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총서 #8. 니체와 《장자》의 ‘자기 극복’ 대조

연구총서 #8. 니체와 《장자》의 ‘자기 극복’ 대조

2024-12-18 0 By 커피사유

연구총서 시리즈는 커피사유가 작성한 레포트 · 연구 기록 · 소논문 등 학술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공간으로, 세상과 스스로에 대한 분석을 여러 방면에서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이 글은 2024학년도 2학기, 필자가 수강한 서울대학교 유용빈 교수님의 〈동양철학의 이해〉 강좌의 과제로 작성된 기말 레포트임을 밝혀둡니다.



I. 서론

장자와 노자로 대표되는 도가(道家) 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규정함에 있어, 이해영1이해영. “장자의 (莊子) 비판의식 I.” 동양철학연구 9. (1988): 5-31.부터 김상래2김상래. “장자(莊子)의 해체주의적 윤리설.” 한국철학논집 32. (2011): 277-308.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도가 사상이 비유와 우화를 통해 절대적 도덕 이념의 허구성을 드러내어 우리가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가치 체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알레고리와 잠언을 통해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한 서양 철학자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꼽혀 왔다. 니체와 노장 사상은 시대와 배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끊임없는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간주한다는 면에서 유사하기에, 그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밝히려는 시도들이 행해져 왔다. 노자보다는 장자가 자주 니체와 견주어지는데, 이는 두 철학자가 공통적으로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니체와 장자 철학에 대한 선행 비교 연구들은 두 철학에서 자기 극복과 자유 추구가 공통 주제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표적으로 이상옥은 니체와 장자는 모두 기존의 정치 질서나 사고 형식 등에서 탈피하여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그리고 ‘무(無)’를 자유 개념의 핵심으로 간주한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장자의 자유는 개인이 체현하는 인간 차원의 것인 반면 니체의 자유는 강한 힘의 발현으로 실현되기에 인간을 초월하는 차원에 뿌리를 둔다고 주장했다.3이상옥. “도가의 철학성 소고 – 니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도교문화연구 35. (2011): 201-237. 양승권은 니체 철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인 ‘위버멘쉬’와 노장 사상에서의 ‘진인’은 모두 개별적 · 일면적인 가치들을 뛰어넘으며 삶의 허무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자기 극복’에 대한 철학이며,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와 노장 사상의 ‘비움’의 자세는 자기 초월을 달성하려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보았다.4양승권. “노장(老莊)사상에서 ‘비움’을 통한 ‘자기 극복’과 타자와의 공존 – 니체(F. Nietzsche)의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와 칼 융(C. G. Jung)의 ‘무의식’에 입각하여.’ 동양철학연구 108. (2021): 275-307. 강신주는 니체와 장자 철학을 모두 창조적 · 극복적 능력으로서의 망각(忘)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보고, 삶의 긍정과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단초라 평했다.5강신주. “망(忘) 혹은 잊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왜 우리는 동양 사유에 주목해야만 하는가?.” 인문학연구10. (2006): 81-93.

선행 연구들은 니체와 장자 철학이 내적 자유를 추구하며, 기존 가치의 체계를 넘어서는 인식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은 정확히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니체와 장자의 공통점으로 ‘자기 극복’을 꼽은 것은 두 철학의 차이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은 결과이다. 선행 연구들은 두 철학의 공통점에 천착하여 차이점을 고찰하였지, 니체 철학과 장자 철학이 사물 판단 · 가치 평가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와 이상적 인간상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대조하지 않았기에 서로 다른 니체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과 장자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을 기존 가치의 거부라는 큰 맥락을 근거로 동일시한다.

본고에선 니체와 장자 철학이 말하는 ‘자기 극복’의 의미차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① 각 철학이 사람의 판단 · 평가 능력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② 이로부터 두 철학이 그리는 이상적 인간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의 두 논점을 살필 것이다. 전자의 경우 외물과 개인의 내면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고찰한 장자 철학의 〈제물론(齊物論)〉을 개인의 사물에 대한 주체적인 가치 판단을 강조한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비교할 것이고, 후자에서는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 〈진인(眞人)〉을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 〈위버멘쉬(Übermensch)〉와 비교할 것이다.


