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서일지 #19.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지난 탐서일지에서 나는 대학 생활 내내 나를 따라다녔던 질문이 무엇이었는가를 고백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의 무게에 시달리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제2장에 등장했던 다음 문장이 그 모든 순간들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
어쩌면 삶에서 가장 위대한 대전환 속에 서 있는게 아닌가 싶은 감각과 함께 보내고 있는 3월, 나는 이십삼 년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들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나 자신으로부터 숨겨져 있었던 〈하얀 문〉들 앞에 서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 어느 때에 내가 썼던 것처럼 “너무나도 중압적으로 서 있었던 그 문들이 열고 들어갔을 때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다는 강렬한 직감을 풍겼기 때문”에, 나는 용기 내어서 다시 섰음에도 불구하고 저 문을 열 수 있을까 여전히 망설였다. 문 뒤에 있는 것들의 정체를 모르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죽음〉에 가까운지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떨리는 손을 문고리 위에 올린 뒤더라도 한참 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기도 했다. 나는 심연을 들여다보려고 했고, 심연은 저편에서 입을 벌리고 정말로 들어올 것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문 뒤에 자리한 흐느끼는 소리를 인지함에도 마주하기를 주저해왔고, 그 때문에 십여 년을 스스로가 만든 연옥에서 보내왔지 않던가. 문을 여는 것은 나에게 회복이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한 번 ‘삶’을 노래하고자 하는 나로서는 단 한 가지 결단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노르웨이의 숲》이 주목하는 것도 이 단 한 가지의 결단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존재다. 항상 타자로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 죽음, 참으로 고통스러운 우리의 상실. 이 운명적인 결여를 마주하노라면 우리는 언젠가 자신에게 찾아올 끝을 직감하게 되고 그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저 중대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소설은 두 개의 항을 서사로 끌어들여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숲 · 붉은색 · 나오코로 대표되는 〈죽음〉과, 초원 · 녹색 · 미도리로 대표되는 〈삶〉이 그려내는 수많은 인생사들을.
다시 한 번 〈우물〉을 떠올려본다. 지난 탐서일지의 ‘II.1. 첫 번째 대목’에서 이야기한 그것, 초원과 숲의 경계에 위치한 그 〈우물〉을. 나오코의 언급 이후로 우리는 〈우물〉 없는 초원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저 심연을 들여다봄에 따라 어렴풋이 피어오를 뿐이었던 당초의 질문은 이제 구체적인 실체를 얻어 온누리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질문의 정체를 나는 모르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4년 동안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던 그것, 〈삶〉과 〈죽음〉이라는 이성 푸가(Fuga a 2 voci)가 빚어내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니까.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왜 인간은 자살하지 않는가?”.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한 몸을 결합함으로써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따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267.
I. 총평
숲. 소설과 더불어 나 자신마저 관통해버리는 저 한 글자의 심상.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나무들과 땅에 떨어져 썩어가는 고엽들, 나뭇잎 사이를 뚫고 조금씩 떨어지는 햇볕과 갑작스레 골짜기 너머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까지. 숲은 다양한 생명들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다양한 죽음으로도 가득한 공간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의 숲》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지난 독서 노트에서 다루었던 〈우물〉이 어디 있었는지를 되짚어보자. 소설의 첫 장에 따르면 그것은 초원과 숲의 경계에 위치한다. 며칠 계속된 부드러운 빗줄기로 여름 내내 덮어썼던 먼지를 깔끔이 씻어 내린 선명한 파랑으로 가득한 하늘 그리고 억새 꽃을 흔들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10월의 바람이 존재하는 초원과, 발아래 매미 시체와 솔방울들이 힘없이 흩어져 있고 너무 많이 자라버린 소나무 가지들 덕에 햇빛마저 거의 들지 않는 숲 사이에 위치한다. 〈우물〉은 초원과 숲 사이에 있다. 사려깊은 독자라면 이 삼자 구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장의 어느 한 문장 뒤에 자연히 떠오르는 어떤 질문 하나가 실현된 시니피앙이 이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소설 제2장은 선언한다. 이 문장을 맞닥뜨린 독자는 생각한다. 좋다, 죽음은 삶의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대상과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여기서 시작된 상실이 아마도 지금 나 자신이 가진 여러 욕망들의 근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나는 마음 속에 자리한 저 드넓은 공동을 보면서 끔찍한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안다. 어떤 맥락 하에서는 이 외로움이 오랫동안 숨겨 두었던 과거를 들추고 고개를 슬쩍 내민 과거가 나 자신이 두 번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감정들을 재림시킴도 안다. 우리는 삶 곳곳에 죽음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더라도 정작 그 앞에 서면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 초원과 숲 사이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중 ‘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설의 8장까지 읽은 독자 또한 자신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응어리를 문장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진흙처럼 바닥으로 부드럽게 가라앉는 기억들을 붙잡고서 이 질문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어느샌가 자신이 처음으로 되돌아왔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따스한 태양빛 아래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초원과 그 태양의 어스름한 붉은색 기운으로 저물어가는 숲 사이의 경계선, 〈우물〉이 하나, 잘 보이지 않게 풀로 겹겹이 가려져 있는 바로 그곳으로.
II. 인상 깊은 부분 두 가지와 그 이유
II.1. 첫 번째 대목
나는 숲을 빠져나가 조금 높은 언덕 비탈에 앉아 나오코가 사는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나오코의 방은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불 꺼진 창 저 안쪽에서 작은 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곳을 찾으면 된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작은 불빛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그 빛은 나에게 타다 남은 혼의 마지막 흔들림을 연상하게 했다. 나는 그 빛을 두 손으로 감싸서 지켜 주고 싶었다. 나는 제이 개츠비가 만 건너편 작은 빛을 매일 밤 지켜보던 것처럼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231-232.
