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22. 「법」 앞의 『내면화된 금지』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
그리고 한병철의 ‘우울사회’의 동형성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그러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능하오.”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열려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서 있어서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히고 문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그것을 본 문지기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 보오. 하지만 내 힘이 장사라는 걸 알아두시오. 게다가 난 말단 문지기에 지나지 않소.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서 있는데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오. 나조차도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힘겨울 정도라오.” 시골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의자를 주며 앉으라고 한다. 그 위에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문지기는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여전히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그 시골 사람은 여행을 위해서 많은 것을 장만해 왔는데, 문지기를 매수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용한다. 문지기는 주는 대로 받으면서도 “나는 당신이 무엇인가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려고 받을 뿐이오.”라고 말한다. 수년간 그는 문지기를 거의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우연에 대해서 무작정 큰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자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었고 문지기에 대해서 수년간이나 열성적으로 관찰한 탓에 모피 깃에 붙어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 자기를 도와서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는 눈이 침침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법의 문에서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서 그 모든 시간에 대한 모든 경험들이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졌다.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이제 굳어져 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숙하게 숙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키 차이가 그 시골 남자에겐 매우 불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뭘 더 알고 싶은 거요?”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 군요.” 시골 남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그런데 왜 지난 수년간 저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 가까이 왔음을 알고 희미해진 그의 귀에 들리도록 소리친다. “이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카프카가 1919년에 인류에게 남긴 『법 앞에서』라는 글은 그 짧은 분량과는 전혀 반대되는 양의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 글을 대학 수업의 일환으로 처음으로 읽게 된 나도 단순히 한 번의 독해 시도로는 글의 전의(全意)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다른 이들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분량과는 상응하지 않는 엄청난 논의의 양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카프카의 이 『법 앞에서』라는 글에 대한 해석을 현대 문명의 주요하고 편리한 산물 중 하나인 인터넷을 통하여 찾아보면 어떤 해석은 ‘문지기가 시골 남자를 속였는가’ 아니면 ‘문지기가 속았는가’에 집중하거나, ‘문지기를 비판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해석은 혹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시골 남자’라는 서사 구조에 집중하여 “금지에 맞서지 않아 결국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 자”에 대한 비판으로 글을 읽어내기까지 한다. 물론 이들 해석은 카프카의 이 난해한 글 자체가 가진 본연적 특성인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건대 모두 틀린 것은 아니며 나름의 논리와 발견을 갖추고 있는 중요하고 또한 훌륭한 해석들이다. 하지만 나는 역시 오늘도 제 마음대로 서사 구조를 비틀어 보고 또 이상한 시각들을 가져다가 붙여보기를 좋아하는 특이한 독자로서 이 수많은 해석들의 반열에 올릴 또 하나의 해석을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충분히 다른 해석에서 논의되었다고 믿는 글의 중간 부분을 제외하고, 글의 말미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다음의 부분이 이 글 전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연상시키는지를 차례로 짚은 후, 한병철의 『우울사회』라는 글의 일부에서 획득한 내 나름의 시각을 소개할 것이며 마침내는 이 카프카의 『법 앞에서』가 사실은 “내면화된 금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는 것으로 글을 맺을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그의 머릿속에서 그 모든 시간에 대한 모든 경험들이 여태까지 문지기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단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졌다. 