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1. 그들에게 기회를 달라
생각을 움직여 다른 꿈을 꾸다. 동상이몽(動想異夢) 시리즈는 커피, 사유의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시사 평론 및 생각 나눔의 장이자, 세상을 향한 이해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복음서 7장 53절 ~ 8장 11절 中.
새벽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내가 지은 잘못은 너무나 많다는 생각, 그리고 이 모든 잘못을 회개하기에는 나에게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생각, 마침내는 이 모든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하는 두려움의 생각.
과거 언젠가 나 스스로가 던진 어떤 언사나 행위가 누군가로 하여금 그 존엄을 침해하여 심리적 고통을 유발하지는 않았을까 – 하는 한편으로는 굉장히 쓸모없으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뉘우침의 사상(思想), 혹여나 누군가의 삶의 위치와 순리를 완전히 비틀어버린 것은 아닐까 – 하는 그런 너무나도 복잡한 번뇌가 삶의 순간 곳곳에서 튀어나올 때, 나는 은근히 괴로워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이 삶을 헤쳐나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먼저 세상을 살아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존중하므로, 그 순간들마다 지나온 과거는 되돌릴 수 없음과 스스로의 미래는 아직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금 떠올리며 다음 하루를 기꺼이 맞이할 준비를 하며, 묘한 몽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로소 완전한 몽(夢)의 영역으로 입성한다.
매일 새벽마다 치르는 이러한 나의 의식의 통과 속에서 내가 매 순간 경험하는 어떤 깨달음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인지와 그리고 아직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사이에 인간 존재에 대한 답이 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되는 수많은 번뇌와 삶이 우리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수많은 고통 속에서 우리가 도전과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 그리고 연대를 그나마 이어올 수 있었던 근본이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하지만 최근에 본 어떠한 이야기는 사회는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잠깐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 듯 하다.
어떤 두 사람이 지은 죄가 그들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의 외침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누군가는 두 사람으로 인하여 입은 자신의 학창 시절의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보였고,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은 상처들을 보고 겪어왔던 세상은 더 이상의 상처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상처 입은 이의 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주위로 많은 이들이 모였다. 모인 이들은 두 사람을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로 한 사람의 삶의 운명이 뒤틀리는 일은 되풀이될 수 없다고, 그리고 그러한 시도를 한 이들에 대해서 일체의 관용은 없을 것이며 오직 단죄만이 있을 것이라고 모두가 울부짖으며 돌을 던졌다.
… 그러나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단죄는 죄를 다루기 위한 항상 최적의 방법은 되지 못하지 않을까. 다른 이의 삶에 대한 비극을 초래한 그들의 잘못도 잘못이지만, 우리가 그렇다고 그들에게 누군가의 삶의 운명을 뒤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달려들어 끝없이 물을 자격이 있을까. 그들도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행위는 되돌릴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인데, 우리가 그들을 한없이 과거로 묶어 다른 미래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길인가. 과연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한다는 목적 하에 상처 입힌 이들의 삶의 운명을 똑같이 뒤틀어 재기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당연한 의무가 맞는가.
… 우리 모두는 상처를 입는다. 매 순간 삶이라는 것이 가져다주는 충돌에 의하여 우리는 뜯기고 베이며 피를 흘린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쉽사리 멈추지는 않는다. 끝까지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도처에 있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나아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과거는 바꿀 수 없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미래는 우리가 바꿀 가능성이 있음을 널리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입힌 이들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상처를 받은 이들의 뒤틀린 운명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를 입힌 자들에게 돌을 던져 그들을 죽이고 무조건적으로 단죄해야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단죄가 그들의 ‘삶’을 의지까지 뒤틀려 세상에 또 다른 무수한 죄인들을 추가하는 결과로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죄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미워할 수는 있게 하여도, 혹은 법이 정한 일련의 처벌을 받게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다는 일련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 상처 입은 이들이 상처를 입힌 이들에 대하여 똑같은 고통을 받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심리일 것이며 이것은 ‘죄와 벌’이라는 형사적 책임의 역사에서 형벌의 주 근거로 적용되어 온 주요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심리가 특히 분노와 결합하였을 때 우리로 하여금 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 중 하나는, ‘벌’의 목적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다시는 짓도록 하지 않기 위함’에 있지 ‘죄를 지은 자들을 처벌하기 위함’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 아마도, 예수가 그 간음한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한 그 대답, 그리고 모세의 율법 사이 어딘가에 진정한 ‘죄와 벌’에 대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