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서일지 #20.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III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전례없는 시간, 전례없는 사유, 전례없는 회복.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보내고 있는 3월 한 달, 나는 이전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여러 미묘한 감정선들을 느낀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이 지금껏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기 위해 둘러쳤던 얇은 막을 찢고 나와 대화하기 시작한 영향 덕분일 것이고, 또 졸업까지 단 9학점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이기에 3학점짜리 강의 두 개와 함께 늘 빼먹지 않는 철학을 위해 〈불교철학의 이해〉 강의를 청강하고 있는 비교적 여유로운 상태 때문일 것이다.
일상 속의 긴장이 조금 누그러지면 그동안 인식의 저편 구석에 던져 두었던 것들이 그림자 바깥으로 한 걸음씩 걸어 나온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학에서 보낸 나날들 동안 나 자신을 따라다니던 저 질문들 뒤로, 나는 오랫동안 잊고자 살고 했던 〈죽음〉이 다시 한 번 나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목도한다. 어릴 적 밤마다 나를 끝없는 공포에 떨게 했던 저 오묘한 부재, 내 일생을 스쳐 지나가면서 소중한 사람들을 〈우물〉 속으로 빠져들게 했던 저 은밀한 속삭임. 나는 저 〈죽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에게 가까워졌음을 인식한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변방에 머물러야 했던 〈죽음〉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노르웨이의 숲》 제2장에 등장하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다음 문장으로 되돌아가보자.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
이 문장과 동치인 문장들을 생각해본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가 어쩌면 그 하나의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삶 속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자리한다.”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서 이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자신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을 왜 묻습니까?” 그렇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누구나 사람에게는 끝이 있다는 것을, 모든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우리는 이 명제를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으로써 도피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죽음〉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만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은 종점에 도달하기에 늘 〈죽음〉은 미지의 영역에 있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고 판단해왔던 것이 아닐까. 어쩌면 〈죽음〉은 일종의 〈우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도통 뭐가 뭔지 알 수 없고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우물〉. 깊고, 어둡고,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저 〈우물〉.
나는 지난 4년 동안 내가 금단의 질문을 따라다닌 대가로 오랫동안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렸음을 기억한다. 소설의 ‘나’가 보냈던 1969년과 1970년은 나에게도 비슷하게 재현되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와 내 시간만이 수렁에 빠져 질퍽질퍽 제자리를 맴돌듯이 걸어갔”던 때,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으며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따름이었”던 때를 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통과했다. 철학에 관해 누군가 나에게 물을 때마다 대답했던 바대로 나는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갈갈이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싸웠고, 그것들의 뾰족한 조각에 찔리며 피를 흘렸다. 나는 내가 눈물 흘렸던 수많은 새벽들을 기억한다. 마음 속의 비어 있는 자리들이 시리도록 나 자신을 조여오는 통증을 나는 이를 악물고서 흘려보냈다. 이유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 통증 이후에 남는 것이란 그것들이 걸러지고 남은 일종의 응어리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무덤덤해진 감각으로 나는 몇 년을 더 치명적인 갈등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우물〉의 가장 아랫바닥까지 내려간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인간의 가장 심연에서 보낸 시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내가 물어왔던 바를 기억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 질문이 덮쳐올 때마다 나는 뭐라 웅얼거렸다. 웅얼거림은 〈우물〉의 벽에 부딪치며 갈라지더니 그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우물〉 전반을 가득 메우고서 위로 올라가버렸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아, 여기는 〈우물〉이구나. 인간의 가장 심연에 자리한, 수많은 〈죽음〉들이 떨어져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곳이구나, 하고.
2025년, 내가 〈우물〉의 마지막 턱을 붙잡고 겨우 바깥으로 빠져나온 시각. 나는 한때 내가 깊숙히 잠들어 있었던 곳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본다. 그것은 여전히 검고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져 있다. 무언가 달라져 있다. 나는 한때 내가 빠졌던 저 깊은 〈우물〉 속에서 보았던 과거들을, 무언가라도 좋으니 제발 버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손에 붙잡히는 것을 어떻게든 붙들고자 했던 저 시간들을 회상한다. 그때 나는 두 가지 광경을 목격한다. 여명이 비추어오는 시각, 내 뒤편으로는 빽빽하게 자리잡은 숲이 조용히 불타오르고 있다. 한때 내가 헤맸던 숲이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다. 붉은 숲의 맞은편, 나는 함초롬하게 젖어 태양을 기다리는 초원을 본다. 푸른 새싹들이 비탈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나는 《노르웨이의 숲》의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본다. 조금씩 재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가고 있는 저 숲에서는 나오코가 나에게 손을 흔든다. 그 맞은편에 자리한 미도리는 풀밭 위에 앉아서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마침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여기는 〈숲〉과 〈초원〉 사이에 자리한 〈우물〉임을, 그리고 나는 방금 막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한 심연에서 빠져나왔음을. 나는 이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미도리를 애타게 불러본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67.
I. 총평
나오코는 죽었다. 새는 날아가 버렸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체념하듯 익힌 〈상실〉 또는 〈죽음〉이었지만 익숙해질 수는 없다. 결국 홀로 남겨진다는 것을, 끝내 문드러져 버린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온기가 절실해진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어딘가를 거닌다. 불타는 숲, 빽빽하게 들이차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나무 기둥들이 하나씩 스러지는 것을 본다. 붉은색이 저물어든 자리에 남은 검은 재, 초록색 싹이 하나 피어난다. 《노르웨이의 숲》이 그리는 장면들이다.
