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서일지 #17. 데버라 캐머런, 『페미니즘』 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당신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볼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中
(Und wenn du lange in einen Abgrund blickst, blickt def Abgrund auch in dich hinein.)
인간 사회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수의 금지들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분석학의 차원에서 보면 프로이트가 일찍이 강조한 바 있듯 문화 일반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이를 표출하도록 하는 수단이기에 이 발견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지금까지 그러해왔듯 비틀어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 왔던 것들을 계속해서 당연히 지켜와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야만 한다(Es muss sein!)’1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그리고 키치.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을 생각하고 있다.고 배워 왔으니까.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웃어른이라면 그저 웃고 조용히 넘기는 침묵을, 집안의 주요한 결정은 가장 웃어른이 해야 하며 나머지 구성원들은 가급적 그 결정에 따르는 복종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곤 한다. 설과 추석 등 주요한 명절 때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면서 이러한 문화를 다시 한 번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런 문화 일반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 과연 그렇게까지 불변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드는 여러 사례들을 본다. 오래 전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제사 문화는 이제 간소화되거나 점차 없어지는 추세인 듯 하다.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 먼저’라는 새로운 모토 아래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과연 전통을 지키기 위해 특정 성별과 가계가 그렇게까지 고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당연한 것을 왜 의심하는가’하는 일갈이 적지 않게 울려퍼진다. 그러나 점차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왔던 것들, 문화와 전통 일반이 과연 스스로에게 이로운 것이 맞는지에 대해 도처에서 제기하는 의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문화 일반의 금지는 명절과 관련된 예법이라거나 예의범절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더 넓은 범주에서 특정한 개인을 금지시키고 또 특정한 개인을 허용한다. 당연한 것들을 지키지 않는 개인에 대해 문화는 그를 도덕적으로 문란하며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했다고 선언하며 사회적 · 실질적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적 매장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문화의 눈치를, ‘당연함’의 눈치를 본다. 인간의 정신이 분열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소극성을 드러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겪는 신경증의 원인은 이 같은 문명의 금지에 있다는 프로이트의 추측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살펴보았듯 작금에서 우리는 당연한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예전에 내가 밀란 쿤데라를 접한 뒤 썼던 바와 같이 “무거움이 과중해진 나머지 지금까지 져 왔던 무거움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는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무게를 부과한다. 인간은 그런 무게를 뒤로 지고서 비틀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간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니체가 말한 ‘낙타의 단계’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그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 없음을 가장 아래에서 발견하게 될 때, 그는 ‘사자의 단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아이의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도 이러한 개인을 위해 문화에 대한 반기를 드는 대서사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젠더 없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젠더가 억압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젠더를 표현하고 수행하며, 자기 정체성과 연관시킬 수 있는 세상이다. 나는 젠더가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운 세상을 원한다.”2이 인용문에서 ‘젠더’를 ‘키치’로 바꾸면, 정확히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된다.
로리 페니의 발언을 재인용: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153.
I. 서론
급작스럽게 잡힌 가족 일정으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점이 심히 아쉬운 새벽이다. 이 책이 나에게 촉발한 수많은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들을 따라간 여정들을 직접 육성으로 구성원들과 공유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아는 까닭이다. 한 번 ‘문을 열고 나가면’ 기둥은 흔들리게 되는 법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기둥이었으나 그것이 부실한 토양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면 첫째로는 허망함이, 둘째로는 분노가, 셋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가 등장하게 되는 것 같다.3여기서 나는 니체가 말하는 인간 정신의 세 단계: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아이’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낙타’의 단계는 모든 금지와 명령을 수용하지만, ‘사자’의 단계는 맹수가 그러하듯 이 모든 금지와 명령을 맹렬한 분노와 함께 보조리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아이’의 단계는 금지와 명령과 ‘더불어’ 산다… 물론 여기서 ‘더불어’는 나의 표현이며, 니체의 표현은 아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긍정’의 단계에 이른 인간 정신이다. 즉, ‘운명애’에 이른 정신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세 가지 단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이러한 감각은 물론 위험한 유추, 위험한 문제 제기, 발칙한 반격을 좋아하는 나의 정체성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설명을 위해서는 이 책의 후반부가 나 자신과 어떻게 상호작용했으며, 그 결과 내가 어떤 기둥과 결별했으며 어떤 기둥을 다시 선택했는지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둥’이 무엇인지, ‘문’이란 무엇인지, ‘키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밝히는 일이다. 그것이 결국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될 것이며, 또한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논의를 지난 10월에 써 놓은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또한 이 논의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아래에서 밝히고자 한다. 그러니 기꺼이 뛰어들자, 기꺼이 솔직해지자. 저 아래로, 저 심연으로. ‘문을 열고’.
