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학생의 사회
최근 나 자신은 나의 학교인 경남과학고등학교와 한국지구과학올림피아드의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적지 않게 실망하고, 또 그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괴로워했으며,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또 한 번 괴로워했고, 이 문제를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거대하고 결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내가 괴로워했던 이유
내가 왜 그 많은 학생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괴로워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다소 어렵다. 분명히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라는 것은 그 변화무상한 특성상 정말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굳이 설명을 하자면, 우선 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하여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나는 교육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블로그의 포스트의 대다수가 제도권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 회의하는 시각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나를 “기-승-전-교육”이라는 말로 평할 정도이다. 어떠한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든 결국 나는 “교육”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교육은 현재의 세대가 다음의 세대에게 자신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우(愚)를 전달하는 장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교육 중에서도 역사 교육의 가치를 꽤 높게 평하는 편이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나는 앞의 문장에서 교육은 현재의 세대가 다음의 세대에게 자신들의 우를 “전달”하는 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달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 전달의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쉽지는 않다. 게다가 나는 이제 겨우 십칠 년의 구차한 인생, 아직 어린 아이이며, 교육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그저 철학을 조금 좋아할 뿐인 아직 배울 것이 많은 학생이므로, 질문에 대해 내가 내리는 다음의 답도 분명 미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아직 미숙한 내가 나 자신 나름의 답을 적어두는 이유는, 생각하지 않는 자는 결국 죽은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에서의 “전달”의 방법론에 관하여
내가 생각하는 교육에서의 “전달”의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어에서 교육을 뜻하는 단어인 Education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Education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영단어 Educ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educare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이끌어내다’, ‘끄집어내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이끌어내며 잘 발전하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랬다. 교육은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약간 웃긴 사상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인들은 모든 인간의 잠재력을 믿었다. 나의 사상은 이 사상과 같이 하여, 주위의 친구들과 학생들을 살펴볼 때에, 그들이 잠재력이 있는지 가끔 의문스러울 때가 있으나, 그러나 이내 그들의 잠재력을 믿는 것으로 나의 생각의 방향을 전환한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우리나라의 교육의 의미에 대하여 조금 더 불만스러울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일반적인 사고에서의 교육의 정의는 한자어인 ‘교육(敎育)’의 뜻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르칠 교(敎)는 설문해자(設文解字)에 의하면, ‘上所施 下所效也’라 하여, ‘孝’와 ‘攵’의 합성문자인데, ‘孝’는 ‘下所效也’라 하여 모방한다는 뜻이 되고, ‘攵’자는 ‘上所施’라고 하여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채찍질을 가해서 가르친다는 뜻이다. 또, 이 ‘敎’자를 파자(破字)로 풀면 ‘爻, 子, 卜, 又’로 구성되어있는데, 이것은 각각 ‘效, 子, 卜, 手’의 뜻이다. 이렇게 볼 때 敎자는 어른이 채찍을 들고 강제적으로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의 행동을 무조건 모방하게 하거나 가르침을 수용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敎자는 어른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만들어간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기를 육(育) 자에 대해서는 별로 특이할 만한 사항은 없다. 문제는 이 가르칠 교(敎)의 의미가 무척이나 무서운 의미라는 것이다.
나는 자신들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그래서 당신들은 당신이 의도하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그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 방향이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당신이 만났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각각 살아나갔던 것처럼, 다양한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굳이 그 중에서 오직 단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며 저기로 가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양한 방향이 있으니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도 결국 아이들로부터 선택의 기회를 앗아가는 – 의도적인 거짓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까? 라고.