〈초원〉과 〈숲〉의 경계에 위치한 〈우물〉. 소설의 제1장부터 끝까지 유지되는 이 광경은 독자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끔 한다. 시작은 모든 질문이 그러한 것처럼 동일하다. “나는 어디에 있지?” 우리는 주변을 둘러본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잘만 앞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끝이 없는 진흙 수렁 속에서 질퍽대며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인간의 가장 아래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손쓸 새도 없이 백사장의 파도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들을 휩쓸어간다. 우리는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붙들어본다. 인간이 〈죽음〉과 가장 가까워지는 바로 이 순간,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울려퍼지는 과거의 속삭임들 속에서 우리는 〈우물〉을 가장 절실하게 인식하게 된다.
눈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왼쪽에는 나오코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미도리가 서 있다. 나오코는 말한다. “죽는다는 건 그냥 죽음일 뿐이야. 그리 대단한 게 아니야.” 고개를 돌리자 미도리가 말한다. “너, 지금 어디에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뭐라 웅얼거린다. 작은 웅얼거림은 여기에 부딪치고 저기에서 튀어나가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공간을 가득 채운다. 〈우물〉을 가장 절실히 인식하게 된 인간은 마침내 깨닫는다. 아, 여기는 〈우물〉이구나, 나오코는 숲속으로 들어가 목을 맸지만 나는 숲과 초원 사이, 그 둘 중 어느 곳도 아닌 참으로 애매한 곳에서 오랫동안 떨었구나. 손을 뻗어 우리는 잡을 수 있는 것들이라면 뭐든지 잡고 조금씩 벽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한다. 여전히 나오코는 들여다보고 있고 미도리는 투정을 부린다. 둘 중 누구라도 좋으니 온기를 바라기에 있는 힘을 다해 우리는 마지막 턱을 뛰어넘는다.
불타는 숲과 이슬이 내려앉은 초원 사이에 주저앉아 우리는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다. 그 연기가 너무 쓸쓸해 보이기에 우리는 장례식을 준비하기로 한다. 누군가가 기타를 꺼내 익숙한 선율을 연주한다. 삶의 모든 ‘나오코’를 위해, 그러니까 우리 자신 그리고 어쩌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한 저 〈죽음〉들을 위해 그 곡을 연주한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노르웨이의 숲》을.
II. 인상 깊은 부분 두 가지와 그 이유
II.1. 첫 번째 대목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체념하듯 몸에 익혔다. 또는 체념했다고 믿었다. 그건 바로 이런 것이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그것만 붙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위스키 몇 병을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에 모래를 묻히며 배낭을 맨 채 초가을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p. 529-530.
- 〈죽음〉. 참으로 기묘한 존재. 생각할수록 점점 더 우리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만 같은 바로 이 영원한 〈우물〉. 일상 속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거의 일부러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부르르 떨리는 자신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의 가장 저편에 죽음을 밀어두고서 삶을 살아간다.
- 그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잔인하게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실로 문장대로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간다. 그러나 이 문장은 뒤에 부언되고 있듯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라는 저 문장은 상술했듯 우리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의 가장 바깥쪽에 밀어두고서 애써 고개를 돌리는 형태의 문장, 즉 쓰여는 있되 제대로 생각하지는 않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로 내려가지 않고서 그저 바깥에서 ‘저기 검은 것이 있군!’이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형태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 나오코의 죽음 이후 방황하면서 그러한 문장 속에 품은, 어쩌면 우리 삶 속에 숨겨져 있는 〈우물〉을 마주한 소설 속의 ‘나’를 통해 나는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첫째는 며칠 전 청강으로 듣고 있는 〈불교철학의 이해〉 강좌에서 들었던 부처의 출가고, 둘째는 지난 2월 〈OMORI〉 독서 모임에서 내가 주목했던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 개념이다.
- 우선 전자, 즉 〈불교철학의 이해〉 강좌와 부처의 출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동양권 대승불교 전통에 전해지는 ‘사문유관(四門遊觀)’ 이야기에 따르면, 세상의 더럽고 어두운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왕에 의해 철저히 궁전 안에 격리되어 근심 걱정을 모르며 자란 그는 스물 아홉에 궁 밖으로 나가 그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네 가지를 목격한다. 첫째, 궁궐 동문으로 나간 그는 노인을 발견하고,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둘째, 남문으로 나간 그는 병자를 발견하고, 병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셋째, 서문으로 나간 그는 장례식을 목격하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북문으로 나간 그는 수도승을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교수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은 출가한 싯다르타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한켠에 치워두고 애써 무시하며 살아가는 게 보통인데, 싯다르타는 그러한 늙고 병듦의 고통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함에 따라 자연히 뒤따르는 끝없는 공포를 직면할 생각을 했다고. 그때 나는 2년 전 들은 〈서양철학의 고전〉 강좌를 강의한 노교수에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점, 그가 왜 니체와 불교 철학을 그렇게 연결지어 논문을 썼을지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얻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결국 모든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이 〈죽음〉 그리고 〈상실〉은 동일하다는 사실을 짐작함에 따라, 나는 내가 한 때 들어가 허우적거렸던 〈우물〉의 깊이가 생각보다 더 깊었음도 깨달았다.
- 후자,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는 이 〈우물〉로부터 빠져나온 때, 그러니까 1학기를 시작하기 직전인 2월 마지막 주차에 내가 〈하얀 문〉이라는 시니피앙까지 써 가면서 내가 주목한 그리고 주목하고 있는 개념이다. ‘주이상스’의 핵심은 닿을 수 없는 것에 닿고자 하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 버린 실재를 탐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파악해버린 나는 분명히 이 구도가 너무나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서기에는 그 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어 울려퍼지는 의미와의 투쟁,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이상스〉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직감들.”
