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13.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I

탐서일지 #13.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I

2024-09-03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만 한다. 인류가 이제껏 진지하게 숙고해왔던 것은 심지어는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한갓 상상이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병들고 가장 심층적인 의미에서 해로운 본성의 나쁜 본성들에서 나온 거짓들이다 ― ‘신’, ‘영혼’, ‘덕’, ‘죄’, ‘피안’, ‘진리’, ‘영생’ 등의 모든 개념이…… 하지만 그런 것들에서 인간 본성의 위대함과 ‘신성’이 찾아졌던 것이다…… 정치 문제, 사회 조직의 문제, 교육 문제가 모두 그 토대에 이르기까지 위조되었다. 가장 해로운 인간들을 위대한 인간들로 받아들였던 것에 의해서 ― ‘사소한’ 사항들이라고 했던, 다름 아닌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 자체를 경멸하라고 가르쳤던 것에 의해서……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니체전집 15: 바그너의 경우 · 우상의 황혼 · 안티크리스트 · 이 사람을 보라 · 디오니소스 송가 · 니체 대 바그너》.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pp. 371-372.

아래에는 지난 번에 이어 경남과학고등학교 36기 동기들과 진행하는 독서 모임의 세 번째 차례, 『도덕의 계보』의 두 번째 논문: ‘죄’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읽으며 나누었던 나의 해석과 소고들을 기록해둔다. 부분적으로는 지난 글의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니체를 “읽은 뒤에 자라난 나의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이 뿌리 박힌 땅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고자” 하는 목적도 있겠지만,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가 작동하는 방식, 즉 해석하고 창조하는 저 능동적 행위가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들을 선보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이유다.

첫 번째 논문에서 니체가 다룬 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외부적 강제라고 한다면, 두 번째 논문에서 그가 다루는 것은 그 외부적 강제가 어떻게 사람의 내면에 뿌리를 내리고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전통적인 도덕의 계급적 성격과 그 기만성에 관한 논의를 확장하여, 이 도덕 자체가 그의 용어에서의 ‘강자’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를 생리학자처럼 분석한다. 〈양심의 가책〉을 하나의 또는 마조히즘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이 철학자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하나의 치료제였기에, 그는 자신의 특허약인 가치의 전도를 환자를 위해 아끼지 않는다. 적지 않은 독자들이 그가 처방하는 독한 문장들의 향에 아찔함을 느낀 나머지 니체의 주장을 극단적이거나 독단적이라고, 폭력에 대한 예찬이라거나 야만적이라고 오해하곤 하지만,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가 공격하는 것은 언제나 비인간적인 것이었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다시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망치를 휘두름에 따라 〈양심의 가책〉, 〈죄〉에 대한 통념은 사정없이 부서져 나간다. 가치의 전복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선 원래의 가치 위에 서 있던 것을 불가피하게 분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그의 집요한 추궁은 스스로가 믿어 왔던 바가 붕괴할지도 모르겠다는 특유의 공포를 실질적인 붕괴로 전환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저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저 체계 외의 다른 기둥 위에 서 있는 기반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어쩌면 그 기반 위에서 인간은 더 이상 기둥에 짓눌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외부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전환됨에 따라 어쩌면 인간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기둥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만약 폐허 위에서 우리가 자신만의 토양을 꿈꾸기 시작한다면, 그 출발선에서 에고이스트 철학자 니체는 축복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출발선 위에 모두가 모였다. 숨을 충분히 고른 우리에게는 앞으로 뛰어나갈 일만 남았다.


보충 자료 3: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양심의 가책’ 비판

이하에는 니체가 논하고 있는 〈양심의 가책〉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일체의 문헌들을 니체의 원 저작에서부터 관련 논문,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일 수도 있을 노래 가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발췌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이번 회차에서 다루는 ‘양심의 가책’에 관한 니체의 분석은 마조히즘을 포함하고 있는 니체의 ‘잔인성’에 대한 철저한 계보적 고찰이 즉각적인 거부감을 일으키는 나머지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도덕의 계보》의 두 번째 논문은 반드시 주의 깊게 읽어야만 합니다. 특히 〈양심의 가책〉의 기원에 대한 니체의 분석, 그리고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비판하는 이유의 가장 뿌리가 되는 〈힘에의 의지〉는 모임 계획서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 “니체 사상에서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므로 즉각적으로 드는 반감에도 불구하고 귀와 눈을 다시 한 번 열고 찬찬히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보충 자료의 분량이 역대급으로 길어졌으며 또한 제공이 늦어진 이유는 바로 이러한 오해를 어떻게든 불식시키려고 하는 제 욕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구성원들이 니체 사상의 전반에 대한 이해가 획득되지 않은 이상, 배경 지식을 제공하거나 혹은 최소한 니체의 말뜻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쉽게 풀어낸 자료들을 제공하고자 유단히 노력했습니다. 책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니체의 다른 저작들에서 ‘비교적 의미 부여를 쉽게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옮겨왔고, 그러한 의미 부여 과정에서 길라잡이 혹은 참고가 될 수 있을 논문의 일부를 가져와 필요에 따라 사족까지 붙였습니다. 제 기우에도 불구하고 이 보충 자료가 과연 니체의 지극히 ‘파괴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광적’으로 보이는 주장에 대한 당연한 거부감의 장벽을 뚫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충 자료를 모두 읽은 뒤 니체에 대한 여러분의 평가가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기를 희망하고자 합니다.