-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자신이 종종 길을 잃었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들이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은 경험들이 암시가 되어 가장 선명하게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로 이 때, 인간은 숲을 헤맨다.
- 숲이란 어떤 공간인가? 총평에서 언급했듯 그것은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자리하는 공간이다. (비록 소설에서는 죽음에 초점을 더 둔 상징으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숲을 생각할 때면 항상 끝을 모르고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나무들, 그 밑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땅 한 줌을 꼭 끌어안고 있는 이끼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스한 오후의 햇빛 아래에서 조금씩 지저귀는 멧새 울음소리를 떠올리지만, 동시에 바닥에 내팽겨진 채로 꺼져가는 갈색 속에서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고엽들, 토양 아래 어딘가에 묻혀 있을 불타버린 식물들의 잔재들, 들을수록 신경에 거슬리는 까마귀의 울부짖음들도 떠올리게 된다.
- 이 모든 기억들 속에서 나는 과거의 자신을 본다.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숲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과학 선생이 담당하던 6학년 반에 몇 달 정도 사실상 ‘월반’했던 기억이다. 그 여름의 교실은 아직도 생생하다. 앞쪽 문을 열고 들어간 6학년 1반의 교실, 가운데 놓인 커다란 칠판 앞에 교탁이 있었고, 거기서 선생은 수업을 했다. 각각이 5행 정도로 이루어진 세 분단에 빼곡히 앉은 한 학년 위의 선배 형/누나들이 쳐다보는 창가 쪽의 작은 TV, 그 아래 그러니까 교탁 옆에 책상 한 대가 있었고 거기서 나는 홀로 숲의 천이 과정을 공부했다. 그 선생이 생태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나는 주일 오후마다 동네 곳곳에 위치한 제비들을 쫓아다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제비집들을 관찰하고 포토폴리오로 만들었다. 종종 자전거 뒤로 문구점에서 같이 군것질을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노는 친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햇살이 잔인하게 내리쬐는 그 책상 위에서 홀로 선배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숲과 관련된 여러 프린트들에 줄을 긋는 일과를 보내는 나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그 친구들이 보일 때마다 페달을 더 세게 밟아서 그들을 더 빨리 지나치는 것뿐이었다. 그들과 나 자신을 갈라놓은 저것, 숲이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무게로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나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 두 번째로 보게 되는 기억이란 가족들과 함께 다녔던 등산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은 비교적 가깝고 난이도도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은 월아산 장군대봉을 많이 올랐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붉은색 K2 아웃도어 파카를 입은채 등산로 입구, 한쪽에는 저수지가 있고 온갖 크기의 돌들이 가득한 길들이 있으며 그 길의 양쪽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나란히 줄지어 심어져 있어 마치 숲의 경계를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준 그 길을 허겁지겁 뛰어가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이다. 얼마 전 본가에 내려갔을 때 부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그 길을 올라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오래도 지나다닌 길인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추억은 십 몇년의 세월 속에서 변해버린 등산로 입구처럼 변질되어 버린다. 작고 큰 돌들이 흙바닥에 박혀 있던 길은 어느샌가 자갈로 뒤덮여버렸고, 나무들은 베어지거나 몇 그루는 죽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정에서 최소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몇 가지 사건들을 겪은 오늘의 나는 옛날과 같은 깊은 정(情) 속에서 그 길을 걸을 수가 없었고, 옛날처럼 산을 올라가기를 희망했던 우리 세 사람 사이에서 간간히 오고 가는 몇 마디 말들 속 깊이 자리잡은 가시들을 느끼며 과거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숲의 가장자리를 지난다는 느낌, 그것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 경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과 함께 세워진 벽 뒤로 영영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 따라서 숲은 나에게 있어 수많은 〈상실〉들, 즉 대상의 죽음들, 내가 가질 수 없었거나 없게 되어버린 무언가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공간인 셈이다. 숲을 헤매면서 나는 나름대로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숲을 빠져나와 그 반대편에 위치한 초원을 탐했던 셈이다. 시리도록 춥고 습한 숲을 떠나서 따뜻하고 풀이 기분 좋게 피부를 간지럽히는 그런 곳을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숲을 빠져나오는 방법을 학문을 통해 배웠다고 느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지금, 내가 발견한 것은 이십 삼년의 지난 세월 동안 언제나 나는 숲 속에서, 조금 더 정확히는 그 가장자리에서 방황했다는 것이다. 문제의 등산로 입구처럼.
- 숲을 빠져나간 작중의 ‘나’가 그 반대편의 나오코가 사는 건물 쪽을 바라보는 장면, 불 꺼진 저 창 안쪽에서 작은 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곳을 찾아 언제까지고 그 작은 불빛을 바라보는 장면을 내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배경 위에서 나라는 존재가 아직도 숲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경험들이 암시가 되어 가장 선명하게 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로 이 때, 나 또한 무언가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흔들린다면 그것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가 그랬듯이, 눈동자에 가득 그 불빛을 담은 나는 개츠비처럼 질문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들. 그 질문들을 나는 불빛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저 ‘숲’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곱씹었을 것이다.
II.2. 두 번째 대목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내 손이며 접시며 테이블이며 눈이 닿는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갰다. 그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비롯한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그것은 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 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 이미 오래전에 어딘가 내려놓았기에, 그런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쓰미 씨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너무도 너무도 특별한 여자였다. 누군가 어떻게든 그녀를 구원했어야만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415.
-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경험. ‘나’가 하쓰미 씨를 떠올렸듯이, 어떤 독자는 자신이 만났던 다른 여성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노을 속에서 누군가를 떠올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여성과 교제해본 경험? 그 경험이 아주 깔끔하게 나라는 존재로부터 도려져 있음을 알기에.
