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2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른 새벽이다. 집의 모두가 잠들어 있다.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인 듯하다. 고요한 이 적막 속에서는 나의 키보드를 잔잔히 두들기는 소리도 무척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밤은 신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순간 나는 밖에 달이 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구름이 많아 별도 보이지 않고 그저 캄캄한 하늘이 있을 뿐인 터라, 새벽이지만 눈에 거슬리는, 아파트 창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의 불빛들로 인한 도시의 존재를 잊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이라도 좋으니 저 하늘 위에 홀로 떠 있었다면 그래도 나는 오늘 밤의 적막에서 위안을 조금이나마 더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나는 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좀 전에 나는 모영화 선생님이 과제로 내 주신 드래곤 길들이기 1편을 다시 보는 기회를 가졌다. 낮에는 내 자그마한 – 겨울 방학 이후에 자잘한 오류 덕에 몇 개월을 선반 구석에 처박혀 썩고 있던 내 미니 컴퓨터 – 라즈베리 파이 3B+ 모델에 각종 이상한 소프트웨어를 이것저것 깔고 몇 가지 명령어들을 치면서, 종종 뜨는 오류에 약간 열을 받으면서도 이내 일상이기에, 그리고 아직 나 자신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는 있기에 나는 한숨을 내뱉으면서 구글을 통해 해결책을 검색함으로서,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어떻게어떻게 하여 몇 시간 만에 개인 클라우드 서버를 구축했고, 그 안에 지금까지의 모든 선생님들의 자료와 강의 파일 등을 꾸역꾸역 집어넣는다고 고생한 덕에 쓸데없이 시간을 버린 탓이었다. 아니, 사실 이것은 핑계일 것이고, 아마 진짜 이유는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드래곤 길들이기 1편 – 그 영화를 처음 보던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나의 모습, 영화관에서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던 그 시절의 향수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런 식으로라도 즐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시 본 영화에서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세상이 충분히 나 자신을 반겨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 – 가끔 부딪히는 고비도 ‘하쿠나 마타타’ 식으로 생각하던 나 자신이었다. 재미로, 가족과 함께 문화, 혹은 여가 생활을 즐긴다는 즐거움에 잔뜩 취했는지 영화의 재미에만 몰입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에서야 겨우 반성해보았다. 지금 나 자신이 다시 본 이 영화는 – 그 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래픽의 옥의 티들이 꽤나 보이기도 하고 – 지금 이 새벽에 나를 글을 쓰도록 이끌었으니 말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멍하니 모니터 앞을 보고 있었다. 양 귀에 꽃힌 이어폰에 의해 양 귀를 사정없이 때리던 영화를 보는데는 있어서 좀 저질의 소리들이, 그 진동들이 사라지자 나는 주변, 이 새벽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적막에 물들었던 것이었다. 적막은 마음까지 물들였고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멍한 상태에서 조금 벗어나 나 자신이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이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약간 시간이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는 도로 멍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이 영화를 어떻게 느껴버렸는지 스스로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문제의 근원은 주인공 ‘히컵’이었다. 문제의 부분은 작 중에 그가 친구에게 왜 그가 처음에 드래곤 투슬리스를 만났을 때 그가 교육받아 온, 자라온 그 사회의 룰에 반하고서 그를 죽이지 못했는지 말하는 그 장면이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투슬리스를 죽이려고 칼을 드는 순간, 투슬리스가 죽음의 위기 앞에서 겁에 떠는 모습으로부터 겁에 떠는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었어.
작 중에 절정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속한 사회의 통상적인 관념과 자신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종 자괴감에 시달려오고, 때로는 자포자기하고 스스로에게 애써 번명도 하며, 그런 것들이 견디기 불편하여 자신이 속한 체제와 비슷해지려고 억지로라도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유난히 그 순간 도드라져 보였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 상황에서 그는 투슬리스였고 나는 그가 아니었을까.
한 시절, 나의 지나간 유년기, 그리고 이미 현재의 관문을 통과하여 이제는 희미하게, 그리고 어렴풋하게 나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버려져 있던 순간들이 떠오른 것, 투슬리스와 나, 히컵. 그리고 이 새벽이 지배하는 적막 속에서 홀로 남겨진 나 자신… 이들은 나의 아픔이었고, 나의 사랑이면서, 나의 변명이었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 같이 밥을 먹던 동생이 앞에서 무슨 연예인 이름을 들먹였을 때 뭔 말인지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그 사람을 모르냐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상처받는 불쌍한 이 가슴과, 주변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공부의 원동력이 되어 버린 불쌍한 이 영혼과, 가슴과 영혼에 수많은 상처와 거짓말을 안고, 애써 숨기고 사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쉽사리 인정해주지 못하는 불쌍한 이 한 사람에 대한, 이 사람에 대한 아픔이자 사랑이면서 변명이었을 것이라고.
문득, 나도 길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살면서 수없이 생각해본 문제이기도 하다. 생택쥐페리가 말했던 그 ‘길들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마 이 영화에서 말하는 ‘길들임’과는 좀 다른 의미로 비춰질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을 그 ‘길들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길들임은 그 관계를 맺는 양 당사자들에게 양 방향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러기에 나는 히컵이었고, 드래곤이 있었을 뿐이니, 나도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나의 투슬리스를 만져보고 싶을 뿐인 것이다.
몰이해와 선동과 날조, 거짓말과 굶주린 한 무리들로 가득한,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누군가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찬, 그럼으로서 마치 이 새벽의 적막함이 오히려 정상적인 것이리라 생각되게 하는, 그 적막함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도록 하는 것들.
그래, 그러기에 나는 히컵이고, 드래곤이 있으니, 나는 그저 손을 내밀어 그의 날개를 살포시 잡아 조금이나마 옆으로 비키게 하여, 조금 있으면 뜰 것인 햇살의 빛줄기를 다시 바라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드래곤을 길들여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