- ‘주이상스’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상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온 역사가 단지 지난 4년의 대학 생활만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유년기의 나를 뒤틀어놓은 것은 아마도 〈죽음〉. 처음으로 내가 목격한 소중한 사람의 〈상실〉. 즉 외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께서 그토록 비참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불이 꺼져버린 방에서도 더 어두운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목도했다.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 당시의 나는 홀로 그 밤의 훌쩍거리는 소리와 간간이 이어지는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강인한 어머니조차도, 수십 년의 세월이라는 경험이 쌓여있는 어머니조차도 〈죽음〉 그리고 〈상실〉이라는 인간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언젠가는 결국 찾아온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을 뿐인 저 거대한 숲을 맞닥뜨리자 길을 잃어버리는데, 그렇다면 나는? 추정컨대 내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경우 남겨진 사람들은 저토록 슬퍼하고 고통에 신음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그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외할아버지의 기일이 되돌아올 때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공허해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으로부터 나는 아마도 다음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던 것 같다: “어떤 진리로도, 어떤 성실함으로도, 어떤 강인함으로도, 어떤 상냥함으로도 〈죽음〉과 〈상실〉의 공허는 채울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채울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하지만 너무 어렸던 나는 모든 사람이 했던 실수와 정확히 같은 실수를 했고, 그리하여 한동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의 가장 바깥에 두었던 그 사실은 고등학교와 대학의 〈상실〉들을 거치면서 재점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이제 나는 내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나 〈자살〉이라는 저 철학적 주제를 붙들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까지 대학에서 비틀거리면서 너무 많은 생각들을 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을 얻은 것 같다. 아마도 최초의 〈죽음〉에 대한 인식 이후 한동안 덮어두었던 자신의 근본적인 운명은 내 나이가 스물에 도달해감과 동시에 일어난 수많은 〈상실〉들을 통해 벗겨저버렸고, 스물이 됨과 동시에 또 다른 〈상실〉과 격렬하게 반응하면서 나에게 일종의 정신적 출가를 행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가설. 나는 그렇게 서성거린 길들을 되짚어본다. 그럴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저 대목을 이루고 있는 단어 하나하나들이 그 길들에 모조리 흩뿌려져 있었고, 지금까지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II.2. 두 번째 대목
“자기가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 어떤 아픔을 느낀다면, 그 아픔을 남은 인생 동안 계속 느끼도록 해. 그리고 만약 배울 게 있다면 거기서 뭔가를 배우도록 하고.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미도리와 둘이서 행복을 찾도록 해. 와타나베의 아픔은 미도리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잖아. 그 사람한테 상처를 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거야. 그러니 괴롭겠지만 더 강해져. 더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거야. 나는 네게 이 말을 해주려고 그곳을 나와 일부러 여기까지 왔어. 먼 여정을 관 같은 기차를 타고 말이야.”
“레이코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아요.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있죠, 그 장례식, 너무 쓸쓸했어요. 사람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레이코 씨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어 가는 거야. 나도 자기도.”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양억관 역, 민음사, 2024, p. 556-557.
-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 내내 나는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마음 속에 자리한 공허들, 즉 수많은 〈상실〉 그리고 〈죽음〉들을 꺼내어 마주했다. 비유하자면 나는 숲속에서 수많은 과거의 나 자신을 만났다. 첫 번째 독서 노트에 썼듯 약 15년 전 근본적인 〈고독〉 즉 쓸쓸하고 우울했던, 어쩌면 나 자신의 오늘날 정신적 ‘주름’에 너무나도 빨리 기여해버렸던 초등학교의 나 자신을, 그리고 고등학교의 옆의 친구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끔찍한 구조 그리고 1학년 가을 즈음 내게 닥쳐온 끔찍한 가정사 둘로 인해 격렬하게 괴로워했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 그 두 사람이 울고 있음을 지금껏 애써 무시해왔음을 깨달았던 나는 그 ‘고개 돌리기’의 역사 동안 내가 비틀거린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고찰해서 두 번째 독서 노트에 펼쳐 놓았다. 글에서 나는 본질적인 저 트라우마들이,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저 〈죽음〉들이 지금의 나 자신 그러니까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견지하고 있는 나의 ‘거리의 파토스’라던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사랑에 대한 감정’ 등이 어디서 기원했을 수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 노력의 산물을 기록해두었다.
-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빠져나옴에 따라 이 두 독서 노트가 내가 걸어다녔던 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발자취가 수많은 질문들, 이를테면 “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죽음과 삶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렇다면 삶 속에서 나는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로 이루어졌음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이제 두 번째 독서 노트에서 내가 사려 깊은 독자라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쓴 저 삼항의 구도, 즉 〈숲〉과 〈초원〉 사이에, 풀로 잘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으며 한 번 빠지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저 깊은 어둠, 〈우물〉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죽음이 도처에 가득한 이곳에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 두 번째 독서 노트에서 나는 미도리와 나오코를 비교하면서 미도리는 삶을 상징하는 〈초원〉에, 나오코는 죽음을 상징하는 〈숲〉에 서 있는 존재라고 썼다.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가운데, 그러니까 〈우물〉에 위치한 존재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여전히 헷갈렸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공포에 대해 생각했고 그 때문에 눈을 돌려 삶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사이사이에 녹아들어간 죽음에 대해, 그리하여 또 다시 공포에 대해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부득이 사유의 연쇄적 사슬을 끊어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흐름이 소설에 등장한 ‘나’가 나오코의 죽음 이후 백사장에 드러누워서 “죽음은 별 것이 아니다”라고 속삭이는 나오코와 함께 쓸려가기를 기도한 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 참 이상했다. 나는 대학 내내 지속된 주기적인 번아웃에서 발견해온 사실을 또 한 번 찾아냈던 것이다. 자신이 가장 아래로 주저앉았을 때, 그러니까 완전히 무너져내려 방황하기 시작할 때 나는 항상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외치며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새싹을 발견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었고 번아웃의 시작이 되었던 모든 것을 화르르 태워버리고 있었던 저 거센 불길은 그대로인데, 그리고 아마도 그 불길의 근저에 있을 〈상실〉은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것임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그게 가능했다. 나는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어떤 〈죽음〉에 계속해서 아파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모른 채 하면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그 〈상실〉의 대상에게 미안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나는 그 폐허 위에서 항상 새로이 시작하기를 욕망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책 · 철학 · 재즈와 같은 대체재를 통해 어떻게든 마음 속에 비어버린 저 자리를 덮어보려고 시도하는 스스로를 계속해서 목격했던 것이다.
