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13. 우상의 황혼, 그리고 민주주의

동상이몽 #13. 우상의 황혼, 그리고 민주주의

2025-01-15 2 By 커피사유

생각을 움직여 다른 꿈을 꾸다. 동상이몽(動想異夢) 시리즈는 Cafe 커피사유의 카페지기 커피사유의 시사 평론 및 생각 나눔의 장이자, 세상을 향한 이해를 표현하는 공간입니다.


우상의 황혼이 내려앉은 시대,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1.

나라가 두 쪽이 났다. 지난 제20대 대선때부터 우려해오던 파국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처음으로 학업 외적의 사유로 한 밤을 남김없이 새도록 만든 지난 해 12월 3일과 4일 새벽 이후, 나는 매일같이 스스로가 믿어왔던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원칙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어느 시국선언문이 표현했듯 “나는 하루하루 인간성을 상실한 절망을 보고 있고, 나 역시 그 절망을 닮아”가는 듯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가 청문회에서 헌정질서를 수호해야 할 책무를 지닌 대통령이 본회의장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고 폭로했고, 누군가는 “행정안전부 장관으로부터 특정 언론에 대한 단전 · 단수 요청이 있으면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들이 그 존재 목적과는 정반대로 행동했다는 사실, 그리고 지난 12 · 3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책임자들이 “잘 모르겠습니다”, “TV 보고 알았습니다”, “답변드리기 제한됩니다”라고 진술하는 모습으로부터 나는 과연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참담한 의문을 떠올렸고, 마침내 그 시국선언문이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했던 이유를 더 깊은 층위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국민이 직접 선거하여 뽑은 일국의 대통령이 스스로가 그 지위를 취득하게 되었던 선거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끝까지 사법기관의 출석 요구 그리고 영장 집행에 불응한 끝에 오늘 아침 나는 현직 대통령의 체포라는 헌정사상 유일무이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자진 출석을 거부하고 관저에 비겁하게 숨어서 변호인을 통해 적법함이 복수의 판사들에 의해 인정된 체포 영장에 대해 꼬투리를 하나씩 잡는 장외 여론전을 펼치는 방식을 택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그리고 헌법기관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내버리고 정치공학적 계산에 편승하여 대의민주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기본 원칙을 공격한 그의 몇 마디를 마치 신탁처럼 받들 듯 하며 도저히 옹호하기 어려운 그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되풀이한 여당 의원들의 참담한 행실까지도 목도해왔다.

나는 한 쪽에서는 국민의 신임을 정면으로 배반한 범죄자를 용서할 수 없으며 즉각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음을, 다른 한 쪽에서는 거짓 정보를 통한 선동과 돈벌이라는 잔인하고도 더러운 관계에 편승하여 (정도가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주장에 숨은 일부 진실대로) 마찬가지로 범죄자 혐의를 받는 야당 대표를 즉각 단죄해야 하며 (정말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계엄은 정당했고 체포야말로 제2의 내란이라고 울부짖고 있음을 봐 왔다. 이 대립은 12 · 3 비상계엄 사태 이후로 계속 이어져왔으며, 지난 12월 14일 탄핵소추안의 가결 때에도, 그리고 2025년 1월 15일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가 법관이 발부한 영장에 따라 체포되면서 헌정질서가 제대로 집행되고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가질 수 있게 되었으나, 이미 점화된 대립이 마침내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이더라도 설득과 존중이 기본이 되어야 할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 철학마저 흔들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에 대한 영장 집행이 마침내 성공했음이 모든 스피커와 화면을 통해 보도되었을 때, 현 사태를 양비론으로 무마하려는 불의한 논리가 들어 있음에도 그 우려만큼은 타당했던 어느 한 칼럼의 첫 문단을 떠올렸다.

계엄 후 정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늘 있던 ‘진영 대결’이라든지 ‘여야 충돌’ 정도로 여긴다면 상황을 오판하는 것이다. 한남동 거리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여의도 국회에서, 적의(敵意)로 가득 찬 극한 대결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관저는 철조망 쳐진 도심 속 요새가 됐고, 유혈 충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타협의 실마리라곤 보이지 않는다. 한쪽이 다른 쪽을 죽여야 끝날 듯한 심리적 살육전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박정훈, 〈총 안 든 내전(內戰)〉. 2025년 1월 13일자 조선일보 칼럼 中

#2.

무엇이 현재의 사태를 만들었는가? 대학 입학 이후 우연히 접한 니체 철학을 통해 조금씩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음을 느껴왔던 나는 수차례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는 물론 Chalkboard 등 수많은 단편들을 통해 일찍부터 니체가 지적한 바 있는 우상의 위험성을 강조해왔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한 키치(Kitsch)다. 죽음 그리고 모순적 존재라는 위태로운 기둥 위에 서 있는 인간 존재가, 스스로가 의지할 만한 구석을 찾기 위해 상정한 하나의 믿음이 바로 우상이다.