늘 그렇듯 아래의 글들은 전문이 아니라 여러 글들 중 필요한 부분만을 옮긴 것입니다. 각각의 글들에 대한 출처는 각 글귀의 마지막에 달아두었습니다. 글에 따라 원주가 달려있는 경우도 있고, 또 제가 필요에 의하여 주석을 단 경우도 있습니다. 인용한 글에 달려있는 원 주석은 【원주】로, 제 주석은 【사족】으로 표기하여 구분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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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노트 3: 제3차 독서 모임 – “죄 그리고 양심의 가책”

그러나 우리의 능력들 자체가 왜소하게 된 생과 생을 손상시키는 사유를 표현한다면 그것들을 회수하거나 그것들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종교개혁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성직자를 내면화했을 때, 즉 그를 신자의 내면에 끌어들였을 때, 과연 그는 종교를 폐기한 것인가? 사람들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본질적인 것인 그 자리를 보존했을 때 사람들은 과연 신을 살해한 것일까? 유일한 변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외부에 의해서 짐을 지게 되는 것 대신에 인간 자신이 짐을 자신의 등에 지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 의사인 철학자는 상이한 징후들의 배후에서 동일한 병이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할 것이다. 가치들은 변할 수 있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보, 행복, 공리(公利)가 진, 선 혹은 신성을 대체해도,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복종하도록, 짐을 짊어지도록, 오직 생의 반동적인 형식들과 단죄하고 비난하는 사유의 형태들만을 인정하도록 권유된다.

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철학과 현실사, 2007. pp. 35-36.

I.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에 대한 정리

I.1. 니체가 생각하는 기존 ‘양심의 가책’의 기원

따라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바로 이 영역에서, 즉 채무법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한 개념 세계의 발단은 지상의 모든 위대한 것의 발단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피로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덧붙여도 되지 않을까? 저 세계는 근본적으로 피와 고문의 냄새를 단 한 번도 완전히 씻어버린 적이 없다고. (심지어 늙은 칸트에게서조차 그렇다. 그의 정언명령에는 잔인함의 냄새가 난다.)

#6.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조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 무엇보다도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 중의 하나이다 ― 거칠고 자유롭고 방황하는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거꾸로 돌려서 인간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16.
  • 권의섭(2015)이 지적한 것처럼, “니체는 ‘부채이론’과 ‘내면화이론’을 통해 약자의 양심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도덕 외적인 경제적 교환관계에서 기인한 부채의식이 변형된 것이며, 외부의 장벽에 의해 표출되지 못한 자신의 공격적 욕망이 내면화되어 형성된 것으로 이해한다.”1권의섭, 〈니체의 약자의 양심과 주권적 양심에 대한 고찰〉, 철학논총 80.2, 2015. pp. 76-77.
  • 여기서 ‘부채이론’이란 계보적 고찰을 통해 얻은 ‘죄의식’에 대한 기원으로, 고대부터 이어져온 인간의 교환 · 경제 행위에서 얻은 것에 대한 상응물(그것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것)을 늦게 지불하게 되는 경우에 가지게 되는 ‘채무 의식(내가 빚을 졌다)’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이 발전했다고 보는 니체의 시각을 말한다. 니체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는 대상을 교환하는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채권자-채무자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채무자로 하여금 ‘빚을 졌고 이를 갚아야 함’을 기억하게 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 (전략) … 바로 이 계약관계에서는 약속하는 자에게 기억을 심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러한 계약관계야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냉혹하고 잔인하며 고통스러운 것을 발명해내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채무자는 자신이 빚을 갚을 것이라는 약속을 채권자가 믿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한 약속의 진지함과 성스러움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빚의 상환을 자신이 져야 할 의무나 책임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새기기 위해서, 그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는 채권자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다른 것, 그가 권한을 갖는 어떤 것, 예를 들면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아내, 자신의 자유나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조차 저당 잡힐 것을 계약하는 것이다. … (후략) …