키치 속에서 사는 것과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냉전 시기 미소의 우주 경쟁의 결과 최초로 대기권 밖에서 푸른 행성을 바라본 사람의 눈에 그 모습이 비쳤을 때였다. 이는 체계 속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체계의 한계, 이론의 한계, 사회와 도덕과 문화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그가 키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다.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는 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밖의 것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자신이 처한 건물,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바로 그 구조물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문 밖을 나가 자신의 피난처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개구리처럼 자신의 앎보다 더 넓은 미지가 존재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는 이제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는 이제 키치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도 있고, 키치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키치와 더불어서 사는 자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키치를 인지한다. 그러나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이미 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키치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자신의 키치와 다른 어떤 키치가 그의 세계로 유입된다면 그는 자신의 구조물에 모순되는 대상이 있다고 소리칠 것이며, 자신의 구조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자신의 구조물이 그 침입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침입자는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닌 방문자가 된다. 그는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에 괜찮다고 생각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와 어울릴 것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인사를 나누고 그를 되돌려보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구조물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제 나는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이 니체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정지한 것이 없고 다만 생성하거나 소멸하는 것들로 가득 찬 세계라고 지각한다. 그가 전쟁과 경쟁을 긍정할 때 그는 그것이 옳다는 측면에서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가 과학도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고 비판할 때 니체는 절대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계의 단 하나뿐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일원적이지 않고 다원적이며, 그것들이 겨룬 끝에 일시적인 우위가 나타날 뿐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인간이 니체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음은 이제 명백하다. 그는 자신의 키치가 키치라는 사실을 알고, 세계는 수많은 키치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키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시간에 따라 변화할 뿐이며, 그는 언제든지 자신의 키치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다른 키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안다.
커피사유, 〈사유 #52. 키치와 인간〉 中
II. 책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들
II.1. 여성에게 있어서의 ‘성(性)’의 두 측면
『그림자』를 둘러싼 논쟁은 넓게 보자면, 여타 형태로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이어져온 성에 관한 논쟁에 속한다. 캐럴 밴스가 1984년에 쓴 글에 따르면, 여성에게 성이란 “탐험과 쾌락, 행위성의 영역인 동시에 금기와 억압, 위험의 영역이다.” 페미니스트가 오로지 ‘쾌락’의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남성 폭력과 억압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위험이 생기고, ‘위험’의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여성이 적극적으로 욕망하고 즐기는 성이라는 경험을 무시할 위험이 생긴다. 성에는 이처럼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하며, 페미니즘은 양측을 모두 다뤄야 한다는 밴스의 주장에 반기를 들 페미니스트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두 측면 간의 균형이 어때야 하는지는 합의하지 못했으며, 몇몇 사안에서는 ‘성 긍정주의’라고 불리는 태도(예: “페미니스트는 오르가슴을 지지한다!”라고 쓴 작가)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이 억압과 폭력의 현장이 되는 방식을 강조하는 태도 간에 깊은 견해차가 드러나기도 한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107.
II.2. 가장 고정된, 가장 금기시된 대상에 대한 자유론
… (중략) … 오늘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적 취향이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바꿀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은 색슈얼리티를 훨씬 유연한 것으로 봤다. 30대에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 하는 기혼 여성의 경우, 반드시 그녀가 이제껏 쭉 레즈비언이었으나 이전까지는 깨닫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가능성일 수 있겠으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정체성이나 욕망이 변했을 수 있다. 특히 중대한 사회적 · 문화적 격변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123.