- 그 때 나는 숲과 초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두 번째 독서 노트에서 나는 숲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경험,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6학년 1반의 어느 교실에서 내가 외로이 종이 위로 줄을 그으며 곱씹었던 그것, 숲의 천이 과정을 생각했다. 나는 숲과 초원은 상호유기적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위에 자리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음을 기억한다. 숲은 초원이 성숙하면 반드시 맞이하게 되는 단계였다. 모든 초원은 그 위에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 가지를 뻗침에 따라 뿌리들로 ‘주름져서’ 결국 자연스럽게 숲이 된다. 그렇다면 초원이 숲이 되는 과정과 별개로, 초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초원은 숲이 다 타버리고 남은 자리 위에 이끼 등 씨앗들이 날아와 싹이 트면서 시작된다. 모종의 계기로 오랜 시간동안 붉은 섬광을 내며 활활 불타버리고 검은 재들만 남은 숲 위에는 녹색의 씨앗 하나가 자라나게 되는 법이고 그리하여 초원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숲과 초원은 항상 서로가 서로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구조다. 숲 없는 초원은 불가능하고, 초원 없는 숲 또한 불가능하다.
- 이때 나는 〈우물〉 바로 앞에 놓였던 저 질문, “죽음이 도처에 가득한 이곳에서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에서 쓴 저 문장들을 떠올린다. “그에게는 심지어 병들어 있는 것이 삶을 위한, 더 풍부한 삶을 위한 효과적인 자극제이다. 그래서 내게는 현재가 사실상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시기로 여겨지는 것이다 :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삶을, 말하자면 새롭게 발견했다. 나는 모든 좋은 것과, 다른 사람들이 쉽사리 맛볼 수 없을 사소한 것들까지 맛보았다 ― 내 건강에서의 의지와 삶에의 의지를 나는 나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다음의 사실을 주목해보라: 내 생명력이 가장 낮았던 그 해는 바로 내가 염세주의자임을 그만두었던 때였다 : 나의 자기 재건 본능이 내게 비참과 낙담의 철학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 니체의 문장들 위로 미도리가 수화기 반대편에서 “너, 지금 어디에 있어?” 라고 묻는다. 고개를 든 나는 이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된다. 나는 〈숲〉과 〈초원〉 사이에 있는 〈우물〉 앞에 서 있다. 몸을 돌려 숲을 바라보니 이제 한때 내가 헤맸던 저 숲은 붉은 열기에 휩싸여 있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그것은 타들어간다. 나의 유년기,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 전반에 걸쳐 내가 걸어왔던 저곳은 시간과 함께 모든 기억이 그러하듯이 조금씩 스러진다. 압도적인 울창함을 조금씩 잃어버리며 불완전해지고 있는 저 숲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돌려 반대편의 초원을 본다. 이슬에 푹 젖어 있지만 여명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푸르름을 잃지 않는 초원을.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붉게 물든 숲을 본다. 불이 꺼지면 그 재 위에서 다시 초원이 자라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그 초원은 숲으로 무성하게 자라나 또 다시 불타버리고 재로 돌아갈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새로이 자랄 초원의 양분으로 계속 지속될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하늘로 날아가버리는 저 연기들을 저렇게 쓸쓸하게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레이코 씨를 불러 기타 한 곡을 청한다. 나오코를 위해서 한 곡 연주해달라고, 그렇게 나는 부탁한다. 그녀는 붉은 숲과 푸른 초원 사이에서 마지막 작별을 연주한다. 다른 어느 곡도 아닌, 바로 《노르웨이의 숲》을.
III. 장별 주요 내용 요약

III.1. 제9장
- ‘나’는 신주쿠의 지하 술집 ‘DUG’에서 미도리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그녀를 처음으로 만난다. 미도리는 장례식에는 익숙하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간병으로 고생하는 데에 비하면 소풍 같다고, 너무 지치기도 했고 또 주위 사람들이 제멋대로 와서 제멋대로 울기를 바랐기에 울지 않았다고도 했다. 훌쩍 떠난 나라 여행은 생리 때문에 망쳐버렸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심경을 고백한다. 남자 친구와 싸운 뒤 혼자서 편안하게 여행하려고 간 아오모리에서 ‘나’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고, 지금은 안에 무언가가 뭉치고 쌓인 상태라 툭 건드리면 엉엉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 ‘나’와 미도리는 변태물 영화를 보러 간다. 미도리는 장면들을 본 영화관의 사람들이 성욕을 느끼는 모습, 영화 속 인물들이 성행위를 할 때 나는 소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영화를 보는 것보다 그녀를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 미도리는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고서 정말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함께 자고 싶다는 그녀의 어리광에 ‘나’는 결국 미도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고바야시 서점’으로 향한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미도리는 죽은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알몸을 보여줬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에 대해 말했다고 이야기한다. 서로의 이야기에 키득거린 ‘나’와 미도리는 아버지를 모신 불단 앞에 함께 눕는다.
- 조금 뒤에 빠져나온 ‘나’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은 뒤 곤히 잠든 미도리를 뒤로 하고 기숙사로 돌아간다. ‘나’와 나오코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시간이 지나간다. 편지에서 나오코도 외롭다고 말한다. 다만 나오코의 경우, 외로움을 타노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밤이면 ‘나’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읽고 또 읽으면서 레이코 씨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면서.
- 나오코는 레이코 씨와 같이 반씩 뜬 스웨터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 “내 스무 살은 너무 허망하게 끝나 버렸지만 네가 내 몫까지 살아 준다면 정말 기쁠 거야.”라고 쓴다.