    #5.
  • 니체는 사회가 발전하고 문명이 고도화됨에 따라 점차 사람들이 자신의 현존을 위해 존재하고 노력했던 조상들에 대한 기억 의식이 점차 조상과 그 세대의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서 조상과 그의 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 즉 ‘조상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 의식’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러한 부채 의식이 ‘조상’과의 거리가 더욱 증대됨에 따라 그 선조가 미신 속에서 각종 힘을 획득하고, 결국은 ‘신’으로 자리함에 따라 ‘신에 대한 부채 의식’으로 변질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 (전략) … 여기에서 종족은 오로지 조상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으로 존속한다는 확신이, 그리고 희생과 업적에 의해서 조상에게 되갚아야한다는 확신이 지배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빚을 인정하며, 더구나 이 빚은 이러한 조상이 강력한 정령으로 계속 존속하면서 종족에게 새로운 이익과 힘을 끊임없이 증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늘어간다. 조상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러는 것일까? 그러나 저 야만스럽고 ‘영혼이 빈약한’ 시대에는 ‘아무런 대가도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조상에게 무엇을 되돌려줄 수 있는가? 제물(가장 거칠게 이해하자면, 처음에는 음식물), 축제, 예배당, 의례, 특히 복종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관습은 조상이 만든 작품으로서 또한 그들의 법령이자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조상의 은덕을 충분히 갚고 있는가? 이러한 의혹은 계속해서 남아 있고 자꾸만 자라난다. 때때로 이러한 의혹은 ‘채권자’에게 한꺼번에 엄청난 상환을, 즉 무서운 보상을 할 것을 강요한다(예를 들면 저 악명 높은 첫아이의 희생과 같은 것으로 언제나 피, 그것도 사람의 피를 강요한다). 조상과 그의 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 조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은 이러한 종류의 논리에 따라 종족 자체의 힘이 증대되는 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즉 종족 자체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고 더욱 독립적이 되고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서 필연적으로 커진다. … (중략) … 가장 강력한 종족들의 선조는 증대되는 공포 자체의 상상에 의해서 종내에는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지게 되고, 신적인 무서움과 상상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밀려들어 갈 수밖에 없게 된다. 선조는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으로 변형된다. 아마도 여기에 신들의 기원 자체가, 즉 공포로부터의 기원이 존재한다! … (후략) …

    #19.
  • 니체는 선조들의 ‘가치평가’, 선조들의 ‘입법’에서 기원하였을 전통과 풍습에 대해 복종하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부채 의식’이 선조들이 ‘신’의 영역으로 마침내 올라섰을 때 ‘그 어떠한 대상물로도 이를 변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상, 그리고 이에 따라 자신은 ‘파산한 채무자’이며 따라서 ‘구제불능의 죄인’이라고 여기게 되는 그리스도교에 이른다고 본다. 처음에는 단순한 채무자의 ‘책임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이 책임 의식이 ‘결코 변제받을 수 없는 부채에 대한 의식’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인간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존재하는 ‘잔인함’의 방향을 틀어 스스로를 단죄하고 고통 위에 자발적으로 올라가도록 하는 ‘병’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가 보는 〈양심의 가책〉인 것이다.

    … (전략) … 빚과 의무라는 개념들의 도덕화와 함께, 즉 그것들을 양심의 가책 속으로 되밀어 넣는 것과 함께, 앞에서 서술한 전개의 방향(무신론을 통해서 무구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방향)을 역전시키거나 최소한 그 전개를 중지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리하여 이제 비관적인 일이지만,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빚의 완전한 변제를 향했던) 시선은 강철과 같은 불가능성에 부딪혀 절망적으로 뒤를 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저 ‘빚’과 ‘의무’ 같은 개념들은 뒤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그것이 먼저 채무자를 향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양심의 가책은 그런 식으로 채무자에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잠식하고 퍼져나가고 무좀처럼 넓고 깊이 자라난다. 그 결과 마침내는 빚을 상환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죄도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즉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영원한 벌’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상은 심지어는 ‘채권자’에게까지 향하게 된다. … (후략) …

    #21.
  • ‘부채이론’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발생하게 되는 ‘내면화’와 관련된 니체의 견해인 ‘내면화이론’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격성이 공동체, 즉 국가 등이 자신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낸 (정확히는, 국가가 성립될 때 ‘지배 계급’에 상응하는 민족이 정한) 가치 부여와 입법에 의거, 그가 사회의 규칙들(도덕들)에 억압됨에 따라, 즉 인간이 ‘길들여’지고, ‘사회화됨’에 따라 본래는 타(他)를 공격하고 지배함으로서 얻었던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추구가 외부로 표출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남은 유일한 방향인 자기 자신으로 향하여 스스로가 스스로를 학대하게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라는 설명을 말한다.
  • 권의섭(2015)이 지적하듯 “니체는 외부의 강력한 벽이 자신의 공격적 힘을 내부로 향하게 하여 자신에게 잔인하게 대하고 거기에서 병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양심의 가책으로 이해한다”. 이 때 “외부의 강력한 벽이란 국가의 힘, 법의 힘, 관습의 힘과 같은 것이다.”2권의섭, op. cit. p. 76.

