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23. 김애란, 『비행운』 I

탐서일지 #23. 김애란, 『비행운』 I

2025-06-21 0 By 커피사유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여는 말

이 모든 정신을 서로 이어 주는 깊은 혈연을 어떻게 느끼지 못하겠는가! 그 정신들이 어떤 특별하고 쓰라린 한 곳으로, 더 이상 희망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한 곳으로 무리 지어 모인다는 것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나는 모든 것이 내게 설명되기를,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무(無)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의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 요청에 깨어난 이성은 답을 찾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순과 억설(臆說)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엄청난 비합리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그의 통찰력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헌한다.

이 모든 경험이 서로 부합하고 일치한다. 궁극적 한계에 도달한 정신은 판단을 내리고 결론을 택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자살과 대답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나는 탐구의 순서를 뒤집어서 지적 모험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동작으로 되돌아오고자 한다. 여기 열거한 경험들은 사막에서 태어난 것이므로 우리는 그 사막을 떠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경험들이 과연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노력이 그 정도에 이르면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는 자신 속에서 행복과 합리에의 욕구를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 김화영 역, 민음사. pp. 48-49.
The Alters (2025, 11-bit Studios) – ‘What If (The Alters Song)’ Scene

“나는 바닥에 흩어져 있는 문어포 하나를 손으로 집었다. 그러곤 멍하니 입안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턱관절이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곤 어머니에게서 뒷걸음쳤다. 질겅질겅 입에 문어포를 문 채. 침을 흘리며. 넘어지고 일어섰다 다시 자빠지며, 허둥지둥.”

김애란, 〈물속 골리앗〉.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 107.

I. 총평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만난 저 문장이, 김애란의 《비행운》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소설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난 1학기 청강으로 들은 〈불교철학의 이해〉 강좌, 교수자와의 총 1시간 동안의 문답을 마친 뒤 함께 문을 나온 이름모를 여학생이 갈림길에서 던졌던 질문. 이 질문이 어떠한 연쇄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던 나는 순간 니체의 영원회귀 이야기로 모든 것을 시작할 뻔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밤이 늦은 터라 다음 시간까지 대답을 준비해오는 약속으로 대화를 갈음했었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던 그 다음 주, 개인적 사정으로 여학생이 부득이 먼저 자리를 뜨게 되면서 나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기회를 놓쳤고 그렇게 이 간단하지만 깊은 질문은 작은 헤프닝으로 기억 속에서 사라질 운명임을 직감했다.

“부자들의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졌다(The paradise of the rich is made out of the hell of the poor).” 《비행운》을 읽으면서 나는 대략 2주 전의 그 짐작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 지독한 의문은 작품 속에서 만난 수많은 삶의 궤적들과 반응한 끝에 니체 철학 그 이상의 무언가가 소설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냐고 넌지시 나에게 차문해왔기 때문이다. 저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엉뚱해보이는 내 기억의 한 구석에서 아직 그 평론의 초안도 쓰지 못한 어느 뮤지컬의 주제 문장을 낚아채 눈앞에 흔들어댔다. 지난 겨울, 동생과 보러 간 《웃는 남자》, 예술의전당 메인 홀에서 집어들었던 팜플렛에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던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의 소설 속 저 단 한 문장을.

“인간은 과연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며칠 전의 통화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이 소설을 선정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여러 삶의 모습을 함께 보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삶의 여러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이 양자택일 문항은 겉보기로는 단 하나의 도치를 차이로 가지기에 같은 것을 거듭해서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이 만약 인간 공통이 마주하는 삶의 부조리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삶은 단 하나일 것이고, 한 사회의 부조리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는 삶은 둘 이상이기 때문이다. 혹자라면 둘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겠지만, 이 물음의 정체가 소설가가 그의 세계를 구성할 때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던진 저 질문을 어떤 층위에서 주로 고려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임을 아는 나는 대답이 그렇게 간명할 수는 없음을 직감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한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만난 저 문장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느낀다. 문장은 책과 일상을 건너 또 다른 문장들을, 우리가 간과한 삶의 여러 측면들 혹은 여러 삶의 측면들을 살포시 들어올려 그 흔적들을 보인다. 그것들은 마치 작은 물방울과 얼음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삶들이 뜨겁게, 거침없이 빨아들인 것들을 뱉어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면서 하늘에 이리저리 흩어 놓은 저 구름들처럼.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리곤 하지만 어느 날 하늘을 들여다볼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저 《비행운(Contrail)》들처럼.