II.3. 언어 · 문화: 성 형성의 초자아(Superego)
여성 예술가, 작가, 음악가, 영화 제자가는 남성과 똑같은 기회와 인정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데 반박할 페미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제껏 여성을 부당하게 배제해온 전통과 정전에 특출난 여성을 위한 자리를 몇 개 마련하는 것으로는 문화 자체의 남성 중심성이라는 더 깊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위대함’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기준, 혹은 애초에 무엇이 예술이나 지식으로 여겨지는지에 관한 기준들은 중립적이지 않다. 이는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남성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전통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은 [세상을] 그들의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이를 절대적 진리인 양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는 펜, 붓, 카메라를 드는 이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는 성별이 여성일 뿐인 예술가 개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요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 즉 가부장적 전제와 기준에 대적하는 관점으로 세계가 재현되길 바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p. 137-138.
II.4. 키치와 페미니즘: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효과적으로 저항하려면 다양한 지지층과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폭넓은 연합이 필요하다. 이는 페미니스트가 여성 간의 권력과 불평등의 관계를 인정하고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원칙상, 모든 페미니스트가 이에 동의한다. ‘제4물결’을 규정하는 특징 중 하나로 교차성 원칙을 꼽은 것은 《프로스펙트》의 기사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교차성을 논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에 항의하기 위해 조직된 여성 행진(Women’s Marches)은 어떤 층위에서 보자면 인상적인 페미니스트 연합이었지만, 또 다른 층위에서 보자면 일부 여성이 다른 여성을 배제하고 주변화하는 갈등의 현장이었다. 흑인 여성들은 원래 행진을 주최한 이들이 모두 백인이었으며, 이 주최자들은 이전에 흑인 여성 시위와 시민권 시위에서 썼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쓰면서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 활동가는 공개서한을 통해 행진의 주최자들을 지지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모든 여성’과 ‘모든 목소리’를 조직에 흡수하려는 정치적 노력은 그저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특정 요구를 지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또한 ‘계집애 모자(pussy hat)’나 ‘계집애 파워(pussy power)’ 표시판(“여성의 성기(pussy)를 움켜쥐어라”라고 말하는 트럼프의 목소리가 담긴 악명 높은 테이프를 언급한 것이다)이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고 존중하지 못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이러한 논쟁은 ‘제4물결’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바로 젠더 정체성과 다양성에 관해 새로운 질문을 다룬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 역사상 대부분 여성이라는 계급의 권리, 평등권, 해방을 부르짖는 ‘여성의 운동’으로 여겨졌다. 2015년에 로리 페니가 그랬듯, “페미니즘이 여성에 집중하면 소외를 유발할 수도 있다”라고 불평하는 것은 빵집에서 빵을 팔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을 것이다(혹은 몇 세기 동안 “그러면 남자는?”이라고 외쳐온 반페미니스트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페미니즘 내에는 전통적 정의의 기초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4이 단락에서 ‘더불어’의 의미는 차별적 · 혐오적 공격이 반복되도록 하는 구조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 글 전체에서 인간이 ‘키치’와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라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진보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담도록 노력했고, 이것이 페미니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밝히려 노력했다.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p. 150-152.
II.5. 그래서 어떻게 ‘ ’이(가) 되는가?
또 다른 대답도 있다. 현대 젠더 정체성 정치는 무엇이 ‘여성’이라는 범주를 정의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키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여기서도 의견이 나뉜다. 거의 모든 페미니스트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데 동의한다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떻게 여성이 되는가? 누구나 여성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특정 종류의 개인사를 거쳐야 하는가(소속된 문화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당신을 남아와 정반대 방식으로 여아로 대우해주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은 특정 신체를 지녀야 한다는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가? 육체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기에 체현 경험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 억압을 끝내려는 페미니스트의 활동이 고려해야 할 물리적 육체의 현실이 존재하는가?
