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54. 부조리한 글쓰기

사유 #54. 부조리한 글쓰기

2025-07-11 0 By 커피사유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Cafe 커피사유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또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
다시 한 번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산정에서 시지프는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응시한다. 밀어올렸던 바위는 이제 그가 출발했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세계는 당초의 위치로 회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는,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기꺼이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돌아가는 이 영원회귀, 세계는 변한 것 없으면서도 모두 변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주 어릴 적 나는 그날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그림일기로 기록하곤 했다. 지금 그 기록들 그러니까 큼지막한 네모칸 안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새겨진 시간들을 음미해보니, 당시의 나는 글쓰기란 일종의 습관과도 같아서 그저 일상을, 당일의 사건들을 나름대로의 술어로써 되짚는 의식과도 같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이를 꽤 먹은 지금도 솔직히 다르지는 않다. 여전히 나에게 글쓰기는 일상적 사건들을 나름대로의 어휘와 문장들을 동원하여 돌이켜보는 하나의 의식이다. 줄이 그어진 종이 위, 까만 색료로써 정해진 형태의 기호를 휘갈겨 흩어지려는 기억들을 붙잡고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그런 의식.

그렇다면 글쓰기란 단지 일종의 의식적 지속에 불과한 것일까? 과거의 나라면 분명히 그 대답은 ‘예’이리라. 지금 나의 대답은 무엇이냐고? 마찬가지로 나는 ‘예’라고 대답한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오늘의 나는 그렇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동어 반복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으냐고? 물론 그렇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그렇게까지 오래 되지 않은 과거, 나는 후배에게 내가 글쓰기에 대해 가졌던 인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함축해 보냈다.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내는 것,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문단과 문단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 뒤엉켜 있는 머릿속 인상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것.”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나는 하나의 통일성 부여로 보고 있는 셈인데, 실로 그러하다. 어느 글이든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기호들은 단일하게로는 별다른 함의를 가지지 못한다. 이 문장에서 만약 ‘문장’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텅 빈 종잇장 한가운데에 따로 떼어 놓고 본다고 상상해보자. 그 광경은 나름대로 강한 인상을 남길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얻는 종류의 의미는 태동하지 못한다. 단어가 지시하곤 하는 현실의 사물들이, 구체적인 실재자들이 추상화되어 탄생하는 개념들이 으레 그러하듯 어떤 것도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수 없다. 존재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존재는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이 있음을 세계에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이 대상과 맺는 이 관계는 어떻게 지각되는가? 심리학적 연구나 인지과학으로 들어간다면 그 유명한 게슈탈트 실험 ― 즉 같은 것도 달리 볼 수도 있음을 보인 실험 ― 을 언급하게 되겠지만, 우리의 논의는 글쓰기에서 출발한 것이니 여기서는 그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로 하자. 멀리 갈 것도 없이 깊은 인상을 남긴 문학 작품 하나를 떠올려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시간차을 두고서 여러 번 읽은 작품이 적당할 것이다. 나의 경우는 알베르 카뮈가 남긴 《시지프 신화》를 생각하게 되는데, 처음 글을 읽었을 때와 지금 글을 읽은 경험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시지프 신화》를 읽은 것은 아마 중학교 저학년 시절,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는 않았던 어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지어진 작은 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 대한 나의 회상이 이 책은 시지프 신화라는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가 적힌 책이라고 결론내렸다는 사실 외의 그 다른 무엇도 발굴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나는 텍스트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시지프 신화》를 읽은 대학 2년차,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 반 전 즈음은 꽤 달랐다. 고등학교 때 그 이름 그리고 문제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몇 구절만을 읽은 것이 전부였던 나는 니체에 이끌렸고, 그의 계보가 카뮈로 이어진다는 언질을 어느 주석서에서 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그해 봄, 정확히 2023년 3월 6일 나는 책의 첫 날개에 작게 써둔 메모대로 “카뮈가 니체의 연장인지 반대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그의 문장들을 펼쳤고, 처음으로 그의 철학의 핵심이라 할 〈부조리〉 속으로 휘말리고 말았다.