그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한다. 이제 굳어져가는 몸을 더 이상 똑바로 일으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그에게 몸을 깊숙하게 숙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키 차이가 그 시골 남자에겐 매우 불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뭘 더 알고 싶은 거요?” 문지기는 묻는다. “당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군요.” 시골 남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 그런데 왜 지난 수년간 저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문지기는 그 시골 사람이 이미 임종 가까이 왔음을 알고 희미해진 그의 귀에 들리도록 소리친다. “이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법 앞에서』의 마지막 부분, 서사의 아이러니함의 극대화
많은 해석이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해석할 때에 문지기와 시골 사람의 관계에 주목한다. 대부분의 해석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의 직관이 이 글에서 발견하기도 하는 사실이기도 한 ‘문지기에 의하여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 시골 사람’이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에 의하여 ‘법’이라는 문으로의 입장을 거절당한다. 문지기는 시골 사람의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 실현, 혹은 욕망에 대한 금지의 주체이다. 그는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가지고 있는 위압감을 가진 존재이고, 그 위압감으로 하여 시골 사람이 스스로 ‘법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좌절시키게 하고 문 앞에 앉아있도록 하는 주체이다. 물론 이 문지기에 의하여 시골 사람이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느냐는 여러 해석에서도 갈리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문지기가 시골 사람의 입장을 가로막은 어떤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문지기는 이렇게 위압감과 중압감으로 시골 사람의 입장을 가로막는 원인을 제공하지만, 이러한 그의 위압감과 중압감이라고 하는 것이란 작품의 마지막의 문지기의 고백을 통하여 완벽하게 상실되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 부분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 부분에 도달하기 전 독자는 문의 입장이 좌절된 시골 남자가 적어도 부당하게 입장이 거부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문지기의 위압감과 중압감, 금지는 정당해진다. 그가 문에 입장하기 위한 자격 요건을 갖추지 못한 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어렴풋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전적으로 입장의 자격 요건이 되지 않는 자들의 입장을 막는 것을 임무이자 또한 존재 의의로 하는 자이므로 따라서 문지기의 충격적인 고백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문지기의 입장에 대한 ‘금지’를 그의 의무에 대한 성실로서 판단할 뿐이지 부당한 어떤 조치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러한 우리 독자들의 믿음을 작품의 말미에서 문지기는 완벽하게 배신하고 만다. 문지기는 사실 그 문은 시골 남자만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 혹은 고백해버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 받을 수 없다오.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오. 이제 가서 문을 닫아야겠소.” 이 순간 우리에게서 서사구조에 대한 아이러니함은 분수처럼 터져 나오며 문지기는 모든 위압감과 중압감을 잃고 또한 ‘부당하게 입장을 가로막은 자’라는 위치로 떨어진다. 시골 남자가 사실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입장을 거부당한 문에 대한 아주 명백한 입장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이제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게 강요했던 모든 금지들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며 또한 위선적인 것이고 월권적인 행위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지기의 이중적 행태 혹은 월권적 행위는 우리 독자들이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해석할 때 문지기와 문의 역할과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련의 강제력을 가진다. 이 아이러니함이 독자가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려는 저자 카프카가 장치한 가장 훌륭한 글의 장치로 보인다. 따라서 이 즈음하여 드는 그의 의도가 이 마지막의 아이러니함의 극대화 속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직관은 틀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이러한 맥락 속에서는 시골 남자의 진입을 금지한 주체인 ‘문지기’와 그가 지키려고 했던 그리고 또한 시골 남자가 들어가려고 했던 ‘문’의 의미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볼 필요는 의무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문지기’와 ‘문’