데버라 캐머런(Deborah Cameron), 《페미니즘(Feminism)》. 강경아 역, 신사책방, 2022. p. 154.
III. “문을 열고 나가기”
- ‘문을 열고 나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서론에서 인용한 나의 몇 달 전 글을 떠올려보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 (중략) … 이는 체계 속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체계의 한계, 이론의 한계, 사회와 도덕과 문화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 ‘문’은 두 공간을 분리한다. ‘문’을 기준으로 세계는 안과 바깥이라는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문’은 하나의 경계요 하나의 구획이다. 그러나 공간을 분리하는 사물로 ‘문’이 유일한 표상인 것은 아니다. ‘벽’도 공간을 분리하고, 세계를 두 범주로 나누며, 마찬가지로 경계이자 구획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벽’은 그 개폐를 조절할 수 없는 통과가 반드시 불가능한 사물인 반면, ‘문’은 그 개폐를 선택할 수 있으며 그 개폐 여부에 따라 ‘열고 나갈 수 있는’ 사물이다.
- 이 추상적인,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당초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는 비유에서는 세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5여기서 나는 분명히 스스로의 글에서 세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설명했음에도, 오직 두 가지 의문만을 명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의도된 사항이다. 이 대목에서는 첫 번째 의문을 살펴보자: ‘문’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라는 문장을 말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지금부터 ‘문을 열고 들어가서’ 논의의 추상성을 조금씩 제거해보겠다.
- 《페미니즘》의 5장: ‘성’은 당면한 독자에게 몇 가지 내적 장벽을 맞닥뜨리게 한다. 평소에는 금기시되는 주제,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한 장 내내 이어지기 때문이다. 저자 캐머런은 여성의 ‘성’에 관한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한다. 인용하였듯 그것은 ‘욕망’으로서의 성, 그리고 ‘억압’으로서의 성이다. 이 둘 사이의 균형에서 페미니스트들은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 논쟁의 보다 구체적인 양태들은 “성매매를 금지할 것인가? 합법화할 것인가?”라는 의문, 그리고 “포르노를 금지할 것인가? 합법화할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 상기한 두 의문에 대한 양쪽의 주요 입장은 책의 본문이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따라서 자연칙에 의하면 다음 수순이 되겠지만 잠시 연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우리가 방금 언급했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빨리 수긍하고’ 넘어가버린 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싶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페미니즘》의 5장: ‘성’은 당면한 독자에게 몇 가지 내적 장벽을 맞닥뜨리게 한다. 평소에는 금기시되는 주제,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한 장 내내 이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왜 이 이야기가 금기시되는 주제인가에 대해서는 분명 아무것도 부언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독자들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논의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 다시 질문, 왜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되는가? 그것이 문란하기 때문인가? 그러나 많은 문학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듯 섹스도 분명 인간의 한 부분이다.6일례로《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마츠코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하는 인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되짚어볼 때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성 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고, 이 불문율을 위반하는 개인에게는 도덕적인 비난이 쏟아져왔다는 사실을 재발견하게 된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제한하는 것’이 ‘포르노를 제한하는 것’과 유사한 사유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다루고 있듯 포르노를 비롯하여, ‘6장: 문화’에서 언급된 바 있듯 수많은 영화와 문학들 즉 문화 일반이 남성 우월적인 지배구조를 반복하고 재생산하기에 이들이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공고화에 기여한다는 기둥 위에서 말이다.