    … (전략) … 그러한 변화란 인간이 결국 사회적인 평화의 벽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 육지 동물이 되든가 그렇지 않드면 사멸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던 바다 동물에게 일어났던 것과 꼭 같은 일이 무질서, 전쟁, 방랑, 모험에 잘 적응하고 있던 이 인간이라는 반동물(半動物)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들의 모든 본능은 단번에 가치를 상실하고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물에 의해서 운반되어왔지만 이제부터는 발로 걷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운반’해야만 했다. 무서운 무게가 그들 위에 놓이게 되었다. 가장 간단한 일조차도 그들에게는 버겁게 느껴졌다. … (중략) … 이 불행한 인간들은 사유, 추리, 계산, 원인과 결과의 결합에 의존하게 되었고, 가장 빈약하고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관인 ‘의식’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나는 이처럼 비참한 느낌, 이처럼 짓눌리는 듯한 불쾌감이 일찍이 지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저 오래된 본능이 통상적으로 요구하던 것을 갑자기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요구에 따르는 것이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을 뿐이었다. 대체로 이 본능들은 새로운, 말하자면 지하적인(은밀한) 만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모든 본능은 내면을 향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나중에 ‘영혼’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개의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얇았던 내면세계 전체가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이 저지됨에 따라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갖게 되었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조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 무엇보다도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 중의 하나이다 ― 거칠고 자유롭고 방황하는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거꾸로 돌려서 인간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사라지고 관습의 억압적인 협소함과 규제 속에 처박혀진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박해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그를 길들이기 위해 가둬둔 우리의 창살에다 몸을 부딪쳐 상처투성이가 된 이 동물, 황야를 향한 향수에 지쳐 스스로 모험과 고문대 그리고 불안하고 위험한 야만상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이 궁핍한 동물, 이 바보, 향수에 사로잡힌 채 절망해버린 이 죄인이 ‘양심의 가책’을 발명한 자가 된 것이다. … (후략) …

    #16.
I.2.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비판하는 이유

그러나 이와 함께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 무서운 병도 생긴 것이다. 이러한 병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을 동물적인 과거로부터 폭력적으로 떼어놓은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와 새로운 생존조건 속으로 뛰어든 결과이고, 지금까지 공포를 불러일의는 자신의 힘과 쾌감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한 선전포고의 결과였다. 이러한 사실에 덧붙여 말하자면 다른 한편으로 동물의 영혼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지상에 너무나 새롭고 심오하며 전대미문의 것이자 수수께끼 같은 것, 모순으로 가득 찬 것, 미래로 충만한 것이 존재하게 되면서 지상의 모습이 본질적으로 변화해버렸다.

#16.
  • 니체가 〈양심의 가책〉을 비판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그것이 약자의 원한 정신에서 기원하였기 때문에 허구라는 점, 둘째는 이 양심의 가책이 ‘삶을 부정하고 재단하며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 그 기형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 셋째는 다양성과 능동성을 발휘하는 건강한 인간으로 되기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 물론 이상의 세 가지 이유는 아래의 서술로 인하여 결국 “〈양심의 가책〉은 반-인간적이기 때문이다”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것이다.
  • 〈양심의 가책〉이 약자의 원한 정신에서 기원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양심’과는 별개로, 니체 스스로가 그것의 대립물로서 강자의 ‘양심’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한다.
  • … (전략) …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관습의 도덕에서 다시금 벗어난 개인이며,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인(왜냐하면 ‘자율적’과 ‘윤리적’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지닌 인간,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그 자신이 마침내 성취하여 체화한 것에 대해서 모든 근육을 경련시킬 정도로 긍지를 갖는 의식이, 자신의 힘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완성에 도달했다는 감정이 존재한다. 진정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이 해방된 인간, 자유로운 의지의 소유자, 이 주권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모든 자보다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자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신뢰와 공포와 경외(그는 이 세 가지 모두를 받을 만하다)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동시에 자신에 대한 이러한 지배와 함께, 환경과 자연 그리고 끈질긴 의지를 갖기 못한 신뢰할 수 없는 피조물들에 대한 비래도 필연적으로 그에게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어찌 모르겠는가? 자유로운 인간, 끈질긴 불굴의 의지를 소유한 자는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을 척도로 하여 타인을 보면서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들, 강한 자들,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 즉 주권자처럼 진중하고 드물게 그리고 오랜 숙고 끝에 약속하는 자, 쉽사리 타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을 신뢰할 때 그러한 신뢰에 의해 신뢰받는 자에게 영예를 부여하는 자, 자신의 약속을 고초를 겪으면서도 심지어는 ‘운명에 저항하면서’까지도 지킬 정도로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하는 자, 이러한 모든 자를 존경한다. 또한 필연적으로 그는 지킬 수 없으면서도 약속을 하는 허약한 허약한 허풍쟁이들을 걷어찰 것이고, 약속을 입에 담는 순간 이미 약속을 깨버리는 거짓말쟁이를 채찍으로 응징할 것이다. 책임이라는 비범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 그러한 드문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가장 밑바닥까지 침투하여 본능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지배적인 본능에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면 그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주권자로서의 이 인간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부를 것이다.

