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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서일지 #16. 데버라 캐머런, 『페미니즘』 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그는 도덕의 파괴자이지만, 바로 이 점에서 동시에 진리의 파괴자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나의 빛 (Veritas Lux Mea)’이라는 문장은 부적절하거나 불쾌한 소리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가장 건전한 문장이란 ‘진리는 나의 병 (Veritas Morbus Mea)’이라던가 ‘진리는 나의 독 (Veritas Venerium Mea)’, 또는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Veritas Non Est Veritas)’일 것이다.
커피사유, 〈Veritas Morbus Mea〉 中
지난 해 가을학기의 시작과 동시에, 나는 중대한 폐기를 선언했다. 물론 일차적으로 내가 거부한 문장은 내가 서 있는 대학의 모토, 즉 ‘진리는 나의 빛 (Veritas Lux Mea)’이나, 조금 더 깊은 층위에서 내가 거부한 것은 비단 문장뿐인 것은 아니다.
지난 4년을 기억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에서부터 출발한 의문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 야마다 무네키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거치면서 〈자살〉에 관한 철학적 의문으로 이어진 4년을, 니체와 도가 사상의 대립에서 출발한 의문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통해 유사체를 획득하고 8월에 《OMORI》를 통해 오랫동안 이어진 무거움, 즉 절반의 우울과 절반의 회의와 결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1이와 관련해서 나는 아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작은 깨달음을 독서 모임 구성원들과 2월에 공유하기 위해 이미 지금까지 썼던 어느 글보다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고 있는 모임 계획서가 여전히 퇴고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그 모임 계획서를 올리면서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OMORI》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예술과 인간 정신의 관계, 인간 정신과 나의 관계라는 세 개의 선율 속에서 내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분명 미쳤다. 관련해서 약간의 ‘틈’이라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한창 그 모임 계획서의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던 지난 해 12월 말부터 금년 1월 초까지의 내 기록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피어오른 〈식인의 욕구〉 즉 어쩌면 가장 흥미로울 인간 정신, 스스로의 내부 구조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진 지난 4년을 기억한다. 대학의 모토를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가장 중요한 종착역에 도달하는 듯한 나의 노선을 되짚어볼 때면, 나는 니체가 얼마나 스스로의 삶에서 중요한 ‘다이너마이트’였는지를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다.
‘다이너마이트’란 무엇인가? 분명 나는 지난 해 8월 독서 모임에서 《도덕의 계보》를 읽을 때 그 모임 계획서에서 “니체 철학이 가지는 압도적인 파괴력”을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다이너마이트’란 어떤 것에 대한 파괴, 어떤 것에 대한 부정을 말하는가?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를 언급함에 있어 무엇이 파괴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폭발하는가라는 의문도 분명 주요하게 다루어질 가치가 있다. 분명 나는 지금까지 부정과 비판의 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서양의 니체 철학, 그리고 동양의 도가 철학 위에서 “‘성역 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일상적인 것들을 다시 한 번 낯설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철학을 확인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주로 집중한 것은 그렇게 해서 파괴되는 우상들, 키치들, 믿음들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문제였지, 어떻게 해서 그러한 망치가 무자비하게 떨어져서 그것들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니었다.
데버라 캐머런의 《페미니즘》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물론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 동기는 철학적 의문을 따라가는 나의 유일무이하며 가장 소중한 탐구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젠더 갈등에 대한 지적 호기심 그리고 역시 〈식인의 욕구〉라고 해야 더욱 정확하겠지만, 대학 입학 이전부터 내가 설명한 바 있듯 세상은 아(我)와 타(他)의 투쟁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므로 결국 인간은 외부의 우연한 사건들의 중첩 속에서 필연과 그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지 않던가?2그렇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논의한 철학적 여정 위에서, 《페미니즘》 역시 니체의 문제 의식과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은 의문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생각을, 그리고 어쩌면 니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직감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서 스스로가 《페미니즘》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바라보았으며 또한 이들의 문제 의식과 나의 철학적 여정사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냈는지를,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에서 다루는 주요한 문제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써 왔던 시니피앙(signifiant)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어제 완성했고 아마도 조만간에 공개하게 될 이 책에 대한 두 번째 독서 노트에 쓴 것처럼 “내가 어떤 기둥과 결별했으며 어떤 기둥을 다시 선택했는지”, “‘기둥’이 무엇인지, ‘문’이란 무엇인지, ‘키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밝히게 될 것이다. 나는 여성 뿐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은 분명 니체 철학이 여성에게 가지는 가치와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지도 모른다는 위험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흥미로운 유추 위에 서 있다. 그 추측을, 그 직감을, 그 관통을 이제는 밝힐 준비가 되었다. 그러니 기꺼이 뛰어들자, 저 반대쪽으로, ‘문을 열고’.