- 물론 그들의 믿음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는 토양 위에 서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계 속의 존재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사물들과 타인들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성장했고, 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삶을 살아왔다. 어떤 사회 속의 문화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포함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테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어떤 언어 체계로 소통하느냐에 따라 아기들이 처음으로 습득하는 언어는 달라진다. 또, 사람들이 특정 동물을 먹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특정 동물을 불결하다고 생각하면, 이는 하나의 문화가 된다) 인간은 타(他)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문화는 적지 않은 수의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회에서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지에 대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문화를 비롯한 외부 세계가 한 인간의 행위 그리고 사고에 미치는 영향은 특정 상호작용의 허용(또는 장려) 그리고 금지(또는 그 반대의 장려)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어쩌면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포르노,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주류 영화들, 주류 문학들 등 문화를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이 ‘주로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남성에게 여성을 차별 대우하거나 급진적으로는 ‘강간의 대상’으로 보는 암시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암묵적 동의와 문화의 토양 위에서 강간 혐의로 기소된 이들 대부분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으며, 기소되지 않거나 신고되지 않는 오늘이 일종의 양의 되먹임 작용을 구성하여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인간에게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금지이다. 문화는 ‘사회화’를 위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정체화하며, 문화의 힘은 아무래도 이 금지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프로이트는 1908년의 논문 「‘문명적’ 성도덕과 현대인의 신경병」 그리고 1930년의 책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길들이기 때문에 자연에서 벗어나 문명이라는 테두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인간은 여러 가지 고통과 갈등 속에 살게 된다7프로이트는 인간이 겪고 있는 신경증의 원인을 이러한 문화에 의한 금지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문화에서 금지되는 바를 범했을 때 우리는 양심의 가책 또는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분명히 지적했듯 특정 사회의 문화 또는 질서는 결국 지배 계급의 역사 속에서 자의적으로 정해진 기준일 뿐이며, 또한 문화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의 위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덕을 포함하여 문화 일반은 절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 즉 문화는 그 특유의 금지 그리고 그 금지를 위반한 경우의 무거움, 즉 금지의 내면화(양심의 가책, 죄의식) 또한 동반한다. 그리고 이 무거움이 심히 중대하기 때문에 (물론 내면의 형벌 외에도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나의 평판’이라는 외부적 강제 수단도 있다) 아마도 문화는 그 특유의 지대한 영향력 즉 힘을 가지게 되는 듯 하다. 이 금지 속에서 인간은 괴로워한다. 니체가 지적했듯 이 금지는 자의적인 구분에 의한 것이고, 이 자의적인 경계 또는 구획은 당초 다양한 욕망 그리고 다양한 세계-인간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 우리의 삶 즉 실재8여기서 나는 전적으로 라캉의 ‘실재계’를 상정하고 있다.를 재단하기에 인간은 그 속에서 괴로워한다.
- 이제 우리는 첫 번째 의문: ‘문’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감각을 얻는다.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나는 일목요연하게 ‘문’을 자의적으로 경계를 가르는 무언가에 비한 비유물로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은 모든 곳에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도,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사이에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 구분은 자의적이다. 그러므로 ‘남성성’, ‘여성성’, ‘페미니즘’, ‘반페미니즘’은 모두 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해 개인이 긋는 경계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문’은 또한 마음 속에 있다. 여기서 나는 ‘문’은 모든 곳에 있지만 동시에 마음 속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9여기서 나는 암묵적으로 정신분석학의 주요 주제를 암시하면서 철학사에서 오래된 논쟁 주제인 ‘인식론’에 대한 나의 입장을 슬쩍 드러냈다. 문장을 통해 나는 무언가를 단언하고 있으므로 나는 하나의 ‘문’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있을지. 이 고민은 분명 독자의 몫일 것이다.
IV. “키치와 더불어 살기”
-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진입할 차례다: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이 자의적인 경계, 자의적인 구분을 지시했다는 점은 충분히 밝혔다. 그렇다면 ‘문’을 연다는 것은 그 경계를 없애겠다는 것인가? 지금부터는 이 질문을 따라가보자.
- III 단락에서 논의한 바는 문화가 개인의 발달 및 주체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한 듯 하다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페미니스트 일부가 지적하는 바, 즉 남성 중심적인 문화 일반 ― 포르노, 성매매, 영화, 문학, 게임 등등 ― 에 대해서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재생산하는 코드들을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인가? 그러나 아니다. 나는 바로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의해서 그 반대를 주장한다.