II. 《장자》의 ‘제물론’과 니체의 ‘힘에의 의지’

본 장에서는 《장자》와 니체가 사물에 대해 사람이 내리는 판단과 평가를 각각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장자》 ‘제물론’과 니체 사상의 ‘힘에의 의지’를 비교한 뒤, 《장자》에서는 사물 · 가치 평가를 본질의 왜곡으로 간주하기에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반면 반대로 니체는 다원성으로서의 세계 인식에 근원하여 사물 · 가치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이라는 이분법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며, 이분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제물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 (중략) …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道樞)'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궤뚫어 보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6《장자》. 오강남 역. 현암사. (1999): 81-82.

《장자》는 상호 반대로 간주되는 사물 개념들, 예컨대 삶과 죽음, 됨과 안됨 등의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생겨나게 하는 ‘방생’의 관계가 자리한다고 지적하며, ‘이것’과 ‘저것’ 모두에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물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그 양면을 온전히 인정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마음을 넘어서기를 권하는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행하는 삶과 죽음, 됨과 안 됨의 구분은 《장자》에게 있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일면적 시각의 결과물인 셈이다.

《장자》는 말을 이용한 사물의 분별과 평가를 ‘말로는 따질 수 없는’ 사물의 본성을 왜곡한다는 점을 들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제물론〉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성인들은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존재 정도는 이야기하지만, 논의하려 하지는 않는다. 성인들은 세상 안에 있는 [내재적인] 것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는 하지만 논증하려 하지는 않는다. 또 역사적인 기록과 선왕들의 역대기에 대해 논증하기는 하지만 변론하려 하지 않는다. 분석하려 해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있고, 변론하려 해도 변론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그럴까? 성인들은 [도를]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서로 보이려고 변론을 한다. 그러므로 변론은 [도를] 보지 못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7Ibid.: 105.

《장자》는 성인들은 사물에 대해 논의하기는 하지만 논증하려 하지는 않고, 또 기록들에 대해 논증하기는 하지만 변론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석이나 변론으로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는 성인들은 구태여 사물을 재단하려 하지 않지만, 보통 사람들은 사물의 특성을 온전히 보는 대신 변론을 통해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한다고 말하고도 있다. 《장자》의 관점에서 변론이란 사물 존재를 창출하는 근본 원리인 도에서는 하나인 물자체를 사람이 자의적으로 나누고 가르는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사람의 판단 · 가치 평가 행위를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는 부정적 행위로 바라본다. 《장자》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긍정/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특정한 견해를 사물에 결부시켜 판단할 때는 사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서 제각각인 주관적 잣대로 사물들을 재단하고 평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컨대 《장자》는 상대적 · 주관적 기준에 따라 사물과 가치를 분별하기 보다는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아우르는 시각을 가질 것을 종용한 것이다.

니체는 주관적 기준에 따른 사물과 가치 평가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니체는 무조건적인 도덕 · 사회 상규의 수용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관점에 따라 사물들과 사건들을 해석하고 새로운 가치 평가를 세우는 인간이야말로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러한 니체의 시각은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덕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본능과 시대적인 취향은 모든 사건에서 힘에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이론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건의 절대적 우연성,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 (중략) … 그러나 이와 함께 생의 본질, 즉 힘에의 의지가 부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정의에서는 자발적이고 공격적이며 침략적이고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방향을 정하고 조형하는 힘들 ― 이 힘들의 작용으로 비로소 '적응'도 이루어진다 ― 의 원칙적인 우위가 간과되고 있다. 그러한 정의에서는 유기체 내에서 생명의 의지가 능동적이고 형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최고 기능들의 지배적인 역할이 부인되고 있다.8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134-135.

니체는 사물들의 존재와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서 기계론적인 무의미성을 찾을 뿐 능동적인 인간의 평가를 지양하는 당대 주류 철학들이 ‘생의 본질’에 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항하여 제시된 〈힘에의 의지〉는 ‘자발적이고 공격적이며 침략적이고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방향을 정하고 조형하는 힘들’로 정의된다. 그런데 해석 · 방향을 정하고 조형하는 행위란 사람이 외부 사물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적용하여 판단하는 일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란 인간이 자신만의 척도에 따라 사물과 사건에 대해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등의 가치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말한다.

〈힘에의 의지〉가 인간 자신이 능동적으로 가치를 규정하고 이에 따라 평가하는 능력을 말한다는 사실은 《선악의 저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칸트나 헤겔의 고상한 모범에 따르는 저 철학적 노동자들은 그 어떤 거대한 가치 평가의 사실을, 즉 지배적인 것이 되어, 한동안 "진리"라고 불렸던 이전의 가치 정립과 가치 창조의 사실을 확정하고, 논리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정치적인 것(도덕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예술적인 것의 영역에서든지, 이것을 일정한 형식에 밀어 넣어야만 한다. … (중략) …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이자 입법자이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를 규정하며, 이때 모든 철학적 노동자와 과거를 극복한 모든 자의 준비 작업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이때 존재하는 것, 존재했던 것,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는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되며 해머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며, 그들의 진리를 향한 의지는 ― 힘에의 의지이다.9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Jenseits von Gut und Böse · Zur Genealogie der Moral)》. 김정현 역. 책세상. (2002): 188-189.