“우리는 천성이나 생물학을 ‘심오한’ 것으로 여기고, 문화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문화 또한 ‘심오하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93.
I. 책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바로 위에 기술하였으니, 이하에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대목을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I.1. 생물학적 성 對 사회문화적 성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역설을 언급했다.
인간종(種)에 암컷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인류의 절반은 암컷이다. 그런데도 여성성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 우리는 여성으로 존재하고, 여성으로 남아 있고, 여성이 되라고 요구받는다. 그 말인즉, 모든 암컷 인간이 반드시 여성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여성성이라고 알려진 불가사의하고도 위태로운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보부아르가 이 글을 쓴 1940년대에 인기 있던 사조는 오늘날 ‘본질주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본질주의는 보편적이고 변치 않는 ‘여성’의 본질이란 여성의 생물학적 생식 기능으로 결정되며, 여성성이란 여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봤다. 보부아르는 이러한 정의가 지나친 단순화라고 주장했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생물학적 범주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사회적 범주를 뜻하기도 한다. 사회적 범주로서의 ‘여성’이 되려면 암컷으로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양식과 자기표현 방식을 습득해야만 한다. 이에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1968년 이후, 영어권 페미니스트들이 이러한 통찰을 빌려 제2물결을 주도했다. 이들은 수컷/암컷을 의미하는 생물학적 섹스(sex)와 문화적으로 정의되는(혹은 이후 보편적인 체계가 되어 ‘사회적으로 구성된’) 남성성/여성성을 뜻하는 젠더(gender)를 이론적으로 구분했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p. 85-86.
I.2. 문화 또한 ‘심오하다’
왜 우리는 진화심리학이 들려주는 얘기에 이토록 솔깃한 걸까? 부분적으로는 우리 일상에서 젠더 구분이 고정되어 있고 불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한몫한다. 만약, 아무리 말려도 분홍색 물건만을 원하는 딸을 둔 부모라면, 딸의 그러한 고집은 단순한 문화적 규범이 아니라 더 심오한 무언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천성이나 생물학을 ‘심오한’ 것으로 여기고, 문화는 얄팍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문화 또한 ‘심오하다’. 선구적인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말했듯, 사회적 존재가 형성되는 과정은 “자발적으로는 습득하지 못할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아동에게 강요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고도로 강압적인 과정이다. 수년간 많은 페미니스트는 아동이 태어난 순간부터 그들에게 젠더화된 시각, 사유, 행위를 강요하는 과정들을 기록하려고 분투했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93.
I.3. 사회문화적 성이라는 ‘키치’ 그리고 ‘자유’
여성성을 옹호하는 목소리 중에 최근 영향력이 커진 주장은 트랜스 페미니스트 줄리아 세라노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페미니즘이 남성성을 선호하는 제도화된 가부장적 문화를 재생산한다고 비판한다. 세라노가 말하길, 페미니즘은 여아와 여성이 ‘남성적’ 자질과 활동을 더 잘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지만, 반대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문화는 여전히 남성이나 남아가 여성성을 표현하는 데 심한 불편감을 느낀다. 이 장의 서두에서 살펴본 비성차별적 양육의 예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부모들은 딸이 나무를 기어오르고 우주선 모형을 만들면 흐뭇해할지라도, 아들이 바비 인형을 사달가고 하면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다른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차이 뒤에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이 부모는 여성성을 향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남자답지 못한 소년이나 남성은 다른 남성의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남아의 특정 관심사나 행동을 저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남성이 다른 남성에게 하는 젠더 단속 행위는 남성에게 여성과 다르게 행동하도록 요구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를 드러내는 위계 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여성성 수행을 거부하는 여성들은 반항아일 뿐이지만, 남성성 규범을 어기는 남성은 반역자다. 각각에 따르는 처벌의 수위가 이러한 인식을 반영한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p. 103-104.
