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답록 #1. 화성학(和聲學)적 공정(公正)
문답록(文遝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작성한 글에 대한 주석과 그에 대한 답글을 갈무리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석과 답글 사이의 동형성 혹은 차이점을 발견함으로써 글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확장하는 공간입니다.
원문(原文, 2021. 6. 26)
… 요즘 들어 뉴스를 보다가 드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들을 모두 언어의 형태로도 표현은 해볼수야 있겠지만, 나는 사실 이 모든 생각들이 종국적으로는 같은 다음의 문장을 가리킨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 과연 공정한 것입니까.”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문장의 구성 요소들의 결합으로써 연상되는 그 전체적인 맥락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공정(公正)이라는 이 한 단어의 속성인 듯하다. 사실, 이 한 단어는 마땅히 합의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사람들은 이 단어에 저마다의 서사를 부여하고는 그 서사가 사실 이 단어의 참된 의미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곤 했다. 지금도 다른 것은 없어서, 공정의 의미는 아직 합의된 바는 없고 오직 저마다의 서사에 따른 개별적인 정의가 산재할 뿐이라, 혼란스러운 정국은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만 같다.
사회에서 어떤 것의 분배에 관한 규칙은 명백히 오래된 사회의 계약에 따라, 그 구성원 모두의 충분한 논의를 거쳐야 할 것임에도 오늘날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각각은 저마다의 서사를 외칠 뿐이지 그 서사를 모두 탁상 위에 올려놓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할 시간은 잘 가지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대부분은 저마다의 서사를 외치기에도 바빠서 다른 이들의 서사는 과연 무엇인가 잠깐 들여다볼 시간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며, 또한 그럴 생각도 없는 것만 같다.
물론, 나도 현실이 어떤 것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에 어려운 것은 안다. 게다가 아직 나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스스로가 보편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으며 더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출발점에 대해서는 할 말은 있다. 다른 사람의 서사를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오직 스스로의 서사만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의 소리를 동시에 질렀을 때 어떤 조화로운 화성(和聲)이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당장의 급박함은 급격한 변화를 주장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물론 그 행위가 결코 무의미하지도 않고 오히려 중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행위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화성(和聲)은 각 단원들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무엇이 과연 공정한 것입니까.”
질문을 던지자. 우리가 기대하는 ‘공정’이라는 단어가 공정(空情)이 아닌 공정(公正)으로서의 올바른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공(公)의 의미에 맞게 모두가 질문을 던지고, 모두가 대답하되 다른 모든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화성학(和聲學)적인 공정(公正)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손탁일 선배의 주석 (2021. 7. 1.)
개인적으로 지적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이신 포항공대의 손탁일 선배께서 이 부족한 글을 읽고 다음 주석을 남기셨다. 이 주석은 전적으로 내가 이 글을 처음 쓰던 동기적 시각 하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나는 생가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그 선배의 소중한 주석이 손상되지 않도록 옮겨두기로 결심했다.
공정을 비롯한 수많은 것들, 심지어 물리학마저도 끊임없는 토론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현실과 잘 부합(compatible) 하는지 확인하는 실험을 거친다. 그들이 완벽한 형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물리학의 대통일이론처럼) 은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앞으로 이끌지만 일단 출발했다면 더 이상 믿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속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들은 변화의 흐름, 즉 역사를 통하여 비로소 정의되는 개념들이다. 세상이 완전한 공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이라는 가치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며 새롭게 약속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공정을 정의한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역사 없이 우리 삶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야말로 가치의 본질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사고 방식이 바로 개념과 가치를 정의하는 역사이다.) 완벽한 세상, 비로소 찾아온 평화는 우리를 이끌 뿐, 결코 실재할 수 없는 상태임을 유념하자. 급하게 결말을 보려는 (그래서 그 결말에 안주하여 안식을 취하려는) 열망은 결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버려져야만 한다.
답문(答文, 2021. 7. 2.)
선배께서 남기신 답글을 읽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생각은 일치했으나, 한 가지 문장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그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부언은 해두고 싶어서 답글의 형태로 나의 의견을 이렇게 개진하고자 한다.
선배의 귀중한 주석을 읽은 후,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예전에 조금이나마 읽어 보았던 Friedrich Wilhelm Nietzshce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연상되는 구절이 있어 옮깁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그대들과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그대들에게 가장 훌륭한 적이기도 하다. (…) 그대들이 인식의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인식의 전사가 되어라. (…) 그대들은 항상 그대들의 적을 찾아야하고, 전쟁을 해야 하며,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 (…) 그대들은 평화를 새로운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랑해야 한다. 그것도 오래 계속되는 평화보다는 짧은 평화를! (…) 나는 그대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Nietzshce는 위와 같이 그의 특유의 거친 비유법으로써 정체(停滯)의 상태를 죽은 상태로 규정하고, 죽은 자에 머무르지 않고 산 자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초극을 강조하면서 Übermensch에 대하여 이야기한 바가 있었지요. 그의 사상(思想)은 한때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무관한 어떤 광인(狂人)의 언사로 간주된 바가 있었습니다만, 아마도 선배의 주석과 제 원문(原文)의 동형성을 생각해볼 때에는 이것이 아무래도 우리 사회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은, 아니, 나아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만 한 가지, 이러한 맥락에서 가치에 대한 논의는 그 논의의 ‘열려 있음’이 보장된다면 그 이외의 조건과 무관하게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과거의 역사는 결국 시대와 공간을 총괄한 타자(他自)의 경험의 집합도출체(輯合導出體)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이것을 알고 있느냐 없느냐는 가치에 대한 논의가 보다 풍성해질 것인지 그리고 보다 다양한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를 것이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이 자신의 모든 직 · 간접적 경험을 토대로 그 삶의 가치와 여러 가지들을 논의하면서 자기-초극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합니다.
선배께서 가진 사상(思想)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의 의견과 제 의견의 공통점을 토대로, 그러나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감히 유추해보건대, 아마도 저와 선배가 함께 말하고 있는 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