- 물론 누군가가 나에게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경험이 없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아주 까마득히 먼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가 희미하게 아직 남아 있다.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이 기억은 교사의 가운데 출입문과 동상 사이에 위치한 벤치 하나에서 여자 급우 한 명에게 내가 키스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몇 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하게 단언해둘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행한 스킨십이었고, 그 이후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 뿐이다. 이 시점에서 두 가지 질문이 탄생한다. 첫째, 왜 나는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경험이 없는가? 그리고 둘째, 왜 처음이자 마지막 상대가 그녀였는가? 두 번째 질문을 먼저 다루는 편이 낫겠다. 그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 유년기의 트라우마 중 하나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선 지금까지 내가 교제한 유일한 상대였던 그녀의 매력이 무엇이었는가를 되짚어보면, 분명히 외모는 아니었다. 주근깨와 그 나이에는 너무 이르게 얼굴 곳곳에 툭 튀어나온 뾰루지들. 키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고 옷을 매력적으로 입는 것도 아니었으며 머리도 고무 밴드로 뒤로 단순히 묶은 데다 몇 갈래는 튀어나온 그 상태로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학업적인 면이나 능력적인 면에서 매력을 느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너무 수줍어했기에 다른 사람과 말을 잘 붙이지도 못했고, 받아쓰기도 자주 틀리는 편이었으며 수학 문제도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오답을 적고 마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녀는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녀는 교실에서 따돌림받는 존재였다. 첫눈에 호감이 가는 상은 분명히 아니었던 특유의 외모로 인해 부당하게도 다른 친구들로부터 일종의 파리아(pariah,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았지만 너무 수줍고 사람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언제나 교실의 어느 구석에 홀로 앉아서 빙그레 웃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 노을 속에서.
- 쉬는 시간이 되면 다른 친구들은 바닷물이 빠져나가듯 복도로 운동장으로 놀이터로 우르르 빠져나가버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홀로 앉아서 책상에 연필로 금을 긋고 있었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왜 이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냐고? 나도 마찬가지로 홀로 구석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쪽이었으니까. 곁눈질로 나는 그녀를 가끔씩 보았고, 그녀도 나를 가끔씩 보았다.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비애에 가득 찬 눈동자가 블라인드를 뚫고 쏟아지는 붉은 오후의 햇살을 타고 나와 그녀를 이어주었다. 처음으로 밖으로 함께 나가서 정원을 걷고 벤치에 앉은 것은 아마 그걸 두 사람 모두가 동시에 깨달아버린 어느 날 일과 후였을 것이다. 그날 늦은 오후 나는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발적인 키스를 한 것이다.
- 초등학교 1학년. 그 당시는 지난 독서 노트에서 언급했듯 인정욕이 처절하게 좌절된 때였다. 원래 살던 동네를 떠나서 읍에 소재한 작은 초등학교로 떨어져버린 나는 예전에 쓴 바 있듯 “일면식도 없는 동네에서 일면식도 없는 급우들과 어울려야” 했다. 하지만 “그 학교에서 이방인이었던” 나로서는 “내가 자리하지 않았던 그 동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문화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서 다가가려 했을 때 얻게 되는 것이라고는 거절과 침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학업을 통해,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쪽으로 내 욕망의 방향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어른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 시기와 질투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언제였던가 컴퓨터 방과 후를 마친 나는 신발장에 두었던 내 실내화가 통째로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새로 사 주셨던 실내화였고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나는 소중히 여기던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현실을 믿지 못하고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애타게 그것을 찾았다. 날이 어스름해지는 것도 모르고 그것을 찾아다녔다. 거의 유일하게 사귀고 있던 오른쪽 팔이 불편한 친구 한 명이 찾는 것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간 이후의 기억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울면서 어머니께 전후사정을 말씀드렸으리라.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의 다른 몇몇 기억들, 이를테면 따돌림 받던 여자 급우와의 스킨십, 그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 16년 동안 친구로 지내온 그 한쪽 팔이 불편한 친구와 관련된 기억들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당시를 단단한 문 저쪽에 던져넣은 뒤 완전히 잊어버리기로 한 것 같다.
- 이 시점에서 나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성 친구로 생각했던 그녀를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하나의 희미한 직감을 얻는다. 오른팔이 불편했던 그 친구와 마찬가지로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호감을 느낀 대상은 대체로 나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같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알아보듯, 〈우물〉의 저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이 〈우물〉 속에 뛰어드려는 사람을 보면 즉각 달려가 그를 붙들듯, 나는 그녀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던 것이고 그리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어 다가갔던 것이다.
- 그녀와의 교제는 학년이 바뀌고 반이 나누어지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같은 반에 있을 때는 비어버린 교실에서 함께 있을 수 있었지만 다른 반까지 굳이 찾아간다면 그런 사람과 어울린다며 다른 친구들이 손가락질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비겁하게 난 도망쳤고, 내 유일한 사랑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학업에 대한 집착은 그 길로 더 심해졌고, 3학년 때 만난 과학 선생 덕분에 과학으로 관심이 완전히 돌아서버린 나는 5학년 당시의 ‘월반’을 거치면서 점점 그녀를 잊어버렸다. 중학교도 같은 학교로 갔지만 간간히 마주치면서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웃으면 나도 어색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 초등학교 이후로, 나는 비슷한 비애에 젖은 눈동자를 가진 여성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건 내가 비슷한 눈동자를 찾았더라도 무시해버렸거나, 아니면 완전히 타인은 모르겠고 눈 앞의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집중되어버린 관심사 때문에 보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여유가 생긴 대학에서도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에 쓴 가면들 덕에 호감이 가는 여성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고, 만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말을 열거해놓고 보는 지금, 나는 아마도 여전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녀의 솔직함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에 지금까지 나 자신으로부터 이성 교제가 깔끔하게 도려졌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가 나오코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어쩌면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겠지만.