II. 우리는 왜 페미니즘에 주목해야 하는가?
- 서론에서 저자는 ‘페메니즘’이라는 기표(시니피앙3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면서 다룰 기회가 조금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니피앙 / 시니피에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철학자 소쉬르가 사용한 용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을 참조할 것:
https://ko.wikipedia.org/wiki/기표와_기의)와 결부되는 기의(시니피에)가 다양함을 밝히고 있다. “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으로 바라보는 시각,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 및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하는 관점, 그리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방법이자 분석 모형”이라고 보는 시각 모두를 다루고 있다. - 우리는 하나의 기표에는 하나의 기의만이 대응한다거나, 혹은 기표-기의의 관계는 아주 강력히 확립되어 있어서 일대일 대응 관계가 성립한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라캉이 지적했듯 기표와 기의는 서로 언제나 ‘미끄러진다’. 즉,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미’가 고정되어 있기를 바란다. 미끄러지고 끊임없이 변하면 혼란스럽기에 고정된 어느 한 지점을 지향하는 것이다.
- 나는 바로 이 지점이 니체가 이야기한 ‘우상’, 그리고 쿤데라가 이야기한 ‘키치’에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자의적인 믿음 위에 서 있는 동물이며, 가장 흥미롭게도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믿기를 원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이는 아마도 인간이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니체와 쿤데라는 모두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 니체와 쿤데라의 사유, 그리고 근 · 현대 철학의 사유로부터 우리가 주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시사점은 절대성은 하나의 허상이라는 시각이다. 즉,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 ‘과학적’이다고 생각하는 것,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따지고 보면 자의적인 기준에 의거하고 있는 분류 체계나 논리가 다수의 동의를 업고 우위를 범하고 있는 사상이나 시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그리고 어쩌면 세계는 이러한 여러 주장과 시각, 좀 더 원초적으로는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 나는 페미니즘을 근 · 현대 철학의 연장으로 이해하며, 집중하고자 하거나 바꾸고자 하는 현실의 영역은 다를지언정 그 본질은 니체 · 마르크스 · 프로이트라는 근대 3대 철학자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모두는 당연함의 폐기를 위한 담론이다. 의식적으로 되돌아보지 못했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무의식적으로 넘겨버렸거나 평소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우리 현실의 측면 그리고 우리 내면의 측면들을 성찰하고 다시 해부해보도록 함으로써 무지의 바다를 끊임없이 유영하는 운명 속의 인간이 잠시 즐길 수 있는 파도 하나를 던져준다.
- 왜곡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표적인 것들만 나열한다고 할 때, 니체가 이의를 제기한 것을 도덕의 절대성, 마르크스는 경제질서의 절대성, 프로이트는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도록 했다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젠더(gender)’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이라 평가할 수 있어 보인다. 근본적으로 이 물음은 우리에게 성별이란 무엇이며, 그 성별과 관련하여 나는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되묻게 한다. 특히 페미니즘 운동에서 ‘성별’에 따라 강요되는 사회적 역할, 그리고 여성의 차별적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에 대한 현재진행형의 논쟁은 자유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부터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물음까지 폭넓은 의문들을 제기한다.
-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 · 임금에서의 불공정성, 사실상 무급으로 진행되기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돌봄 · 육아 노동의 가치, 그리고 사회 · 문화적으로 자리잡은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하거나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규범 · 전통들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인간이 세계나 사회 구조와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위험한 생각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며, 또 근본적이거나 불변적이라고 여겨왔던 우리 사회 · 내가 처한 상황에 암묵적으로 부여되어온 당위성을 흔들고 이를 억압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을 제안한다. 페미니즘은 ‘적’을 제시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서의 ‘적’은 몇몇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남성’ 일반은 절대로 아니다. 표면적으로 페미니즘은 ‘성별에 따른 역할을 강요하고, 그 역할 강요 구조에서 기원하는 경제적 · 권력적 불평등 그리고 이를 재생산하는 구조’ 일반을 적으로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선언하는 ‘적’은 여타의 철학과 동일하게 상식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서는 페미니즘이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 구조의 개혁을 달성하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을 집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독자 · 호소 대상의 구체적인 생물학적인 성별(sex)와 무관하게 페미니즘은 사회적 성별(gender)와 관련된 시각을 넓혀주고, 상식으로 여겨져왔던 성(性)4성(性)에 관한 용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별로서의 성(性), 다른 하나는 성질 · 특성으로서의 성(性)이다. 여기서 나는 두 의미를 모두 고려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회 제도 · 자신의 가치 관념 · 의심없이 전제해왔던 몇몇 명제들에 대한 재고를 권유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페미니즘의 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구성하며, 또한 페미니즘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III. 페미니즘은 무엇에 주의해야 하는가?
