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을 풀자’가 아닌, ‘되돌아보자’의 자세에 관하여

2020-11-23 0 By 커피사유

이 글은 필자가 2020년 11월 22일에 상경(上京)하여 치른 고려대학교(Korea University) 면접 대기실에서 대기 중에 작성한 에세이를 귀가 이후 그대로 옮긴 것임을 서두에 밝힙니다. 당시의 감정 상태를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기 위하여, 추후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특정 인물의 이름을 공란 처리한 것 이외의 수정은 일체 하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필자 주

2020-11-22. 日. 고려대학교 우당교양관 6F 대기실 內.

침묵.

솔직히 말해서,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30분 남짓의 순간을 위하여, 나는 새벽부터 이곳으로 달려왔으니, ‘자식 덕에 서울 구경 한 번 가네’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부모님께서 새벽잠을 아껴가며 상경(上京)을 준비하시고 또 4시간 가량의 기나긴 운전을 내가 완전히 곯아떨어졌을 때에도 오직 내 대입을 위하여 해 주셨다는 사실이 나에게 책임감을 부여한다. 일종의 사명감인지도 잘 모르겠는 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사료되는 것은 비단 이것 하나 뿐만은 아니다. 조금 늦게 오셔서(아니, 12시 50분부터 입실 시작인데, 12시 40분에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 모이라고 하시고는 13시에 나타났다면 좀… 그렇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로 하여금 ‘내 안의 목소리’를 궁시렁궁시렁-거리게끔 하신 선생님들의 응원과 격려, 초등학교 때부터 연을 이어온, 나를 결코 잊지 않고 연락을 주는 소중한 당신, 전OO가 2일 전 밤에 문자로 건넨 작은 응원 메시지가 또한 나를 황홀하면서도 아름다우나, 동시에 위대한 긴장의 고조로 몰아넣는다.

14시부터 면접이 시작되어, 1人씩 각 조에서 (고려대학교는 각 과별로, 그리고 그 각 과 내에서 14人 남짓의 조를 나누어 면접을 본다) 대기실을 나가겠으나, 나는 수험번호가 좀 뒤쪽이므로 (지구과학과 16번) 좀 있다가 갈 것이 분명하다. 기다림의 시간은 아직 좀 남아 여유는 가질 수 있겠다고 혹자는 생각하겠으나, 직접 대기실에서, 지정된 좌석에 앉아보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라. 아날로그 손목시계와 무선 이어폰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전자기기를 지퍼백에 담아 담당 조교에게 건네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라. 긴장되는 마음에 주변에 하소연해보고 싶어도 수험생간 대화나 신체 접촉이 금지된 터에 속으로만 삭여보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라. 긴장과 고요가 경쟁의 불안한 심리 속, 적막을 깨는 수험생 이동 안내 방송과 그 과정에 수반되는 소음이 당신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기 전까지는 절대 말하지 말라. 대입에 관한 긴장이란, 지방서 살던 한 사람이 어느 날 낯선 도시로 올라와서, 수많은 경쟁자들 한 가운데서, 페이지 넘기는 소리,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조교가 계단 올라가는 소리, 가방 지퍼백 드르륵 여는 소리, 옆 사람이 막 가방을 의자에서 떨어뜨려 다시 들어올릴 때 나는 소리 그 모든 실제의 소리 한 가운데서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체험해보지 않았다면, 감히 상상하지도, 무언가 말하려 하지도 말라.

