestrieb)〉과 견주어진다. 그러나 둘은 그 출발점은 유사할 수 있어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개념이다. 〈죽음 충동〉은 쾌락 원리의 극단으로, 생물학적 죽음을 통해 아예 외부 자극을 중단시켜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충동을 가리킨다. 라캉의 〈주이상스〉는 자극의 중단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구조로 인해 주체로부터 분리되어버린 ‘실재(Real)’, 즉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으로 계속해서 향하고자 하면서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즘적인 욕구에 가깝다.
인간 정신 구조가 만약 20세기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함을 증명한 ― 즉, “자기 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무모순인 체계” ― 수론 체계와 유사하다면, 위험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추를 통해 인간의 정신 또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한계, 자신이 영원히 알 수 없을 〈무언가〉를 향한 불꽃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란 말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과연 니체의 함의대로 한 사람의 정신에게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
…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서기에는 그 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어 울려퍼지는 의미와의 투쟁,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이상스〉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직감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썼다. 시지프스를 나는 다시 생각한다. 결국 굴러떨어져 원점으로 되돌아갈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그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그의 땀방울 사이로 작은 미소가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이 바로 이 비유 속에 자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용히 깊은 흔적을 남기며 스러진다.
제4주차 ‘하루 전’ – ‘하루 전’ 질문지
라캉은 실재는 주체가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언어의 구조적 특성에 의해 주체가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위치로 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본질적으로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한다. 자신이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걸어 들어가는 체험, 불가능한 대상과 조우하려는 이 충동. 그 끝은 무엇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는 예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심연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커피사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1. 2024. 12. 21. ~ 2025. 1. 10.〉 中
1. 독서노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OMORI》를 관통하는 질문들입니다. 신중하게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 모든 등장인물에게 있어 ‘상실의 대상’은 무엇(누구)인가? 그 상실은 각 등장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들은 그 직후, 어떤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그를 이용해 상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는가?
- (이 부분은 예외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허용함) 마리를 작중 상징하는 꽃은 은방울꽃이다. 은방울꽃의 꽃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꽃은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 왜 이 꽃이 마리를 상징하는지 알겠는가?
- 《OMORI》의 서사에서 밝혀지는 최후의 진실은 무엇인가?
- 써니와 바질은 모두 마리의 죽음에 대한 치명적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 모두가 현실 세계와 꿈속 세계 모두에서 각자의 ‘무언가’를 보는 이유는 짐작하건데 바로 그 비밀 때문일 것이다. 써니가 보는 ‘무언가’와 바질이 보는 ‘무언가’는 각각 어떤 이미지로 나타났는지 상기해보자. 각각은 마리의 죽음에 대한 비밀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각자에게 있어 어떤 사물이 그 끔찍한 진실에 대한 시니피앙으로 되었는가?
- 우리는 《OMORI》에서 등장하는 ‘검은 대상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의 이론을 떠올려보면, 파스텔 톤의 환상적인 ‘꿈속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 대상들은 상징계를 뚫고 들어오는 실재계, 주체로부터 격리되거나 봉쇄되어 버린 극도로 치명적인 진실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OMORI》의 전체 줄거리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 매 장마다 목도한 특이한 대상들을, 인상에 깊게 남았던 연출 · 대사들, 그리고 ‘문 뒤에 무언가가 있을 법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이들은 각각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나?
- 진실과의 조우, 인간이 자신의 가장 심연 아래에 억압했던 기억 · 경험들과 재회하는 것은 정말로 치명적이다.《OMORI》는 주인공의 서사를 통해 그 재회가 어떤 식으로 파괴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어떤 결과에 다다를 수 있을지 여러 가능성을 제시한다. (비록 우리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을 살펴봤지만, 선택 분기에 따라 더 나쁜 결말들이 가능하며 이는 플레이어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2가장 간단하게는, 최후의 전투에서 ‘다시 도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주인공에게 벌어질 수 있는 결말들 중 하나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이야기를 토대로 생각해볼 때, 진실은 주인공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주인공이 욕망한 바, 행동한 바들이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자. 이들은 진실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 위 질문들에 대해 답변한 바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보라. 《OMORI》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언가’의 정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생각해보는 것이 권장되는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선택적으로 포함하시기 바랍니다.
- (이 부분에 대한 인터넷 검색은 예외적으로 허용함) 이 질문지의 맨 위에 실린 bo en의 〈My Time〉 의 가사를 찾아보라. 반복에 민감하다면, 이 음악이 제1주차, 즉 첫 모임 당시 사전 플레이리스트 및 영상에서 재생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곡의 가사는 영어와 일본어가 혼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하나씩 살펴보면 《OMORI》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달 동안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지금, 우리의 모든 논의 위에서 곡을 다시 한 번 들어보라. 왜 이 음악이 처음과 마지막 모두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알겠는가?