    #2.
  •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양심’은 결국 첫 번째 논문에서 논의된 바 있는 ‘강자’와 ‘약자’의 차이에 의하여 기원하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에게 있어 주인도덕(군주도덕, 귀족도덕)에 따라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때 있어 차이가 되는 것은 그들의 가치 평가가 근본적으로 긍정에서부터 출발하는지 아니면 부정에서부터 출발하는지이다. 들뢰즈의 해석을 가져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들의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가 힘들에 대하여 긍정의 질을  부여하는지 아니면 부정의 질을 부여하는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강자’는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의지, 즉 ‘자기 자신을 고양 ·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인 힘에의 의지를 거스르거나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전면에 드러낸다.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위하고 사유하는 ‘강자’는 따라서 자신이 아닌 사회 그리고 관습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서 ‘자유롭게(예측 불가능하게)’ 행위한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대상과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세계를 해석한다. ‘강자’가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그가 입법자로서 행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사물에 대한 쓰임을 부여하고 그것의 가치를 정해줌으로써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는 내면과 세계에서 경쟁하는 수많은 ‘힘’, 즉 동인(動因,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들의 차이들을 확인하고 그중 하나를 의지(Willing)함에 따라 먼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긍정의 질을 부여하고 그런 뒤에야 그 반대로서의 유익하지 못한 것들을 구분하는데, 이들은 유익하지 못한 것들마저도 인정하지 이들을 악마화하지는 않는다.
  • ‘약자’ 또한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는 이들의 힘에의 의지는 이들이 굴종하고 지배받은 역사에 의하여(즉, 관습과 전통,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성역’에 기꺼이 도전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 맹목적으로 복종한 역사에 의하여) 오랜 시간 타(他)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표출될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바로 이 역사에 의하여 그들이 가지게 된 ‘강자’, 즉 지배 계급에 대한 원한에 의하여 뒤틀린 나머지 먼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 즉 자신에 대한 지배의 원천되는 자들에 대한 부정의 질을 부여하고 이들을 ‘악’으로 규정한 뒤, 그런 뒤에야 그 반대로서 ‘선’한 자, 즉 자기 자신을 상정하였고 피지배계급으로서 끊임없이 시달린 억압과 지배받음으로부터의 고통을 오히려 스스로 원하는 마조히스트가 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 즉 니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통상의 도덕 · 사회적 규범 · 법률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 가지게 되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자들이 이러한 절대성에 도전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원한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역설적이지만 역사와 ‘노예도덕’의 발전에 따라서 오히려 죄의식과 ‘인간성의 내면화’가 고도화됨에 따라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으로 이어진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 그런데 니체가 지적하고 있듯 이들 약자들이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질서, 즉 사회의 규범과 ‘관습의 도덕’은 결국 그 사회를 맨 처음 구성한 지배 계급 또는 선조들이 정한, 그들의 ‘자유’에 따라 정한 상대적인 질서일 뿐이라서, 이것이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하나의 허구적 믿음(=미신)에 불과하다. 도덕과 양심이 가져다주는 가치평가가 과연 절대적인가? 니체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 진리, 사물의 본질(or 이데아)은 존재하지 않고, 세계란 오직 현실 속에서 수많은 대상들이 존재하고 경쟁하는 생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약자들이 믿는 ‘절대성’이란, 약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가질 때 그를 구속하고 있는 ‘양심’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도덕’이란 결국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도덕의 절대적 지위와 함께 ‘양심의 가책’은 당연히 폐기되어야만 한다.

    다른 맥락에서 니체 또한 가치평가의 객관적 척도를 제공하는 실체로서의 양심능력을 부정한다. 이미 객관적인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니체에게 양심은 최종적 가치판단의 심급일 수 없다. 니체에게 양심의 소리는 다양한 힘(Macht)의 관계와 힘 작용의 복합적 결과물로서 이해된다.

    권의섭, “니체의 약자의 양심과 주권적 양심에 대한 고찰”, 철학논총 80.2. 2015. p. 72.
  • 둘째에 해당하는 〈양심의 가책〉이 삶을 재단하고 부정한다는 점은 위를 살펴보았을 때 자명해진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삶이란 기독교적 가치관 하에서는 철저히 부정되는 공격성과 잔혹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 (전략) … 삶이란 본질적으로, 즉 그 근본기능에서 침해, 공격, 착취, 파괴를 통해서 기능하고 이러한 성격을 결여한 생명이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해, 공격, 착취, 파괴도 그 자체로 결코 ‘불법’일 수는 없다. … (후략) …

