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2.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I

탐서일지 #22.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 II

2025-06-19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지난 독서 노트를 잠시 되짚어보자. 글에서 나는 니체의 가장 귀중한 유산, 즉 ‘순수하고 의지를 결여하고 있고 고통도 갖지 않는 무시간적인 인식주관’의 허구성을, 그러니까 ‘순수이성’, ‘절대정신’, ‘인식 자체’와 같은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주장들과 개념들은 날조되었다는 그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이 인용이 오늘날에도 여실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음도 보였는데, 계보적 맥락에서 과학사를 검토해볼 때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과학적 시각이란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얻은 증거만에 의하여 가설을 세우거나 곧바로 이를 폐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완전한 중립적 · 객관적 시각”이라는 통념이 아닐 것 같다는 직관이기 때문이었다.

토머스 S.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그러한 직관의 발흥지였다. 하지만 사려깊은 독자라면 이 저작의 또 다른 한 가지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일반적 과학 통념에 대해 대해 단순히 의심을 제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왜 이러한 대중적 인식이 정립되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려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장들에 비해 분량이 짧기에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제11장: 혁명의 비가시성’에서 쿤은 다음과 같이 쓴다.

… (전략) … 지금도 볼 수 있는 과학 교과서에 실린 자료의 배열은 특정한 과정을 함축하는데, 그 과정의 존재는 혁명의 기능을 부정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교과서란 학생들로 하여금 당대의 과학자 공동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현행 정상과학의 다양한 설명, 개념, 법칙,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다루게 된다. 교수법으로서의 이런 제시 기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역사적인 과학적 저작의 성향과 앞에서 거론되었던 수시로 발생하는 체계적 왜곡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강렬한 인상이 압도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과학은 한데 통합되어 현대의 전문적 지식의 총체를 구성하게 된 일련의 개별적 발전과 발명에 의해서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 교과서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시초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패러다임들 속에 구현된 특정 목표들을 향해서 진력해온 것이 된다. 특히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에 비유되듯이, 과학자들은 당대의 과학 교과서 속에 제공된 정보 더미에 또다른 사실, 개념, 법칙 또는 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전되어온 방식이 아니다. … (후략) …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p. 247-248.

쿤은 그가 주장하는 과학 과정의 실질적 구조, 공약불가능한 패러다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패권 경쟁이라는 혁명적 구조가 드러나지 못했던 주된 이유로 전통적인 과학 교육을 지목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연속적으로 잘 조직된 방식으로 재구성된 교과서를 제공함으로써 실질적인 역사와는 무관하게 당대의 패러다임에 익숙하도록 빠른 시간 내에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교육 구조가 실제 사건들이 어떠했는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쿤의 이러한 주장은 과학 교육이라는 영역 그리고 주제에 국한된 주장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주장을 일반화했을 때의 파급력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쿤의 명제를 조금만 추상화해본다고 하자. 논의의 대상을 과학 교육으로 한정하지 말고, 일반적인 교육 일체로 확장해보는 것이다. 이 경우, 나에게 있어 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교육은 승리한 패러다임이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를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이 명제는 치명적인데, 통상 우리는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이 제기한 관점은 이러한 믿음을 흔들어놓는다. 사람들은 진리는 있는 그대로의 참이기에, 인간에 의해 재구성되거나 왜곡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만일 저 위험한 명제가 옳은 것으로 판명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대중적 인식의 전제 또는 명제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사람들이 배운 수많은 지식들과 이론들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아닌 재구성된 ‘진리’라고 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첫째, 명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완전히 중립적인’이라는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는 직관의 호소에 따라 교육은 참된 것을 가르치거나 이끌어낸다는 통념을 폐기한다. 둘째, 명제의 전제가 되는 ‘진리’ 개념을 폐기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완전히 중립적인’ 진리를 폐기하고, 그 자리를 유동적이고 단지 당대의 합의에 의해 이러한 본성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진리로 대체한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적 깊이는 후자의 관점이 더욱 깊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란 어차피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존재이기에 둘 중 어느 것을 믿는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달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세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공평한 객관적 교육이란 그 속성으로 인해 애시당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일 것이다.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부터 니체까지 이어져온 저 변화의 철학은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예시하고 있지 않던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것이라 할 것이다.