III.2. 제10장
- ‘나’에게 가장 힘들었던 1969년이 제시된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무겁고 끈적거리는 수렁, 나아가는 주위 사람들과는 달리 제자리를 맴돌듯이 걸어가는 ‘나’와 ‘나’의 시간들이 제시된다. ‘나’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기에 한 걸음씩 내디딜 따름이었다고 말한다.
- 그 해 12월 나는 ‘아미 사’를 방문하여 나오코를 만난다. 나오코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방긋 웃기만 했다. 레이코 씨가 자리를 비우자 그녀는 ‘나’의 마스터베이션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 감촉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나’와 나오코는 그녀가 자신의 스무 살 생일, ‘나’에게 안겨 펑펑 울었던 그 날 외에는 도무지 젖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기숙사를 나와 방을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오코는 천천히 생각하게 해 주라고, 그리고 ‘나’도 천천히 생각해 줘라고 말한다. 눈이 내리는 사흘 동안 ‘나’와 나오코는 옛날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조금씩이지만 기즈키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 1970년 초 ‘나’는 기숙사를 나와 독채의 방을 얻어 이사한다. 사흘 후 나오코에게 편지를 쓴다. 4월부터 그녀와 함께 살 수 있기를, 가까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쓴다. 이사로 이것저것을 만들고 또 아르바이트로 비용을 모아 구매하면서 두 주가 지난 이후, ‘나’는 미도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에게 사과의 편지를 쓴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미도리에게도, 나오코에게도.
- 답장을 기다리기를,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며,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고 정원 손질이라던가 창고에서 찾아낸 자전거를 수리한다던가로 기묘한 봄을 보내던 ‘나’에게 어느 날 레이코 씨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녀는 나오코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그녀가 ‘나’의 편지에 답장을 쓰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결국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는’ 증상과 편지를 쓰려고 할 때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문의와 함께 진행한 면담에서 ‘나’를 부르고자 했지만 그녀가 “만날 때는 깨끗한 몸으로 만나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거부했다고, 그녀의 회복을 기도해달라고 쓰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사흘 동안 바다의 바닥을 걸어가는 듯한 기묘한 시간을 보낸다. 벚꽃을 바라보면서 ‘나’는 부패를 생각한다. 왜 나오코의 육체는 병에 시달려야 할까 질문을 던지며 ‘나’는 봄을 격렬하게 증오한다.
- 미도리가 같이 만나 점심을 먹자고 편지를 보냈고, 의식이 풀어져 있던 ‘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라는 나가사와 선배의 말을 떠올린다. 마침내 몸을 바로 세운 ‘나’는 레이코 씨의 편지 내용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다. 나오코가 쾌유되어 간다는 낙관적이 관측이 한순간에 뒤집혀 버렸다는 것을,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떻게든 살아가면서 그녀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임을 ‘나’는 깨닫는다. 죽은 기즈키를 생각하면서 ‘나’는 더 강해질 것이라고, 성숙할 것이라고,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미도리와 만난 ‘나’는 최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도리는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과 같다고, 새옹지마라고 이야기한다. 나오코를 생각하면서 멍한 상태였던 ‘나’를 미도리는 약속이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떠난다. 그녀는 자신이 ‘나’의 세계로 향하는 문에 노크하더라도 눈만 한 번 들어 쳐다보고는 금방 자기 세계로 들어가버리는 ‘나’에게 화가 났으며, 다음에 강의실에서 봐도 말을 걸지 말라는 편지를 남긴다.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편지를 쓰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나’는 나오코에게 결국 또다시 편지를 쓴다.
- 나오코도 미도리도 모두 멀어져 간 1970년 4월과 5월, 강의실에서 말을 걸어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쏘아 붙이는 미도리와 아무런 소식이 없는 나오코 사이에서 ‘나’는 애절한 고독을 씹으며 시간을 보낸다. ‘나’는 마음이 영문도 모르게 부풀어 올라 떨리고 흔들리다가, 아픔이 궤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때마다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둔중한 통증이 ‘나’에게는 계속 남았다. ‘나’는 종종 나오코에게 쓴 편지로부터 위로를 얻고,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 이토와 대화하면서 고통을 견딘다. 5월 중순에 레이코 씨로부터 나오코의 상태가 더 나빠졌으며, 결국 전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편지로 받은 뒤 ‘나’는 편지를 더 많이 쓴다. 편지 쓰기를 통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생활을 겨우 붙들어두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 미도리와 ‘나’가 대화를 한 것은 6월이었다.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해서 외로웠고 힘들었다고 말한다. 미도리는 그녀 역시 ‘나’를 못 만나서 외로웠고 힘들었다고 말한다. 남자 친구가 있음에도 ‘나’가 생각났기에 그와의 관계도 정리해버렸으며,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안아 줄 수 있지는 않겠냐고 묻는다. ‘나’는 미도리를 정말 좋아하지만 나오코의 상황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라고 대답한다. 미도리는 자신은 ‘살아 움직이는, 피가 흐르는 여자’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잡지 않을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진심으로 좋아하고 다시는 놓치기 싫지만 지금은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미도리는 기다려주겠다고 한다. ‘나’와 미도리는 빗속에서, 그녀의 방 침대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았고, 미도리는 ‘나’의 마스터베이션을 도와준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미도리와 나오코를 모두 갈구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즉, 미도리를 사랑하지만 속에는 나오코를 위한 꽤 넓은 자리도 손도 대지 않고 보존하고 있음을 발견한 ‘나’는 레이코 씨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쓴다. 나오코에게는 무서우리만치 조용하고 상냥하며 맑은 애정을 느끼지만, 미도리에게는 땅을 밟고 서서 걷고 숨 쉬고 고동치는 무엇을 느낀다고.