III. 장별 주요 내용 요약

III.1. 제6장
- ‘나’는 나오코가 편지에 쓴 대로 ‘아미 사’로 향한다. 무서울 정도로 깊은 산속으로 향하며 ‘나’는 초가을의 햇발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한산한 마을과 서늘하고 어두우며 갑자기 피부가 아플 정도의 찬 바람이 불어오는 숲을 번갈아 통과한다. 머무르는 사람에 비해서는 규모가 좀 커 보이는 ‘아미 사’의 본관에서 ‘나’는 나오코와 같은 방을 쓰는 음악 선생, 레이코 씨를 만난다. 그녀는 여기는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고 하면서, 의사와 환자가 구분되지 않는 이 공간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규칙은 단 두 가지라고 말한다. 첫째, 상대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할 것. 둘째, 정직할 것.
- 나오코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다가 ‘나’는 레이코 씨를 따라 그녀가 머무르는 작은 목조 주택으로 들어선다. ‘아미 사’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커리큘럼에 따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에 ‘나’는 5시까지 기다린다. 죽은 기즈키 생각을 하고 있던 차, 나오코가 몰래 들어왔다 나간다. ‘나’는 손질 잘된 폐허 속에 혼자 살아가는 공간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 그날 밤 ‘나’, 레이코 씨, 나오코 세 사람은 촛불과 와인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레이코 씨에게 기타로 「노르웨이의 숲」을 청해 듣는다. 나오코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깊은 숲 속을 헤매는 듯한 외로움과 절망감, 그리고 슬픔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나’는 여러 여성과 잠자리를 가지는 나가사와 선배에 대해 이야기하고, 매일 만나지만 자신이 기즈키의 자리를 대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이끌려 모르는 여자 애들과 계속 같이 잤다는 사실을 밝힌다. 나오코는 “죽은 사람은 언제까지고 죽은 채이지만 우리는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하니까.”라고 자신을 타이르고서는, 기즈키와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과거를 정작 그가 죽은 이후 ‘나’에게는 잘 반응했던 생일날 밤 자신과 비교한다. 그녀는 기즈키와 자신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고 모든 이야기를 나눈 사이임을, 그래서 그가 죽은 이후로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을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음을 고백한다. 나오코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레이코 씨의 제안에 따라 건물을 나와 숲을 통과하여 그 반대편 언덕 위에서 작은 불빛이 흔들리는 나오코의 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다시 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오코를 진정시킨 레이코 씨와 그녀의 과거사였다. 젊을 때 프로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어느 날 왼손 약지가 굳어버려 움직이지 않았던 그녀는 그 당시 자신의 전부였던 피아노의 상실로 인해 펑, 머리에서 나사 하나가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신세가 더욱 처량해진 것은 자신을 둘러싼 부모와 이웃들, 다른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나 구설수였고 그 때마다 그녀는 펑, 머리에서 나사 하나가 날아가버렸다고 증언한다. 그녀의 정신적 위기는 집안의 반대와 자신의 모든 과거사와 현재를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결혼을 선택한 남편에 의해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으며, 자신이 이상해지더라도 다시 태엽을 감아 줄 이가 있다는 신뢰감 아래에서 그녀는 아이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했음을 회상한다. 하지만 어느 날 이웃집 여자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이 생활은 잘 짜여진 함정에 걸려들듯 단단히 꼬여버렸음을, 그 여자 아이가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이상한 매력이 있으면서도 지독하고도 교묘한 허언증을 가졌기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 밤이 깊자 ‘나’는 버드나무 가지 하나하나에 작은 새가 매달린 장면을 꿈꾼다. 바람이 불어도 가지는 새들의 무게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막대를 집어 들고 다가가 가지를 쳐 보지만, 새들은 날아가지 않고 새 형태의 금속으로 바뀌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순간 꿈에서 깬 ‘나’는 달빛이 만들어내는 상처 받기 쉬워 보이는 그림자를 두른 나오코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지켜보다가, 단추를 풀더니 가운을 흘려 버리고 알몸을 보여주는 것을 목격한다. 나비 모양의 머리핀만 걸친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나오코의 생일날 밤, 울고 있던 그녀와 함께 했던 관계에서 느꼈던 육체는 기즈키의 죽음으로 사라지고 이제 남은 그녀의 육체는 너무도 아름답게 완성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가운을 걸치고 사라진 나오코와 밤을 뒤로 하고 맞이한 아침에 나오코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나’를 향해 방긋 웃는다. 그녀는 나비 머리핀을 꽃지 않은 상태였다.
- ‘나’, 나오코 그리고 레이코 씨 세 명은 ‘아미 산’ 뒤쪽 고원으로 소풍을 간다. 여름에만 운영하는 작은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레이코 씨의 연주를 듣다가, 그녀의 제안으로 나와 나오코는 둘이서 단독으로 산책을 간다. ‘나’와 레이코는 우리 모두가 비틀리고 꼬여서 버둥거리기만 하다가 점점 깊은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바깥 세계를 돌아다니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기즈키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한 ‘나’가 나오코의 도움으로 성욕을 해소한 뒤, 나오코는 ‘나’에게 죽은 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그녀의 언니가 종종 혼자서 멍하니 이틀 정도 방 안에 늘어졌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사실, 그걸 다름아닌 그녀가 처음으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나오코는 자신은 너무 깊게 빠져들었다고 말했고, ‘나’는 그녀가 죽음 사람들의 힘을 너무 무서워하고 있으며 이를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날 저녁 레이코 씨와 ‘나’ 역시 단독 산책을 나간다. 레이코 씨는 피아노를 가르친 여자 애가 아마도 너무 깊은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그녀를 좀먹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그리고 그녀와 레이코 씨가 어느 날에 동성 성교를 했음을 고백한다. 시작은 어느 레슨 날 여자 애가 울면서 문제 많은 집안의 사정과 함께 너무 외롭고 슬프며,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너무 괴롭다고 토로한 것이었다. 레이코 씨는 여자 아이를 끌어안고 쓰다듬어 주는데 집중했기에 여자 아이가 그녀를 벗기고 만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 아이는 그녀를 애무하고 있었고, 그녀는 ‘안 돼, 안 돼’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자 아이의 뺨을 때려 중단된 그날의 레슨 이후로 여자 아이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았고, 레이코 씨는 자신이 여자 아이를 강제로 범했다는 소문에 시달렸기에 이사를 원했다. 남편은 한 달만 기다려달라고 말했고, 그것으로 그녀의 세 번째 펑, 나사가 머리에서 날아가버렸다. 그녀는 자살 시도를 했고, 자신이 고집하여 남편과 이혼했으며 그 이후 여기 ‘아미 사’에 왔음을 모조리 고백한다. 바깥 세계를 접하는게 두렵고, 사람들을 잔뜩 만나 생각을 또 잔뜩 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두렵다는 것까지.