물론 〈키치와 민주주의〉에서 인정한 바 있는 쿤데라의 문장: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라는 기표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키치로부터, 즉 우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다. 무엇이라도 믿지 않으면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심연을 응시해야 하기에 유약한 인간은 무언가라도 좋으니 그를 붙잡아줄 동아줄을 바라게 된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의 세 번째 논문 말미에 적시하는 바와 같이 말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하면, 인간,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다. 지상에서의 그의 생존에는 아무런 목표도 없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생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거대한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더 거대하게 “헛되다!”라는 후렴이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무서운 공허가 인간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설명하고 긍정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인간은 삶의 의미라는 문제로 괴로워했다. 인간은 대체로 보아 하나의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괴로워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아니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져 있기만 하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까지 한다.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가 바로 이제까지 인류에게 내려진 저주였다. 그런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간에게 하나의 의미를 준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주어진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인간이 부득이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었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고통이 해석되었으며, 무서운 공허가 채워진 것으로 보였다. 자살을 부르는 모든 허무주의로 통하는 문이 폐쇄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새로운 고통을 가져왔다. 그것은 더 깊은, 더 내면적인, 더 유독한, 더욱 삶을 갉아먹는 고통이었다. 이 금욕주의적 이상은 라는 관점에서 모든 고통을 해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제 더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이나 무의미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이제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되었다.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는 구원된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서 방향이 정해진 저 모든 의지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는 은폐할 수 없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오, 동물적인 것에 대한 더 심한 증오,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심한 증오, 이성과 관능에 대한 공포,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그 자체로부터 도망치려는 갈망,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 우리가 감히 그것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면 ― 무를 향한 의지이고 삶에 대한 혐오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의지이고 의지로서 남아 있다! 그래서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를 의욕하기를 원한다.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pp. 301-302.

그러나 바로 위에서 니체가 지적한 것처럼 키치는 본질적으로 무를 향한 의지, 즉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특정한 관점에서 삶을 재단하는 의지이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조건인 이 키치는, 우상은 바로 이 점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험성을 가진다. 키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그 키치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하는데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갈등이 인간의 실존적 · 정신적인 운명에 기인한 것이라면, 정녕 출구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3.

우상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인간의 한계라는 법은 없다. 나는 〈사유 #52. 키치와 인간〉에서 논한 것처럼 키치 속에서 사는 것과 구분되는,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 두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키치 속에서 사는 것과 키치와 더불어 사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신한 것은 냉전 시기 미소의 우주 경쟁의 결과 최초로 대기권 밖에서 푸른 행성을 바라본 사람의 눈에 그 모습이 비쳤을 때였다. 이는 체계 속의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체계의 한계, 이론의 한계, 사회와 도덕과 문화의 한계를 깨닫기 위해서 그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그가 키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다.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는 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그 밖의 것을 체험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자신이 처한 건물,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는 바로 그 구조물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러나 그가 문 밖을 나가 자신의 피난처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지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물 밖으로 빠져나온 개구리처럼 자신의 앎보다 더 넓은 미지가 존재하며 그리하여 자신의 믿음은 하나의 우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는 이제 밖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 그는 이제 키치 안으로 들어가서 살 수도 있고, 키치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키치와 더불어서 사는 자란 바로 이러한 사람이다.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키치를 인지한다. 그러나 키치 속에서 사는 자는 이미 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키치를 인지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만약 자신의 키치와 다른 어떤 키치가 그의 세계로 유입된다면 그는 자신의 구조물에 모순되는 대상이 있다고 소리칠 것이며, 자신의 구조물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키치와 더불어 사는 자는 자신의 구조물이 그 침입자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침입자는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닌 방문자가 된다. 그는 충분히 대화를 나눈 뒤에 괜찮다고 생각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그와 어울릴 것이고, 별로라고 생각되면 인사를 나누고 그를 되돌려보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구조물이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거하여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

커피사유, 〈사유 #52. 키치와 인간〉 中

핵심은 스스로가 키치 속에서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지의 여부에 있다. 조금 더 일상적인 언어로 옮긴다면, 자신이 믿는 우상 외의 다른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지의 여부, 약간의 왜곡을 무릅쓰고 더욱 쉽게 말한다면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였는지의 여부가 모든 것을 가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믿음광신의 차이이며, 진리와 인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차이가 도대체 뭐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실소를 품을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의 담론이 너무 피상적이고 또한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당초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철학적 깨달음은 한 개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놓고, 단 하나의 믿음에 매달려서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비난하는데 생을 쏟아붓지 않도록 해 준다.


#4.

