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파록 #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와 ‘죽음’

논파록 #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와 ‘죽음’

2023-02-14 0 By 커피사유

논파록(論破錄) 시리즈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지적 동반자들과 함께 어떤 주제에 대하여 토론 혹은 토의하면서 완성시켜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공간입니다.

이번 논파록은 카카오톡을 통하여 필자의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과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를 보존을 목적으로 정리하여 옮긴 것입니다.

메신저 앱을 통한 채팅의 특성상, 시간차에 의해 이야기의 엇갈림이 몇 번 발생하였으며, 또한 몇 가지 문법이나 어순에 맞지 않은 표현들이 있었으므로, 이 부분들은 순서에 맞게 교정하였음을 서두에 밝힙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직소〉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

선생님: 내가 〈직소〉를 다시 읽으려다가 읽기 싫어서… 전에 메모해둔 걸 보니, 이렇게 적어놨네.

선생님: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긴 일을 소설화하였다. 화자는 유다이고, 유다는 자신이 예수(그 분)를 팔아넘긴 일을 자신의 심정을 담아 ‘신에게 직접 소를 올리는’ 형식으로 썼다.

  • 경우 1. 예수를 모욕하는 글
  • 경우 2. 유다 자신을 벌 주는 글

처음에는 1처럼 읽히더니, 나중엔 2처럼 읽힌다. 관련 성경 구절이 주석으로 달려있는 탓인지, 덕인지….

이 글이 재밌는 까닭은 경우 1처럼도, 2처럼도 읽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중에 민음사 해설을 찾아보고, 글 한 편 써야지. 내용은 경우 1이냐, 2냐에 대해. 경우 1의 경우에는 신성모독이 되겠으나, 그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기는 독자는 오히려 신성을 절대 모독할 수 없는 독자라는 아이러니에 대해 쓰고 싶다.

그러니까 이 텍스트의 묘미는 그 뫼비우스의 띠 같은 아이러니 덕분.

선생님: 뒷부분이 헷갈리게 적혔는데, 의도한 바는 이렇다. 〈신을 모독하기 어려운 독자는 화자인 ‘가롯 유다’는 신성을 모독한 것으로 읽을 테니까, 그것을 미리 알고 ‘직소’를 올린 유다는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즉 욕 먹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일 거라는 것.

필자: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이랑 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는 상당히 사람 사이의 관계라던가 인간 사회 자체에 다소 회의를 느낀 사람이거든요. 군국주의로 점칠되었던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에서는 드물게도 말입니다.

필자: 오사무는 ‘직소’에서 유다의 입으로 자신의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요? 선생님의 의견을 제가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이 모습을 표출하려고 했다고 보아야 할까요?

선생님: 읽은 지 오래되서 잘못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답변한다면, 오사무는 오히려 군국주의 시대 사람이라서 그 시대에 더 적응을 못 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더 싫었을 수도 있을 듯함.

선생님: 끝 부분만 다시 대충 훑어보니, 유다의 서술 중에 세 개가 눈에 띄네.

  • 1. 그분은 자신의 힘이 다함을 알고, 죽기를 준비하고 계신다. 나는 그분을 도와 함께 죽겠다.
  • 2. 나는 예수가 위대한 분인 것을 안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창피 주는 심술궃은 분이다. 그 심술이 얄미워 나는 차라리 같이 죽는 쪽을 선택한다.
  • 3. 아니다. 나는 장사꾼이라서 돈 때문에 그분(그 녀석)을 팔았다.

위 서술 중 서술 2는 서술 1쪽에 붙어있어 서술 1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 같음. 또는 서술 3으로 건너가는 중간 다리 역할이거나.

선생님: 이 소설은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심리를 상상해본 것이라 하겠는데, 서술 3은 그냥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 것 같고, 서술 1은 그분의 위대한 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고. 서술 2가 차라리 가장 솔직한, 못난 인간들의 솔직한 심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

필자: 서술 2에서 3으로 가는 대목이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인 〈인간 혐오〉의 마지막 부분과 묘하게 닮아 있는 듯 합니다. 인간 자체의 ‘가면 씀’과 그럼에도 ‘벌 받지 아니함’에 민감했던 〈인간 혐오〉에서의 화자 ‘요조’의 결말은 정신병원행인데, 그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은 광인이 되었다며 모든 것을 포기하거든요…….

