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8. Modern Humanity
사유(思惟)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일상 속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연재하는 공간이자, 커피, 사유(思惟)의 중심이 되는 공간입니다.
이번 글은 경남과학고등학교 문학 2020학년도 수행평가로 진행되었던 掌편소설들 중, 눈, 귀, 입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고 든 생각을 기술하였음을 서두에 알립니다. 저작자의 동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의 원문을 제공해드릴 수 없다는 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가끔 나는 어린 시절의 향수가 떠오를 적이면, 한 때 초등학교 숙제로 유행을 탄 덕에 내가 만난 선생님이란 선생님이면 다 방학 숙제로, 혹은 그냥 주간 숙제로 내어 주시던 일기 쓰기를 하도 했던 탓에, 중학교 2학년 즈음까지 쭉 이어지다가 결국은 끊기고야 만, 나의 과거의 기록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종종 가진다.
일기장을 보면 하도 부끄러운 기억도 많고, 뭔가 슬펐던 기억도 많았던 것 같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행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이러한 순간들이지만, 나 자신이 매번 일기장을 들추어 볼 때마다 항상 빠지지 않고 보는 글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당시의 나 자신이 용감하게도 다음의 문장을 새겨 넣은 어느 가을날 새벽에 썼던 일기이다.
슬프다, 한편으로는 원통하기도 하다. 나는 기계 따위나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지난 2년, 경남과학고등학교에서 미친 듯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겠다고 버둥거리던 때에는 이 문장은 점점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이 문장을 다시금 떠올린 만한 자극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문장을 떠올려보았자, 그러한 회의를 가져 보았자 눈 앞의 경쟁 상황 속에서 낙담에 빠질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때에는 극단적으로 회의적이면서 비판적인 아이라는, 타인이 본 (다소 오해가 많은) 나 자신을 규명하던 이 문장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다가, 결국 내 어딘가 한 귀퉁이에 세월의 흔적을 담은 채로, 구겨진 채로 체념한 듯 자리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새벽에 읽은 눈, 귀, 입이라는 내 친구들의 선물로 인하여 다시 제 자리를 찾아 과거의 나를 다시 되돌려주는 듯 하다.
가볍게 쓰여졌든 아니든, 어떤 글을 볼 때 생각보다 상당히 비틀어보고 내 마음대로 보기를 좋아하는 일종의 고집쟁이 독자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나는 이번에도 역시 이 掌편소설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는 습관을 피할 수 없었다. 소설을 원래 의미 내에서 해석하는 것도 문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내 생각은 ‘나에게 닿지 못하는 예술은 예술 따위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왜냐하면,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는데, 감동이라고 함은 엄격하게 정의되자면 한 인간의 몸과 마음가짐을 바꾸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함이니까, 내가 감동하지 못하면 그것은 예술이 아닌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작품을 볼 때 일단 ‘나 자신’과 꼭 연결지어 보아야 뭔가 직성이 풀리는 나로써는 어쩔 수 없기는 했다. (그렇다.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 친구들이 쓴 이 掌편소설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한 거짓된 루머로 인해 고통받는 현대인’을 그린 소설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치마를 입는 남자’라는 조그마한 사실에서 출발하여 ‘여자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있는 남자’, ‘여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 ‘게이’까지 이르는 악소문의 스노우볼을 제대로 굴려가는 내용이 중심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 자신의 이목을 끈 내용은 불행하게도 이러한 ‘악소문의 스노우볼’이라기보다는 조금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는 다문화, 세계화를 외치지만 정작 타(他)를 받아들일 준비부터 되지 않았다.
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말인가.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마치 스스로의 생각과 가치를 고집하고, 다른 이들의 가치와 관점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해석하는 ‘타를 받아들이다’라는 표현이라는 것은 굳이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용어는 아니다.
어떤 사회나 집단이 ‘이질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 자신이 생각하건대 ‘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이 정의하는 아(我)와 타(他)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안과 밖을 구분짓는, 우리의 것, 너희들의 것 이렇게 선을 긋는 행위의 결과로써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차원이든 집단의 차원이든 아, 그리고 타. 이 두 단어는 모두 고유의 의미를 가진다.
나의 친구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루머’의 발단은 내용 전개를 보면 어떤 한 남성이 편해서 자신의 누나의 치마를 가끔 입고 다니는 것에서 비롯된다. 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당사자와는 달리, 그를 둘러싼 ‘회사’라는 사회의 반응은 냉담하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통념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한 개인을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는 듯 하지만, 점차 이러한 타(他)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인식은 결과적으로는 차별, 그리고 사회적 격리(혹은, 흔히 말하는 왕따)로 이어진다.