- 두 사람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신주쿠의 레코드 가게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 히피와 백수들, 성인 용품점에서 이상한 용품을 파는 중년 남자, 쭈그려 앉은 노숙자, 빙고 게임을 하며 휴식 시간을 죽이는 이웃 음식점 주방장, 담배와 함께 음악을 듣고서는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여자애, ‘보지’라고 외치며 웃어대는 엉망으로 취한 회사원들, 십오 분 간격으로 들리는 사이렌 소리를 모조리 목격한다. ‘나’는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점점 혼란스러워진다고 느낀다.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나오코를 생각하며 자위한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고 나오코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가 괴로운 꿈을 꾸지 않도록 기도한다.
III.2. 제7장
- 다음 날 목요일 오후, ‘나’와 미도리는 신주쿠 지하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 미도리는 ‘나’와 키스를 한, 이웃집의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던 지난 일요일 고바야시 서점의 옥상을 이야기한다. 여행의 잔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나’는 여기가 진짜 세계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고백했고, 미도리는 짐 모리슨 노래의 가사 “People are strange when you’re a stranger.”를 떠올린다. 미도리는 ‘나’와 맺고 싶은 관계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투정을 부린다’. 자신을 범하는 ‘나’의 장면을 상상하고, 해적에게 밧줄로 묶인 상태에서 한 시간 뒤에 바다에 던져버려지기 전에 마음껏 ‘나’와 즐기는 장면과 함께 자신의 속을 있는 그대로 ‘나’에게 모조리 이야기해버린다. ‘나’는 “어이쿠.”라고 말하며 고개를 젓는다.
- 그 주 일요일, 미도리는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기숙사로 찾아온다. 그녀는 ‘나’에게 자위를 할 때의 상상에 한 번 정도는 자신을 출연시켜줄 수는 없냐고 이야기한다. 자신은 남자애의 생각, 몸의 특성에 대한 이른바 케이스스터디로 이것저것 알고 싶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를 낸다고도 말한다.
- 오차노미즈에서 미도리는 자신을 바보 취급한 여러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어 가정법을 어디 써먹느냐고 질문한 자신에게 화를 낸 영어 선생, 노래하고 싶어 들어간 포크송 동아리에서 마르크스를 강제로 읽게 하는 것은 물론 읽어오지 않자 문제의식이 없고 사회성이 없다는 둥 멍청이 취급을 한 사람들, 제국주의적 착취 · 산학 협동체 분쇄 등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자 설명해주기보다는 화를 마구 내는 학생들, 서민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말로 사회 혁명을 논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다 안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는 학생들, 여자 아이들에게만 싸 오라는 부담을 지운 야식 주먹밥에 기껏해야 매실 절임밖에 안 넣었다고 푸념하는 동아리원들에 대해서. 미도리는 이들 모두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남한테 들키는게 두려워서 벌벌 떠는 인간들이며, 그 때문에 이들이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늘어놓고 똑같은 음악과 영화를 본다고 말하며, 이딴 게 혁명이라면 필요 없다고, 자신은 그런 거를 믿지 않고 사랑만 믿겠다고 일갈한다.
- 미도리와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방문한다. 미도리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우루과이로 떠났다고 이야기한 것은 거짓말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는 이 년 전 엄마의 사망 원인과 동일하게 뇌종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는데,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한 생명이 살았던 미약하고 뿌연 흔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우 몇 마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고, 음식도 거의 먹지 않았다. 미도리는 이런 그녀의 아버지가 뿌리는 정말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성격이 무르고 장사도 잘 못했지만 어머니를 사랑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으며 정말 올바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 잠깐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간 병원 식당에서 ‘나’는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압도된다. 무엇보다도 환자와 의사가 명확히 구분되는 공간이라는 점, 죽음과 가까운 공간이라는 점이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나’는 밥을 거의 먹지 못하지만, 미도리는 잘 먹는다. 미도리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먹어 두지 않으면 간병을 못 한다고,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냥 찾아와서 동정할 뿐인 남들은 자신이 여기서 밥을 다 먹는 것을 보면 ‘건강해서 좋겠네’라고 단순히 재단한다며 불만을 표한다. 자신도 상처받을 때가 있고, 지쳐서 축 늘어질 때가 있고, 울고 싶을 때가 있고, 나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붙잡고서 끊임없이 수술을 해대는 의사들을 오랫동안 지켜보는 게 견디기 힘들지만 중요한 것은 대소변을 치우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그녀는 일갈한다.