… (전략) … 그러나 인식하는 자로서의 우리는 그러한 전도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한 번 다르게 보는 것, 다르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지성이 장차 언젠가 자신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이며 준비인 것이다. 이러한 훈련과 준비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이 경우 객관성을 ‘무심한 직관'(이것은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한 것이다)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지성의 찬성과 반대를 통제하면서 그러한 찬성과 반대를 내걸거나 거두어들일 줄 아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들과 정념들이 개입하는 해석들(Affekt-Interpretationen)을 인식을 위해 이용할 줄 알게 된다. 친애하는 나의 철학자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순수하고 의지를 결여하고 있고 고통도 갖지 않는 무시간적인 인식주관’을 상정한 저 위험하고 낡은 개념적 허구를 경계하자. 우리는 ‘순수이성’이나 ‘절대정신’이나 ‘인식 자체’와 같은 모순적인 개념들의 촉수(觸手)를 경계하자. 이러한 개념들은 항상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눈을, 즉 전혀 어떠한 방향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눈에서는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힘은 억압되어야 하고 결여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을 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힘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들은 항상 불합리하고 어처구니없는 눈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직 관점적인 봄만이,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념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수록, 우리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눈과 다양한 눈을 동원할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객관성’은 그만큼 더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모두 제거하고 정념들을 남김없이 배제한다는 것을 우리가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성을 거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221-222.

“과학에서도 검증 상황은 단순히 단일 패러다임과 자연과의 대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검증은 과학자 공동체에 충실하려는 두 개의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에서의 경합의 일부로서 일어난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254.

I. 총평

“과학적 사고를 통한 미신과 편견의 타파야 말로 모든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1권재원, “과학교육이 나아갈 길, 민주시민교육”, 교육플러스, 24 May 2021. https://www.edp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2.

이 문장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진보’에 대한 통념을 더욱 잘 요약해주는 말이 있을까? 비판적 사고의 함양, 이성적 분별을 통해 얻은 증거에 기초한 합리적 토론. 사람들은 과학이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자연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진리를 향해 늘 한 걸음씩 더 전진하는 진보를 이룩해왔다고 간주해왔으며, 따라서 어느 순간부터 ‘과학’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 내지는 합리성의 화신으로 자리매김함은 물론, 이제 ‘진보’와 ‘과학’은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용례가 혼재된 끝에 사실상 동의어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말로 그러한가? ‘진보’가 곧 ‘과학’인가? ‘과학’이 곧 ‘진보’인가? 과학은 늘 반증에 대한 사려 깊은 검토와 더불어 소위 ‘더 나은 이론’들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는가? 과학에 대한 신봉이 일종의 사회적 기준으로 자리한 오늘, 누군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면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볼 것이 분명하다. 전문적인 과학 교육을 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대중 과학 서적을 통해 정합적인 방식으로 과학의 역사들을 접한 그 어떤 이들이더라도 아마 이 의문들에는 논의의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바로 이러한 현재에, “아직도 과학이 미신을 타파하는 거의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되며, 산업기술의 발전을 위해서 과학의 발전은 물론 국민들이 이런 과학적 마인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2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347.지는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책이라 할 것이다. 그는 과학의 발전은 존재하는 단일한 자연의 진리를 향한 누적적인 과정이라는 견해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단일한 진리가 존재하는지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그는 “이론들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떤 정합적인 존재론적 발전의 방향을 찾을 수 없다”3Ibid. p. 336.고 고백하며, 과학은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경우 관찰 결과들에 의존하여 더 정교하고 정확성이 높은 것을 택한다는 엄격한 규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 · 간결성 등과 같은 느슨한 규칙들에 대한 과학자 개인의 주관적 해석에 상당히 의존하는 형태로 발전해왔음을 주장한다. 쿤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과학에 대한 대중적 믿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주의’의 신봉자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계보적 맥락에서 과학함이란 무엇인가를 쿤과 함께 톺아본 독자들이라면, 아주 오래된 과학의 진보성 그리고 과학의 합리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폐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처음의 문장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얻게 되었을련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과학적 사고는 미신과 편견을 타파하는, 인류가 지금까지 찾은 단 하나의 유일한 절대적 진리를 향한 사고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늘날 우리는 ‘과학’에 대한 통념과 정확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과학적 민주시민’이라는 저 단어는 ‘과학’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인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결여된, 자기 지향과 그 구성 방식이 상호 모순성을 함축하고 있는 단언인 것은 아닐까? 이 의문들에 대한 정답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 듯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다음의 직감들만큼은 가시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과학에 대한 성찰적인 태도를 간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직감,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과학이 아주 명료하고도 합리적인 발전 과정을 겪어온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직감, “과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저 의문이 생각했던 것만큼 멍청하지는 않은 질문이겠다는 바로 그 직감.


