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1.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

탐서일지 #21.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

2025-06-01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 (전략) … 그러나 인식하는 자로서의 우리는 그러한 전도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다르게 보는 것, 다르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지성이 장차 언젠가 자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이며 준비인 것이다. 이러한 훈련과 준비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 경우 객관성을 ‘무심한 직관'(이것은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한 것이다)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지성의 찬성과 반대를 통제하면서 그러한 찬성과 반대를 내걸거나 거두어들일 줄 아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들과 정념들이 개입하는 해석들(Affekt-Interpretationen)을 인식을 위해 이용할 줄 알게 된다. 친애하는 나의 철학자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순수하고 의지를 결여하고 있고 고통도 갖지 않는 무시간적인 인식주관’을 상정한 저 위험하고 낡은 개념적 허구를 경계하자. 우리는 ‘순수이성’이나 ‘절대정신’이나 ‘인식 자체’와 같은 모순적인 개념들의 촉수(觸手)를 경계하자. 이러한 개념들은 항상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눈을, 즉 전혀 어떠한 방향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눈에서는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힘은 억압되어야 하고 결여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을 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힘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들은 항상 불합리하고 어처구니없는 눈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직 관점적인 봄만이,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념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수록, 우리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눈과 다양한 눈을 동원할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객관성’은 그만큼 더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모두 제거하고 정념들을 남김없이 배제한다는 것을 우리가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성을 거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싱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221-222.

객관성과학.

언론이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즘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특정 언론은 특정 진영의 목소리만 선택적으로 대변하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그런가하면 탄핵 이후의 대선 국면이라는 정치적 격동기, 후보들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한 객관적 정책 수립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은 어떤 이념에 치우친 것이 아닌 오로지 증거와 민의에 기초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느 시각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 관찰적 시각으로서의 객관성을 요구하곤 한다. 개인의 주관적 신념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고 판정하는 바로 그러한 시각, 과학에서의 시각이 우리 시대에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발언들 뒤에 숨은 가정, 그것의 합리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검토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과 객관성이 결부된 실질 용례들을 검토하다보면, 우리는 오늘날 대중에게 과학은 일종의 완전한 중립적 · 객관적 시각으로서 확실한 진리의 담보책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과학은 그러한가? 오로지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얻은 증거만에 의하여 가설을 세우거나 곧바로 이를 폐기하는 방식으로 과학 활동은 이루어지는가? 과학의 각 세부 영역에서 어떤 문제를 어떻게 관찰할지, 어떤 방식으로 이를 설명할지는 오로지 자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나는 니체의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담론이 성역으로 간주되어 온 과학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는 계보적인 맥락에서 당대의 전통과 도덕관을 검토하고, 이것들이 발달된 역사를 토대로 하여 그것들을 우상으로부터 끌어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시대는 필요에 의해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사상 중 하나를 채택해왔고, 그 채택의 과정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교리를 믿을지를 선택하는 것에 가까웠음이 지적되었다. 절대적으로 믿어졌던 도덕관과 신들이 일종의 철학적 소외, 즉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믿음과 도식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어느 순간 그가 그것들의 기원을 망각하고 일종의 외부적 진리로 숭배하기 시작한 현상의 결과물이 아닌가는 니체의 의심. 철학자는 때로는 사회 통념에 맞서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러한 의심을 끝까지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약 60년 전 즈음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 토머스 S. 쿤, 그는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과학의 신성함에 도전했다. 그의 첫 출판 이후 사람들은 그가 “과학을 비이성적 · 자의적 판단에 기초하는 전혀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은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며 날을 세웠지만, 나로서는 그들과 쿤이 바라본 객관성과학 사이에 일종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le)이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연사의 어느 것도 적어도 서로 얽혀 있는 이론적, 방법론적 믿음의 암묵적인 요체가 없이는 해석해낼 수 없는데, 이러한 믿음의 요체는 자연사의 선택이나 평가 그리고 비판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82.