3. 심연을 향하는 민감한 질문들
이하의 질문들은 독서노트에 포함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혼자서 주의깊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 《OMORI》에서 우리는 주인공에게 있어 ‘상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상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또 그 일부 혹은 전조가 ‘꿈속 세계’에서 어떤 이미지들로 나타났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게임에서 ‘상실’은 좌절과 공포라는 대표적인 인간의 부정적 감정과 결부되어 나타나 있었으며, 되짚어보면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주인공의 서사에 깊게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구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하필 왜 좌절과 공포 때문에 주인공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예술 작품에서 드러나는 부정적 감정의 표출은 감상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 것이길래, 우리는 《OMORI》에 깊게 빠져들 수 있었을까?
- 방금의 질문은 전적으로 ‘추상화된 담론’ 위에서 감상 경험을 평가하는 대답을 유도한다. 즉, 개별 감상자마다 다른 과거의 기억과 그에 결부된 정동들 그리고 가치관들을 반영하지 않고서 평균적이고 객관적인 감상자를 상상하도록 한 뒤 그 시니피앙과 《OMORI》 사이의 상호작용을 상징계에서 관찰하도록 한다. 그러나 라캉을 통해 우리는 예술 작품의 가치를 그 작품이 자신과, 자신의 과거와 감정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에 집중할 때 보다 온전한 의미에서 재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서 묻자. 물론, 깊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장 치명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게임 《OMORI》가 나 자신의 어떤 기억들 그리고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기에, 우리는 그 작품의 세계에 깊게 빠져들 수 있었을까?
- 모든 진실이 그 끔찍한 과거까지 모두 포함하여 밝혀진 현재의 시점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결정적인 질문을 마주할 때이기도 하다. 질문은 간단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던지는 이 마지막 질문이 또 하나의 다이너마이트가 되기를 바란다. 자, 이제 묻는다……. 《OMORI》의 써니와 당신은 다른가?
4. 군말
아래에는 제가 지난 1월 9일, 《OMORI》 플레이의 약 3개월 이후 상이한 세 층위 ― 즉, 주인공의 층위, 작품의 층위 그리고 나 자신의 층위 ― 에서 동시에 심연을 생각한 이후 남긴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심연으로 내려가기.”
하루 전의 두서없는 일기에 써둔 바와 같이 (2주일 째 이어지는 코감기로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한 몽롱한 상태에서의 결과물이었다) 2025년에 내가 스스로 주요하게 목표하는 바 중 하나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 스스로의 내면 구조를 깊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 일은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2차 정신 모델을 빌려 말한다면 이드(id)를, 라캉을 빌린다면 실재계를(물론 그의 견해대로 아마 나는 상징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실재의 회귀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여전히 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OMORI》를 빌려 말한다면 〈Black World〉를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 통념과 도덕이 용납하지 않을 원초적 욕망을 직시해야 할 수도 있으며, 트라우마의 잔혹한 진실을 알게 되는 《OMORI》의 주인공처럼 나 자신이 스스로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즉 위태로운 의식 · 믿음의 기둥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어제 저녁 상담사에게도 이야기했으며 2024년 연말정산 독서 모임에서도 논의하였듯 나는 인간은 모순 속에서 사는 존재이며 그 부조리를 직시하는 것의 중요성을 마지막까지 논한 알베르 카뮈의 문장을 기억한다.3「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니체는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마침내는 카령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과 같은, 이 땅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무엇인가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이 생겨난다.”라고 썼는데, 그는 그 말로써 위대한 풍모의 모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을 보여 준다. 불꽃에 복종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도는 생각 위로 밤이 올 때 하는 것이다.”라고 알랭은 말한다. 이에 대하여 신비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정신은 밤을 만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은 눈 밑에서 오직 인간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밤, 정신이 그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불러일으키는 캄캄하고 닫힌 밤은 아니다. 만약 정신이 밤을 만나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맑은 정신을 간직한 절망의 밤, 극지(極地)의 밤, 정신이 깨어 있는 밤, 하나하나의 대상이 지성의 불빛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희고도 때 묻지 않은 광명이 비쳐 올 밤이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등가성은 열정적인 이해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비약을 비판하는 것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간적 태도들을 보여 주는 벽화 속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관객이 볼 때 ― 그 관객의 의식이 또렷하다면 ― 이 비약 또한 부조리하다. 비약은, 그것이 역설을 해소시킨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바로 역설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는다. 이 점에서 비약은 감동적이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부조리의 세계는 휘황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단 한 가지 보는 방법에 만족한 채 모든 정신적 힘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힘인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 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97-98. 그렇다. 나는 스스로가 외부 · 내부와 대면하면서 얻어지는 긴장을 회피하고 싶지는 않다. 