II. 인상 깊은 부분 두 가지

쿤의 주장들에 대한 나의 관점은 상기 총평과 지난 독서 노트에서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하므로, 이하에서는 두 가지 인상 깊은 부분만을 옮긴다.

II.1. 첫 번째 대목

… (전략) … 왜냐하면 교과서란 학생들로 하여금 당대의 과학자 공동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빨리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므로, 여기에서는 현행 정상과학의 다양한 실험, 개념, 법칙, 이론들을 개별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다루게 된다. 교수법으로서의 이런 제시기법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역사적인 과학적 저작의 성향과 앞에 거론되었던 수시로 발생하는 체계적 왜곡을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강렬한 인상이 압도적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과학은 한데 통합되어 현대의 전문적 지식의 총체를 구성하게 된 일련의 개별적 발견과 발명에 의해서 현재의 상태에 이르렀다. 교과서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과학 활동의 시초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패러다임들 속에 구현된 특정 목표를 향해서 진력해온 것이 된다. 흔히 건축에서 벽돌을 쌓아올리는 것에 비유되듯이, 과학자들은 당대의 과학 교과서 속에 제공된 정보 더미에 또다른 사실, 개념, 법칙, 또는 이론들을 하나씩 하나씩 추가해왔다는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과학이 발전되어온 방식이 아니다. 현대의 정상과학에서의 퍼즐들은 대부분 가장 최근의 과학혁명이 완결되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중 과학의 역사적 시초까지 거슬러오를 수 있는 문제들은 거의 없다. 보다 앞선 세대들은 그들 나름의 도구와 해결의 규범을 가지고 그들 고유의 문제들을 연구했다. 변화를 거쳤던 것은 단순히 문제들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교과서의 패러다임이 자연에 일치시키는 사실과 이론의 전체 조직망 구조가 변동을 겪은 것이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248.

II.2. 두 번째 대목

이 실례들은 경쟁적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에 대한 세 번째의,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잘 설명하기 힘든 의미에서, 경쟁적 패러다임의 제안자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그들의 연구를 수행한다. 하나는 서서히 낙하하는 속박된 물체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계속해서 운동을 반복하는 진자를 다룬다. 한쪽에서는 용액이 화합물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혼합물이다. 한쪽은 평평한 형태에, 다른 한쪽은 곡면 형태의 공간에 포함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두 그룹의 과학자들은 같은 방향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어느 것을 본다는 뜻은 아니다. 양쪽이 모두 세게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보는 대상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는 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대상들이 서로 맺는 다른 관계 속에서 그것들을 본다. 한 그룹의 과학자들에게는 증명될 수 없는 법칙이 다른 그룹에는 직관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경우가 생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서 충분히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려면, 한 그룹 또는 다른 그룹이 우리가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불러온 개종(conversion)을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쟁적인 패러다임 사이의 이행은 공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이행이기 때문에, 논리나 가치중립적 경험에 의해서 추동되어서 한 번에 한 걸음씩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게슈탈트 전환에서와 같이, 그것은 일시에(반드시 한 순간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어나거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4이상에서 굵게 표시한 부분은 원서에서 굵은 부분이 아니며, 단지 내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한 것임을 밝혀둔다.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p. 261-262.