선생님: 유다와 작가 오사무를 겹쳐 읽어본다면, 오사무의 우울함(자기 부정)의 성향은 아마도 서술 2 때문인 듯. 그러니까 얄팍한 질투, 또는 가볍지만 불타오르는 화, 평범한 젊은이들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나이 오십, 그러니까 지천명쯤 되면 없어지는 객기 같은 것인데. 이것도 다 경험이긴 하지만.

필자: 질투라기보다는 날카로운 인간에 대한 통찰인 듯 합니다. 물론 보편적인 사람들의 정서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따라서 정신병원에 가둬넣기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죠…….

선생님: 날카로운 인간에 대한 통찰! 동의함.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뫼비우스의 띠〉 같다고 한 대목이 바로 그것인데, 유다는 자신의 그런 (모자란)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보임으로써 자신을 벌 줌. 오사무는 그런 유다의 모습을 통해 예수와는 결코 같을 수 없는 모자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음.

선생님: 오사무를 유다와 겹쳐 읽지 않으면 〈통찰〉이란 표현이 가능한데,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통찰을 〈자신을 성찰하면서〉 얻는 법이지. 그래서 〈앞으로 A처럼 살지 않고, B처럼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글쓰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A처럼 살고 있음을, B처럼 살고 있지 못함을 자백하는 꼴임.

필자: 오사무는 인간의 위선적인 면은 정확히 통찰했지만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지는 못한 듯 합니다. 선생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오사무의 논조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혐오하는 위선적 인간 부류로부터 분리함이 깔려 있으니까요.

필자: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오사무가…….


죽음 · 위선 · 종교,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

선생님: 오사무가 자살했나? 잘 몰라서.

필자: 자살로 생을 마감하긴 했어요. 평생 총 4번의 자살 시도를 했고 (강물에 뛰어든다던가, 칼모틴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던가) 1948년 6월 13일에 약을 먹고 자기 옆을 지키던 여성과 함께 수원지에 투신해서 사망했습니다. 즉, 5번 시도해서 마지막에 성공한 거죠.

선생님: 보통 인간의 통찰의 순서는 다음과 같지.

  • 1. 나의 이런 점(A)이 싫다.
  • 2. 다른 인간들의 이런 점들이 싫은 게 보이네. (통찰!)
  • 3. 아, 다른 인간들의 싫은 점들(위선적인 면들)이 바로 내 모습이었구나.

필자: 제가 생각하기에 오사무는 3이 빠졌다는 겁니다.

선생님: 지천명까지 살았다면, 3까지 도달하여 그런 자신의 모습까지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자살.

필자: 지천명까지 11년 남기는 했었죠. 서른 아홉에 사망했으니까요. ‘젊은 패기’는 확실히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인간의 위선적인 면을 통찰했다는 평가는 〈유다가 위선적이다〉라는 뜻인가? 네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서.

필자: 〈직소〉에서 따진다면 예수가 위선적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신의 위선적인 면을 통찰했다〉고 해야 하지 않나?

필자: 〈인간 혐오〉에서 화자 ‘요조’는 자신의 ‘인간되지 못함’을 탓하다가 스스로가 ‘광인’이라고 단정짓는 것으로 서사를 매듭짓습니다. ‘직소’에서는 ‘유다’가 자신의 ‘예수되지 못함’을 탓하다가 스스로를 ‘팔아먹는 장사치’로 단정짓는 것으로 서사를 매듭짓죠. 둘 다 자신이 되지 못한 자(인간 또는 예수)의 경멸을 받는 존재로 서사가 종결된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선생님: 아… 많은 인간들이 유다처럼 생각했으면서도 안 그런 척하면서 〈예수〉를 떠받들었으니, 기독교들이 위선적이라면 말이 되겠네.

선생님: 사실 〈직소〉에서 유다는 매우 솔직하지. 독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글은 〈솔직한 글〉이란 걸 우린 알잖아.

필자: 다른 사람을 볼 때 자신에 대한 ‘솔직함’은 몰라도 스스로를 볼 때 자신에 대한 ‘솔직함’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화자가 스스로를 경멸한다는 말이제? 맞아. 나도 그런 걸 느꼈어. 특히 마지막에 자신을 〈장사치〉라고 말한 부분.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는, 독자들이여 나에게 돌을 던져라 말하듯이.