우선 둘 중에 우선적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문’이다. ‘문지기’는 ‘문을 지키는 자’로 정의되므로, 즉 그 정의에 ‘문’이 포함되어 있고 ‘문’으로 정의되는 존재이므로 ‘문’을 정확히 규명하지 않고서는 ‘문지기’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의 의미는 자명해보인다. 우선 작품에 등장하는 정보에서 확인되는 사실을 나열하자면 문은 ‘시골 남자가 들어가고자 하는 대상’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절실히 바라는 대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절실히 바라는 대상’으로서의 ‘문’이라는 추론은 임종 직전 시골 남자의 “모든 사람들은 법을 절실히 바랍니다”라는 문장과 작품에서의 문과 법의 동일시를 생각해보면 합리성을 꽤 가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많은 해석들이 시도하는 이 표면적인 사실에 대한 기술에 있어 프로이트 혹은 심리학적인 용어로 몇몇 용어를 대체하는 기술을 사용하면, 이제 ‘문’은 ‘시골 남자와 모든 사람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 용어의 마법 같은 대체를 유지하면서 우리는 ‘문’을 정의하였으니 이제 ‘문지기’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해 볼 수 있다. 즉 문지기는 작중 시골 남자의 ‘문’으로의 진입을 차단하는 존재였으므로, 이제 금지라는 심리학 용어를 빌려와서 ‘시골 남자의 욕망을 금지하는 존재’라고 정의내려도 될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잘 알려진 욕망 – 금지의 대립 구도 하에서의 해석이 완성된다. 즉, 문지기가 시골 남자의 진입을 차단하는 행위를 금지가 개인의 욕망을 차단하는 서사로 읽는 틀이 여기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위 욕망 대 금지의 틀은 많은 해석에서 등장하는 틀이지만 근본적으로 한 가지, 바로 ‘문지기’라는 존재에 대한 이중성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문지기는 시골 남자를 금지하는 존재, 즉 진입을 차단하기도 하는 존재이지만 그 존재의 의미가 바로 시골 남자에 의하여 부여되기도 한다는 점이 바로 그 이중성이다. 작품의 말미의 문지기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사실, 그 문의 주인이 시골 남자였다는 고백은 다른 의미로는 문지기가 사실 그의 주인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바와 다를 것이 없다. 문은 시골 남자만을 위하여 존재하였고, 시골 남자가 죽으면 문지기는 “문을 닫아야만” 하므로 문지기는 다름 아닌 시골 남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하여 충분하게 해명하고 있지 못하는 욕망 대 금지의 틀은 한계가 분명한 해석이다. 문지기의 이중성이 명백하게 어떤 의미를 파악하는지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글에 숨은 또 다른 의미의 차원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지기의 이중성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문지기가 사실은 시골 남자에게 종속된, 혹은 예속된 존재이며 동시에 시골 남자가 죽기 직전까지도 그의 입장을 금지하는 존재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 것인가? 그러한 이 이중성의 혼란을 해명하기 위한 열쇠로서 나는 이제 한병철의 『우울사회』 속의 성과주체가 어떤 존재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병철의 『우울사회』 속 ‘성과주체’
한병철이라는 사람은 특이하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철저하게 이과적인 한국인이었으나 그는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홀연 떠나서는, 가톨릭 신학과 독일어문학, 철학을 공부하고는 하이데거, 데리다 등에 대한 논문을 통해 학위를 받고 철학 교수가 되어 독일의 베를린 예술대학교, 바젤 대학교 등에서 재직했다. 이러한 특이한 행적을 보여온 그여서 그런지, 그가 저술하고 대한민국 사회에는 2012년에 출판된 『피로사회』라는 저서에서 그는 근대후기 사회를 ‘성과사회’라는 용어로 규정짓는다. 그에게 있어 지금의 사회란 ‘성과사회’이며 사회의 발전상이란 그와 대립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으로 이해된다.
그의 ‘성과사회’는 간단히 말하자면 그 명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짐작대로 ‘성과가 강조되는 사회’이기도 하나, ‘규율사회’와의 아주 명백한 차이점으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성질에 의해서 규정지어지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금지의 논리 – 즉, 이를테면 과거 사회를 지배하였던 유교에서의 다양한 금지의 논리 등 – 가 지배하는 ‘규율사회’와 달리 ‘성과사회’에서는 그 ‘규율사회’에서의 금지의 논리가 변형되어 자본주의 체제가 강조하는 ‘성과’의 극대화라는 명목 아래 그 금지가 사실 개인에게 ‘내재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성과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과거 사회에 속하던 개인들을 옭아매던 여러 금지의 명시적 규정들을 철폐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동시에 할 수 없음을 할 수 있음으로 긍정화시켰지만 이것은 사실 눈속임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저 그 ‘규율사회’를 규율하던 명시적 금지의 논리들이 그저 ‘성과’라는 미끼를 토대로 개인 속으로 포함되게 해버렸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이다.