- 페미니즘의 여러 분파들 중 한 갈래인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은 가부장제의 개혁이라는 근본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으로써 급진적 사회 재정비를 주장한다. 이러한 급진적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모든 사상 발전사가 그러했듯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한 가지, 사회 개혁을 주장하고자 할 때 페미니즘의 문제 의식에 동의하는 자가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부언하고자 한다.
- ‘지금 당장’의 변화를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범하는 실수 중 하나는 당장의 변화가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는 좌절에 맞닥뜨릴 때, 그 좌절을 분노로 전환하고 그 분노의 대상을 구조가 아닌 그 구조에 똑같이 처해 있는 동일한 사람들에게 잘못 투영한다는 점에 있다.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개인을 많은 경우 적극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하기에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며, 또 어떤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다른지 그리고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한 배경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통상 우리가 분노의 적극적인 표출 대상으로 삼는 ‘개인’은 추상화된 개인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레디컬 페미니즘을 믿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대남’들에 대한 거친 언사를 퍼붓는다. 이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부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매우 유감스럽게도, 사상의 이름과 연결지어서 그 사상의 이름 자체에 부정적 정동을 결부시키려는 시도에 동조하여) ‘페미’라고 표현하고 거친 언사를 퍼붓는다.
- 이러한 거친 반목과 대립의 구조에는 항상 ‘개인의 집단화’가 있었다. 조금 생각해보면 모든 개인은 제각각의 성장 배경을 가지며, 또 아마도 제각각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한 사람이 특정 집단이 가진다고 대표되는 속성 모두에 일치되는 속성을 가지는 것만도 아니다. ‘이대남’의 특성으로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지닌다를 비롯해 보수 정당을 지지한다, 선택적 공정을 주장한다는 특성이 열거되곤 하지만 모든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지닌 남성이 보수 정당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지지 정당이 없거나, 이익 대변 관계에 따라서는 민주당계를 지지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남성이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지닌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페미’의 특성으로 페미니즘 성향을 지닌다를 비롯해 민주당계 · 진보 정당을 지지한다, 높은 연대력을 보인다는 특성이 제시되곤 하지만 모든 페미니즘 성향을 지닌 여성이 보수 정당과 경쟁하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것만은 아니며 (지지 정당이 없거나, 보수 정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연대에 대한 동참을 거부하거나 별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젠더 논쟁으로 대표되는 거친 페미니즘과 관련된 대립에서는 상대를 지칭할 때 막연한 집단으로 상정할 뿐, 그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은 그 집단의 특성의 일부만 공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거나 우호적이지 않은 ‘특성’을 가진 집단과 유사한 특성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그 분노를 손쉽게 개인 각각에게 암묵적으로 투사하곤 한다.
-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개인이 범할 수 있는 실수 중 대표적인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이를 교정이나 교육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과 논쟁하거나 토론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신의 견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을 통한 설득이 실패한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상대의 교육 · 교양 · 지성의 수준이 낮다고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상정은 암묵적으로 자신의 주장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며 반대 주장은 도덕적으로 불의하다는 생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사람들을 조금 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전향’하도록 만든다거나, 그들에게 극단적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곤 한다. 그러나 일찍이 논하였듯 페미니즘에 제대로 동의한다면 두 가지 사항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조이지 그 구조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 둘째는 페미니즘의 사유가 갈라져나온 근 · 현대 철학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물음은 절대성에 관한 물음이며 그 교훈은 상식 · 절대성 · 도덕적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페미니즘에 동의한다고 주장하면서 페미니즘이 전제하는 두 가지 정신을 위배하여 ‘집단화된 개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의 도덕적 우월에 심취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제기나 혁신을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상실감 · 좌절감이라는 부정적 감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극단적 행위로 해석되지 않을 수 없다.