- 레이코 씨는 답장에서 나오코가 ‘생각보다 빨리’ 쾌유되고 있다는 소식, 그런 양가적인 감정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인생을 자기 방식에만 너무 맞추려 하지 말고 조금 마음을 열어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조언한다. 그런 기회는 인생에 몇 없으며, 잡을 수 있을 때 잡지 않으면 후회와 쓸쓸함에 시달리게 된다는 말로 편지는 끝에 도달한다.
III.3. 제11장
- 나오코가 자살했음이 밝혀진다. 그 뒤에는 곧바로 나오코의 죽음 이후 ‘나’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가 기술된다. 1970년 8월, 나오코의 쓸쓸한 장례식 이후로 ‘나’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방황한다. 오로지 낯선 땅에서 푹 자는 일만을 바라면서, 발 닿는 대로 이동하고 방금 어두운 구멍에서 기어 올라온 몰골을 유지하면서 길을 걷고 해안가에서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나’는 나오코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당장이라도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선명히 기억하지만, 그녀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나오코에 관해 분출하는 기억들을 억누르지 못하고 바다 위에 드러누워서 파도가 자신을 쓸어가기(죽음)를 기도했지만 물이 빠져나가고 홀로 백사장에 남게 되자 아파한다. 어떤 진리로도, 어떤 성실함으로도, 어떤 강인함으로도, 어떤 상냥함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슬픔, 다 슬퍼한 뒤에야 거기서 뭔가를 배우더라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슬픔 속에서 ‘나’는 한 달 동안 떠돌아다닌다. 도쿄로 돌아오면서도’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실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죽었으며 미도리는 남았다는 것, 나오코는 하얀 재가 되었고 미도리는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남았다는 바로 그것.
- 며칠 뒤 레이코 씨가 ‘아미 사’를 나와 ‘나’를 찾아온다. 그녀와 함께 ‘나’의 방으로 오는 길에 ‘나’는 그녀와 ‘나’가 나오코라는 죽은 자를 공유한다는 생각을 했고, 갑자기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레이코 씨와 ‘나’는 그녀가 나오코의 유품으로 받은 옷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이코 씨는 나오코가 옷을 자신에게 모두 주라는 짧은 메모 외에는 일절 유서 없이, 어머니와 함께 찾아왔던, 어쩌면 모든 것을 결정해두었기에 밝은 표정의 그녀가 물건들을 정리하고 편지를 태우고 레이코 씨에게 ‘나’와 했던 섹스에 대해 처음으로 아주 상세하게 말한 그날 밤, “다시는 아무도 내 안에 들어오게 하기 싫고,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기 싫을 뿐이다”는 말을 남긴 그날 밤 숲으로 들어가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말한다.
- 레이코 씨는 ‘나’에게 미도리와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다. ‘나’는 미도리를 선택했고 나오코는 죽음을 선택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엉켜 버리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지만 나오코를 잊을 수 없다고, 결과가 마찬가지였기는 하겠지만 중도에 나오코를 내팽겨친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부터 그녀와 ‘나’가 결합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는 말을 덧붙인다. 레이코 씨는 나오코의 죽음에 대해 ‘나’가 어떤 아픔을 느낀다면, 남은 인생 동안 계속 느끼되 거기서 뭔가를 배우고, 그와 별개인 미도리와 별도로 행복을 찾으라고, 더 강해지라고, 더 상장해서 어른이 되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적어도 나오코는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한다. 레이코 씨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어간다고 말한다.
- ‘나’와 레이코 씨는 쓸쓸한 나오코의 장례식을 잊기 위해 다시 한 번 둘이서의 장례식을 진행한다. 레이코 씨는 「디어 하트」부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그리고 마침내 「노르웨이의 숲」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곡들을 기타로 연주하고, ‘나’와 그녀는 계속해서 술을 마신다. ‘나’와 레이코 씨는 작은 장례식을 마치고 섹스를 한다.
- 레이코 씨와 헤어진 다음,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너와 둘이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수화기 너머에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휙 둘러보고 질문을 반복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도 없고 짐작도 가지 않았다.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사람들 뿐이었기에,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IV.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인가?
- ‘II. 인상 깊은 두 대목과 그 이유’에서 충분히 쓴 것 같지만 조금 주석을 덧붙여가며 다시 한 번 설명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은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비틀즈의 동명의 노래. 둘째, 작품 내내 유지되는 숲과 초원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우물이라는 구도. 셋째, 숲의 천이 과정.
- 노래에 대해서는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가사를 보면 명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동의할 대응 관계만을 빠르게 밝히고 넘어가고자 한다. 첫째, 그녀(Girl)는 소설의 나오코에, 가사의 화자는 소설의 ‘나’에 대응시키면 일어난 사건들이 거의 소설과 동일하다. 둘째, 가사에서 그녀가 보여준 자신의 방은 소설의 〈우물〉 또는 나오코의 깊고 맑은 눈동자에 대응한다. 셋째,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 끝에 그녀가 한 말 “이젠 잘 시간이에요.”는 나오코가 목을 매달기 직전 남긴 “더 이상은 아무도 내게 들어오게 하기 싫고,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을 뿐이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넷째,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새가 날아가 버렸기에 불을 지핀 것은 나오코의 죽음 이후 ‘나’가 겪은 방황 그리고 다시 미도리를 떠올리는 과정과 대응된다.