나도 긴장을 풀어보겠다고, 어쨌든 대화는 못 하니 여기에다가 하소연하고 있으나, 그래도 이 뭔가 – 아, 4년 전인가 이 망할, 수험생들을 사회적 거리 두겠다고 1칸씩 띄워 앉히는 (덕분에 조금 공간상 널럴하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지금은 아득한 오래전의 워터파크에 놀러간 기억 속에서, 30여 m의 워터슬라이드 앞 튜브에서, 낙하 직전에 느꼈던, 마음 속, 가슴 속 어딘가에서 차가운 물이 올라와 시리게 하는 그 느낌, 어딘가 가라앉는 듯 하지만 아닌, 그런 감정은 도무지 가실 줄을 모른다. 하지만 비단 긴장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겠다는 어느 정도의 지레짐작이, 지금 막 화장실을 가시겠다 손을 든 내 앞자리 바로 우측의 김OO 선배가 고려대학교 기출 문제 페이지를 넘길 때 천장의 백색 LED등의 불빛에 잠깐 비추어지던 그의 손에 맺힌 물기로 하여금 전해져온다는 사실은 하나의 위안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원래 이 글을 쓰지 말고 – 필기구 닳고, 손목 아프고, 조금 피곤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고려대학교 모의면접 (학교에서 한 5~7번인가 진행한) 문제나 기출을 볼까 – 도 생각했으나, 오늘 입실 전 – 그러니까 대충 입구에서 신분증, 수험표 대조 확인 받고, 열 스캔하고, 6층까지 걸어올라가면서 옆에서 함께 올라가던 김OO 선배가 ‘긴장 안되나’ 하며 멋쩍게 웃어보이시자 ‘제가 지금 걸어 올라가고 있는지, 밀려 올라가고 있는지 헷갈려요’라고 말하기 전에,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서 김OO 선생님과 함께 우당교양관 (왜 계속 나는 쓸 때 ‘우당교양관’이 아니라 ‘우당교육관’이라고 실수로 쓰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으로 이동할 때에, 3학년 선배들은 아는 눈치였으나 나는 초면인 어떤 우리 학교 선배가 오전에 면접 친 애들 말에 따르면, 고려대 면접 제시문 스타일이 조금 바뀌었다. 원래는 짧은 제시문을 주고 공통인 키워드 찾고, 대표하는 사회 현상, 혹은 과학사나 과학 개념 속 예시를 들고, 제시문 별 공통 개념을 비교-대조하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다르게, 긴 제시문을 줬다더라 – 는 말씀에, 그게 좀 생각이 나서 별 소용이 없겠구나, 불안하지만 그 동안의 나 자신이 쌓아올린 바탕과 기초, 그리고 치열했던 지난 2년, 그 순간순간마다 환호하거나, 절망에 빠져 비틀어지며 질렀던 그 비명 소리와 절규, 신음 소리와 시험 기간에 어떻게든 내신을 사수하겠다고 악착같이 버티던 때들, 집안일로 비틀거리며 눈물 흘리다 울분을 마침내 쏟아붓기도 하고, 가장 친하던 친구와 싸우고 갈라지고 다시 화해하고, 조기졸업 발표 이후 점차 멀어지면서 들던 그 시리고 아픈 감정들, 내가 헛살았다 – 혹은 헛살지 않았다 – 라 생각하던 모든 순간들, ‘나의 삶을 살자’면서도 주변과 나를 비교하게 되면서 나를 채찍질하고 주변을 시기하고 저주했던 그 모든 순간들, 낙담하고, 다시 기뻐하고, 다시 우울해졌다가는 다시금 웃던 지난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이 있음으로써 여기에 있게 된 지금의 나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인가, 어쩌면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그럴지도.

이 글은 대기실 내에서 면접 전에 쓰고 있는 것이나, 아마 뭔가를, 내 생각을 표현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사람은 분명히 또 한 네 시간 즈음 피곤한 경부고속도로를 통한 하경(下京) 과정을 거치고 나면, 노트북 앞에 앉아 이 글을 타이핑해서 (지금은 A4 용지에 쓰고 있으니까) 블로그에 올릴 것이 뻔할 사람이므로, 누군가가 본다는 것을 아마 내 무의식 중에서 상장하고 쓰고 있는 것일 게다. 몇 십분 동안 써 오고 나니, 손에 약간 땀도 나고, 코에 쓴 KF94 마스크가 촉촉해서 그 특유의 습기와 구취로부터 오는 불편함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뭐. 어쩌겠는가.

만약 누군가 이 글을 본다면, 고려대고 뭐고 면접 전에 ‘긴장을 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싶다. 그 대신, 그 자신이 살아온 (아마 고려대 쓸 정도면 굉장히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자신에게는 – 치열했을) 지난 2~3년의 기억과 순간순간들을 한 번 되돌아보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주변에 경쟁자가 즐비하고, 심지어는 같은 학교 친구나 선배가 같은 학과에 지원한 덕에 상호 경쟁 관계에 있게 되는 비극 속에서 긴장과 고독에 시달릴 때, 그 누군가가 스스로의 짧지만 어쨌든 자신에게는 길었을 18~19년 속은 뭐, 몇 년이 되었든 간에 그 인생사 속 순간들을 되돌아 짚어가며, 단지 자신이 지금, 옆에는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님을. 당신이 살아온 세월과, 그 세월이 당신에게 건넨 선물과, 그 세월 속의 연과 만남, 환호와 격려와 축하, 다툼과 언쟁과 논쟁, 틀어짐, 이별, 절망, 눈물, 그리고 그 순간들이 만들어낸 당신의 본연이 스스로에게 자리한다는 것을 발견해주기를 단지 나는 바랄 뿐이다. 그 때 비로소 그는 긴장의 감정이 아닌, ‘자신감’도, ‘승리자’도, ‘패배자’도, ‘작은’도, ‘큰’도, 그 어떤 것도 아닌, 그 자신의 의지로써 풍만하여 그의 의지를 대입에서, 고사실로 이동하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 면접장서 그가 휘갈길 메모장 위 연필서 미끄러지는 흑연 입자 하나하나, 그리고, 마침내. 그가 구술실의 문을 용기있게 잡아돌리고 들어가 웃으며 자리에 앉아, 그 앞이 카메라든 면접관이든, 그 자신을 스스로가 증명해낼 때 피력할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fin.

2020-11-22. 日. 14:30. 고려대학교 우당교양관 6F 대기실 內. Stephen O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