필자: ‘독자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신은 독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기만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선생님: 맞아. 그만큼 솔직히 쓰기가 얼마나 어렵겠냐고!

선생님: 김수영의 〈죄와 벌〉이란 엄청난 시가 있는데, 이 시를 읽으면 독자들이 〈헐! 김수영이 마누라를 때렸어? 그러고도 그것을 반성하지 않고, 아끼던 자신의 우산을 잃어버린 걸 아까워해? 김수영은 정말 인간 말종이군〉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놨지. 스스로를 벌하는 시.

필자: 예전에 선생님께서 문학 수업 시간 때 보여주신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오사무의 경우와 김수영의 경우는 비판의 방향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왜?

필자: 김수영은 비판의 방향이 처음부터 자신을 향합니다. 그러나 오사무의 경우는 자신이 아닌 ‘위선적인 인간’을 먼저 비판하다가 ‘위선적인 인간’으로부터 이상한 이 취급받자 자포자기 하는 쪽에 가까워 보여요. 즉, 김수영 시인은 처음부터 비판이 안을 향하지만, 오사무의 경우는 밖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밖을 향하다가 ‘꺾여’ 안으로 향하게 되는 셈이죠. 니체가 제일 경계한 겁니다.

선생님: 이런 전제로 하는 말이지? 〈많은 인간들이 유다처럼 생각했으면서도 그러지 않은 척하면서 예수를 떠받들었으니, 기독교도들이 위선적이라면 말이 되겠네〉.

필자: 기독교인들도 위선적이라 볼 수 있겠지만, 〈인간 혐오〉와 구도를 맞추려면 ‘예수’ 자체가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합니다.

선생님: 아, 예수를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는구나.

필자: 네. ‘솔직하지 못한’ 또는 ‘사기꾼’의 〈인간〉으로서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진정한 〈신성모독〉인데?

필자: 〈직소〉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잖아요.

“나는 천국을 믿지 않아. 하느님도 믿지 않아. 그 분의 부활도 믿지 않아. 그 사람이 무슨 이스라엘의 왕이겠어. 바보 같은 제자들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인가 뭔가를 그 사람한테서 듣고는 한심스럽게도 환호작약하고 있어. 이제 곧 그들이 실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임받을 거라고 그 분은 약속하셨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됩니까?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야. 말하는 것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터리야. 나는 하나도 믿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그 사람의 아름다움만은 믿어. 그렇게 아름다운 분은 이 세상에 없어. 나는 그 분의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어. 그뿐이라고.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아. 그 사람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천국이 가까워지면 멋들어지게 총리나 부총리가 되어 보려는 그런 치사한 마음도 없어. 다만 그 사람을 떠나고 싶지 않을 뿐이야. … (후략)”

선생님: 유다를 〈믿을 수 없는 서술자〉로 본 게 아니네? 유다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필자: 왜냐하면 유다를 ‘오사무’의 투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오사무는 신앙이 없었나?

필자: 일본 토속 신앙이었다가 성경을 읽고 (메이지 유신 시대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선생님: 그런 오사무가 저 〈직소〉의 유다처럼 말한다고? 예수를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본다고? 그런 유다가 오사무의 투영이라고?

필자: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절대적이라고 믿지는 않으니까요.

선생님: 가짜 신앙인만 그런 것 아닌가? 나도 기독교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서도.

필자: 그렇다기엔 니체도…….

선생님: 니체는 기독교, 나아가 종교를 비판하고 있으니까. 종교와 술은 마취제. 그래서 술도 안 마셨다네. 뭐, 오사무도 일본인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 이성보다는 ‘감성’의 힘을 믿는 쪽이었으니까.

필자: 그러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은 좋아하더라고요.

선생님: 그래서 나도 이 이야길 듣고… 음, 니체가? 그랬단다.

필자: 재미있는 건 오사무가 기독교를 읽기 시작한 때인데요, 그가 성경과 기독교를 접하기 시작한 것은 1933년 11월 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한 이후) 깊이 수용하게 된 것은 정신병원 입원을 통해서라고 추정된답니다. 성경을 ‘삐딱하게’ 읽기 좋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선생님: 오사무 전문가구나.