- 상술한 두 가지 실수, 즉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개인이 자신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개인을 ‘집단화’하여 분노를 표출하거나, 그들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전제한 뒤 이들을 ‘교정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철학적 뿌리에 상통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도, 페미니즘이 목표하는 사회 제도의 혁신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에도 중대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인간은 모순적 존재이며 또한 감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세계, 그리고 사회가 수많은 힘과 주장이 대립하고 경쟁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시대에 따라 그 힘들 중 무엇이 득세하느냐에 따라 제도 그리고 관습, 도덕이 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말로 구조를 혁신하고자 한다면 ‘세력을 획득하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득세를 위해서는 ‘헤게모니’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늘려야 하는데, 이는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설득은 주장의 논증 구조에도 좌우되지만 동시에 그 설득이 이루어지는 감정선에도 크게 좌우된다. 이를테면 ‘독서 모임의 오프라인 모임 날짜를 이틀 뒤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관철하고자 할 때 “이러한 사정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틀 뒤로 변경해야 할 듯 하다.”고 말하는 것과, “이틀 뒤로 변경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것이 있는데, 만약 이 문제가 발생하면 이는 당신들 책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에 지대한 차이가 있다. 논리적으로 건전한 주장도 그 주장이 상대에 대한 단정이나 매도와 동반되어 있다면 상대는 논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 주장을 듣는 것부터 거부하게 되기 마련이다.
- 그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적대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의 주장을 참을성 있게 경청할 수 있을까? 또,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은근히 하대하거나 도덕적으로 수준 낮은 사람으로 바라본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할까?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감정을 숨기거나 가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각종 문학과 고사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어 왔다. 사상적 부정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그 목적 달성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에 해당하는가는 의문에 대해, 과연 상대와 대화하고 타협하기조차 거부하는 태도가 적절한지를 따지는 것은 어려움이 적은 일이 아닐까 싶다.
- 따라서 페미니즘의 가치와 문제 의식에 동의하는 개인의 태도는 오히려 이러한 ‘집단화된 개인으로 파악하기’, ‘도덕적 우월성 가지기’를 경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 뿌리를 계승하여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자신이 반대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구조와 동일하게 단 하나의 믿음에 매달려서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비난하는데 생을 쏟아붇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찍이 카롤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지적했듯, 늘 자유롭고 열린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상세하고 자세히 살펴보고 섬세하게 구별하려는 노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열린 사회의 적들’에 대항해야 한다. 아무리 내가 믿는 가치에 반대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반목을 거두고 끝까지 그들의 의견을 듣고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 왜 그러해야 하냐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9월, 밀란 쿤데라로 돌아간다. 그의 문장은 페미니즘에서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젠더 갈등과 정치 갈등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가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실로 그렇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적’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며, ‘부조리’와의 대결을 마지막 순간까지 멋지게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점에 페미니즘은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도 하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이와 관련해서 나는 아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작은 깨달음을 독서 모임 구성원들과 2월에 공유하기 위해 이미 지금까지 썼던 어느 글보다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고 있는 모임 계획서가 여전히 퇴고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그 모임 계획서를 올리면서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OMORI》는 게임과 예술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예술과 인간 정신의 관계, 인간 정신과 나의 관계라는 세 개의 선율 속에서 내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분명 미쳤다. 관련해서 약간의 ‘틈’이라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한창 그 모임 계획서의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던 지난 해 12월 말부터 금년 1월 초까지의 내 기록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 2그렇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고 있다.
- 3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면서 다룰 기회가 조금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니피앙 / 시니피에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언어철학자 소쉬르가 사용한 용어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을 참조할 것:
https://ko.wikipedia.org/wiki/기표와_기의 - 4성(性)에 관한 용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성별로서의 성(性), 다른 하나는 성질 · 특성으로서의 성(性)이다. 여기서 나는 두 의미를 모두 고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