    #11.
  • 야성적으로는 생존이라는 본능에 의하여, 정신적으로는 자유라는 본능에 의하여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 타(他)가 욕망하는 것이 충돌되는 것을 일상적으로 확인한다. 먹이 사슬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살아가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물의 명(命)을 끊어서 이들의 조직을 섭취 · 소비해야 하는 운명에 있고, 인간 군상이 이루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회의 어떤 면들이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정치 결사체를 구성하고 대립하고 투쟁한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꾀할 때 우리는 국가에게도 결국 인간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이기심과 생존 본능 속에서 당연히 기원하는 지배, 공격, 착취가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니체는 평화, 항구적인 평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니체에게 있어 현실, 즉 삶이란 궁극적으로 생명체 그 자신이 처한 본질적 운명에 의하여 끊임없이 의욕하고 투쟁하는 행위의 연속이다. 니체는 존재하는 것 이상을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보이는 것 그대로를 긍정한다. 이 차이를 갈구하는 것이며 동시에 투쟁이고 대립이며 항구적인 평화의 정확한 반대인 이상, 평온과 비-투쟁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도덕 그리고 그것과 결부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간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요구받는 인간인 셈이고, 따라서 그러한 도덕에 따르는 인간은 당연하게도 스스로의 본성 즉 ‘삶’을 엉뚱하게 재단하고 그와 반대되는 가치들을 보면서 ‘삶’의 자연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 두 번째 논문, 역자의 5번 주석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선한 의도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성을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실행하도록 요구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죄의식을 갖게 하는” 〈양심〉그리고 그것의 작용인 〈양심의 가책〉은 진정으로 잔인함의 극치에 달한 것이라는 점이 니체가 ‘양심의 가책’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 셋째로 지적되는 ‘능동성과 다양성을 발휘하는 진정으로 강한 인간’이 되기를 방해한다는 점도 이 맥락에서 당연히 귀결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상술하였듯 니체가 보는 ‘삶’이란 의욕과 투쟁의 연속이며, 그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서로 다른 생물들의 ‘힘에의 의지’의 경쟁과 그것으로 인한 변화이다. 니체는 〈양심의 가책〉은 곧 사람들이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도덕에 맹목적으로 복종한 나머지, 그것이 요구하는 불가능적 성격을 인지하지 못한 끝에 스스로를 착취하게 된 결과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이러한 도덕 하에서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고 의심하는 능력을 상실한, 진정으로 ‘철학함’이 결여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간으로 가득 찬 세계란 곧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인간이 결여된 세계, 사실 변화하는 것이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 변화를 인지하더라도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인간으로 가득찬 세계를 가리킨다. 이러한 세계에서 압제에 대한 인식이라던가 패러다임의 전환, 인류의 진보는 영원히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은 당연히 문제이기는 하지만 둘째의 문제가 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인간은 그 스스로의 본능에 반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의 ‘건강’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비주류적으로, 전심전력으로, 격정적으로, 기회주의적으로, 절치부심으로, 원색적으로” 행위하는 것이 그의 ‘생’이자 가장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혼란에 굴복하여 거짓 의미와 절대성이라는 우상을 세워 숭배한 끝에 ‘능동성’마저 포기해버린 유약한 인간이 된다는 점에 있다. 니체가 능동적이고 다양성을 보는 인간을 긍정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따라서 그것이 ‘생’이고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3. [추가] ‘긍정’의 철학자로서의 니체와 ‘힘에의 의지’

니체의 말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무언가를 격렬하고 원하고 획득하는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산출하는 데 존재한다. 힘에의 의지로서의 힘은 의지가 의욕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 안에서 의욕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역, 2007. 철학과 현실사. p. 39.
  • 니체의 용어 중 ‘힘에의 의지’를 해석함에 있어 주의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힘’이라는 단어에 대한 통념에 사로잡혀 이 용어가 지배욕과 소유욕을 비롯한 모든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짓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듯, 니체의 힘에의 의지란 사회적인 영역, 물질적인 영역에서 작용하는 의지라기보다는 어떤 생물을 움직이는 여러 원인들 ― 이를테면 ‘~하고 싶다’로 표현되는 욕망(가장 가까운 것은 프로이트의 이드(id)일 것이다), ‘~해야 한다’로 표현되는 약속 · 의무(가장 가까운 것은 프로이트의 초자아(superego)일 것이다), ‘~하자’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어떤 것(가장 가까운 것은 프로이트의 자아(ego)일 것이다)들이 그의 내면에서 그의 움직임, 그의 행위와 사유함의 출발점 즉 동인(動因)들로서 병존하고 있는 가운데 그것들 중 어느 하나가 그를 움직이게 할 때 그 동인들 사이에서 부여되는 위계질서에 대하여, 그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것(정확히는, 그러한 위계질서가 부과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 ‘힘’ 사이에 위계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은 힘과 힘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A라는 행위를 하고 싶다/해야 한다/하자’와 ‘B라는 행위를 하고 싶다/해야 한다/하자’와 같은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할 때 만약 A가 아닌 B를 택했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후자 즉 ‘B라는 행위를 하고 싶다/해야 한다/하자’라는 마음 속의 어떤 움직임에게 더 높은 가치를 이미 부과하고 있고 따라서 그 높은 가치를 우선 적용하여 행위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가 ‘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물리적인 힘, 통상적인 폭력에 결부된 바로 그 ‘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니체가 말하는 ‘힘’은 동인(動因)이며, 들뢰즈의 해석대로 ‘의지’란 힘과 힘 사이의 관계이고, 이 힘과 힘 사이의 관계들이 정해질 때 그 정해짐으로부터 드러나는 또 하나의 관계가 바로 ‘힘에의 의지’인 것이다.
  • 위계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높고’ 더 ‘낮은’지, 즉 어느 것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며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지를 판정하는 행위임을 고려할 때, 결국 힘에의 의지가 하는 것이란 가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가 모든 생물은 힘에의 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말할 때 이를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들을 어쩔 수 없이 공격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때 니체가 말하는 것은 모든 생물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 평가 기준을 가지고, 그 가치 평가 기준에 따라서 사유하고 자유로이 행위하는 존재라는 사실 선언이다.
  • 물론 니체가 ‘힘에의 의지’와는 별개로 생물의 생존과 결부된 잔혹성과 공격성, 그리고 이로부터 기원한 역사적인 인간의 잔혹성과 ‘타인(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즐기는 역사’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를 이러한 병기된 사실 진술을 토대로 재구성한 끝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예찬’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충실히 따르는 ‘강한 인간’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 자신이 당한 피해 그리고 자신에게 부과되는 고통도 충분히 빠르게 잊어버리고 견딜 수 있는 인간이라고 진술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곧바로 부적절한 이해임이 명실상부하게 드러난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서로 다른 ‘강한 인간’들의 투쟁, 생물들의 투쟁이 ‘전쟁’ 혹은 ‘폭력’이라는 양상을 동반할 수는 있지만 니체의 철학이 그것이 옳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니체의 철학은 극단적인 양상으로 투쟁이 전개될 때에 단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애써 부정하며 거짓을 택하는 것보다는 긍정하기, 즉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를 택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철학은 가장 솔직한 철학이고, ‘긍정’의 철학이라 불릴 만하다. 니체는 구역질 나는 것, 더러운 것, 퇴출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인간의 결점으로 간주되던 것, 즉 존재하고 있음에도 ‘부정’이라는 왜곡을 받은 것들로부터 왜곡의 ‘딱지’를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II. 중심 논제에 대한 의견