III. 필수 질문들에 대한 나의 입장들

III.1. 〈연역과 귀납〉: “연역적 탐구 경험의 기억과 그에 대한 반성적 고찰”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학교에서 과학 수업이나 과학 관련 활동 중에서 연역적 방법으로 실행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였는가? 그 결과는 타당하였는가? 그때 연역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 개인적으로는 사실상 과학 교육을 받으면서 교과서 각 단원의 말미에 수록된 예제 · 연습문제들을 푸는 활동 모두가 일종의 연역적 방법으로 실행한 활동들이 아니었나 싶다. 단원의 본문 기술 또는 교사의 설명을 통해 익힌 개념이나 법칙들을 적용하는 이 과정은 그 개념 · 법칙과 주어진 문제 상황을 연관짓는 해석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과정들이 모두 추론 규칙들을 통해 답을 얻는 과정들이었기 때문이다.
  • 이를테면 뉴턴의 운동 법칙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적용하여 애트우드 기계 문제를 푸는 아주 고전적인 에시를 검토해보자. 우리는 중력 퍼텐셜 에너지의 기준선을 설정하고, 몇몇 작용점들을 선정한 다음 방정식들을 쓴다. 뉴턴의 운동 제2 · 3법칙을 적용하여 방정식계를 완성한 이후에는, 이 등식들을 연립하여 원하는 해를 구한다. 그런데 이 때 방정식계의 연립을 통해 해를 구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연역적 추론이다. (비록 우리가 추론 규칙들, 즉 등식의 성질들에 대해서는 엄밀히 따졌을 때는 예시들을 통해 그 규칙들이 항진명제인 전제들로부터 항진명제인 결론을 끌어낼 것이라고 설득당한 것이라고 기술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같기는 하지만) 연립방정식계를 풀기 위해 사용하는 등식의 성질들: (a) $a = b \rightarrow a + c = b + c$, (b) $a = b \rightarrow ac = bc$ 등의 적용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1) $m_1 + m_2 = 3\ \land\ m_1 – m_2 = 1$, (2) [추론 규칙 a] $a = b \rightarrow a + c = b + c$, (3) $(m_1 + m_2) + (m_1 – m_2) = 3 + (m_1 – m_2)$, …
  • 이렇게 풀었던 예제들의 결론에 대해서는 대체로 타당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엄격한 기술은 나의 결론이 정답과 다른 경우에 결론에 이른 과정을 검토하다가 추론 규칙을 오용했거나 전제 중 하나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 경우들이 밝혀지는 경험들을 반복적으로 했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들을 푸는 것이 옳다고 설득되었다는 쪽에 가깝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 이러한 연역적 방법을 통한 논리 전개 또는 문제 풀이 등은 결과적으로는 식을 세운 뒤에는 기계적으로 그로부터 귀결되는 결과들 (이 방정식 계에 의하여, 시각 $t$ 뒤에 결정되는 물체 1의 위치, 속도 등등…) 을 빠르게 얻어내는 능력의 배양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최초의 출발점, 즉 연역적 전개가 출발할 수 있는 전제들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 교육에서 어떤 과학 법칙이나 명제들에 대한 확신의 과정은 하술하는 것처럼 연역적 방식이라기보다는 예제들을 통한 그것들의 설명력을 충분히 제시함으로써 더 이상 그 진술들의 진리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쪽으로 진행되어 온 것 같다.