솔직하게 나 자신도 뜨끔했던 것 중 하나는, 치마를 입고 다니는 남성을 상상하였을 때 아직도 속에서 무언가 꺼림직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최근 들어서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들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고, 나 또한 그들에 대해서 자유론적인 관점으로 별 상관없다고, 그들의 자유대로 사는 것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의 입장을 처음부터 유지하고 있지만, 이 꺼림직한 어떤 것은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행동하고 있고 입장 표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그리고 아프리카 많은 부족들이 치마 형태의 의복을 입는다는 것도 사회 시가에 배웠지만, 성 교육 시간에도 들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이러한 관념이 내 머릿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지하고 있되, 뿌리를 뽑지 못한다는 점에서 나는 결과적으로는 위선자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근데. 나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규명하고 나니까 뭔가 오기라도 올라오는지, 아니면 애써 구태여 변명이라도 해 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괜스레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이유를 찾고 싶었다. 물론 이러한 관념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뿌리를 결코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도 문제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고려해보면 뭔가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답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슬프다. 한편으로는 원통하기도 하다. 나는 기계 따위나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그들에게 동화되고 있다.
그 해답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한 때 획일화적이라고 지적한 교육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기본 성질에서 출발했다. 교육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는 기본적으로 국가적인, 혹은 사회적인 시스템 아래의 것으로 일련의 사회에서 원하는 인간상을 양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방침이라는 점에서, 정부 혹은 관리자에 의한 전면적인 통제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교육부라는 별도의 부처를 설치하고 장관을 앉혀 대한민국을 매년 뜨겁게 달구는 대입 문제와 수능 출제 등, 혹은 교육 과정의 결정과 편제 등을 담당하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통제적인 교육은 결과적으로는 결코 다양성을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 해답에 도달하고자 한 나의 주요한 결론이었다. 무슨 말인지 조금 더 풀어 이야기하자면, 이를테면 제n차 교육 과정의 역사 교과서에서 최근 정부에 대한 평가를 수록한다고 생각해보자. 많은 이들의 정치적 이념 사이의 갈등으로 하여 이 수록에 대한 문제가 사회 전체로 공론화되어 각종 반발과 갈등을 낳을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일부 단체들은 얼마전의 정부에 대하여 정의롭고 당당한 정부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어떤 세력들은 부패하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정부라고도 평가될 수 있다. 이러한 두 세력의 견해는 결과적으로 전 정부가 보여준 양면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인데, 지면이 한정되어 있는 교과서에 이들의 의견을 모두 수록하면서 그 설명까지 붙이기에는 너무 양이 방대해질 위험도가 크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과서를 만들 적에는 양 측에서 모두 문제가 되지 않을만한 일반적인 견해를 들고 와서 대충 수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나온 교과서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그 문제를 둘러싼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부인될 수 없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세계는 실세계의 단편에 불과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주의를 그렇게 기울이지 않는 학생이라면 당연하게도 이 문제, 혹은 주제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을 간과, 혹은 무시하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단편적인 사례로 들어 설명하였듯, 이처럼 교육이라는 것의 기본 성질 자체는 결과적으로 피교육자들의 ‘획일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의 모순을 결코 해결해낼 수 없다. 다양성의 존중은 결과적으로 현재 진행 중인 교육의 기본적인 형태인 ‘표준화된 교과서와 선생’,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의 생활’이 동반되는 형태 내에서는 그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본질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아는 현재의 시스템 내에서는 애초에 우리가 주장하고, 변화를 모색하면서 나아가야 한다고 소리지르고 있는 ‘다함께 더불어’라는 사회로 결코 나아갈 수 없음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세계화,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기존 교육 시스템에 ‘다문화 교육’, ‘글로벌 시민 교육’이라는 추가적인 교육만을 도입하는 현재의 추세는 이러한 점에서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심장이 주된 병의 원인임을 알면서도 심장에 관한 수술을 고려하기보다는 심전도계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돌팔이 의사와 같은 행위이다. 내 스스로가 고찰하였듯, 기존 시스템 내에서 그 본성이기 때문에 결코 그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방침을 도입하지 않는 이상 결코 해결될 수 없는 ‘획일화’의 문제는 지금의 체계 내에서는 영원할 수 밖에 없고, 그 비극으로 인하여 양성되는 수많은 ‘획일화된 인간’들은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기본 통념에 종속되어 다양한 생각을 수용할 능력은 이미 박탈당한지 오래라, 작 중에 등장하는 ‘치마를 입은 남자’를 결국은 퇴사에 이르게 하는 수많은 루머와 차별, 그리고 사회적 격리를 유발시켰던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근대(Modern)의 인간성은 그 근대 교육의 자기 한계 때문에 이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없는 특이점에 이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