I. 총평

“과학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이들이 학창 시절부터 소위 ‘이과 교육’, 그러니까 인류가 지난 수백 ·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축적해온 수학 · 과학적 지식과 이론들을 배워 왔고 그중 상당수는 과학자라고 불리는 그룹에 속하게 되었거나 속할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대한 명료한 대답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학철학’이라는 이름 위에서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의거하여 자연을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초창기보다 훨씬 전문화되어 다양한 세부 분과들과 학파들로 나뉘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과학’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들을 찾아내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과학’이라는 말에 합리와 진리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론이 보다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도출되었다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방법을 통한 경우보다도 그 도출 결과를 더 믿을 만한 것으로 판정하곤 한다. 자그마치 19세기에 니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과학’이라는 낱말 혹은 표현은 인류에게 있어 일종의 절대성을 획득했으며,1「과학과 금욕주의적 이상, 이 두 가지는 ―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 실로 동일한 지반 위에, 즉 진리에 대한 과대평가 위에 존재한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란 평가와 비판을 초월해 있다는 동일한 믿음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동맹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공격당하게 되면 언제나 항상 함께 공격당하며 함께 문제시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갖는 가치에 대한 폄하는 불가피하게 과학이 갖는 가치에 대한 폄하조차도 수반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제때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 283. 그 영향력은 오늘날 증대되면 더욱 증대되었지 감소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은 ‘과학적’인 방식들이 인간이 세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발견물들을 응용하여 더 편리한 방식으로 세계를 조직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두 번의 세계 대전 시기에서의 ‘기술의 남용성’에 대한 우려를 낳은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대체로 그 어떤 사회에 의해서도 격렬한 반대나 저항에 부딪힌 적이 없는 것 같다.

저자 쿤의 견해는 이같은 보편적인 ‘과학’에 대한 대중적 믿음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과학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계보적 맥락에서, 즉 과학사의 맥락에서 어떤 연구들이 ‘탐구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연구의 ‘성공 또는 실패를 판정함에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논한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평소의 인식, 즉 그것은 어떤 존재하는 자연의 진리를 향해 인간이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바로 그 인식이 실제 일어난 또는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함에 따라 스러져감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쿤이 이야기하는 바를 따라가다 보면 ‘과학’이라는 과정은 ‘진리’와는 무관하게 어떤 공동체마다 특정한 믿음이 채택된 뒤 그것을 합리화 · 정교화하는 일을 반복하다 일종의 한계에 도달하면 다시 또다른 믿음이 채택될 때까지 상이한 파벌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보다 ‘사회적’인 과정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쩌면 쿤은 독자가 암묵적으로 동의해버린, 과학 활동이 무엇인가를 정의함에 있어 영향력을 미치는 어떤 〈패러다임〉의 실패를 보여주어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을 살펴보기 시작한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평소의 사유 체계와 세계관을 지탱해온 하나의 기둥에 금이 가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까지 조야하게 답하거나 얼버무리고 넘어간 저 정체성의 질문에 대해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다시 묻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II. 인상 깊은 부분 두 가지와 그 이유