필자: 2022년에 나온 민음사 〈인간 혐오〉 특별판에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에 대한 해설이 달려 있더라고요.

선생님: 오사무는 몇 년에 죽었어?

필자: 1948년 6월 13일이요.

선생님: 그래. 아무튼… 〈직소〉는 다양하게 읽히겠다. 그런 면에서 좋은 작품이네.

필자: 많은 생각이 드는 작품이 늘 좋은 작품이죠.


〈직소〉의 화자 ‘유다’는 믿을 수 있는 서술자인가, 믿을 수 없는 서술자인가?

선생님: 오사무가 〈직소〉를 쓴 시기는?

필자: 1940년이랍니다. 〈인간 실격〉이 1948년에 쓰였고요. 그래서 사실상 〈인간 실격〉이 유작인 셈이죠.

선생님: 〈인간 혐오〉도 썼고?

필자: 〈직소〉를 쓸 당시에 썼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직소〉에서 ‘유다’의 말을 믿는다면, ‘예수’는 사기꾼이 되고, 사기꾼에 속아 넘어간 대중들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되네. ‘유다’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믿을 수 없는 서술자’인 경우) 유다의 솔직한 모습에서 독자는 자신의 어떤 이중적(위선적)인 면을 성찰할 수도 있고……. 아무튼 나는 ‘믿을 수 없는 서술자’ 쪽인데, 그렇다고 유다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뜻은 아니고 유다의 서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쪽이지. 호칭도 〈그 분〉, 〈그 녀석〉 왔다갔다 하더라고.

필자: 극도의 정신 불안(혹은 칼모틴과 같은 마약성 진통제의 과다복용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중 하나인 환각)에 걸린 것처럼 말입니다.

선생님: 맞아, 횡설수설 느낌이 있었어……. 사실 신앙인들도 스스로를 반성하곤 하지. (내 믿음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유다의 서술을 읽고, 자신의 믿음을 반성할 수도 있겠지.

필자: 저는 오사무가 ‘신앙인’으로서 〈직소〉를 쓴 건지, 니체처럼 ‘반신앙인’으로서 〈직소〉를 쓴 건지 아직도 헷갈립니다. 최근 견해는 전자이긴 합니다만…….

선생님: 유다의 서술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거라면(횡설수설 느낌으로), 유다의 태도에서 어떤 독자들은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거나, 니체처럼 신앙(종교) 자체에 대해 성찰할 수도 있겠지.

필자: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가네요. 오사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해설의 설명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목이 있거든요.

선생님: 민음사 해설? 궁금하군.

필자: “… (전략) …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근대 문인들 중에서도 기독교를 가장 가까이 했던 작가에 속한다. 기독교와 자살이라는, 원천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진 이들에게 ‘그렇다면 기독교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적어도 다자이에게 있어서 자살, 좀 더 확대해서 죽음이란 무엇이었으며 기독교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극히 소박한 의문을 풀기 위해, 완성된 작품으로는 마지막 소설인 ‘인간 실격'(1948)과 유다의 배반을 다룬 ‘직소'(1940)을 여기 실었다.”

선생님: 유다의 배반이 〈자살〉처럼 읽히더라. 〈내가 그 분과 함께 죽겠다. 그 분을 고발하고〉.

필자: 그러니까 말입니다. 스스로가 ‘되고 싶은’ 대상으로 될 수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했으니까요.

선생님: 무슨 말이지? 그 분의 예언, 그 분의 말씀대로 실행한 것 뿐이지.

필자: ‘예수’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평생 지내고 싶었으나 ‘예수’가 고발되고 처형됨에 따라 영영 불가능해지게 되었죠. 물론 유다의 서술을 모두 믿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선생님: 아니, 예수의 예언(말씀)처럼 실행하여 그 분과 함께하게 된 걸 수도. (죽음)

필자: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에는 예수에 대한 유다의 당초 인식이 ‘사기꾼’에 ‘거짓말쟁이’니까요.

선생님: 뒤에는 엄청 훌륭한 분인 것처럼 묘사된 데도 있음. 진술이 왔다갔다 함. 내가 처음에 〈젊은이의 혈기, 욱하는 성질〉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점 때문.

필자: 예수가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선생님: 그 분의 훌륭한 모습도 다 사기치기 위한 술책이라고 써져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뭐… 가난한 이들을 위한다는 부분도 있었던 듯함.