- 하지만 노래만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왜 ‘노르웨이산 가구’ 혹은 ‘노르웨이산 목재’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Norwegian Wood》가 소설에서는 ‘숲’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가이다. 나로서는 두 번째, 그러니까 작품 내내 유지되는 삼자 구도: 〈숲〉 – 〈우물〉 – 〈초원〉과 세 번째, 숲의 천이 과정이라는 두 요소를 고려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 두 번째 독서 노트에서 이미 나는 〈숲〉이 어떤 공간이며, 〈초원〉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요점은 〈숲〉은 죽음에 상응하는 공간이고 〈초원〉은 삶에 상응하는 공간이라는 것에 있다. 인간은 결국 삶과 죽음 사이에서, 조금 더 정확히는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삶과 죽음이 아니라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독자는 그 가운데 놓인 〈우물〉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우물〉이란 무엇인가를 고려해보면, 첫 번째 독서 노트에 썼듯이 그것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온갖 과거를 끌어와 현재에 세워 버리는 장소이다. 그 〈우물〉 속에서 뛰쳐나오는 그 모든 정동들이 어디서 왔느냐를 생각해보면, 결국 나 자신이 과거에 겪은 〈상실〉과 〈죽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에 우리는 〈우물〉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란 〈숲〉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 그런데 이번 독서 노트에서 제시한 ‘숲의 천이’가 상징하듯, 결국 〈숲〉과 〈초원〉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구조이다. 초원은 자연스럽게 숲이 되며, 초원은 불타버린 숲 위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이 두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두 사실에 대응하는 문장이란 결국 모든 삶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며, 삶은 죽음 위에서 피어난다는 귀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전자 그러니까 우리 자신과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라는 저 자명한 명제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저편에 치워두고 마주하기를 고집스럽게 미루는 명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 너무나도 가까운 것이었음을 인식하는 순간 자연히 떠오르는 저 질문: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이 후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이 ‘숲의 천이’가 가져다주는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의 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이 되어야만 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 마지막으로 나는 원곡의 가사 중 “So I lit the fire”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화자는 도대체 왜 불을 질렀을까? 세간의 수많은 해석들은 성관계를 거부한 그녀에 대한 복수로써 방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산 목재’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Norwegian Wood’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해석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수 해석에 조금 더 마음이 끌린다. 숲을 불태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뒤에 남는 재 위에 새싹이 하나 자라날 것임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자는 불타는 〈숲〉을 보면서 이야기했을 것이다. “안녕, 나의 방황. 안녕, 나의 과거. 안녕, 나의 《상실의 시대》라고.”
V. 작품에서 드러나는 상실 · 죽음, 이들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상반된 입장들
이 대목은 이미 지난 두 독서 노트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추가로 부언할 필요를 못 느낀다.
여기에서는 곳곳에 나눠져 있는 해당 대목들을 아래에 조금씩 옮겨 재구성하는 것에 그치기로 한다.
V.1. 작품에서 드러나는 상실과 죽음
V.1.1. 첫 번째 독서 노트: ‘I. 총평’
인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생물학적 죽음 뿐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가능한 모든 죽음에 대해서 말이다. 죽은 자는 말을 할 수가 없기에 인간은 그저 죽음이 어떤지 그의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1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경험. 대상의 죽음에 반드시 수반되는 바로 이것, 대상과 관계되는 자극이 불가능한 것으로 전환되는 바로 이 순간을 우리는 〈상실〉이라고 부른다.
세계는 물질들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이기에 인간은 모든 것에는 끝이 있음을 어렴풋이 인식한다. 하지만 그 인식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끝이라는 무서운 직감으로 변모한다. 그러므로 변화하는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는 영속을 꿈꾼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상실된 것에 집착하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다시 생각하는 것, 잃어버린 바로 그 대상을 불완전한 형태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재현하려 시도하는 것 모두는 인간이 자신의 근본적인 불완전성, 언젠가는 자신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희미한 직감 위에서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그가 덥석 믿어버리는 과정이다.
라캉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대상과 주체의 영원한 단절에 일찍이 집중하여, “인간의 욕망은 〈대상의 결여〉에서 기원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우리는 그의 이론이 소설의 등장인물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기즈키의 상실과 함께 뒤틀려버린 주인공과 나오코에서부터 사랑과 금전적 지원의 상실로 고통받은 미도리 그리고 정착감과 진중함의 상실로 끊임없이 배회하며 게임을 즐겨야만 하는 나가사와까지. 라캉이 그린 근본적 격리 속에서 불가능한 합일을 향해 손을 뻗는 인간의 운명을 하루키는 문장 사이마다 소복히 쌓인 단절들로써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서사 속에서 자신의 고독과 이해받지 못한 수많은 순간들, 마찬가지로 수많은 욕망과 그 투사체를 발견한다면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 이전에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해프닝을 곱씹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쩌면 이제는 상실되어 버린 예전의 이름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소설이 음미하는 인간의 주제를 고백했을지도 모르니까.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상실의 치명성에 영원히 시달려야만 하고, 그건 이 소설을 읽는 독자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라는 바로 그 주제를.
V.1.2. 두 번째 독서 노트: ‘IV. 지금까지의 모든 〈죽음〉들에 대하여’ 中
지금까지 작중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 표면적인 죽음 (실질적인 인물의 죽음): 나오코의 누나, 기즈키, 하쓰미 씨, 미도리의 양친.
- 상징적인 죽음 (작중 결여된 ‘인물’ 또는 인격):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나’,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나가사와 선배, 기즈키의 죽음에 격렬히 괴로워하는 나오코 (부분적 사망).
표면적인 죽음으로 열거한 등장인물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겠으나, 두 번째 항목으로 열거한 ‘상징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부언이 필요해 보인다. 핵심은 〈죽음〉에 관해 내가 채택하는 두 번째 의미 때문에 나는 저들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독서노트에 썼듯 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은 지금도 〈상실〉이라고 생각하며, 그 〈상실〉은 〈죽음〉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어떤 대상을 상실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 더 이상 접촉하거나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태를 일컫는데, 생명체에 대해 이러한 상태에 진입하면 우리는 그 사람/생물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던가.
V.2. 나오코와 미도리의 ‘대립’: 두 번째 독서 노트, ‘V.2. 소설의 나머지 부분 전개에 대한 개인적 예상’ 中
첫 번째 독서노트에 포함된 예상들이지만, 그 근거가 8장까지의 서사를 확인하면서 보충되었으므로 이번에도 적어둔다.