II.1. 첫 번째 대목

패러다임은 전문가들 그룹이 시급하다고 느낀 몇몇 문제를 푸는 데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라는 이유로 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보다 성공적이라는 말은 단일한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든가,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성공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행성의 위치에 대한 프롤레마이오스의 계산, 라부아지에의 천칭 저울의 이용, 또는 전자기장에 대한 맥스웰의 수학화 같은 패러다임의 성공은 당초에는 주로 선별적이고 아직은 불완전한 예제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성공의 약속일 뿐이었다. 정상과학은 그런 약속의 실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91.
  • 통념적으로 우리는 어떤 과학 이론이 성공하여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과학계에서 당면한 수많은 문제들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법칙’이 어떤 방식으로 정립되는지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처럼, 수많은 관찰이 누적되고 이 수많은 관찰들에 대한 일종의 ‘회귀’가 진행되어 자연 뒤에 숨어 있는 ‘참된’ 관계가 마침내 ‘이론’의 형태로 정형화되고, 그 권위는 오차 범위 이내로 정확히 같은 것을 예견하는 것이 반복됨으로서 획득된다고 흔하게 간주한다.
  • 그러나 실질적인 과학의 발전사는 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렇게 일어나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새롭게 제시된 학설이 기존의 것보다도 더 온전하고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기만 하더라도 주류 지위를 획득하곤 한다.
  • 101쪽에 예시되어 있는 대로, 뉴턴 법칙은 《프린키피아》의 발표 이후 일반성에 대한 믿음을 널리 획득했지만, 그 적용례가 많지도 않았고 심지어 정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뉴턴은 단진자의 운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진자추의 부피를 무시하고 점질량으로 간주하면서 실제와 이론 사이의 상당한 괴리를 남겼고, 그가 남긴 저작들은 주로 천체역학의 문제들에 대한 이론이었기에 지상의 문제에 대한 접근에 대해서는 한참 동안 갈릴레오 · 하위헌스 등의 방식에 자리를 내준 역사가 있다.
  • 교양 과학이나 과학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등에서는 뉴턴을 마치 ‘천상을 지배하는 법칙’과 ‘지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동일한 것을 밝힌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송하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평가일 뿐이지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술은 아닌 것이다. 뉴턴의 이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아주 치밀하게 상당한 대상들에 대한 설명들과 이해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닌, 그것이 이전까지는 설명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해명에 성공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에 대한 적용 · 확장 가능성이라는 일종의 희망을 제시했기 때문인 것이다.
  • 이와 같은 과학사의 실제 맥락을 확인하다보면, 나는 어쩌면 과학 또한 종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직감을 받는다. 둘 모두가 허용되는 특정한 방법과 주요 문제들을 정의하고, 공통된 믿음을 전제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합리화와 확장이 시도된다는 점만에 의해서가 아닌, 희망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 “어떤 사상은 왜 성공하고, 어떤 사상은 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가?” 교과서를 뛰어넘은 계보적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날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상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지만 결국 잊힌 사상과 이론들을 접하곤 한다. 종교에서 우리의 질문은 “왜 유사한 인도 전통과 철학적 토양 위에서 탄생한 불교와 자이나교 가운데, 오늘날 불교만이 세계적으로 대중적이고 자이나교는 인도만의 종교로 거의 국한되어 있는가?” 등의 문장들로 나타나곤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의 질문이 과학에 대해서도 가능한 것이다. “관찰에 의할 때 뉴턴의 법칙에 따라 예고되는 케플러의 법칙이 꼭 천체들에서 만족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뉴턴의 법칙보다 더 잘 설명하는 다른 학설들을 채택하는 대신 뉴턴의 법칙을 따르지만 ‘오차’가 있다는 쪽을 채택하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 과학 교육의 덕택이자 저주로, 수많은 이공학도들은 그 이유란 뉴턴의 법칙이 ‘더욱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특히 ‘더욱 성공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더 많은 현상을, 더 정확히 설명했다는 방식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실제 과학의 발전 과정은 우리의 평소 생각만큼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쿤의 지적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과학이든 종교든, 어쩌면 그것이 세를 획득하고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초의 방아쇠는 그것이 사람들의 합리에의 욕구, 설명을 바라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II.2. 두 번째 대목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우리가 그것을 적용하는 세계의 유형이 주어진 경우라면, 그런 공통의 특성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지었다. 다수의 게임이나 의자나 나뭇잎에 공유되는 어떤 속성들을 논의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익히는 데에 종종 도움이 되지만, 이런 유형의 모든 구성요소들에 대해서 동시에 적용되고 거기에만 유일하게 적용되는 일련의 특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보는 새로운 활동이 이미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도록 배웠던 많은 활동과 비슷한 “가족 유사성”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에는 관찰되지 않았던 어떤 활동을 보고 ‘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 (중략) … 이 각각의 일가는 서로 포개지고 교차되는 유사성이 얽히면서 구성된다. … (중략) … 단일한 정상과학의 전통 내에서 야기되는 다양한 연구 문제와 테크닉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통에 특성을 부여하고 과학자들을 붙잡아두는 뚜렷하거나 온전히 찾아낼 수 있는 일련의 규칙과 가정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사성과 모형화를 통해서 과학 체제의 이런저런 부분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체제란 과학자 공동체가 이미 그 확립된 업적 중 하나로 인정한 것을 가리킨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p. 120-121.
  • 쿤의 이 대목은 주로 철학 · 예술 사조에서의 개념 정의가 난해함을 설명할 때 이용되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가,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쉬운 ‘과학’의 영역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 하다.
  • 우리는 과학은 인문학이나 예술과는 달리 모호성이 아닌 명확성과 재현 가능성, 탄탄한 정의들을 오랫동안 올바른 것으로 검증되어온 방법들을 사용해 엮고 쌓아올려 만들어온 하나의 체계에 가깝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학이든 과학이 아니든, 소쉬르와 라캉으로 대표되는 저 철학의 계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대상을 언어로 조직하고 그 언어 체계 안에서 개념들을 만들고 이어붙여 사유하는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대한 예외라 간주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 즉, 우리는 여기서 과학은 기초부터 쌓아올라가는 건물 짓기라기보다는 유비의 사슬에 의해 얽힌 또 하나의 덩어리에 더욱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런 이미지는 ‘과학’이라는 낱말에 얽힌 담보성과 확실성 그리고 철저한 구조라는 관념 때문에 우리 정신의 즉각적인 반발을 마주하게 되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과학’ 그 자체의 대명제, 즉 있는 것 · 관찰된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그 교리에 의하여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 같다.
  • 비트겐슈타인의 ‘개념’, ‘언어’, ‘사물’에 대한 관계는 ‘과학’의 절대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해 주요한 의문을 제기한다. 과학이 채택하는 방법과 연구 문제들이 합리적인 기반을 가진 특정 규칙들에 의해 채택되었다기보다는, 어떤 매력적인 선례의 영향 하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방법이나 집중해온 문제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형성되고 확장된 것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유클리드 기하원론 식의 ‘쌓아올리기’ 방식의 사유 체계에 익숙한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곤경에 빠진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과학’ 또한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다고 선언했을 때, 혹자는 그가 철학자라는 이유로 과학의 합리성에 대해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냐고 비웃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쿤과 마찬가지로 그 독일의 철학자 또한 계보적 연구를 통해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검토하고 평가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과학’의 절대성에 대한 그의 비판을 조금 더 깊은 층위에서 이해하게 될 수 있게 되었을련지도 모른다.