필자: 유다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느끼거나 ‘옳다’, ‘하느님의 진정한 자식이다’라고 표현하는 때는 예수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고 생각될 때’라고 제시되는 것 같습니다. 유다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거짓말을 일삼는’ 장사치라는 점에서 자포자기하니까요.

선생님: 발을 씻어주는 장면 막바지에 〈누군가 나를 배반할 거다. 그 사람 입에 빵을 넣어주더군〉.

필자: 그 순간 이후부터 예수의 호칭이 ‘그 분’에서 ‘그 녀석’으로 고정되죠.

선생님: 맞아. 그런데 자포자기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보니까, 〈좋다. 그래, 내가 장사치 맞다. 너희들 말처럼〉. 이런 느낌이었어.

필자: 인간 혐오의 결말과 비슷한 느낌인 겁니다. ‘위선적인 인간’이 되지 못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요조가 자포자기 한 것처럼.

선생님: 아……. 그렇군.


다자이 오사무, 니체, 들뢰즈 그리고 ‘잘 죽음’

선생님: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다른 사람들은 다 위선자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위선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정신병원으로.

필자: 그런 느낌이죠. 제 비판의 핵심이 두 번째 문장에 있는 거고요.

선생님: 이건 대중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일종의 〈엘리티시즘〉. 이런 엘리트주의는 근대 초기 문학의 특징이고, 비판받는 것 중 핵심적인 것. 실제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태도를 취했고, 그런 태도조차 사실은 위선적이지. 〈대중과 함께 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뻘이다〉는 태도.

필자: 계몽주의의 한계로 많이 지적되는 태도기도 하죠. 다만 그 점 때문에 자살까지 이어진 것이 매우 안타까운 오사무입니다…….

선생님: 맞아. 자살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절망이나 희망에 대해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긴 좀 그렇군.

필자: 그렇긴 하죠…….

선생님: 자살은 절망 또는 희망 때문이거나, 덕분일 수 있다고 봄.

필자: 그의 절망과 희망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 정체를 밝히는 작업이 남은 거죠. 음……. 오사무가 니체도 봤으면 좋았으려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니체가 주목받은 건 그가 죽고 나서도 꽤 있다가였지. 니체가 주목받은 것은 현대 철학에 와서……. 그러니까 2차 대전 후 70년대……. 그러니까 오사무가 죽고 나서 한참 후…….

필자: 아이고……. 아무래도 저는 오사무를 조금 더 읽어야겠습니다…….

선생님: 헐! 네 호기심은 〈자살〉인 건지?

필자: 오사무가 왜 ‘포기했는가’하는 것에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오사무는 ‘반-니체’적인 혹은 지극히 ‘기독교적’인 인물이거든요.

선생님: 니체도 정신병원에서, 아니 행려병자(?)로 죽은 건 알지?

필자: 말년에 말 채찍치는 거 보고 끌어안고 울면서 채찍을 대신 맞다가 식물인간으로 십년 정도 살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선생님: 아……. 그렇구나. 식물인간으로…….

필자: 니체와 오사무 모두 근대적인 인물이고, 귀족주의적 또는 엘리트주의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도 참 아이러니하네요.

선생님: 니체가 미리 알았다면, 식물인간 되기 전에 자살했을 수도 있어.

필자: 니체도 ‘오사무’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비록 두 사람의 사상은 완전히 평행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선생님: 니체는 주체적인 선택(신을 증오, 신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을 중시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자살이 누군가에겐 대단히 희망적이고 주체적인 선택지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자포자기〉, 〈절망〉만이 자살의 동기는 아니란 말씀.

필자: 존엄사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 니체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철학자 들뢰즈 덕분일 수 있는데, 그 들뢰즈가 〈자살〉했거든. 어떤 책에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려다 떨어져 죽었다, 실족사라고 하더라만, 이상하게 나는 〈자살〉쪽인 듯. 90세 무렵(?)에 병이 들어서 아마도 주체적으로 그렇게 선택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

필자: 찾아보니 말년에 폐암으로 고통받다가 스스로 호흡기를 떼고 아파트에서 투신했다고 나오네요.

선생님: 맞지? 어떤 책에는 비둘기, 실족사 주절주절 하더라고.