- 문화가 특정 행동 양식,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는 생각 위에서 왜 이들을 규제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인지 반문할 수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지나친 자유론 위에서, 즉 여전히 인간은 외부 세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논의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하고자 하는 것이냐고 항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이 놓치고 있는 문화의 특성은 두 가지, 하나. 문화는 금지에 의해 힘을 획득한다는 점이고, 둘. 문화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토대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 내가 생각하기에 남성 지배적인 문화 그것을 금지로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은 금지에 의해 획득된 권력에 금지로 대항하겠다는 주장이 아닌가 싶다. 이는 힘과 힘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에 있어 적절한 해결책일 수는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권력과 지배 구조 속에 놓여 있던’ 여성들이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지배 구조가 무너지고 난 다음을, 지배 구조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을 상상하며 연대하기에 남성 중심적 권력과 지배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을 꿈꾼다. 금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금지의 자리가 또 다른 금지로 대체된다면? 지배 구조의 자리가 또 다른 지배 구조로 대체된다면?
-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중심적이었던 지배 구조가 양성 평등적인 지배 구조로 대체될 것인데 무엇을 문제삼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인간은 기본적으로 세계 속의 존재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성(gender) 을 포함하여 인간이 가지는 대부분의 관념들 그리고 생각들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훌륭히 입증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적에 대항하는 과정 속에서 ‘당신들의 경험, 당신들의 배경을 뛰어넘는 다른 경험과 배경이 있다는 사실’들을 적극적으로 또한 호소했다. 페미니즘은 그 과정 속에서 금지의 부당성, 그리고 자의성을 주장해왔다. 그런데 그 부당하고 자의적인 금지 · 지배 구조 · 권력을 대체할 바로 그 금지 · 지배 구조 · 권력이 과연 정말 부당하지 않고 자의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바로 그 대체된 금지가 역설적으로, 이제는 반대의 비극을, 즉 여성 중심적인 지배 구조의 공고화를 이끄는 문화의 창출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물론 몇몇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지금까지 여성이 당해온 억압의 역사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바인가? 페미니즘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수라기보다는 언제나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 즉 사회 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었던가?
- 예상되는 항의 중 하나는 “그렇다면 당신은 가만히 있기를, 저항하지 말기를 외치는 것인가?”는 물음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언제나 기본적인 문제 상황 자체가 아니며, 내가 언제나 페미니즘과 관련해 제기하는 물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페미니즘의 문제 인식, 즉 여성에게 특정 역할을 강요하며 불이익을 주는 ‘문’이 있으며, 이 ‘문’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10물론 나는 남성의 배경을 지니고 있기에 페미니즘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양성’으로 확장하여 인식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성별과 관련된 특정 금지와 싸우는 전반적인 담론에 가까운 듯 하다. 김채운은 〈분노한 2030 남성에서 필요한 것〉 이라는 한겨례 칼럼에서 “여성들이 개인의 성차별 경험을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의 문제’로 언어화하고 길거리로 나와 제도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안, (20 · 30대) 남성들은 예컨대 강제징집 제도나 군 인권 문제에 그 어떤 담론도 내놓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강제 징집 제도, 군 인권 문제는 남성들이 마주하는 금지이며, 동시에 하나의 문화이다. 이들은 남성들이 마주하는 ‘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문’을 마주하는 방식을 거울로 삼아 이들 ‘문’을 인식하게 하고 어떻게 마주할지를 결정할 때 주요한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은 우리의 문제 의식에 반대하는가라는 의문도 포함하지만, 동시에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대안을 가지고 있는가는 의문도 포함한다.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이 항의는 유효하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반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반론하고 있다.
-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나는 문화의 두 번째 특성을 상기하고자 한다. 문화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문장은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나아갈 또 하나의 가능성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문화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바로 그것으로써 바꿈으로써 바뀔 수 있다11문장이 괴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문화는 문화 자신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는 알아서 바뀐다’라는 문장과 같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문화’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다른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지를 바꿈으로써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문화’는 ‘문화’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는 바로 그 가능성 말이다.