III.2. 〈연역과 귀납〉: “귀납적 탐구 경험의 기억과 그에 대한 반성적 고찰”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학교에서 과학 수업이나 과학 관련 활동 중에서 귀납적 방법으로 실행했던 것을 떠올려보자.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하였는가? 그 결과는 타당하였는가? 그때 귀납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 이전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암시한 것처럼, 나는 과학 교육 전반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법칙이나 과학 이론의 명제들을 ‘당위성’ 내지는 ‘진리성’을 설득하는 과정이 귀납적 방식으로 실행되었다고 생각한다.
  • 앞서 예시로 들었던 뉴턴의 운동 법칙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다시 검토해보자. 내가 그 법칙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과정이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우선 그 그 법칙들이 제시되거나 이전의 법칙에서 연역적인 과정으로 유도되는 경우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뉴턴의 운동 법칙은 내가 직접 실제 사물의 운동들의 구체적인 실례들을 모두 검토한 뒤에 동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적용되어 계의 미래 상태들을 성공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많은 예시들이 제시되었던 것으로부터 그것의 진리성 · 합리성 등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쪽에 가까웠던 것 같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경우 표준 물리학 교과서에서는 뉴턴의 운동 법칙에 더해 일의 정의를 가져와 연역적인 유도 과정을 통해 처음 제시되기는 하지만 (운동 에너지 보존 법칙이 Serway 일반물리학 교과서에서 어떻게 처음 기술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 보존 법칙이 항진명제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실례들이 언제나 각종 예시들을 통해, 수행평가 등에서 수행한 실험들을 통해 직 · 간접적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 귀납적 방식으로 제시된 이론 명제들이 타당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이다. 이전 교육 과정에서 귀납적 방식으로 항진명제라고 간주할 것이 요구된 과학 법칙이 후속 교육 과정에서 실은 잘못된 것이 밝혀지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뉴턴의 운동 법칙은 광속에 가깝게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이 물리학 교과서의 후속 단원들에 의해 뒤늦게 제시된다. (반증의 제시) 이 시점에서 뉴턴의 운동 법칙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폐기되고, 그 자리를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제시하는 수정된 운동 법칙들이 대체한다. (“$E = \frac{1}{2}mv^2$” → “$E = p^2c^2+m_0^2c^4$” 등)
  • 이상의 사례를 검토해볼 때, 귀납적 방식의 한계란 그 방식을 통해 얻어진 명제의 진리성이 항상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연역적 방식의 경우도 추론 규칙이 잘못된 경우(물론 많은 논리학자들은 그 잘못된 추론 규칙의 적용은 연역적 논리 전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겠지만)에는 명제의 진리성이 실제로는 보증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III.3. 〈포퍼의 반증주의〉: “반증할 수 없도록 상반된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의 과학성 · 용이성”

포퍼는 반증할 수 없도록 상반된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하였다. 상반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이론의 단점이 될 수 있는 것 같은가? 그렇다면, 또는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과 사이비과학은 구분될 수 있는가?)

  • 나로서는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통한 진술의 과학적 진술 여부를 가리려는 시도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데, 기본적으로는 내가 쿤의 입장과 유사하게 계보적인 맥락에서 과학사를 관찰했을 때는 반증, 즉 어떤 이론에 속하는 진술들 중 하나 이상이 관찰된 결과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진술로 간주되어온 이론들이 폐기되지 않은 역사적 실례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물론 보충자료 (2)와 (3)을 검토해볼 때 포퍼는 ‘반박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진술들’에 대한 논의 및 비판의 난점에 주목하여, 이들을 허용하지 않는 관례가 있는 과학에서의 진술들과 이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로써 반증주의적 입장을 택한 것 같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오늘날 우리 현대 물리학에서조차 상반되어 보이는 현상들이 같은 이론에 의해 설명되는 현상을 목격한다.
  • 이를테면 현대의 빛의 이중성 이론을 고려해보자. 이 이론은 입자론을 사용했을 때는 설명이 잘 안 되는 빛의 간섭 무늬 현상을 맞닥뜨리는 경우에는 ‘빛의 파동성’을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이를 설명하고, 반대로 파동론을 사용했을 때 어려움에 맞닥뜨리는 광전 효과 등의 경우에는 ‘빛의 입자성’을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이를 설명한다. 포퍼의 주장을 우리가 일관적으로 적용하려면, ‘빛의 이중성’ 이론은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 이론이 반증할 수 없도록 상반되는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이론은 이를테면 빛이 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찰을 가져오든 파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찰을 가져오든 타파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빛이 파동도 입자도 아니다’를 보여줄 수 있을 경험적 조사를 통해 반박할 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기까지 한다. (빛이 파동도 입자도 아니면, 그 무엇일 수 있을지를 상상한 다음, 그것을 검증할 실험을 우리는 고안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빛의 이중성’ 이론은 오늘날 널리 과학적 진술로 인정되고 있으므로, 포퍼의 반증주의 과학론은 그 자신을 스스로에게 적용한다고 하면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바로 이 반증에 의해서)
  • 따라서 상반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이론의 단점 내지는 이론을 과학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빛의 이중성이 과학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검토해보았을 때는, 오히려 그 이론이 당혹스러운 상호모순적인 실험 결과들을 전부 다 잘 설명해주는 유일한 대안이었기에 널리 채택되고 받아들여진 것, 즉 ‘상반되어 보이는 현상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론의 장점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아닌가 싶다.