III. 장별 주요 내용 요약

III.1. 제1장: 서론 – 역사의 역할

  • 쿤은 자신의 문제 의식과 논고의 성격에 대해 소개한다. 그는 지금까지 설득과 교육을 위해 교과서에 기록된 ‘과학에 대한 역사’ 혹은 그로부터 추상되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 이를테면, 관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데이터를 조작하는 논리적이고 합당한 방법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지식들이라던가, 그러한 방법들을 적용해 지식들을 얻어온 역사의 누적으로서 과학을 정의하는 것 ― 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기에, ‘연구 활동 자체의 역사적인 기록’이라는 계보적인 맥락에서 과학사를 살펴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제시하겠다고 선언한다.
  • 이윽고 그는 자신의 논고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2장 ~ 5장에서 그는 ‘패러다임(Paradigm)’을 소개하고 그것이 과학자들과 과학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때문에 ‘정상 과학(Normal Science)’라 불리는 과학사의 한 단계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특징지어지는지를 소개할 것임을 밝힌다.
  • 6장 ~ 8장에서는 정상 과학을 진행하기 위한 도구가 예상대로 작동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변칙 현상(Anomaly)’을 살펴보고, 그렇게 될 때 기존의 ‘패러다임’이 지배적 지위를 잃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지위를 대체하는 변동기인 ‘비정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의 시기, 즉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시기에 대해 살펴보겠음을 예고한다.
  • 9장 ~ 10장에서는 ‘과학 혁명’의 특성을 과학사에서 주요한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들을 토대로 살펴보고, 어떠한 방식으로 그러한 전환기가 일어나는지를 논의할 것임을 알린다. 이 논의는 ‘과학 혁명’을 인식하기 어렵게 한 여러 장애물에 대한 논의인 11장과 이 시기 정상 과학과 비정상 과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을 다루는 12장을 거쳐, ‘과학적 진보’와 ‘과학 혁명’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다룰 13장으로 맺어질 것임도 암시한다.