한병철은 지금의 사회의 모습을 ‘성과사회’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한병철의 이러한 주장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활 모습에서 찾아보기로 하도록 하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금지가 무엇이 있는가? 사회 전체를 규율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법은 하나의 예시가 물론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법은 ‘성과사회’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긍정성을 얻은 개인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침으로서의 금지와 규제이므로 무언가 규율사회의 그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성격의 금지와는 조금 다른 성격의 것이다. 즉, 규율사회의 것이 변형되어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법이 명백히 아니다. 그렇다면 도덕적 관습이 바로 이것인가? 아니다. 도덕적 관습은 물론 간혹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까지도 있지만 이것은 ‘규율사회’에 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에 숨은 금지의 논리는 ‘규율사회’에 없던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였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도덕적 관습은 ‘규율사회’의 그 금지들이 전환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는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법과 도덕적 관습 등을 제외하면 이제 개인을 규제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욕망을 금지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잠시 우리 모두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하자.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우리 스스로를 지배하고, 금지하고, 규제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우리의 안에 있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과 사회의 개인, 다른 말로는 ‘성과주체’라고 표현하는 이 주체를 지배하는 존재는 바로 ‘성과’를 위한 무한한 자기-수탈의 강요이다. 사회에서 강요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 동시에 강요되고 있는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되는 이 성과사회의 논리를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태만을 사실상 악과 동일시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왜 태만한 인간을 우리는 비난하게 되었는가? 취업을 하지 않고 방바닥에 누워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백수들, 그리고 일본 그리고 그 이외의 국가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한 히키코모리(引き籠もり)1사회 생활을 극도로 멀리하고, 방이나 집 등의 특정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 그러한 현상 모두를 일컫는 신조어.들이 오늘날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딱 그렇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된 “노력해야 한다”라는 당위감으로 무장한 단어, 혹은 이러한 뜻에서 오늘날 청년 세대 사이에서 비꼬는 용어로 줄곧 사용되는 “노오력”이라는 단어의 숨은 저의에 깔려 있을 것이다. 이 “노력에 대한 집착”은 결과적으로 자기 개선의 의지의 한 형태로도 읽을 수 있겠지만, 가장 정확한 대체 표현이란 “성과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압적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날의 개인들은 이를 위하여 학교에서 가서 기술과 지식을 섭취하고 대학의 졸업장을 따내며 이력서를 제출하지만 그 끝은 우울이나 허무를 연신 내뱉는 것이며 심지어는 이들을 내뱉다가 목에 걸려 숨이 막혀 죽고 만다. 우리는 성과라는 논리에 지배되어 우리 스스로를 지배하고 금지하고 조절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끝없이 비판하여=자기수탈하여 스스로를 한없이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다. 한병철이 주장하는 대로, ‘규율사회’의 어떤 규율의 일체는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형태를 변환하여 각 개인을 감염시켜, 금지의 논리로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우리가 앞에서 찾던 그 변형된 금지란 바로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의 성과를 위한 끝없는 자기-희생 또는 자기-수탈인 것이다. 또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비성과주체적 삶에 대한 금지”인 것이다.
‘성과주체’와 ‘시골 남자’의 동형성: 『내면화된 금지』
이로써 나는 비로소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해석은 한병철의 『우울사회』의 ‘성과주체’와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동형성을 설명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카프카의 논란의 글에 대하여, 우리의 ‘문지기’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 분석틀인 욕망 대 금지의 대립은 이 이중성을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고 나는 지적한 바가 있었다. 이제는 그렇다면 그 분석틀을 사용한 사람들의 야유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차례일 것이다. ‘문지기’의 이중성까지 포함하여 ‘문지기’를 어떻게 설명해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명백한 과제이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문지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문지기’는 분명 시골 남자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은 존재이다. 그러나 그 ‘문’은 시골 남자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혹은 시골 남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문지기는 동시에 시골 남자에 예속된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이중적인 존재인 ‘문지기’로 인하여 시골 남자는 죽을 때까지 문에 도달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때로는 그가 가진 것을 동원하여 문지기를 매수해보려고도 하지만 결국 그가 도달한 결말이란 죽기 전까지 도달할 수 없는 ‘문’이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게 예속된 존재였다는 점, 그리고 결말은 도달할 수 없는 문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핵심에 의거하여 시골 남자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법 앞에서』를 보는 시각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 등장인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나는 ‘시골 남자’와 ‘성과주체’가 사실 동형적이라고 제안하는 바이다. 