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만색 #2. 철학: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기
만인만색(蔓認滿色)은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받은 인상들이 번지며 채워나가는 공간을 기록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비평 시리즈입니다.
이하의 글은 Rainrose 군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글을 보고 생각했던 바를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23일 R의 블로그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를 읽었다.
R은 음모론을 신봉하는 어머니 ― 이를테면 만병통치 온수매트 · 천사봉 등의 효험을 굳게 믿으며 사용하거나, 저출산 현상을 일루나미티와 연계짓거나, 또는 코로나 백신에 불임화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머니 ― 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글 자체는 바로 이 어머니를 겨냥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글의 주제 의식 내지는 주장이 글 자기 자신에게도 겨누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R은 어머니의 행동들을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발화에 기초하여 비판하고 있다: “그 때 이 온수매트를 알았다면, 할머니는 살 수 있었을 거야. 어쩌면 그 전에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할머니도.” 이에 대한 R의 입장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최후명제로 대표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at we cannot speak about we must pass over in silence).” 그는 자신 그리고 아버지에게 소중한 할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어머니가 ‘그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그녀가 가정법 과거 하에서 제시하는 유사 · 대체 과학의 실현불가능성과 결합함에 따라 문제가 되는 이별의 순간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R은 이같은 ‘삶의 〈비극적 순간〉에 대해 원인을 지목하고 그 대상을 겨누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우리의 세상은 복잡계이므로, 현상은 언제나 복수의 존재자 간 상호작용-연쇄다. 그러므로 어떠한 현상이 있을 때 그것의 원인을 언제나 단일한 존재로 짚는 것은 오류이다. 삶의 비극적 순간은 현상이다. 따라서 비극적 순간에 대해 단일한 존재자를 원인으로 지목하거나 겨냥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R의 이러한 세계관은 탁월한 것으로, 타자와 매개하는 것으로서 각각이 있는 사물의 존재양식에 대한 본격적인 지각이 출발했다는 신호다. 그러나 나로서는 R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시도한 이 기술 일체가 그가 문제삼고 있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하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사려깊은 독자라면 다음과 같은 ‘메타적 대체’들을 R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R의 글에서 ‘어머니의 행동’은 R의 어머니에게서의 ‘할머니의 죽음’을 대체한다. 둘째, R의 글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R의 어머니에게서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를 대체한다. 이러한 대체 관계에 대한 기술은 R의 글에서 시도되는 것이란 그의 어머니가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는 ‘실수’를 똑같이 범하는 것이라는 암시를 충분히 제공한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주장하려고 한다.
R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물론 그보다 내가 R의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때문에 추론을 계속하기는 언제나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나와 나의 어머니와의 관계로 미루어볼 수는 있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유년기와 성장 배경에 대해, 하다 못하여 내가 그녀의 손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길러진 때 그녀가 어떤 정동과 생각들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만약 나와 어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조용한 단절이 R과 그의 어머니 사이에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내가 어머니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그녀 또한 한 명의 인간이라고, 즉 그녀 역시 타자와 복잡한 관계를 맺어오며 살아온 복잡계 속 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그녀에 대해 기술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는 것처럼 R 역시 그의 글 자체에 대해 망설였어야 하지는 않은가? 어머니의 행동이라는 복잡계적 현상에 대해 그는 정말로 그 글이 담고 있는 주장처럼, 현상 배후를 지목할 때 단일자가 아닌 복수자 간의 관계를 지목하고 있는 것인가?
글의 말미에서 R은 말할 수 없는1‘복잡한, 우리가 전후 맥락 ― 그 존재자와 타자와의 관계들 ― 을 잘 알지 못하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것들에 대해 손쉽게 말하는 일’들의 폐단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 뒤, 그 칼날을 자신에게도 공정하게 들이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어머니의 맥락이 자신에게서 결여되어 있음을 과거와 달리 인식하고 있다. 그가 그녀를 단순히 ‘음모론자’로 보는 시각이 폐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R이 어머니를 ‘말할 수 없는 존재’로 고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 자체에서 그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이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를 가르는 이 경계 위에서 R은 언어의 형태로, 즉 논리적 기호 조작의 영역에서 어머니에 대한 표상 · 기억들을 조합 · 연결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 과정 위에서 자신 역시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결론, 즉 어머니 역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속했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술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만 자신의 그 요구 자체가 달성 불가한 것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기술을 포기하지 않는 그는 어머니를 여전히 단정하지만, 그 단정을 최후에 주저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저지를지도 모르는 오류일 가능성을 검토하며, 새로운 단정을 수립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그의 행동이 그에게 현재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상기에서 논한 층위를 달리하는 이율배반성이 핵심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타자를 언제나 온전히 인식하지 않고 왜곡해서 인식한다. 타자에게서 특정한 속성만을 추출 · 탈락시키거나, 잘 맞지 않더라도 이전에 확립한 형태나 부류에 욱여넣음으로써 타자를 구성하고 그 타자들로 가득한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 자신조차 타자를 통해 낯설게 이해하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고 칠해나가는 방식은 바로 이러하다. 낯선 타자들, 본질적으로 모든 맥락을 파악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시지프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카뮈가 이야기했듯 우리의 존재 조건은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올리는 것에 있고, 따라서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을 다하여 말하고, 채색하며, 의미를 변형하고 부과한다. 즉 우리는 현상의 원인을 단일하게라도, 모든 존재자들을 포함하지 아니하더라도 계속 지목해본다. 우리가 ‘바위를 밀어올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어도 ‘바위를 밀어올리지 않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세계의 타자들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 논리 · 수리 등의 영역에 해당하는, 즉 언어로 기술 가능한 ‘언표될 수 있는 것들’. 둘, 미학 · 종교 등과 같이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언표될 수 없는 것들’. 철학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부류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문장들을 오늘날 누군가는 언표될 수 없는 것들은 버리고 언표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는 취사선택의 청유로 이해하기도 하지만(“철학은 자연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는 그가 언표불능자의 언표 행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적 활동은 명료화의 본질들로 구성된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다. 철학은 애매하고 흐렸던 생각들을 날카롭게 정리하고 그 경계를 확정해야 한다. (The object of philosophy is the clarification of thoughts. Philosophy is not a theory but an activity. A philosophical work consists essentially of elucidations. The result of philosophy is not a number of ‘philosophical propositions’, but to make propositions clear. Philosophy should make clear and delimit sharply the thoughts which otherwise are, as it were, opaque and blurred.)”
‘언표 가능자와 불가능자를 명료히 나누는 작업’이 철학의 의미라 한다면, R의 글에 대해서도 이 《논리-철학 논고》와 같은 최후적 성격이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에 의하여 ― 나의 명제들을 달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달고 올라간 이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My propositions are elucidatory in this way: he who understands me finally recognizes them as senseless, when he has climbed out tthrough them, on them, over them. 〔He must so speak throw away the ladder, after he has climbed up on it.〕 He must surmount theses propositions; then he sees the world rightly.)”고 썼다. R에게도, R의 글에도, R의 글을 읽은 독자에게도 남은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상기 인용의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복잡한, 우리가 전후 맥락 ― 그 존재자와 타자와의 관계들 ― 을 잘 알지 못하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