III.4. 〈쿤의 패러다임〉: “암묵적으로 수용한 원리나 가정들에 대한 반성적 고찰”

초 · 중 · 고 및 대학교에서 내가 배웠던 과학에 대해서 묘사해보자. 암묵적으로 수용한 원리나 가정이 있는가? 암묵적으로 수용한 그 내용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보자. 내가 제기한 의문이 받아들여진다면, 현재의 과학 패러다임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 초 · 중 · 고등학교 및 대학교에서 내가 배웠던 과학에 대한 묘사는 이미 III.1 ~ III.3.에서 충분히 한 것 같으므로, 나머지 질문들에 대해 답해본다.
  • 암묵적으로 수용한 원리나 가정이 있다고 한다면, 나로서는 과학 교육을 받으면서 나에게 제시되었던 모든 과학 법칙들과 이론들이 이들에 모두 해당한다는 진술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상술하였듯, 오늘날 과학 교육의 과정에서 이들 법칙 및 이론들은 그것들이 참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권위와 그들을 적용하여 성공적으로 풀 수 있는 에제 및 문제들을 통해 그 합리성과 진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만약 우리가 엄격하게 이 모든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인다고 했다면, 우리는 한 단원에 적힌 수식들을 볼 때마다 수백 · 수천번 실험을 통해 직접 눈으로 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실험들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참인 것으로 증명되었다거나 이에 대한 반례가 확인되지 않았음이 교사 또는 교재의 권위를 통해 제시되었고, 우리는 이것에 근거해 혹은 그것을 거부할 경우 사회적으로 주어질 불이익(내신 점수 등)에 근거하여 이들을 암묵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 훨씬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
  • 이런 맥락에서, 암묵적인 원리 · 가정 · 법칙 · 이론의 수용이 거부되는 경우 현재의 과학 패러다임이 붕괴될 것은 매우 자명하다고 해야 한다. 쿤이 묘사한 ‘전패러다임’ 시기의 연구나 ‘위기’의 시기 연구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질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될 수 있다. 우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학 교사인데, 뉴턴의 법칙을 배운 학생 중 한 명이 이 법칙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직접 수백 · 수천 번의 실험을 통해 맞는지의 여부를 확인해보겠다고 고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것만으로도 과학 교육을 통한 잠재적인 과학도의 양성에 상당한 차질을 겪을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단 한 명이 반기를 드는 경우를 가정했지만, 한 학급이, 나아가 한 학년이, 나아가 한 세대가 이러한 암묵적 수용을 거부하는 경우를 상정하고 그 파급력을 고려한다면, 현재의 과학 패러다임은 그 유지력의 뿌리를 이러한 교육 내용에 대한 암묵적 수용에 두고 있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III.5. 〈쿤의 패러다임〉: “패러다임의 개인적 의미변천사”

패러다임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인가?

  •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기 전까지의 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개략적 이해는 다음과 같았다: “패러다임은 특정 공동체가 공유하는 하나의 과정에 대한 구조로, 어떤 활동이나 과정이 진행될 때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이 옳으며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끝나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결정하는 일종의 규칙들에 해당한다.”
  • 그러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나는 이러한 패러다임에 대한 초기의 이해가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쿤이 사용하는 용례에서 ‘패러다임’이란 그가 후기에서 지적하고 있듯 다음의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1) 어떤 공동체 내에서, 그 구성원들 간의 전문적 의사소통의 상대적 완전성과 전문적 판단의 상대적 의견 일치를 야기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약속 내지는 믿음들 (e.g. 활용하는 수식과 그것의 의미, 표준 실험 절차의 방식 혹은 그것의 유용성에 대한 믿음, 좋은 이론은 이러이러해야 한다에 관련된 가치적 믿음들 등등…), (2) 공동체의 개념적 결부 혹은 세계관 조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공유하는 모범적 실례(Examplar, 범례).
  • 따라서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난 전후에 오늘날 대중적인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에 대한 용례에서 전제되는 의미와, 실제 그 용어가 처음 탄생한 저작에서 사용된 의미는 상술한 바와 같이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된 것 같다.