필자: 최소한 ‘실족사’에는 일부의 진실이 들어 있기는 하네요.

선생님: 실족이 아닐 수도 있는 걸……. 힘있게 내딛는 발걸음일 수도.

필자: 잘-죽음(Well-Dying)에 관한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령화 시대에 들어선 요즘에 논란이 많은 주제기도 하죠.

선생님: 절망이나 도피, 자포자기로 하는 자살은 사실 〈피살〉인 셈. 어쩌면 힘있게 내딛는 적극적 선택에만 ‘자살’이란 이름붙이기가 가능한 게 아닐까?

필자: 그 적극적 선택도 불가피한 죽음 앞에서 내딛는 용기인 셈이니까 어쩌면 타살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라는 면은 분명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말입니다.

선생님: 결론은 내리고 나면 편해지기 때문에, 〈결론〉은 늘 섣부르기 쉽지. 그런 면에서 좀 불편을 감수하는 쪽을 택하자는 결론을 내려볼까?

필자: 각론에 다다르면 분명 또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서는 무문(無問)에 붙이는 것이…….

선생님: 〈불가피한 죽음〉이라는 말에는 〈죽음은 피해야 하는 것〉또는 〈피하고 싶은 것〉 정도의 의미가 담긴 것 같은데?

필자: 생물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하고 싶은 것이라는 본성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니체보다 쇼펜하우어 쪽을 조금 더 지지하는 셈이죠.

선생님: 그냥 〈죽음〉 앞에서 힘있게 내딛는, 그러니까 그게 내 길이니까 그냥 뚜벅뚜벅 용감하게, 주체적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니까.

필자: 아직 배워야 될 게 많군요.

선생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거의 다 읽었는데, 거의 마지막에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의 긍정과 부정’을 다루면서 결국 죽음과 자살을 다루고 있어.

선생님: 쇼펜하우어는 거의 불교신자 같은 느낌인데……. “〈죽음〉 앞에서 힘있게 내딛는, 그러니까 그게 내 길이니까 그냥 뚜벅뚜벅 용감하게 주체적으로 가는 사람도 있다니까.”라고 앞에 던진 이 말(위의 말)이 거의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란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개별화된 것(개체, 개개인)의 의지도 있지만, 자연 전체의 의지도 있어. 그러니까 그건 거의 〈운명〉, 〈섭리〉 같은 건데, 쇼펜하우어의 〈자살〉 부분은 아직 읽기 전이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알게 되면, 인간은 자연의 의지, 즉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이지. 아마 여기서 니체는 〈영원 회귀〉나 삶의 무한한 긍정을 생각했을 거라는 게 딱 보이더라고.

필자: 중간 과정이 좀 다르기는 하죠. 니체의 출발점은 쇼펜하우어의 ‘자연 의지’에 대한 부정이었으니까요.

선생님: 쇼펜하우어의 ‘자연 의지’에 대한 부정이 곧 신에 대한 부정이겠지?

필자: 보편적 신의 개념이라면 아마 맞을 겁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쇼펜하우어의 ‘자연 의지’를 조금만 틀면 니체가 가능하다고 보는 게 내 생각.

필자: 결국 모든 철학은 죽음 앞의 인간이 어떻게 걸어갔느냐에 관한 이야기니까요.

선생님: 맞아. 철학을 공부하면, 죽음 이후, 그러니까 개별 인간의 죽음 이후에도, 무언가가 가능하겠다는 믿음(신에 대한 믿음은 전혀 아님)이 생김.

필자: 저는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해서 더욱 오기로 불타오르는 쪽인 것 같아서요. 분명 철학이 아직 부족한 모양입니다.

선생님: 이런 믿음은 내 미완성을 긍정하게 되고, 내 미완성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내 미완성에서, 내 죽음에서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말하는 건데…….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네가 남고, 네가 죽어도 네 제자나 후배가 남고, 또 남고, 또 남고 이어간다는 것. 혹은 이어가지 못해도 누군가가 다시 시작하고, 뭐 또 실패하고, 뭐 또 도전하고…….

필자: 그 논리가 오히려 ‘떠넘기기’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선생님: 그렇겠군.

필자: 기후 위기가 대표적이죠.

선생님: 진짜 한 끗 차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차이도, 떠넘기기와 도전(책임)의 차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