- ‘나’는 미도리에게 두 시간 정도 혼자 산책하고 오라고 이야기한 뒤, 그녀의 아버지를 병실에서 대신 간병한다. ‘나’는 나오코가 왜 자신 앞에서 옷을 벗었는지, 그것이 환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고민한다. 기침을 한 미도리 아버지의 가래를 닦아주고 그의 식사를 도운 뒤, ‘나’는 그에게 자신의 대학 생활과 연극사 강의에서 배우는 에우리피데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연극의 특징은 온갖 사람이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 나름의 행복과 정의를 추구해서 이도 저러지도 못하게 마구 뒤엉켜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교통 정리를 하는 신적 존재,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등장하는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현실에 존재하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까지 덧붙여서.
- 미도리 아버지는 ‘나’에게 “표, 미도리, 부닥해, 우에노 역.”이라고 정말 간절히 이야기한다. ‘나’는 돌아온 미도리와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묻는다. 미도리는 우에노 역에서 전차를 타고 후쿠시마의 숙모 집으로 가출한 과거사를 이야기해준다. 아버지가 자신을 항상 데리러 왔고, 우에노 역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평소에는 별로 하지 않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한 때가 있었다고, 매번 아버지의 말은 ‘어딜 가나 다 마찬가지야, 미도리.’라는 문장으로 끝났다는 말과 함께.
- 다음 금요일, 미도리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미도리가 전화로 그 소식을 알렸고, 도울 일이 없겠냐고 묻는 ‘나’에게 그녀는 장례식에는 익숙하다며, 그런 곳에서 ‘나’를 보고 싶지는 않다고 오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한다. 미도리는 전화를 끊기 전에 포르노 영화를 같이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묻는다. 엄청 야한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일주일 동안 미도리로부터 연락은 오지 않는다. 어느 날 밤, ‘나’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를 생각하며 자위를 해 본다. 잘 되지 않아 나오코로 바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 태엽을 감지 않는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쓴다. 사람의 죽음이란 아주 사소하고 묘한 추억을 남긴다는 고백과 함께 시작한 편지에는 미도리와 그의 아버지가 자리한 지난 사건들이 담긴다. 자신의 일상에 대한 기술로 마무리된 편지를 부쳐버린 후 ‘나’는 야구를 하는 소년들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오후가 되어 돌아온 기숙사에서 ‘나’는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미도리와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장면과 그가 간절히 부탁한 문장, 그리고 그가 남긴 것들, 마침내 그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지를 가늠한다. ‘나’는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얼마나 반복해야 할까는 생각을 한다.
III.3. 제8장
- 레코드 가게 근무에서 손을 심하게 다친 ‘나’는 치료를 받은 뒤 나가사와 선배의 방으로 향한다. 그는 이미 외무성 채용에 합격한 상태였고,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이 꾀죄죄한 기숙사에서 사 년을 버텼으니, 나가면 완전히 화려하게 살 거라고 말한다.
- 나가사와 선배는 하쓰미 씨와 ‘나’, 세 사람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편이 자신과 하쓰미 씨 양쪽에게 모두 편할 것이라면서. 외국으로 나가면 하쓰미 씨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나’에게 나가사와 선배는 그건 자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답변한다. 아무하고도 결혼할 생각이 없고, 따라서 기다릴지 말지는 하쓰미 씨의 문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인생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냐는 ‘나’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의 답변 태도는 비슷했다. 그는 인생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전제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냥 자신의 힘을 발휘해서 원하는 게 있으면 손에 넣고, 아니면 붙잡지 않으면서 살아갈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나’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보기에는 정말 몸이 부서져라 노력하는 거 같다고 반문하자, 그는 그건 노력이 아니라 노동이며, 보다 주체적으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말한다.
- 토요일 ‘나’는 나가사와 선배와 하쓰미 씨 세 명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여자를 소개시켜주려는 하쓰미 씨와 ‘나’의 사절이라는 전형적인 대화 레퍼토리는 ‘나’와 나가사와 선배의 ‘여자 스와핑’ 화두를 시작으로 점점 불편해진다. 시부야에서 술을 먹고 ‘나’와 선배 두 사람이 여자와 잤다는 사실을 듣자, 하쓰미 씨는 왜 그런 걸 하냐고 진지하게 묻는다. ‘나’는 때로 몹시 여자애와 자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가끔 온기가 필요할 때가 있고 그걸 느끼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이 외롭다고 고백한다. 나가사와 선배는 하쓰미 씨와 만난 삼 년 동안 다른 여자와 많이 잤으며, 그 여자들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고 이름과 얼굴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번 밖에 안 자고 헤어지며, 그뿐이라고, 이건 그냥 게임이고, 아무도 상처입지 않는다고는 쐐기와 함께.
- 하쓰미 씨는 “난 상처받았어. 왜 나 하나만으로는 안 되는 거야?”라고 화를 낸다. 나가사와 선배는 자신은 그런 갈증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과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과 다르게 ‘나’의 경우는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해 방황하거나 상처를 입는다고 단언한다. 하쓰미 씨가 방황하거나 상처를 입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냐고 말하자, 나가사와 선배는 자신도 물론 그러하지만 훈련을 통해 그것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 나가사와 선배는 ‘나’와 그는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유사점을 가진다고 말한다. ‘나’는 아무도 이해 안 해 줘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서로 이해받고 싶은 상대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경우 이해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나가사와 선배는 그게 그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쓰미 씨는 나가사와에게 그가 자신에게 이해를 못 받아도 괜찮냐고 묻는다. 자신이 남에게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게 잘못이냐고 쏘아붙인다. 나가사와 선배는 그건 잘못된 게 아닌 사랑이라고 정의한 뒤, 다만 자신의 시스템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선언해버린다. 하쓰미 씨는 “시스템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으르렁거리듯 외친다.