II. 기억에 남은 ‘불편함’들

II.1. 첫 번째 대목

불빛에 얼비쳐 노르스름해진 가림막의 윤곽은 A구역과 바깥세상의 경계가 아주 얇다는 걸 상기시켜줬다. 여긴 정글이나 미로가 아니라 도시라고. 조금만 발 디디면 저기 모텔이 있고, 교회가 있고, 패밀리레스토랑이 있는 서울 한복판이라고. 불빛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A구역의 땅은 건물 잔해 때문에 평편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처럼 솟은 곳이 있는가 하면, 움푹 꺼졌거나, 중간에 발이 푹푹 빠지는 데도 있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며 목적지를 향했다. 흙 속에서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비위가 상해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김애란, 〈벌레들〉.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 77.
  • 〈벌레들〉에서 재개발로 인해 건물들이 철거되고 있는 A구역은 이 단편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벌레들’의 근원지로 묘사된다. 소설의 묘사에 따르면, A구역은 지은지 30년도 더 된 낡은 단층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날이 더워지면 오래된 건물 자재와 쓰레기 더미가 뒤섞인 악취가 주인공의 집으로 올라오는 그런 터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A구역과 자신이 사는 장미빌라를 나누고 있는 절벽을 기점으로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구역으로 올라오는 냄새를 ‘빈곤의 냄새’라고 부르고, 방충망을 들이받는 이름모를 커다랗고 털과 점들로 가득한 애벌래들에게 비명을 지르며 살충제를 난사한다.
  • 이 짤막한 단편에서 주요 구도를 수립하는 요소는 네 가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A구역, A구역 바깥, 벌레 그리고 커다란 나무. 이들 요소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두 개의 쌍을 구성한다. 첫째. A구역 – A구역 바깥, 그리고 벌레 – 나무의 경우. 이 방식의 묶음은 무엇이 무엇 안에 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가능한 결과이다. A구역은 말 그대로 중장비로 부수어 내는 그 건물들의 잔해들이 마음대로 비산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가림막으로, 그리고 그 가림막을 둘러싸는 모텔촌과 빌라촌으로 그 바깥 즉 A구역의 바깥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그런 공간이다. 기하적으로는 마찬가지의 ‘둘러싸인’ 관계가 벌레와 나무에 대해서도 성립하는데, 적어도 어느 날 굉음을 내며 굴착기가 나무를 끝끝내 쓰러뜨리기 전에 벌레들은 나무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하적인 배치 관계가 유사하다고 하여 두 관계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둘러싼 것이 둘러싸인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가 결정적인 둘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즉, 나무가 벌레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것과는 달리 A구역 바깥은 A구역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큰 나무는 그것이 쓰러진 자리에서 수많은 벌레들의 행렬이 흘러나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동안 그 내부에 품은 벌레들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A구역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내몰리고 굴착기와 인부들은 한때는 정착민들의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공간들을 먼지와 콘크리트 조각으로 산산조각 내버렸다.
  • 이러한 구도 하에서는 따라서 쓰러져버린 나무와 철거된 A구역을 대응시키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파괴적인 변화 속에서도 살 곳을 찾아 떠나는 벌레와 A구역의 바깥으로 쫓겨난 철거민들을 대응시키지 않을 수 없다. 즉, 나무 – A구역, 벌레 – A 구역 바깥이라는 두 번째 묶음 관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는 벌레들을 찍어 누르거나 살충제를 난사해 살해하고 아래로부터 풍겨오는 악취로부터 자신의 집을 ‘정화’하려고 내내 노력하는 주인공의 공간, ‘장미빌라’가 다름아닌 A구역 바깥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획득하게 된다. 주인공은 A구역 바깥에서 A구역의 것을 혐오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작품의 마지막에서는 양수가 터지면서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A구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 이 아이러니는 상당히 주목할 만 한데, 많은 사람들은 삶에서 빈곤과 악취로 뒤덮이곤 하는 소위 ‘더러운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부의 상징, 소위 ‘깨끗한 것’으로 도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안간힘을 쓰면서 자신이 처한 시궁창에서 탈출할 날들을 꿈꾼다. 주인공만 하더라도 도로의 소음과 철거가 한창인 A구역의 소음으로부터, 즉 장미빌라로부터 벗어나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꿈을 꾸지 않던가. 하지만 많은 경우 꿈은 어디선가 발목이 잡히기 마련이고 그렇게 사람들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뒤섞인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염원한다.
  •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어떤 곳이든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나아가 어떤 생명도 결코 ‘더러운 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이 없다거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애써 눈을 돌리는 도피를 선택하는 것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과 그것의 부패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저 항진명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자들도 육체적 관계를 탐닉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이중적인 모습을 종종 보인다는 일상적 관찰을 우리는 되짚어보아야 한다. 주인공은 ‘벌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했고 그것을 철저히 탄압했지만, 어떤 시각에서 볼 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부분을 철저히 말살한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 이러한 배경 때문에 주인공이 A구역의 사람들과 집들을 ‘가난의 상징’으로 보아 매도하고 그곳으로부터 절벽을 기어 올라온 벌레들을 기겁하며 찍어 누르는 장면은 서로 다른 지위에 있는 두 집단 사이의 긴장과 시각차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주인공 또한 사회적 지위가 그렇게 높지 않기에 그녀는 높다른 절벽 위로의 비상을 꿈꾸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A구역을 폄하하고 그 높다른 절벽을 올라온 벌레들을 무참히 짓밟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행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녀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의 행동이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삶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주인공이 어느 순간 벌레와 철거민들, A구역과 장미빌라 사이에 존재하는 저 아이러니를 인식했다면 소설은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 벌레들과 주인공, 그리고 철거민들과 굴착기는 화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손을 쓰기도 전에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나무는 쓰러졌고 집들은 주저앉았으며, 벌레들은 떠나고 철거민들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씁쓸한 현실이다.