III.6. 〈포퍼와 쿤〉: “쿤과 포퍼 중, 어느 쪽의 견해가 과학의 본질에 접근하였는지에 대하여”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명시적 규칙이 아니며, 그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의 합의에 의해 무엇을 과학 활동으로 할지 정해진다. 반면에 포퍼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반박가능한지가 과학의 본질이다. 쿤과 포퍼 중 어느 쪽 의견에 동의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 이미 이전의 진술들에서 내 입장이 무엇인지 충분히 암시되었고 또 일부에서는 명시적으로 내가 쿤을 지지한다는 점을 그 근거와 함께 밝힌 것 같기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기로 하자.
  • 앞서 나는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통한 과학적 진술의 구분’이라는 견해에 대해 ‘빛의 이중성 이론’을 〈반증〉으로 들어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힌 바 있다. 나는 여기에 더해 쿤이 옳다고 믿는 나의 입장에 대한 한 가지 근거를 추가로 제시하고자 한다.
  • 기상학 연구실에서의 약 3년 반이라는 오랜 인턴 근무 경험을 통해 내가 알게 된 내용 중에는, 기상학계가 최근 대두된 AI 기술을 기상 예보에 적용하는 것이 과학적인 연구인지를 두고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한쪽에서는 Google Nowcast등과 같이 AI 기술을 사용하여 기상을 예측하는 것이 정확도가 더욱 높고, 또 비합리적인 방식도 아닌 수학적으로 결정된, 다만 그 복잡도가 매우 상당하여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울 뿐인 방식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이 연구들을 정상적인 과학 연구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내 지도교수님이 속한 분파를 포함하여) 학계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블랙박스’에 가까운 AI 기술은 어디까지나 방정식들과 물리적 과정으로 기술될 수 있는 통상 기상 이론들을 보완하거나 그에 필요한 관측 · 실험 등을 제공하는 용도로 사용될 때에야 그것이 사용된 연구를 과학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Google Nowcast 등이 보여준 놀라울 정도의 높은 기상 예측의 정확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상학계가 양분되어 있다는 점은, 칼 포퍼의 견해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으로 보인다. AI 기술이라는 새로운 연구 방법이 훨씬 더 높은 정확도를 보여준다는 보고들이 속속이 저널을 통해 공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그것은 과적합에 의한 결과라고 비판하거나 (상당 부분 맞는 이야기임이 밝혀지긴 했다) 과적합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가치에 근거하여 그러한 연구는 과학적 연구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고 여전히 이야기한다. 칼 포퍼의 ‘무엇이 과학인지의 여부를 가르는가?’에 대한 이론은 이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AI 기술의 활용과 관련된 이 논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각 입장에 대한 반증이 존재하는지, 반증이 더 많은지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이 기상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학자들이 공유하는 믿음이 상이하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은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정확히 포착하는 ‘공약’ 그리고 그것들의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포착하는 점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적어도 내가 깊게 관련되어 있는 이 실례를 고려할 때는 쿤의 이론이 포퍼의 이론보다는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권재원, “과학교육이 나아갈 길, 민주시민교육”, 교육플러스, 24 May 2021. https://www.edpl.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2.
  • 2
    토머스 S. 쿤,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s of Scientific Revolutions)》, 김명자 · 홍성욱 역, 까치, 2013, p. 347.
  • 3
    Ibid. p. 336.
  • 4
    이상에서 굵게 표시한 부분은 원서에서 굵은 부분이 아니며, 단지 내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한 것임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