도덕성 그리고 사회적 명성 ― 즉, 비겁하다는 평가가 두렵다기보다는, 스스로가 인정한 인간의 본래적 성질(또는 아마도, 운명?)로부터 도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저주이자 사랑으로, 위험한 불꽃의 밝은 빛에 매료되어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자의 행보일 것임을 안다. 그러나 내가 인간의 바로 이러한 점을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흥미로운 인간 정신의 구조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 최근 읽고 있는 (2월 ‘날적이’ 독서 모임을 준비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석 교수의 《무의식으로의 초대》의 내용에 따르면, 앞으로 나는 억압되었던 표상들과 그것이 결부된 기억이나 정동(이렇게 말하면 프로이트식이다), 또는 상징계의 본성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의 실재에 대한 소외의 구체적인 양태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경우는 라캉 식이다) 살펴보게 될 것이다.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 일반적인 사유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이 영역을 호기롭게도 나는 탐구의 대상으로 올려두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지금까지 내가 해 오던 방법과는 분명히 다르다. 여태껏 나는 이공학도로서 외부 사물들의 표상 – 표상 간 관계들을 파악하고 조직화하는 연습들을 해 왔다면 (과학은 근본적으로 상징계 상의 것일테다) 이제는 외부 사물들이 스스로에게 어떻게 반영되는 것이며 나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일들을 확인하고 분석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꿈에 어쩌면 나도 주목해서 그의 《꿈의 해석》에서의 작업과 유사한 작업들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라캉과 호프스태터4《괴델, 에셔, 바흐》를 쓴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를 말한다.가 주목한 말실수에 주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나도 모르게’의 작용들을 이제는 그저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거대한 우물 저 아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나는 기꺼이 뛰어들려고 하기에, 숨을 충분히 골라야 한다. 《OMORI》에서의 〈검은 문〉들과 그 내부의 〈무언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끔찍한 기억들을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다시 내 앞에 두고서 해부해야 할 지도 모른다. 분명히 나는 수많은 오류를 범할 것이며 종종 착각에 빠질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내가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러나 제대로 한 번 스스로의 ‘빙산의 일각’을 살펴보는 경험에는 죽기 전에 해 볼 가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살아가는가? 또, (라캉에 의하면)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얼마나 아이러니하게도 위대하면서 비참한 존재인가? 그 동안 무시해왔거나 중요치 않다고 여겼던 ‘마음의 영역’에 나의 시선이 가 닿음에 따라, 이제 나는 졸업 논문 및 대학 이후의 진로 설계와 더불어 나 자신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 위에 서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 그래, 카뮈의 말대로,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모든’ 공간이라고 한 이유는, 그 공간이 내 몸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2가장 간단하게는, 최후의 전투에서 ‘다시 도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주인공에게 벌어질 수 있는 결말들 중 하나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 3「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니체는 “하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복종하는 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결과 마침내는 카령 덕, 예술, 음악, 무용, 이성, 정신과 같은, 이 땅에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 모습을 바꾸어 놓는 그 무엇, 무엇인가 세련되고 광적인 혹은 신성한 그 무엇이 생겨난다.”라고 썼는데, 그는 그 말로써 위대한 풍모의 모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부조리한 인간이 가는 길을 보여 준다. 불꽃에 복종한다는 것, 그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따금 어려움에 맞서서 겨루어 봄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유익하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기도는 생각 위로 밤이 올 때 하는 것이다.”라고 알랭은 말한다. 이에 대하여 신비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나 정신은 밤을 만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은 눈 밑에서 오직 인간의 의지에 의해 생겨나는 밤, 정신이 그 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불러일으키는 캄캄하고 닫힌 밤은 아니다. 만약 정신이 밤을 만나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맑은 정신을 간직한 절망의 밤, 극지(極地)의 밤, 정신이 깨어 있는 밤, 하나하나의 대상이 지성의 불빛 속에서 또렷이 보이는 희고도 때 묻지 않은 광명이 비쳐 올 밤이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등가성은 열정적인 이해와 만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실존적 비약을 비판하는 것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세기에 걸친 인간적 태도들을 보여 주는 벽화 속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이다. 관객이 볼 때 ― 그 관객의 의식이 또렷하다면 ― 이 비약 또한 부조리하다. 비약은, 그것이 역설을 해소시킨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바로 역설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는다. 이 점에서 비약은 감동적이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부조리의 세계는 휘황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지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단 한 가지 보는 방법에 만족한 채 모든 정신적 힘들 중에서 가장 미묘한 힘인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것은 다만 어떤 사고 방식을 정의한 데 불과하다. 이제부터는 실제로 사는 문제가 남아 있다.」
―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pp. 97-98. - 4《괴델, 에셔, 바흐》를 쓴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