II.2. 두 번째 대목

세계는 비 닿는 소리로 꽉 차가고 있었다. 빗방울은 저마다 성질에 맞는 낙하의 완급과 리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듣다 보니 하나의 소음처럼 느껴졌다. 자연은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댔다. 단순하고 압도적인 소리였다. 자연은 망설임이 없었다. 자연은 회의(懷疑)가 없고, 자연은 반성이 없었다. 마치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 같았다. 그렇게 비가 오는 날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티브이와 라디오는 나오지 않았고, 양초는 되도록 아껴야 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거나 이런저런 몽상에 잠기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곤 눅눅한 방바닥에 누워 지구의 살갗 위로 번져 나가는 무수한 동심원의 무늬를 그려봤다.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들……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는 동그라미들.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 그렇게 빗방울이 퍼져가는 모양을 그리다 보면 이상하게 내 안의 어떤 것도 출렁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고, 당장 뭘 이해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떼를 입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본분 위에도 동심원이 고요하게 퍼져 나가고 있을 터였다. 아직 떠내려간 것만 아니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김애란, 〈물속 골리앗〉.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p. 94-95.
  • 비가 그치지 않고 모두를 사정없이 적시는 세계, 〈물속 골리앗〉이 상정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비현실성을 고려해 소설이 판타지적 배경 위에 세워졌다고 결론내릴 수도 있지만, 작중 화자가 처한 상황 그리고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는 거대한 금치산자가 울어대는 결과물로서의 끊임없는 비’가 가지는 함의를 고려한다면 비는 하나의 연출이요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대한 비유라고 판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 소설의 중간에 등장하는, ‘물에 잠긴 도시’를 규정하는 다음의 두 문장을 고려해보자: “인간이 지상에 이룩한 것과 지하에 배설한 것이 함께 엉기는 곳. 짐승의 사체와 사람 송장은 물론 잠들어 있던 망자들의 넋마저 흔들어 뒤섞어버리는 곳.” 이들 문장은 각각이 하나의 빗방울이다. 삶의 눅눅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상승을 꿈꾸는 우리의 살갖 위로 무수한 동심원형의 파란을 낳기 때문이다. 이 불편한 사실에 대한 진술은 “우리의 수동성을 허락하고, 우리의 피동성을 명령하며, 우리의 주어 위에 아름다운 파문을 일으키는 동그라미들”이자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이다. 상술한 바 있듯 사람들은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그 일부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려 불결하다거나 바라보기 고통스러운 것과 멀어지기를 기도하기 때문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인 이상 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 도시라는 공간이 가지는 저 ‘뒤섞임’에 대해 조금 더 깊게 고찰하면 우리의 불편함은 배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말 그대로 지상에 이룩한 매끈한 스카이라인들을 가로질러 흐르는 상수도와 그 상수도에서 튀어나온 물들이 오물과 뒤섞여 사람들의 발 밑,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 하수 처리장으로 향하는 저 끈적거리는 하수도 사이의 긴장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람들이 잠을 자는 공간 밑, 지하 깊숙히 어딘가에 묻혀 있을 이름 모를 백골들과 그들이 한때 사용했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사물들이라는 수직적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스케치는 다름아닌 우리의 삶의 유지에 정말 중요함에도 저소득 또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들과 그 직업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의사’, ‘변호사’와 같은 각광받는 직종과 혼재되어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다.
  • 나는 지난 4년 반 동안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일상적이었지만 너무나 지나치게 일상적이어서 비교적 무심하게 지나친 사람들을 회상해본다. 점심과 저녁을 비교적 싼 값에 먹을 수 있었던 학생 식당에서 근무하시는 조리사분들과, 진흙과 빗물로 뒤덮인 계단과 복도를 쓸고 누군가가 막고서 도망간 변기들을 뚫는 미화원분들을 기억 속에서 조금씩 되짚어보는 것이다. 나는 그분들의 이름을 모른다. 얼굴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여쭙기도 했으며, 어느 아침에는 화장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사생들의 흉을 한뜻으로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나에게 있어 자주 간과의 대상이 되곤 했다.