- 저녁 식사의 파행 이후, ‘나’는 하쓰미 씨와 시부야로 간다.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녀에게 뭔가를 느끼는데, 십이삼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정체는 ‘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 동경 같은 것’이라는 점, 그리하여 그녀가 ‘나’의 내부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놓았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된다. 하쓰미 씨는 자살했는데, 나가사와가 ‘나’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녀의 죽음으로 뭔가가 사라져버렸고, 참을 수 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편지에 써 보냈음을 확인한 ‘나’는 그걸 찢어 버리고 그에게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 여튼, 하쓰미 씨와 ‘나’는 시부야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당구장에서 게임을 한다. 당구장을 나오면서 ‘나’는 기즈키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당구를 친 것이 그가 자살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하쓰미 씨에게는 그의 사인을 교통사고라고 거짓으로 대답한 뒤, ‘나’는 상처를 확인하고 소독해주겠다는 하쓰미 씨의 말에 떠밀려서 그녀의 집으로 간다. 맥주 몇 잔을 더 마시며 ‘나’는 하쓰미 씨가 자신은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라고 묻는 말에 나가사와와 헤어지라고, 그는 우리와는 달리 시스템 자체가 다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쓰미 씨는 모든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나’와 하쓰미 씨는 그런 나가사와의 모든 면을 알지만 그를 사랑하고 있는 그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 일요일 아침, ‘나’는 나오코에게 또 다시 편지를 쓴다. 편지에서 ‘나’는 기즈키의 죽음을 떠올린 계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쓰미 씨와 당구를 칠 때는 떠올리지 못하다가 펩시콜라 자판기를 보고서야 뒤늦게 떠올린 자신이 마치 그 친구를 내버리고만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고백과 함께.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것, 그와 공유한 것의 어떤 부분은 벌써 사라져 버렸으며 그건 아무리 한탄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쓴다. 일요일에 자신은 태엽을 감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나’는 편지를 마친다.
IV. 지금까지의 모든 〈죽음〉들에 대하여
지금까지 작중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 표면적인 죽음 (실질적인 인물의 죽음): 나오코의 누나, 기즈키, 하쓰미 씨, 미도리의 양친.
- 상징적인 죽음 (작중 결여된 ‘인물’ 또는 인격):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나’,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나가사와 선배, 기즈키의 죽음에 격렬히 괴로워하는 나오코 (부분적 사망).
표면적인 죽음으로 열거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겠으나, 두 번째 항목으로 열거한 ‘상징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부언이 필요해 보인다. 핵심은 〈죽음〉에 관해 내가 채택하는 두 번째 의미 때문에 나는 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독서노트에 썼듯 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은 지금도 〈상실〉이라고 생각하며, 그 〈상실〉은 〈죽음〉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어떤 대상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 더 이상 접촉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태를 일컫는데, 생명체에 대해 이러한 상태에 진입하면 우리는 그 사람/생물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던가.
이 같은 두 번째 〈죽음〉에 대한 정의 속에서 내가 찾아낸 인물들이 ‘나’, 나가사와, 나오코 세 사람이라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도리와 이 세 인물의 대립 속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도리와 이 세 사람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결과로 발생하는 이차적인 〈죽음〉들을1맥락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드러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해두기 위해 부언해둔다. 나는 상술했듯 〈죽음〉을 〈상실〉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소중한 이의 죽음과 같은 첫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내가 정의한 두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으로 나타나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지 않는 두 번째 의미가 훨씬 ‘낯선’ 죽음이기에 나는 첫 번째 의미로 또는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별다른 표시 없이 죽음이라고 쓰고,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홑화살괄호를 사용하여 〈죽음〉이라고 쓰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선택하는 방향이 정반대이다. 미도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미도리는 과거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결여되었던 것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다 드러내보인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생활을 영위하기에 너무나도 바빴던 집안 사정 때문에 가지고 싶은 것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음식도 매번 비슷하게 대충 때웠기에 자신이 모은 용돈으로 조리 도구나 요리책을 샀다는 것,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가 같은 이유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이해보다는 멍청하다고 단정지어버린 사람들로터 받은 상처들 그것들 모두를 미도리는 숨김 없이 이야기해버린다. 미도리의 솔직함은 (라캉의 이론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기원한 자신의 욕망을 성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가감없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나’, 나가사와, 나오코 세 사람은 어떤가? 저마다의 방식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떤 계기가 부여될 때서야 조금씩 이야기해주거나 아니면 혼자 간직하는 쪽이다. 나가사와 선배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아예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의 근저에 있을 〈죽음〉과 담을 쌓았다. 물론, 8장에 이르는 서사 동안 나가사와 선배의 과거사가 명시적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 흥미롭게 뒤틀린 인간이라면 과거에 큰 상처를 하나 정도는 입었으리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가정이 맞다는 전제 하에, 아마도 그는 담을 쌓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인간이기에 그것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을 더 높게 쌓도록,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에 쌓는 담을 포함하여 스스로를 타인으로부터 격리시켰고 그리하여 마침내 삶 자체는 이해받을 수 없는 본질을 가진 세계 위에서 하나의 게임을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결론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즈키의 죽음 이후에 수많은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을 같은 상실을 공유하는 것이 확실한 나오코 이외의 제3자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제3자 앞에서 ‘나’는 주로 듣거나 간단히 반응하는 입장이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아니다. 나가사와 선배와 마찬가지로. 물론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겠지만 일단 있는 그대로만 볼 때의 사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나오코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 역시 상처를 드러내보이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 역시 삶 사이사이에 스며든 〈죽음〉과 담을 쌓으려고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그녀가 쌓은 담은 ‘아미 사’의 담장이 그러하듯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외부의 무언가가 넘으려 한다면 손쉽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담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쌓은 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상실〉의 괴로운 기억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면서 괴로워하고 또 끊임없이 그 공백들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면서도(다음 날에 ‘나비 모양 머리핀’을 빼고 아무렇지 않게 웃을 때처럼) 속으로는 〈죽음〉에 괴로워하는(어느 새벽에 ‘나’ 앞에서 ‘나비 모양 머리핀’을 꽃고 옷을 모두 벗어 알몸이 된 것처럼) 인간, 그것이 나오코가 상징하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V. 더 찾아보거나 생각해 본 대목들
V.1. 작중 등장하는 음악 · 책 중 어느 하나에 대한 감상과 분석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제외하고 여러 번 등장하는 외부 매체 중 하나는 빌 에반스의 레코드이다. 이 음반은 나와 나오코를 이어주는 하나의 가느다란 실로2여기서 나에 따옴표를 쓰지 않았음에 주의할 것.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작중 내용에 의하면 ‘나’ 자신이 나오코가 울면서 품에 안겼던 그녀의 생일날, 자취방에 있었던 6개의 레코드 중 항상 마지막을 차지했던 음반, 『Waltz for Debby』이다.