-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은 ‘다양성’에 집중해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해 이 책의 저자는 여성이 다양한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페미니스트들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결국 깨뜨려야 하는 것은 절대성의 신화 즉 우상이라는 점도 깨달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나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시, 사람은 자신 주위의 사람들과 사물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며 자신을 정립한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초해볼 때, 스스로가 틀렸다거나 잘못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는 의문을 제기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바에 반하는 사람이나 사물들에 노출되었을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12그러나 여기서의 ‘적’은 전적으로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적’이다. 즉, 자신의 ‘호적수’, 즉 자신의 가치 체계 및 세계관에 도전하는 ‘적’을 가리킨다.을 더 많이 마주할수록 나는 더 많은 영역들에서 절대성을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페미니스트들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 구조를 인지한 과정도 결국 그들이 무너뜨리고자 하는 가부장적 문화 및 사회 구조라는 주류에 반대되는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가부장적 문화 및 사회 구조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등장과 목격, 금지하는 주류 문화 그리고 금지를 넘어선 여성들 사이를 오가는 시선들을 생각해보라!) 그 경험들이 누적된 결과 자신이 암묵적으로 동의해왔거나 믿어왔던 남성 중심 질서에 대한 절대성이 폐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 따라서 금지된 것 너머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 중 하나는 금지된 것 너머에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금서를 보게 만드는 방법은 그 책 표지 뒤에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암시와 추측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출입 제한 구역을 가르는 문을 통과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그 뒤에 무언가 재미있는 것, 색다른 것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남성 중심의 주류 문화, 남성 중심의 주류 금지에 대항하는 방법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것 너머에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자신의 기둥 바깥에, 자신이 마주한 문 뒤에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 ― 즉,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문화, 사람들-사람들, 사람들-사물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다양성을, 당신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많이 살고 있음을 제시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또 하나의 투쟁법, 그리고 개인적인 믿음으로는, 가장 근본적이며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투쟁법이 아닐까 싶다.
- 페미니즘은 책의 7장이 지적하고 있듯 여성 집단은 그 인종, 출신지, 문화권에 따라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성 내부에서도 이들에 따른 또 다른 차별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모든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의해 실질적 불이익을 겪는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을 잊지 않으며, 이 공통적 경험 위에서 연대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어 왔다.
- 페미니즘이 오늘에 이른 것은 이처럼 ‘다양성’ 속에서 끊임없이 논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경험들에 따라 연대하는 바로 그것, 즉 ‘다양성 속에서의 연대’라는 믿음이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이 꼭 여성에게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어쩌면 모두가 같은 구조, 같은 문화 속에서 제각각 구체적인 양태는 다를 수 있더라도 비슷한 억압을 겪고 있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게 연대를 호소할 수 있는 좀 더 넓은 공통점이, 아마도 문화 속의 인간이라는 이 공통적인 운명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자, 이제 두 번째 질문: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의 대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대답이, 동시에 내가 키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제시하는 대답이기도 하다.
V. 끝내며: 페미니즘과 ‘문’
한 번 ‘문을 열고 나가면’ 기둥은 흔들리게 되는 법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탱해왔던 기둥이었으나 그것이 부실한 토양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되면 첫째로는 허망함이, 둘째로는 분노가, 셋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가 등장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감각이 나의 정체성 위에 서 있다고 추측한다. 위험한 유추를 좋아하는 나는 이러한 과정이 페미니즘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고 생각해본다. 위험한 문제 제기를 좋아하는 나는 페미니즘의 금지를 통한 반격 그리고 페미니즘 안에서의 다양성을 거부하거나 흐리는 태도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발칙한 반격을 좋아하는 나는 그 모든 의문에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는 어느 ‘문’을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목소리가 희미하더라도 가 닿는다. 어쩌면 그는 작은 소음이겠거니하며 그 목소리를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반복되면 그 소리가 작은 소리더라도 그 ‘문’ 바깥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문’으로 걸어나간다. 그리고 ‘문’을 천천히 열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 방식으로 오늘까지 도달해왔으며, 여성 사이에서 하나의 힘으로, 하나의 문화로 자리했다. 즉, 페미니즘은 금지가 아닌 다양성을 통해 여성 집단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했다. 나는 이제 이 책의 후반부가 나 자신과 어떻게 상호작용했으며, 그 결과 내가 어떤 기둥과 결별했으며 어떤 기둥을 다시 선택했는지 논의했다. ‘기둥’이 무엇인지, ‘문’이란 무엇인지, ‘키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도 나름 밝혔다. 나는 이러한 키워드들이 결국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 것임을 암시했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그 암시 위에서 누군가의 ‘적’으로서 충실히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문제는 다양성이다. 그러니 기꺼이 뛰어들자, 기꺼이 솔직해지자. 저 아래로, 저 심연으로. ‘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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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및 참고문헌
- 1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그리고 키치.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을 생각하고 있다.