III.2. 제2장: 정상과학에로의 길

  • 쿤은 패러다임(Paradigm)을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는 모범적인 연구 사례2책의 서두에 실린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지적(p. 24-25)대로, 오늘날 대중적 맥락에서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쓰이는 ‘패러다임’에 대한 상용례보다는 이 단어의 모태가 되는 고대 그리스어 paradeigma의 의미를 곱씹어 모범이 되는 사례, 즉 범례(範例, exemplar)의 의미로 쿤의 서술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로 정의한다: (1) 경쟁 집단 · 학파의 옹호자들을 끌어오거나 전향시킬 수 있을 정도로 폭발력이 있거나 매력이 있다. (2) 수많은 후속 문제들을 예시(豫示)한다.
  • 쿤은 정상 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는 ‘모범적 연구 사례’, 즉 이 패러다임이 제시되면서 시작된다고 보지만, 이 전이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 해당 연구례가 당대의 모든 발견 · 현상들을 설명할 필요는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정상 과학에로의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이 경쟁설보다는 설명력과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의 양들이 더 많아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 그는 패러다임의 제시 이후 정상 과학으로 어떻게 과학사가 향하는지를 제시한다. 패러다임은 아주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경쟁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에 대해 일종의 기초적이고 당연한 ‘믿음’을 형성한다. 동일한 패러다임에 전향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경쟁 학파들을 도태시키고 ‘주류’를 형성한다.3나로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복’ 또는 ‘평정’이라는 표현이 실제에 더욱 가깝지 않은가 싶다. 패러다임은 어떤 문제들이 탐구할 만한 것이고 또 어떤 방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지에 관한 암묵적인 지시들을 가지기에 과학자 집단은 더 이상 ‘처음부터의 합의’라는 문제가 아닌, 보다 심오하고 복잡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 쿤은 패러다임이 특정 분과의 전문화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성숙한 학문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그가 그 분과에서 통용되는 공통적인 믿음 또는 약속(공약)과 그것을 산출하는 패러다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당 학파에 속하는 전문가는 교육을 통해 해당 분과만의 패러다임과 추상적 규칙들에 대해 학습하고, 그 과정에서 그것을 다른 구성원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설명하지 않아도’ 그 바탕을 공유하는 소수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연구 결과들이 공표 · 공유되는 방식으로의 발전, 즉  오늘날의 학문 분과의 전문 · 파편화가 일어난다.

III.3. 제3장: 정상과학의 성격

  • 쿤은 패러다임의 영향 하에서 진행되는 과학 연구의 시기, 즉 ‘정상 과학’은 어떤 문제를 주로 탐구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것의 성격에 대해 논의한다.
  • 쿤은 이 단계에서의 사실적 과학 탐구와 이론적 과학 탐구가 모두 ‘패러다임’의 공고화 또는 맥락 확장의 측면에서 일어남에 주목한다.
  • 정상 과학 시기의 사실적 과학 탐구의 문제로는 크게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1) 패러다임이 보다 뚜렷하게 탐구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간주하는 사물의 본질을 더욱 정확하게 찾는 문제. 이 유형에는 물질의 비중, 압축률, 전기 전도도, 끓는점 등과 같은 요소들을 더욱 정확히 측정하려는 연구가 대표적이다. (2) 패러다임 이론으로부터 유도되는 예측과 비교하기 위한 사실의 결정.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예측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진행된 탐사가 대표적이다. 이 유형, 즉 사실과 이론의 일치를 보이고자 하는 연구들은 통상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은 도구 또는 측정 기술의 고안 · 발전을 동반한다. (3) 패러다임 이론을 명료화하기 위한 경험적 연구들. 패러다임 이론의 모호성을 해결하거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한 연구들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물리적 상수를 결정하는 경우나 정량적인 법칙을 얻기 위한 시도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과정 역시 (2)와 마찬가지로 도구 · 측정 기술의 발전사를 동반하여 진행된다.
  • 정상 과학 시기의 이론적 탐구의 문제도 세 가지로 분류된다. 독자가 혼동하기 좋게 두 번째 문제와 세 번째 문제는 구분이 애매하지만 차이가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1) 기존 이론을 이용해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실적 정보들을 예측하는 연구. 렌즈 특성의 계산 · 천체력의 작성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패러다임의 응용 범위를 확장하거나 그 정확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둔다. (2) 패러다임 이론과 관찰 결과의 불일치를 완화 · 제거하기 위한 명료화 · 재정식화. 이들은 기존 패러다임 이론이 실제의 설명에 실패하거나 불완전하게 성공하는 부분들을 그 이론의 추상적 · 정성적 부분을 모다 명료화하고 다듬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 (3) 기존 패러다임 이론의 심적 · 논리적 · 미적 불완전성을 제거하기 위한 재정식화 · 명료화. 이 유형은 패러다임을 다듬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2)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동기가 ‘사실과의 불일치’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뉴턴 역학에 대해 유럽의 수리물리학자들이 논리적이고 보다 심미적으로 만족스러운 형태의 재기술을 시도한 역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 쿤은 정상 과학에는 세 가지 유형: (1)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2) 사실의 이론과의 일치, (3) 이론의 명료화를 목표하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정상 과학의 시기에도 일반적이지 않은 ‘비정상적’ 문제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문제들은 정상 연구가 일정 수준에 도달한 특별한 경우에 한해 출현하고, 이는 패러다임의 폐기 (또는 대체) 가 일어나는 과학 혁명의 시기로의 전초가 된다고 덧붙인다.