  •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대학 신문에 실린 청소 노동자 사망 사건과 비교적 최근의 신문에 실린 대학생활협동조합 소속 조리사분들의 하소연을 실은 기사들을 떠올려낸다. 대학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살던 건물 바로 아래에서 기숙사를 청소하던 직원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 분의 마지막이 발견된 건물 앞에는 하얀 국화꽃들이 놓였고 국회의원들이 들락거렸으며, 학생들은 ‘영어 회화’와 같은 불필요한 시험을 도대체 왜 그 분이 감내해야 했는지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다. 몇 년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학생 수에 비해 지나치게 적은 노동자 수, 너무 좁은 휴식 공간과 부족한 설비가 처음 알려졌을 때 학생회관 앞에선가 시위가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는 대형 이벤트를 치르는 학생들 그리고 저마다의 사건으로 바쁘고 비틀거리는 이 사회의 관심은 차갑게 내리는 비처럼 식어버리곤 했고, 나는 무엇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을 여전히 보지 못했다.
  • 나는 작년 겨울 동생과 함께 보러 갔던 뮤지컬의 주제 문장을 기억한다. “부자들의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 위에 세워졌다(The paradise of the rich is made out of the hell of the poor).” 이 문장을 쓴 빅토르 위고는 벌써 대략 150년 전의 사람이 되었지만, 이 문장은 15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묵직하게 우리의 현실 위에 내려앉는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 자신의 삶에 가장 밀접한 곳에서, 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책임져주시는 그분들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이 모든 현실들을 인식하면서도 그저 표를 잘 던지는 것으로, 글을 통해 애탄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며 애써 변명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 청소 노동자 한 분이 돌아가신 날로부터 며칠 뒤, 나는 비가 내리던 어느 이른 아침에 국화꽃이 놓인 벽 앞에서 조용히 흐느끼던 사람을 목격했다. 여름비는 새벽부터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고 조금씩 거세진 끝에 “지척에서 흐르고, 꺾이고, 번지고 넘치며 짐승처럼 울어”대던 아침이었다. 습한 공기로 희멀겋고 탁한 아침, 그 사람의 흐느끼는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도처에서 아스팔트 바닥 위로 떨어져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동심원들, 그 몹시 시끄러운 동그라미들의 파란이 눈물과 빗물을 마구 뒤섞어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어터진 세계 속에서, 죽은 사람 앞을 지나 나는 우걱거리며 아침을 씹어 먹어치웠다. 나는 죽은 어머니 앞에서도 문어포를 씹어먹었던 화자와 그날 아침을 먹던 나 자신의 공통점을 생각해본다. 소설의 공간과 그 우울한 아침 하늘 모두는 “오래전에도, 그보다 한참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졌을 동그라미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화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애써 그 하늘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II.3. 세 번째 대목

택시는 24시간 감자탕집을 지난다. 재개발 단지의 가림막과, 녹색등이 켜진 야간 진료소, 퇴락한 스탠드바와 편의점을 지난다. 용대는 속도를 조금 더 낸다. 담배를 파는 애완견 센터가 보이고, 목 잘린 두상들이 진열된 미용 재료 가게, 속옷 도매 마트와 만물상이 보인다. 그리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테이프의 운동.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용대는 더듬더듬 어색하게 중국말을 따라 한다.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테이프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저절로 뒷면으로 넘어간다. 짧은 사이. 명화의 목소리가 들린다. “리 쩌리 위안 마?” “여기서 멉니까?” 용대는 조그맣게 “리 쩌리 위안 마?”라고 중얼거린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겨울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약속처럼,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방금 막 지나간 택시를 굽어보며,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다.

