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얼마 전에 1권의 책을 끝내고선, 요즘 또 1권의 책을 읽고 있다. 헌법 주석서라 말할 만한 ‘지금, 다시 헌법(차병직, 윤재왕 저, 로고폴리스)’와 매년 꼭꼭 챙겨보는 ‘세계미래보고서’ 시리즈 ‘세계미래보고서 2019(박영숙, 제롬 글렌 저/이희령 역, 비즈니스 북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책들을 틈틈히 읽고 있다 보니, 그리고 그 언제나 –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도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 매스미디어에서 줄곧 떠들어대는 최근의 뉴스들을 보니, 한 가지의 질문이 도저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내가 든 생각은 이러했다. 내가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김대현 저, 다산책방)’이라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분쟁 수역인 한일공동개발수역에 국제해양법을 생까고 국가를 세운다는,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그러한 장편 소설을 읽은 이후 줄곧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 우리 자신은 국가 선택에 있어서 어떠한 자유도 가지지 못한다. 설령 이민제도나 개인이 국가를 그나마 옮겨갈 수 있게 하는 제도라고 말하지만, 그 절차는 모두가 이미 알다시피 매우 복잡하며 까다로운 것이고, 경제적 기반을 요구로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결국 우리 자신들은 태어난 국가에서 – 심지어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속지주의나 속인주의에 의하여 – 그 국가의 국적을 부여받음으로서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한 때 내가 존경해마지 않던 인물 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에 대하여, 이제는 반기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J.F. 케네디
그는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라 그의 취임 연설 중에서 말한 바가 있는데, 이는 국가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한 결과라 하겠다. 장 자크 루소 – 그 유명한 프랑스의 혁명사상가가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생각해보자. 그는 국가가 형성된 기원을, 공동체가 형성된 근원을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조금 대가로서 지불하고 그 공동체의 구성으로부터 자신에게 오는 이익 – 사회적 분업에 따른 전문성과 효율성의 증대로 인한 생존 확률의 증대, 그리고 사회의 개인에 대한 보호를 얻기 위함’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통찰과 가설이 반드시 옳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나, 적어도 그래, ‘지금, 다시 헌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본연적인 잘못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그렇게 함으로서 개인에게, 우리에게 무언가 강요하고 있는 듯한 이 국가를 인지하고 의심해보게 하고 있다.
개인은 이제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이런 내용과, ‘세계미래보고서 시리즈’에서 한참 전부터 예언하고 있었던 국가의 소멸과 정부의 붕괴의 대목을 고려하여볼 때, 또는 이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도 단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국회에서의 국회의원들의 행태만 보더라도, 개인은 아무래도 이제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국가는 보호라는 명분 아래 개인이 세상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을 때부터 번호를 부여하고는 늘상 감시에 감시 – 그 영국의 제러미 밴담이 설계하고 푸코가 논한 패놉티콘(Panopticon)의 그 끔찍한 형태와 같이 감시를 통한 질서 유지와 규율을, 그렇게 함으로서 통치자에 대한 권력의 끊임없는 강화를, 그들 자신 – 국가 – 가 태어난 이유를, 그 국가가 해야 할 본래의 기능을 망각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는 표준적인 관점에, 여론에 맞지 않는 추태를 인정하기 싫어하며, 그것에 반기를 드는 자는 그래, 마치 ‘빨갱이’인 듯 마냥 위험 인물로 낙인 찍고는 사회적으로 격리시킨다. 대중은 ‘군중심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에게 언젠가 주입된, 슬그머니 뇌 속 깊은 곳까지 뿌리내린, 우리가 ‘신념’이라고 변명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예측 불가능성의 세상을, 자신의 틀에 맞추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항시 이러한 것들을 자각해야 한다. 특히, ‘국가가 있음으로 나 자신이 있다’나 ‘공동체의 존속이 곧 나의 존속이다’는 공동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이제 과감히 버릴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공동체’를 너무나도 중시한 나머지,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일 것이지만 그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교육받았다. 그래, 결국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러한 국가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우리 개인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자들이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개인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국가는 우리가 만든 것이지, 우리가 소속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미래보고서 2019’에서는 2018년 가장 주목해야 될 사건으로 ‘블록체인 국가 모델’의 탄생을 들었다. 2018년 10월, 2014년에 설립된 온라인 가상 국가 비트네이션(Bitnation)이 기계 판독이 가능한, 빈 협약을 준수하는 여권을 그들의 국민들에게 발급했기 때문이다. 이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가는 탈중앙화되고, 대통령이나 수상도 없는, 인터넷 속의 그 누구도 등록만으로 국민이 될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온라인 국가였다. 이 국가는 우리에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국가의 3요건 – 국민, 영토, 주권 – 에서 과연 ‘영토’가 굳이 필요한 가와, 국민을 굳이 일정한 범주 내에서 복잡한 절차를 통해 그 요건을 제한시킬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이 외에도 구글 엔지니어 출신인 패트리 프리드먼의 해상 국가 시스테딩(seasteading)이나,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신생 독립국 리버랜드(Liberland)의 예를 들며, 이러한 시도들로 말미암아 다가올, 국민들이 더 효율적인 국가나 자신이 원하는 국가로의 이주나 이민을 자유로이 선택함으로서, 부패한 정부는 국가 간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보다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참으로 주권이 모두에게 있는 직접 민주주의로서의 정부가 운영될 수 있는 미래를 내다 보고 있다. 그래, 우리의 자유경쟁시장의 모델처럼, 이제 국가도 경쟁을 통해 국가의 설립 목적에 맞는 국가를 설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험과 예측이 과연 옳을지,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그 누구도 모르는 현재 진행형의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러한 진보적인 행태를 강력히 응원하며 지지하고 싶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곧 있을 나의 보약 공책 발표에서도 ‘노회찬’ 전 의원의 ‘6411번 버스 연설’을 통해 던질 질문이지만, 우리 급우들이, 아니. 그냥 경남과학고등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이 질문 – 손석희 앵커, 그도 세월호 사건을 보도하면서 던진 질문이지만 – 을 깊이 고민해주길 바란다.
대관절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주입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데올로기, 당연시 여긴 기존의 지배 체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내가 맞추어 들어가야 한다는 ‘지배 당하는 이’의 사고 방식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첫 번째 열쇠가 되지 않을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가 생각난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서 스페인 내전 당시 혁명군 측과 함께하며 종군기자로서 경험한 전쟁의 쓰라린 과정과 결과를 보고 이러한 글을 썼다. 그러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것도 결국은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원인이었으며, 결국은 스페인의 권력을 누가 잡을지, 누가 군중을 지배할 지를 둔 대립이었고, 양 측 모두 어찌 보면 국가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는 잊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대관절, 우리가 삶에서 매 순간 목격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 정부의 부패와 무능한 관료주의, 부패한 민주주의 – 포스트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주는 이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 글은 2019.5.17에 본인이 고등학교의 국어 날적이에 적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부분 다듬어서 보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