이 음반이 어떻게 나와 나오코를 이어주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2021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오코와 ‘나’가 만났던 때와 동일한 대학 1학년, 전세계를 휩쓴 전염병 통에 주로 본가에서 온라인으로 강의를 들었고 저녁에는 강가에서 어머니와 주로 산책을 하던 나는 새로운 사람을 갈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즈음 유튜브에서 재즈를 우연한 계기에 접했던 지라 나는 JIVE라 불리는 재즈 동아리에 가입했고, Zoom으로 진행한 온라인 음악 감상회에서 이 앨범의 곡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재즈 음악이 195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앨범에서 시작된 쿨 재즈(Cool Jazz)의 전통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지만, 어쨌든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에 등장하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주선율과 그 아래를 튼튼히 뒷받침해주는 콘트라베이스의 둥둥거리는 소리는 나에게 너무 깊은 감명을 남겼고, 따라서 엄청나게 자주 즐겨 듣게 되었다. 몇 달 동안 아침 알람으로 쓴 것도 모자라서 아예 저녁에 틀어놓고 앨범의 이름과 같은 곡 「Waltz for Debby」의 처음 몇 마디 떨어지는 음들이 마치 나비가 펄럭거리며 날아오르는 듯하다는 상상을 해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동아리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빠르게 식어버리고 다시 고독을 택한지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앨범은 나에게 대학 생활의 처음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나오코가 마지막으로 항상 이 앨범을 가져다 턴테이블에 올릴 때마다, 또 이 음반을 ‘아미 사’에도 똑같이 가져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대학으로 처음 들어가던 나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 마침내 (옆의 급우를 누르고 어떻게든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질서가 지배한) 끔찍했던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의 땅 위에서 대화가 좀 통하고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나 자신, 고등학교에 대해 가지는 치명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그 때문에 두 번 다시는 고등학교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맹렬한 분노에 타올랐던 나 자신, 마침내 이런 맥락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고 어머니와 강변을 산책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조금은 좌절했던 나 자신을 모두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과거의 나 자신과 마주하고, (미도리처럼) 그들을 모두 끌어안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3월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그래서 이 앨범이야말로 내가 여기에 쓰지 않으면 안 될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앨범은 과거 속에서 울고 있는 상처받은 가슴을 표현한 듯한 「My Foolish Heart」로 시작해서 앞으로를 노래하는 「Milestones」로 끝난다. 앨범 자켓도 마치 누구라도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흐리게 처리한 누군가의 옆 모습 실루엣이 아련한 연보라색 위에 비춰진 모양이다. 앨범 이름이 『Waltz for Debby』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 실루엣은 아마 Debby의 모습이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생겼는데.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한 번은 나오코를 넣어보고, 다른 한 번은 나 자신을 넣어 본다. 내가 나와 나오코를 이어주는 가느다란 실이 빌 에반스의 이 레코드라고 한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V.2. 소설의 나머지 부분 전개에 대한 개인적 예상
첫 번째 독서노트에 포함된 예상들이지만, 그 근거가 8장까지의 서사를 확인하면서 보충되었으므로 이번에도 적어둔다.
- 하나. 나오코는 반드시 사망할 수밖에 없다.
- 둘. 미도리는 반드시 소설의 끝까지 생존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글 전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듯 소설에서 대비되는 두 색채는 녹색과 붉은색이며, 각각은 아마도 미도리와 나오코를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 자신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교제하는 주요한 두 여성이라는 위치가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대립되는 두 여성을 소설의 상징적 공간인 숲과 초원 중 어디에 각각 배치시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깊게 파고드노라면, 미도리와 나오코에 대해 지적한 차이점이 가장 도드라진다. 지적했듯 미도리는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담한 여성으로, 계기가 주어져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의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그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을까하는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숨기며, 적당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먼저 스스로의 유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레이코 씨가 작중에서 이야기하듯 큰일이 나는 때란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상황이고, 회복하는 때란 “마음을 여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나오코는 붉은색 숲, 미도리는 녹색 초원이 아닌 다른 쪽에는 배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 그리고 나오코 · 미도리라는 두 등장인물이 서 있는 가운데 〈우물〉에서, 미학적 · 철학적으로 그리고 내가 파악한 작가의 메시지에 따라 나오코는 숲으로, 미도리는 초원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의 상징으로 들어가는 나오코는 말미에 사망해야 하며, 삶의 상징으로 들어가는 미도리는 말미까지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처럼 명백하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맥락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드러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해두기 위해 부언해둔다. 나는 상술했듯 〈죽음〉을 〈상실〉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소중한 이의 죽음과 같은 첫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내가 정의한 두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으로 나타나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지 않는 두 번째 의미가 훨씬 ‘낯선’ 죽음이기에 나는 첫 번째 의미로 또는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별다른 표시 없이 죽음이라고 쓰고,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홑화살괄호를 사용하여 〈죽음〉이라고 쓰는 것이다.
- 2여기서 나에 따옴표를 쓰지 않았음에 주의할 것.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