III.4. 제4장: 퍼즐 풀이로서의 정상과학

  • 쿤이 이 장에서 주목하는 문제는 “왜 과학자들은 정상 과학에 헌신하는가?”라는 질문이다. 2장과 3장에서 그는 ‘정상 과학’은 이전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이론이라던가 사실에 주목하기보다는 ‘패러다임’이 지정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문제’들을 ‘패러다임’을 이용해 탐구하고 그를 통해 기존의 학설 · 이론을 강화하는 작업의 반복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107쪽에서 쿤은 이렇게 쓴다: 만일 정상과학의 목표가 실질적인 주요 혁신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런 문제들이 애초에 다루어지는 것일까?”)
  • 쿤은 그 동기가 ‘정상 과학’의 진행은 일종의 ‘퍼즐 풀이’와 같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연구자들은 처음에는 유용하다고 증명되는 어떤 새로운 것 · 영역을 찾아내고 자연의 근저에 숨은 질서를 표출하며 기존 이론들을 시험하는 통념적인 과학 활동과는 전혀 딴판으로 일어나는 현실적 연구의 모습, 즉 그 분과가 지정하는 ‘문제 풀이’에 몰두하는 모습에 집중한다. 이러한 관찰에서 쿤은 ‘정상 과학’이 참여자, 즉 연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학설 혹은 이론의 제시가 아닌, 예측한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성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을 ‘퍼즐 풀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 이유는 연구자의 흥미가 어떤 방식으로 이끌리냐의 차원 뿐만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패러다임에 의해 ‘연구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또 어떤 방식의 해법이 ‘합당한 것’인지가 좌우된다는 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아무 것이나 ‘퍼즐’이 될 수는 없다. ‘퍼즐’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요철이 있어서 들어맞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등 인정받는 특정한 형식이나 특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어떤 ‘퍼즐’ 풀이가 성공적인 것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모든 조각의 사용, 빈틈없는 짜맞춤과 같은 특정한 ‘풀이 규칙’들을 만족해야 한다.)
  • 장의 말미에서 쿤은 어떤 과학 분과에서의 패러다임과 그 분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규칙 혹은 믿음에 해당하는 ‘공약’에 주목한다. 이 ‘공약’은 과학자들에게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제공하기도 하고, 어떤 설명이 합리적이거나 인정될 수 있는지와 같은 방법론적 지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공약들 ― 즉, ‘퍼즐 규칙’들은 정상 과학에서 연구자가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를 규정한다. 다만, 쿤은 정상과학을 결정짓는 것은 공약 즉 규칙들이 아닌 패러다임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지만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마지막으로 피력된다.