제3차 독서 모임에서 다루게 되는 중심 논제는 다음과 같다.

  • V.1.1. ― 니체의 위와 같은(우리에게 익숙한 ‘선’의 관념, ‘양심의 가책’ 일체가 사실은 역사적 약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강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즉 자신들이 ‘강자’로 올라서고 강자들을 ‘약자’로 전환시키기 위해 발명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 근원의 사악함과 이들 관념이 ‘인간이 자신을 공격하며 상처입게 만들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도덕 관념이라고 주장) ‘선’,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에 동의할 수 있나요?
  • V.1.3. ― 니체는 삶의 의미가 이른바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즉 더욱 강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니체의 ‘삶의 의미론’에 동의할 수 있나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II.1. 중심 논제 V.1.1.에 대한 의견
  • [주장] (제한적 동의) 니체가 ‘선’과 ‘양심의 가책’이 역사적으로 ‘약자’들이 가치들의 ‘전환’을 꾀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할 때, 그러한 ‘선’과 ‘양심의 가책’이 절대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들이 ‘인간을 괴롭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만 그 기원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보류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비록 다른 ‘사회계약론’ 등과 같은 다른 기원에 비해서는 훨씬 현실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 근거
    • 니체가 ‘선’과 ‘양심의 가책’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법은 ‘계보적 기법’으로, 특히 단어의 발전사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번져왔는가에 대한 고찰이 니체가 ‘선’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을 찾아나가는 출발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논문의 5절에서 ‘Fin’과 ‘Fin-Gal’의 연관성, ‘Bonus’와 ‘Duen-lum’ 사이의 개연성을 지적하고 마침내는 독일어 ‘Gut(좋음)’과 ‘God(신)’, ‘Goths(고트인)’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부분이라던가, 두 번째 논문의 4절에서 독일어 ‘Schuld(죄)’와 ‘Schulden(빚)’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부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단어’ 사이의 거리 분석에서 출발한 니체는 곧 민족 간의 투쟁과 정복을 동반하는 국가의 발전사와 그 내부에서의 형벌과 입법의 발생 역사를 진술하고 있다. 니체는 ‘강한’ 민족이 정복자로서 ‘약한’ 민족을 지배한 역사 속에서 지배 계급으로 올라선 민족이 그 사회의 가치를 규정하고, 그 가치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부터 혹은 그들이 정한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기억을 새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형벌’을 고안하였고, 마침내는 충분히 강해진 그들이 ‘자비를 베푸는 법’을 배웠다고 진술하고 있다.
    • 그런데 여기서 니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점을, ‘선’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비록 니체의 설이 그럴 듯 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선’과 ‘양심의 가책’이 니체의 주장대로 기원하였는지 아닌지는 역사적인 증거를 통하여 하나씩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 물론 니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경우 재앙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어리석음을 유발한 신의 잘못’으로 돌렸다는 점을 하나의 역사적 증거로 들이밀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호메로스로 ‘전해져 오는’ 그러한 고전 문학들의 진술들이 니체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설령 그러한 신화가 구전되는 와중에 ‘날조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구전의 과정 중에 구전에 개입된 사람들의 사상과 가치관이 은밀하게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니체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아예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 그러나 이를테면 니체가 ‘선사시대에는 악행을 범한 자가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았던 적은 없고, 단지 피해를 입은 자가 분노를 풀기 위하여 그에게 보복을 가하는 것에서부터 형벌이 출발했다’라고 말할 때 니체가 그렇게 주장하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문자 발명 이전의 선사시대에, 즉 인류의 가장 초창기에 대하여 우리가 온전히 그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그들이 어떤 의미의 ‘형벌’을 행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오직 그들이 남긴 물건들 그리고 그들의 몸에 남은 흔적들만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의 시대에도 별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의 출발이 ‘보복’ 그리고 ‘부채의식’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하나의 그럴듯한 가설로 여겨야 하지, 그것이 온전한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 그러나 니체의 견해는 적어도 루소 등이 주창한 ‘사회계약론’보다는 인간의 본성으로 생각되는 것을 놓고 과거를 상상한다고 했을 때 ‘더 그럴 듯 한 가설’이라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모든 인간이 투쟁과 투쟁의 상태에 지쳐서 한날 한시에 자신의 자유 일부를 헌납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것보다는 투쟁과 정복의 결과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생겨났고 이 관계들의 집합으로 공동체와 국가가 출범했으며 이후 그 관계의 유지,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을 위하여 가치 부여가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니체가 인정한 바 있는 인간의 공격성과 잔혹성을 고려할 때에 훨씬 채택하고 싶은 가설로 보인다.