- 2이 인용문에서 ‘젠더’를 ‘키치’로 바꾸면, 정확히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된다.
- 3여기서 나는 니체가 말하는 인간 정신의 세 단계: ‘낙타’의 단계, ‘사자’의 단계, ‘아이’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낙타’의 단계는 모든 금지와 명령을 수용하지만, ‘사자’의 단계는 맹수가 그러하듯 이 모든 금지와 명령을 맹렬한 분노와 함께 보조리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아이’의 단계는 금지와 명령과 ‘더불어’ 산다… 물론 여기서 ‘더불어’는 나의 표현이며, 니체의 표현은 아니다. 니체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긍정’의 단계에 이른 인간 정신이다. 즉, ‘운명애’에 이른 정신이다.
- 4이 단락에서 ‘더불어’의 의미는 차별적 · 혐오적 공격이 반복되도록 하는 구조와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본질적으로 이 글 전체에서 인간이 ‘키치’와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라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진보한 질문에 대한 나름의 치열한 고민을 담도록 노력했고, 이것이 페미니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밝히려 노력했다.
- 5여기서 나는 분명히 스스로의 글에서 세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 설명했음에도, 오직 두 가지 의문만을 명시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의도된 사항이다.
- 6일례로《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마츠코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 섹스를 하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하는 인간.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기도 하지.”
- 7프로이트는 인간이 겪고 있는 신경증의 원인을 이러한 문화에 의한 금지로부터 찾을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 8여기서 나는 전적으로 라캉의 ‘실재계’를 상정하고 있다.
- 9여기서 나는 암묵적으로 정신분석학의 주요 주제를 암시하면서 철학사에서 오래된 논쟁 주제인 ‘인식론’에 대한 나의 입장을 슬쩍 드러냈다.
- 10물론 나는 남성의 배경을 지니고 있기에 페미니즘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양성’으로 확장하여 인식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오히려, 성별과 관련된 특정 금지와 싸우는 전반적인 담론에 가까운 듯 하다. 김채운은 〈분노한 2030 남성에서 필요한 것〉 이라는 한겨례 칼럼에서 “여성들이 개인의 성차별 경험을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의 문제’로 언어화하고 길거리로 나와 제도 변화를 만들어내는 동안, (20 · 30대) 남성들은 예컨대 강제징집 제도나 군 인권 문제에 그 어떤 담론도 내놓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강제 징집 제도, 군 인권 문제는 남성들이 마주하는 금지이며, 동시에 하나의 문화이다. 이들은 남성들이 마주하는 ‘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문’을 마주하는 방식을 거울로 삼아 이들 ‘문’을 인식하게 하고 어떻게 마주할지를 결정할 때 주요한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 11문장이 괴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문화는 문화 자신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는 알아서 바뀐다’라는 문장과 같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나는 ‘문화’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다른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지를 바꿈으로써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문화’는 ‘문화’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 12그러나 여기서의 ‘적’은 전적으로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적’이다. 즉, 자신의 ‘호적수’, 즉 자신의 가치 체계 및 세계관에 도전하는 ‘적’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