디그리오크라시(Degreeocracy)의 부패와 제도권 교육의 한계
나는 제도권 교육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했다. 제도권 교육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6년 TED에서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Sir Ken Robinson의 ‘Do schools kill creativity?’의 강연을 보라. 그는 이 강연에서 무용수였던 Gillian Lynne의 사례를 강연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다. 이 아름다운 무용수 – 세계 3대 뮤지컬에 속하는 ‘캣츠(Cats)’와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에 출연한 이 무용수는 1930년 당시 학업 부진아이고, 주의가 산만하며 학교에서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다는 이유로, 부모가 의사에게 데려갔던 바가 있다. 그러나 그 의사는, 방에 음악을 틀어두고 이 어린 무용수를 그대로 두고는, 그녀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그녀의 부모에게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Mrs. Lynne, Gillain isn’t sick. She’s a dancer. Take her to a dance school.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의사의 말이었다. 그녀가 만일 이렇게 말해주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떠한 삶을 살았을지에 대해서, 디그리오크라시(degreeocracy)의 부패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근대 사회는 출신이나 가문 등이 아닌, 교육에서 주어지는 학위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사회로,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이 경우가 극히 심하다. 대표적으로, 예전에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녔던 다음의 말을 생각해보아도 이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단 두 개의 대학만이 있다. 하나는 서울대, 나머지는 잡대.
말이 좀 심하지 않은가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에서 특히 만연한 – 대학을 통해 그 사람의 한계를 결정짓는 – 분명히 잘못된 이데올로기인 디그리오크라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의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나고, 수많은 이들이 경쟁에 뛰어들어 패배하는 자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승자들은 패자들이 있기에 자신들이 승자가 되었음을 항상 자각하지 못한다. 승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한 이유는 자신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피나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고, 패자들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패자가 된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력이 그들에 비해 더 많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 역시 경쟁의 특성 상, 평가에서 자신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로 불쾌한 일이나 다름없다. 나는 앞에서 교육의 정의를, 현재의 세대가 다음의 세대에게 자신들의 우를 전달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러한 나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서의 정의는 별로 기분이 좋은 정의라고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교육이라는 것은 나는 기본적으로 소통의 일종이지, 개인에게 신분 따위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 개인에게 신분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교육이라면, 제도권 교육이 특성상 분명 그 수많은 인생에서의 다양한 방법 중에서 단 한가지 – 혹은 소수의 몇 가지 만을 강조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을 것이 분명하다. 이전에 올렸던 “근대 교육을 재판합니다”의 포스트에서, 그 영상의 흑인 변호사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범죄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범죄가 되지 않을까.
학교가 학생을 죽였다고 나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도권 교육에서는 학교가 학생을 “죽인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만나본 수많은 학생들은 죽어있는 상태와도 다름없었다. 제도권 교육에서, “대학”이라는 사실상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남은 인생의 수준을 결정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그들은 마주하고, 절망하고, “대학”을 위한 공부에 쫓겨 그들 스스로를, 그들의 본질적인 아(我)를, 그들은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 그들 중 대부분에서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영롱하고 생기있는 눈빛은 현대인의 힘든 생활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피곤에 찌들어있었고, 커피나 에너지음료 등의 약물로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병자와 다를 것이 없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단순히 조금 의심하고서 받아들이는 기계에 다름없었다. 학교는, 학생을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개조하고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인간’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학교보다는 차라리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러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갈 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제도권 교육 속에서 성장해온 대한민국의 학생이기도 하며, 처음에 경남과학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미 수많은 선행을 해 온 친구들의 곁에서,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수없이 몸부림친 인간 중에 하나니까. 그러나 한 가지 나 자신이 그나마 다른 이들과 달랐다고 생각하는 점 – 지극히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 은 적어도 철학을 조금이나마 좋아한 덕분에, 나를 둘러싼 수많은 제도와 사회에 대하여 소소한 의문이라도 던지고, 조금이나마 의심해볼 수 있었고, 그 사이에서 적어도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적어도 자신이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최소한의 인간성이라도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것을 모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를 낳지 않을까.
씁쓸하다. 허무하기도 하다. 우리는 기계 따위가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교육이라는 불합리한 시스템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의 수많은 방법들을 오래전부터 제시받지 못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단 하나의 길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불쌍한 영혼들이 아니었는가. 우리들이 더 많이 공부할 수록, 우리들은 더욱 문제 따위를 풀어내는 기계나 되어버리는 것이고, 정작 사람 사는 세상에서 중요한 생각하는 힘과 의심하는 힘과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은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다음의 상당히 소름끼치는 말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친다.
교육받은 국민은 다스리기 쉽다.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Friedrich II von Hohenzolle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