이 철학적 소결이 작금의 사태에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밝히면 왜 내가 〈우상의 황혼〉이라는 키워드를 구태여 강조하고 있는지를 명정(明正)하게 소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믿음, 즉 우상(또는 키치)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다른 주장들과 믿음에 귀를 닫고 눈을 감아버린 결과물이 바로 일찍이 〈바벨의 도서관 #5. 광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에서 인용한 바 있는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가 지적한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이 의존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명확성이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동질적’ 민족, 하나의 ‘참된’ 종교, 하나의 ‘본원적’ 전통, 하나의 ‘본연적’ 가족과 하나의 ‘진정한’ 문화라는 하나의 순수한 교리가 필요하다. 어떤 이의도, 어떤 모호함도, 어떠한 양립도 허용하지 않는 비밀번호와 암호가 필요하며, 그들의 가장 큰 약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순수와 단순의 교리는 모방적 대응 전략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엄숙주의로써 엄숙주의와, 광신주의로써 광신주의자와, 증오로써 증오하는 자와 대결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수단을 가지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 자유롭고 열린 사회가 스스로를 방어하려 한다면, 그것은 늘 자유롭고 열린 상태를 유지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현대의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유럽은 공격을 받더라도 현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다원적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 광신주의자와 인종차별적 광신주의자가 동일성과 차이라는 범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려 획책할 때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더욱 중시하는 연대적 동맹이 필요하다. 광신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투박하고 단순한 세계관을 제시한다면, 단순함과 투박함으로 그들을 능가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섬세하게 구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 《혐오사회》. 서울: 다산북스, 2017 中

여기서 다루는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들을 우리가 반대하고 혐오하는 세력에 국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말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독단에 빠진 광신주의자이지 않은가하는 되물음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부정이자 치밀한 공격이었던 지난 12 · 3 비상계엄이 합법적이고 합헌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또, 여당 의원 여럿이 보이는 행위들에는 그러한 세력에 올라타 조금이라도 표를 더 받아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었던 지난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또한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공유했다. 그러나 이 분노가 상대 세력의 악마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상대 세력을 적폐 세력이라고, 내란 동조 세력이라고, 청산퇴출 대상이라고,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야 우리가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표현의 자유라 할지라도,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와 동일하게 정말로 그렇게 광신하지는 않아야 한다. 아무리 내가 믿는 가치에 반대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또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그들에 대한 반목을 거두어야 하며 속이 터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최대한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운명에 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은 여기서 그 진가를 온전히 발휘한다. “우리가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5.

올라오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정말 억울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그들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타협은 곧 우리가 패배하는 것이기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억울하지만 스스로가 굽히고 들어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다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 그들을 설득하고 대화하려는 태도가 확산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맞서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을 온전히 보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마저 다음과 같이 논한다.

또한 광신주의의 본질주의에 대해서도 본질주의적 가정들로 대응하려 해서는 안 된다. 증오와 멸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항상 증오와 멸시의 구조와 조건들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개개인을 악마적 존재들로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언어적 또는 비언어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비판하고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적으로 처리해야할 범죄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 범인을 법적으로 추적해 수사하고 가능하면 법적 판결까지 받아내야 한다. 또한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광신주의와 인종주의의 내용만이 아니라 형식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 이는 스스로도 똑같이 과격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혐오와 증오, 그리고 폭력으로써 저들이 꿈꾸는 내전 시나리오(또는 종말의 시나리오)에 힘을 실어주라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는 증오와 폭력으로서 분출된 불만이 애초에 발생한 장소와 구조를 찾아 경제적, 사회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광신주의가 발붙이기 전에 미리 예방하고자 한다면, 유사종교적 교리 혹은 민족주의적 교리가 어떤 경제적, 사회적 불확실성을 가짜 확실성으로 덮어 가리는지 밝혀내는 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광신주의를 예방하려는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만큼 하찮게 여기는지도 물어야만 한다.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 《혐오사회》. 서울: 다산북스, 2017 中

저쪽이 키치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키치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일 듯 맞부딪힐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구조’가 오늘의 현상을 만들었으며 ‘어떤 과정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는 것, 나아가 나의 키치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 위에서 각자가 문제 진단을 내리고, 그것을 공론장에서 맞부딪치면서 무엇이 옳은가를 논하는 것, 바로 그 태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바로 이 태도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와 함께 지키고자 한 건강한 사회를 위한 초석이 아니던가?


#6.

나라가 두 쪽이 났다. 지난 제20대 대선때부터 우려해오던 파국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나는 한 쪽에서는 국민의 신임을 정면으로 배반한 범죄자를 용서할 수 없으며 즉각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음을, 다른 한 쪽에서는 거짓 정보를 통한 선동과 돈벌이라는 잔인하고도 더러운 관계에 편승하여 마찬가지로 범죄자 혐의를 받는 야당 대표를 즉각 단죄해야 하며 계엄은 정당했고 체포야말로 제2의 내란이라 울부짖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나는 작금의 상황이 도래한 원인을 직시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서로에 대한 증오가 증폭되었으며 경청과 타협이 실종된 오늘의 폐허 위에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나는 끝까지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참고 견뎌낼 것이다. 나는 끝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쓸 것이다. 키치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키치와 더불어 살 것이다.

그리고 결국 지켜낼 것이다. 이 우상의 황혼이 내려앉은 시대에서,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