기억은 바로 이 시점을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한다. 니체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던 나의 인간 이성과 합리에 대한 믿음들이, 중학교 때부터 철저한 미덕이요 교양 · 인간됨 그 자체로 여겨왔던 도덕률들이 카뮈의 문장들에 치명상을 입어 스스로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완전히 주저앉고 만 것이다. 그즈음 연구실에서 진행하던 일들이 상당히 지지부진했다는 우연까지 겹쳐, 처음으로 나는 최악의 실존적 위기에 직면했다. 누군가는 흔한 청춘의 방황이요 잠깐의 사건으로 분명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 추억될 그 무언가라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종종 농담 삼아 (그러나 동시에, 진심으로) 이야기하곤 하듯 삶에서 죽음과 그 정도로 가까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때 세계는 눈 앞에서 갈갈이 찢겨 나갔다. 감정적인 파도에 휩쓸려간 나는 기억과 인상들이 이곳저곳에 부딪쳐 긁혀 나가는 고통 속에서 가시덩쿨처럼 아프고도 단단한 무언가들로 얽혀있던 내 트라우마들을 발견해냈다.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엄습해왔고 문제의 장면들이 끝을 모르고서 되풀이되는 난폭한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허우적댔다. 그러나 폭풍은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마지막 조각마저 앗아갔는데, 그 트라우마들이 지금의 나를 규정짓는 것 같다는 불편한 관찰이 그만 치명타를 날리고 만 것이다.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그 관계를 끔찍이도 아끼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청천벽력처럼 맞닥뜨린 가정이 분해될 위기가 닥친 직후부터였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해서 학문이라는 길을 천직처럼 믿게 된 출발점이란 다름아닌 이방인으로써 감내해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외로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책을 집어든 그 뒤였으니까.


한 사람의 인식이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러니까 의심할 여지 하나 없이 그의 존재를 단단히 지탱한다고 여겨졌던 기둥들이 실은 하나의 도망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에 이르게 된다면, 제아무리 단단한 암반이라도 일순간에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뻘로 전락하고 만다. 그가 쌓아올린 세계란 이 무너져버린 지반 위에 세웠던 기둥을 토대로 한 것이었기에 이제 그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 극심한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서 있는 막연함과 낯섬으로 빠져들게 된다. 카뮈가 저술한 대로 이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존재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 지점, 이 〈이방인〉의 순간 인간은 시지프의 산정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올해 세 번째로 읽은 《시지프 신화》는 완전히 색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개인적인 체험이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그 씨앗은 있었으되 그 뿌리가 정신 속으로 깊이 침투하지 못한 시점들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구절에 불과했던 것들이 새로운 존재들로 태어나 내 앞에 펼쳐졌다.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헤매던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니체와 그의 영원회귀에 대해 애절하게 물고 늘어진 나날들로 인식을 달리 할 수 있었기에, 즉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것들과 그에 후속되는 잔인한 폭풍우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는 스스로를 재인식할 수 있었기에 카뮈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시지프스가 내려가는 그 길이 비참하게 보이던 시간을 지나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대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임을 깨닫게 된 바로 이 대전환의 순간, 나는 마침내 굴러떨어진 바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합리와 설명을 꿈꾸며 무너진 세계에도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는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와 작품들 속에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인간의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시지프 신화》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80여년 전 카뮈의 손을 떠난 당시 그대로의 텍스트이며 문장들도 동일하다. 그러나 세 찰나에 걸친 기나긴 독해의 역사로부터 위대한 반복을, 즉 또다시 붕괴해버릴 해석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직조해내는 인간을 떠올리는 오늘의 나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보게 된다. 이처럼 재해석 내지는 재탄생의 순간을 겪음으로써 글은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세계는 모조리 전복될 수 있다. 동어반복이, 다시 원래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문장들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이 행간을 읽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경험에 비추어 나는 글쓰기를 과거와 동일하게 의식의 지속, 일상적 사건들을 나름의 술어로 되짚는 바로 그 의식의 지속이라 쓰면서 그렇지 않다고도 동시에 쓴다. 글쓰기란 그 재료가 한 사람이 겪은 일들과 그것에 대한 인상 및 추론들로 구성되지만, 작가는 글에서 사건 · 정동 · 이야기의 배치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와 경험을 다시 한 번 새로운 관계 속에 세운다. 하나하나로 분해된다면 의미를 상실해버릴 기호들을 하나의 실로 연결하며 그는 “언어라는 형식체계에서 자신만의 합계를 낸다.” 삶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인간은 그 몸짓을 글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모조리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운명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을 직시하는 인간은 글쓰기 일체를 통해 이 위대한 인간의 몸부림을 그려내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다. 말 그대로, “문단과 문단 사이의 배치 관계, 문장과 문장의 배치 관계, 단어와 단어 사이의 배치 관계” 이들 모두를 통해서.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산정에서 시지프는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응시한다. 밀어올렸던 바위는 이제 그가 출발했던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세계는 당초의 위치로 회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지프는, “보기를 원하는 장님 그리고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기꺼이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돌아가는 이 영원회귀, 세계는 변한 것 없으면서도 모두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