III.5. 제5장: 패러다임의 우선성

  • 쿤은 ‘패러다임’과 ‘규칙(공약)’ 사이의 관계에 대해 주목한다. 궁극적으로 이 장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패러다임’이 정상과학 안에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규칙(공약)’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 그는 통상 과학 공동체를 구분짓거나 정의하는 작업에 있어 공유된 패러다임들은 수월하게 판명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에서 ‘공유된 규칙’의 경우는 판명하기 어려움에 주목한다. 다만 ‘공유된 패러다임’에 대한 그의 지적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그는 과학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패러다임의 해석이나 합리화까지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닌, 그 패러다임의 수용에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공유’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그는 ‘공유된 패러다임’의 존재,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이 과학 분과의 공약의 산출의 근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유된 규칙’들을 찾기 어려운 이유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견해, 즉 ‘가족 유사성’을 통한 대상 구분(언어 사용)으로 설명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대상에 대한 공통적인 어떤 속성에 대해 우리가 ‘이름’을 붙여 사용한다는 통상의 견해와는 달리(e.g. 수많은 색깔과 모양의 사과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 모두를 ‘사과’라고 부르는데, 이들 제각각의 개별자들이 공유하는 특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이름이 붙는 대상은 ‘가족 유사성’, 즉 이웃한 대상들끼리의 유사성에 의해 그 이름이 붙는다고 간주한다(e.g. 컴퓨터 게임과 현실 대면 게임은 사용 매체와 목표하는 바가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동일하게 ‘게임’이라고 불리는 ‘술래잡기’와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는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동일 개념으로 분류되는 대상들은 공통적인 특성이 아닌, 인접한 대상들의 유사성-사슬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쿤은 정상과학의 전통 내에서의 다양한 연구 문제 그리고 테크닉에 대해서도 ‘가족 유사성’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을 모두 같은 ‘정상과학’ 분야로 묶는 것은 이들 모든 것이 공유하는 어떤 특성 · 규칙이 아닌, 상호 연관성 · 유사성이라고 본다. 따라서 한 성숙한 분과를 정의함에 있어 ‘공약(규칙)’을 찾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 즉, 쿤은 과학자들이 일단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나면, 그것이 정의하는 어떤 영역 또는 방법과 ‘유사성’을 가진 다양한 주제와 연구 규칙들을 허용하거나 추상하는 방식으로 정상 과학이 진행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쿤의 입장에서 패러다임들은 그것들로부터 추상될 수 있는 연구 규칙들보다도 우선적이고, 구속력있고,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 쿤은 ‘패러다임’의 우선성과 관련한 근거로, (1) 정상과학 전통을 주도해온 규칙을 찾아내는 일이 어렵다는 이유 외에도 세 가지의 추가적인 현실례에 근거한 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2) 과학 교육의 성격 상, 과학자들은 개념을 문제 풀이에 응용하는 것을 관찰하고 참여함으로써 알게 되고, 이 같은 전례의 응용과 연관짓기가 과학자의 평생에 걸쳐 반복되고 일어나기에 ‘규칙’들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명시적으로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규칙 이전의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과학사를 보면 정상과학의 시대에는 무엇이 합당한 연구 규칙인지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있으나, 그렇지 못한 시대, 즉 ‘패러다임이 공격을 받고 바뀌게 되는 시기와 그 예고기’에서는 연구 규칙들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과 경쟁이 있어 왔다. (4) 패러다임의 교체로 일어나는 ‘과학혁명’은 종종 그 영향력이 세분화된 특정 분야의 구성원들에게만 미치는데, 이는 전공의 세분화 과정에서 같은 ‘패러다임’이 구성원들마다 다르게 수용되기 때문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쿤은 양자역학이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에게 그들의 주요 연구 범주 ― 고체물리, 양자화학 ― 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수용된다는 일종의 ‘패러다임’ 맥락의 분화를 이야기하며, 이 ‘패러다임’에 대한 차이의 발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후속할 장에서 살펴볼 것임을 암시한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과학과 금욕주의적 이상, 이 두 가지는 ― 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 실로 동일한 지반 위에, 즉 진리에 대한 과대평가 위에 존재한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진리란 평가와 비판을 초월해 있다는 동일한 믿음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동맹 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공격당하게 되면 언제나 항상 함께 공격당하며 함께 문제시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갖는 가치에 대한 폄하는 불가피하게 과학이 갖는 가치에 대한 폄하조차도 수반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제때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 283.
  • 2
    책의 서두에 실린 이언 해킹(Ian Hacking)의 지적(p. 24-25)대로, 오늘날 대중적 맥락에서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쓰이는 ‘패러다임’에 대한 상용례보다는 이 단어의 모태가 되는 고대 그리스어 paradeigma의 의미를 곱씹어 모범이 되는 사례, 즉 범례(範例, exemplar)의 의미로 쿤의 서술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 3
    나로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정복’ 또는 ‘평정’이라는 표현이 실제에 더욱 가깝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