즉, ‘시골 남자’는 ‘성과주체’의 투영Projection이라는 시각을 제안한다. 이 시각은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앞에서 마주한 ‘문지기’와 ‘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뒤이은 과업으로 삼아 이제 새로운 해석을 완성시켜보도록 하자. ‘문지기’에 대한 ‘시골 남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금지의 존재’라는 우리의 관찰과 모순점의 발견은 ‘시골 남자’가 ‘성과주체’의 투영인 이상, 앞의 한병철의 『우울사회』의 내용을 다루면서 확인한 성과사회 속 ‘성과주체’의 변형된 금지의 논리인 ‘성과를 위한 끝없는 자기-수탈의 논리’가 된다는 점에서 해소된다. 그러면 ‘문’은 무엇이 되는가? ‘문’은 ‘문지기’와 동형 관계에 있는 자기-수탈의 논리가 가로막는 것이므로, 자기-수탈로 인해 계속 피로해질 수 밖에 없는 성과주체가 도달할 수 없는 것, 즉 피로의 길을 걸어가는 성과주체가 걸어가는 방향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 이른바 만족 또는 행복에 해당하거나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서사에 대한 완성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이 이야기는 비성과주체적 삶에 대한 금지에 의하여 결코 만족이나 행복 혹은 이와 유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성과주체를 그린 것이다.” ‘시골 남자’와 ‘성과주체’는 공통적으로, ‘문지기’로 표현되는 ‘내면화된 금지’에 영향을 받고, 나아가서는 지배되는 존재라는 것이 나의 핵심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시골 남자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문지기 때문이다는 해석 그리고 문지기 때문이 아닌 시골 남자 때문이라는 기존의 두 상반되는 해석은 사실 둘 다 옳은 것이다. 다만 시골 남자는 문지기의 금지에 의해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맞지만, 동시에 그 문에 자신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것 또한 맞다. 시골 남자가 문에 들어가려면 사실 문지기를 쫓아내야 하는데, 그는 이미 문지기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성과주체’가 이미 그 안에 내재된 ‘자기 수탈의 논리’에 길들여져 끝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비극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시골 남자도 사실은 문지기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문지기는 사실 시골 남자의 일부여서, 시골 남자의 거부권 행사는 결국 자기 자신의 일부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승화되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이제 ‘자기 수탈의 논리’에 길들여진 시골 남자는 그저 문 밖에 앉아 있다가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카프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금지와 욕망의 대비가 아닐 수도 있다. 카프카는 어쩌면 그가 살아가던 그 시대에도 여전히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던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의 개인 속에 ‘내면화된 금지’와 그로 인하여 고통받는, 그리하여 결코 ‘법’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궁극의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없는 개인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글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과 그에 따르는 다양한 문학적 향유에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이쯤에서 다시 다음의 문장들을 다시 곱씹어보면서 ‘시골 사람’으로부터 우리의 모습을 향유해보도록 하자. 다음의 문장들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 ‘향유’할만한 긍정적인 것은 못 되는 것이 비록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문장을 향유하면서, 그리고 카프카가 그리는 ‘시골 사람’이라는 관통을 향유함으로써 무언가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가치 하나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 시골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 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 문지기가 그에게 의자를 주며 앉으라고 한다. 그 위에 그는 여러 날 여러 해를 앉아 있다. 그는 들어가는 허락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자주 부탁을 하여 문지기를 지치게 한다. 문지기는 가끔 그에게 간단한 심문을 한다. 그의 고향에 대해서 자세히 묻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지체 높은 양반들이 건네는 질문처럼 별 관심 없는 질문들이고, 문지기는 마지막엔 언제나 그에게 여전히 들여보낼 수 없다고 한다. (…) 수년간 그는 문지기를 거의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다른 문지기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문지기만이 법으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방해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처음 몇 년 동안은 이 불행한 우연에 대해서 무작정 큰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늙자 그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그는 어린애처럼 되었고 문지기에 대해서 수년간이나 열성적으로 관찰한 탓에 모피 깃에 붙어있는 벼룩까지 알아보았으므로, 그 벼룩에게 자기를 도와서 문지기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내 그는 눈이 침침해진다. 그는 자기의 주변이 더 어두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의 눈이 착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어둠 속에서 법의 문에서 꺼질 줄 모르는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
오늘의 사족
그리고 오늘은 이 사유(思惟)에 대하여 한 곡의 노래로 사족을 달까 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음악 장르를 찾아보고 익히고 있는데, 우연히 발견한 다음 곡의 가사가 사유(思惟)를 관통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사회 생활을 극도로 멀리하고, 방이나 집 등의 특정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 그러한 현상 모두를 일컫는 신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