    • 니체의 ‘선’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이 옳고 그르냐라는 질문과 별개로 가장 격정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선’과 ‘양심의 가책’의 상대성이다. 오늘날 우리는 국제 정치 (대표적으로 전쟁; 서로가 ‘선’이라 주장하고 반대가 ‘악’이라고 주장하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는 물론이거니와 국내 정치 (대표적으로 서로가 ‘선’이라고 주장하고 반대가 ‘악’이라고 주장하는 양당) 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선’과 ‘악’이라는 점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양태를 본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어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존재한다기보다는 그저 병존하며 경쟁할 뿐이고,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해 보인다. 간통죄의 폐지, 동성애에 대한 인정 등과 같이 시대에 따라서 하나의 가치가 폐기되고 다른 하나의 가치가 득세하는 역사가 목격된다는 점은 니체의 절대성에 대한 부정, 생성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훨씬 실제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 따라서 ‘선’과 ‘양심의 가책’에 대한 니체의 분석은 실제로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보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지만, 적어도 그 분석이 그들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출발점으로서 제시될 때는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II.2. 중심 논제 V.2.3.에 대한 의견
  • [주장] (동의)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의 추구, 즉 ‘더 강하고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이란 곧 타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가치 평가에 따라 창조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주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니체가 말하는 ‘삶의 의미 (또는, 변화무쌍한 삶의 수많은 변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세련된 통일성)’가 ‘힘에의 의지’의 추구라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 근거
    •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점이라고 말할 때, 그 뜻은 절대성이라는 ‘허구’로부터 벗어나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를 긍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인지된 세계에서 기꺼이 자신만의 가치와 창조를 행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다만 이 때 ‘삶의 의미’가 그러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가 경계한 것이 일정한 것 없이 변화무쌍한 세계를 직시하지 못한 끝에 허구의 의미를 부과하면서라도 ‘절대성’을 추구한 인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니체가 주장한 ‘힘에의 의지’를 다시 ‘우상’ 혹은 ‘절대성’으로 간주하는 것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어떤 의지(Depend)할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하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니체가 보기에는 이러한 태도가 그의 유약함의 증거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만약 여기서 의지(Willing)한다는 것을 어떤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할 때는, 즉 ‘삶에서 의지하는 것’, ‘삶에서 바라볼 방향’이 ‘삶의 의미’에 대한 상응물이라고 해석할 때는 니체가 지적하는 ‘힘에의 의지’에 대한 추구가 ‘삶의 의미’라고 할 때 그것이 니체가 경계한 것에 들어간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 즉, ‘삶의 의미’가 ‘삶에서 고정불변 혹은 일정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 자신 외부의 것, 따라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의미가 제거된 ‘우리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것’, ‘우리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방향성’에 대한 진술이라고 해석된다면, 오직 이 때에만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 진정으로 ‘강하고’, ‘위대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당당히 행위하고 해석하며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 인간의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니체가 지적한 바대로, 그것이 ‘절대성’보다는 ‘상대성’과 ‘병존성’으로 가득찬, 다원적인 세계에 대한 훨씬 바람직하고 건강하며 자연스러운 태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절대성’과 ‘단일성’에 따라 세계를 재단하고 해석하는 것 자체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약, 위 질문에서 ‘삶의 의미’가 어떤 ‘고정점’, ‘움직이지 않아 천착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상응한다면 위 질문은 니체에 대해 잘못 던져진 질문이라고 해야만 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권의섭, 〈니체의 약자의 양심과 주권적 양심에 대한 고찰〉, 철학논총 80.2, 2015. pp. 76-77.
  • 2
    권의섭, op. cit. p.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