- 하나. 나오코는 반드시 사망할 수밖에 없다.
- 둘. 미도리는 반드시 소설의 끝까지 생존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글 전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듯 소설에서 대비되는 두 색채는 녹색과 붉은색이며, 각각은 아마도 미도리와 나오코를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 자신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교제하는 주요한 두 여성이라는 위치가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대립되는 두 여성을 소설의 상징적 공간인 숲과 초원 중 어디에 각각 배치시켜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깊게 파고드노라면, 미도리와 나오코에 대해 지적한 차이점이 가장 도드라진다. 지적했듯 미도리는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담한 여성으로, 계기가 주어져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의 상처를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그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을까하는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숨기며, 적당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이상 먼저 스스로의 유약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레이코 씨가 작중에서 이야기하듯 큰일이 나는 때란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상황이고, 회복하는 때란 “마음을 여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나오코는 붉은색 숲, 미도리는 녹색 초원이 아닌 다른 쪽에는 배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 그리고 나오코 · 미도리라는 두 등장인물이 서 있는 가운데 〈우물〉에서, 미학적 · 철학적으로 그리고 내가 파악한 작가의 메시지에 따라 나오코는 숲으로, 미도리는 초원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의 상징으로 들어가는 나오코는 말미에 사망해야 하며, 삶의 상징으로 들어가는 미도리는 말미까지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처럼 명백하다.
V.3. 나오코와 유사한 인물들: 두 번째 독서 노트, ‘IV. 지금까지의 모든 〈죽음〉들에 대하여’ 中
이 같은 두 번째 〈죽음〉에 대한 정의 속에서 내가 찾아낸 인물들이 ‘나’, 나가사와, 나오코 세 사람이라는 사실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미도리와 이 세 인물의 대립 속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도리와 이 세 사람은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의 결과로 발생하는 이차적인 〈죽음〉들을2맥락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드러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해두기 위해 부언해둔다. 나는 상술했듯 〈죽음〉을 〈상실〉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소중한 이의 죽음과 같은 첫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내가 정의한 두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으로 나타나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지 않는 두 번째 의미가 훨씬 ‘낯선’ 죽음이기에 나는 첫 번째 의미로 또는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별다른 표시 없이 죽음이라고 쓰고,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홑화살괄호를 사용하여 〈죽음〉이라고 쓰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선택하는 방향이 정반대이다. 미도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미도리는 과거 집안 사정으로 인해 결여되었던 것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다 드러내보인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생활을 영위하기에 너무나도 바빴던 집안 사정 때문에 가지고 싶은 것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음식도 매번 비슷하게 대충 때웠기에 자신이 모은 용돈으로 조리 도구나 요리책을 샀다는 것,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아버지가 같은 이유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이해보다는 멍청하다고 단정지어버린 사람들로터 받은 상처들 그것들 모두를 미도리는 숨김 없이 이야기해버린다. 미도리의 솔직함은 (라캉의 이론을 토대로 생각해볼 때)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기원한 자신의 욕망을 성적인 것까지 포함하여 가감없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나’, 나가사와, 나오코 세 사람은 어떤가? 저마다의 방식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어떤 계기가 부여될 때서야 조금씩 이야기해주거나 아니면 혼자 간직하는 쪽이다. 나가사와 선배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아예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의 근저에 있을 〈죽음〉과 담을 쌓았다. 물론, 8장에 이르는 서사 동안 나가사와 선배의 과거사가 명시적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정도로 흥미롭게 뒤틀린 인간이라면 과거에 큰 상처를 하나 정도는 입었으리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 가정이 맞다는 전제 하에, 아마도 그는 담을 쌓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인간이기에 그것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담을 더 높게 쌓도록,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에 쌓는 담을 포함하여 스스로를 타인으로부터 격리시켰고 그리하여 마침내 삶 자체는 이해받을 수 없는 본질을 가진 세계 위에서 하나의 게임을 즐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라는 결론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기즈키의 죽음 이후에 수많은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을 같은 상실을 공유하는 것이 확실한 나오코 이외의 제3자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제3자 앞에서 ‘나’는 주로 듣거나 간단히 반응하는 입장이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아니다. 나가사와 선배와 마찬가지로. 물론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겠지만 일단 있는 그대로만 볼 때의 사실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나오코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녀 역시 상처를 드러내보이는 타입이 아니다. 그녀 역시 삶 사이사이에 스며든 〈죽음〉과 담을 쌓으려고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그녀가 쌓은 담은 ‘아미 사’의 담장이 그러하듯 높이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외부의 무언가가 넘으려 한다면 손쉽게 넘나들 수 있는 그런 담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쌓은 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상실〉의 괴로운 기억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면서 괴로워하고 또 끊임없이 그 공백들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하면서도(다음 날에 ‘나비 모양 머리핀’을 빼고 아무렇지 않게 웃을 때처럼) 속으로는 〈죽음〉에 괴로워하는(어느 새벽에 ‘나’ 앞에서 ‘나비 모양 머리핀’을 꽃고 옷을 모두 벗어 알몸이 된 것처럼) 인간, 그것이 나오코가 상징하는 사람들의 부류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그래서 《미키 17》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부활할 수 있는 ‘미키 반스’에게 “죽는 기분은 어때? (What it feels like to die?)” 라 묻는 것이다.
- 2맥락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도록 드러냈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해두기 위해 부언해둔다. 나는 상술했듯 〈죽음〉을 〈상실〉과 사실상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소중한 이의 죽음과 같은 첫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아니면 내가 정의한 두 번째 의미로 쓰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타자의 죽음으로 나타나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정의에 따르지 않는 두 번째 의미가 훨씬 ‘낯선’ 죽음이기에 나는 첫 번째 의미로 또는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할 때는 별다른 표시 없이 죽음이라고 쓰고,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할 때는 홑화살괄호를 사용하여 〈죽음〉이라고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