김애란,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p. 167-168.
  •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시작과 끝 가사가 동일하다. 소설은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我的座位在哪儿)?”이라는 읊조림으로 시작해서,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라는 고독한 외침으로 끝난다. “나뭇가지에 끝끝내 매달려 있는 은행 몇 알”이 그러하듯 “떨이지지도 썩지도 못한 채 몸을 떨”면서, 그렇게 소설은 끝끝내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묻는 하나의 질문을 후렴구로 되돌려준다.
  • 택시 운전사인 주인공 용대와 그가 한때 사랑한 여성인 조선족 노동자 명화는 모두 과거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가장 밑에 위치한 현재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을 꿈꾼다. 용대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은 명화가 살았던 중국이고, 명화에게 있어 약속의 땅은 용대가 택시를 달리고 있는 한국이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환대받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았다. 우연히 어느 음식점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삶의 가장 바닥에서도 수중의 돈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몸을 섞었고 작은 방에서 서로의 온기로 외로움을 달랬다.
  • 거의 모든 독자들은 용대와 명화의 첫 번째 공통점으로 그들 모두가 사회의 ‘이방인’에 속한다는 사실을 꼽을 것이다. 용대는 잊힌 뒷바라지로 자존심을 세우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집안의 사고뭉치이자 컴플렉스로,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오토바이와 함께 수로에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어머니의 유일한 집까지 날려먹은 끝에 도시로 도망친 남성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않은데다 형이 지인 관계로 알선한 일자리마다 번번이 다툼을 일으키고 도망치듯 뛰쳐나온 그가 택할 수 있는 직장은 사납비를 사비로 채워야 하면서도 급료가 박한 택시 운전수였고, “사람들의 포기와 실망에 익숙해진 그”는 이제 조카의 멸시에도 익숙해지고 말았다. 명화는 잘 살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밀항한 조선족 노동자로, 거의 모든 품팔이를 전전하다 강염기가 튀어 한쪽 눈을 실명한 동생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비용을 떠안고서도 삶의 감각마저 묵혀두면서 불법 체류 노동자의 너무 적은 급료마저도 감당하고야 말았다.
  • 나는 첫 번째 공통점에 대해서는 전혀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내가 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두 사람의 두 번째 공통점, 즉 두 사람이 교차하는 ‘삶의 욕망’이다. 마치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어머니의 장례식 날 애인과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갔던 것처럼, 용대와 명화는 자신들의 우울한 나날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승을 꿈꾼다. 용대는 익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이 가는 것처럼” 카페로, 고급 레스토랑으로 명화를 데려갔다. 그들은 간단한 서류 처리가 완료되자마자 자산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열에 달뜬 청춘처럼 새삼스럽게”, “늙은 추방자들처럼 절박하게” 서로를 갈구했다.
  • 우리는 다음의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왜 하필 그녀였는가? 왜 하필 그였는가? 사람들은 왜 두 사람이 맺어졌는지를 질문받을 때 그 대답으로서 두 사람의 사회적 처지가 유사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즉 가재는 게편이라는 속담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의 문장에는 동의하면서도 세련된 조소를 포함하는 그 함의만큼에는 동의할 수 없다. 저 대답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동일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답변자와 두 등장인물의 거리를 은근히 벌리는 ‘동정’이 내포된 것이기 때문이다.
  • 사유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추방자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법원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교 모임에서 만인은 평등하며, 모두가 동등하게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저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평등을 말하면서도 우리가 종종 불평등을 목도하면 그것을 합리화한다는 점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사람들은 용대와 명화가 거리를 걸을 때 그 뒤에서 수군댔는가? 왜 용대의 조카는 그의 삼촌에게 가짜 명함을 건냈는가? 나는 이 질문을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 속에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러한 행동들이 어떠한 연유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의 당위과 충돌하며 펼쳐지는 이율배반이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믿는다. 사회적 추락을 두려워하는 우리는 회색 인간들의 속삭임처럼 앞으로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그런 과정 중에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미래’를 목도하면, 우리는 편한 길을 택한다. 즉, 직시하는 것, 나 또한 동일하게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저렇게 되지 않도록 하자’는 반면교사적 결론을 간단하게 채택하고 만다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게을렀기 때문에 저 지위를 획득한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 사회적 당위와 침묵 속의 현실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 여기서 나는 떨어지지도 썩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빙빙 맴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노래, 그 후렴구를 다시 한 번 가져와본다. “워 더 쭈어웨이 짜이날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늦은 밤 용대가 모는 택시, 밤의 한가운데를 가르는 그 택시 안에서 울려퍼지는 명화의 목소리는 용대와 함께 우리 사회에 하나의 질문을 더 남긴다. “리 쩌리 찌안 마 (离这里远吗, 여기서 멉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