니체는 진정한 철학자는 입법자이며, 존재들을 수단으로 삼아 인간의 행위와 목적을 규정한다고 정의한다. 니체가 보기에 철학적 노동자들은 진리로 간주되어 왔던 기성 가치 평가의 양식에 사로잡혀 이를 극복한 새로운 가치 체계를 창조하기보다는 사물들을 전통적인 양식에 잘 끼워맞추는 것을 중시하지만, 진정한 철학자는 전통적 가치 평가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새로운 인식과 평가를 창조한다.〈힘에의 의지〉는 철학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생의 근원이므로, 철학적 노동자와 진정한 철학자 각각은 기존 가치를 단순히 수용할 뿐이기에 자신만의 가치 창조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 인간 부류와 기존 가치에 도전하고 새로운 가치 평가를 만들고 주장하는 능동적 인간 부류를 가리킨다고 해석해야 한다. 니체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진정한 철학자는 기존 가치를 넘어서서 자신의 기준으로 사물 · 가치 판단을 하는 사람이며 〈힘에의 의지〉가 그 행위의 바탕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니체는 사물에 대한 사람의 주관적 평가에 대해 호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니체와 장자는 사람의 시비 판단, 사물 및 가치 평가 능력에 대해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 장자의 경우 물자체에 대한 왜곡이라는 점에서 이 능력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어떤 관점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중립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 가치 체계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내리는 가치 평가와 판단을 강조한 니체는 사람의 판단 · 평가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장자에 반대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니체와 장자가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서로 다르게 지각한 결과이다. 장자와 달리 니체는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는 물론 상이한 힘과 해석들의 경쟁 및 병존까지도 세계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절대적 중립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자의 도(道)가 어떠한 해석에도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 중립 혹은 평화 상태를 말한다면, 니체에게 있어 도(道)가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기꺼이 그 해석들의 병존에 동참하는 상태라 할 것이다.


III. 《장자》의 ‘진인’과 니체의 ‘위버멘쉬’

본 장에서는 《장자》가 제시하는 이상적 인간상 ‘진인(眞人)’ 그리고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 ‘위버멘쉬 (Übermensch)’를 대조한다. 구체적으로는 《장자》의 ‘진인’은 사물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행하지 않는 사람인 반면 니체의 ‘위버멘쉬’는 사물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주도적으로 행하며 기꺼이 다른 평가 · 판단과 대결하고자 하는 사람임을 보인 뒤, 이러한 차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장자》와 니체가 사람의 가치 평가 · 판단 행위에 대해 상반되는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함을 논증할 것이다.

《장자》는 〈대종사〉에서 ‘진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내린다.

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 (중략) … 외적 조건에 굴복한 사람은 그 목에서 나오는 말이 토하는 소리 같습니다. 여러 욕망에 깊이 탐닉한 사람은 하늘의 비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얫날의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습니다.10오강남 역. op. cit.: 264-265.

‘진인’은 외적 조건이나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여 사는 인간이다. ‘진인’은 모자라도 억지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으며,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는다. ‘진인’은 도(道)에 통달했기에, 주관적이고 이분적인 판단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는 죽음과 삶을 별개로 바라보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의연히 사는 사람이다.

《장자》의 ‘진인’이 주관적이고 이분적인 판단을 초월한 상태의 사람임은 〈대종사〉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과도 하나요, 하나 아닌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입니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지 하려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진인(眞人)의 경지입니다.11오강남 역. op. cit.: 271.

《장자》의 ‘진인’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 모두와 하나이고, ‘하나인 것과 하나 아닌 것’ 모두를 하나로 보며 이들이 서로를 이기지 하려 않는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다. 호오의 구분 그리고 범주의 구분은 이분법적 판단이므로, ‘진인’이란 이분법적 판단을 초월하고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을 가리킨다.

《장자》의 ‘진인’ 개념은 사물에 대한 판단 중지를 본질로 내포하고 있다. ‘진인’은 사물에 대해 ‘좋아한다/좋아하지 않는다’를 구분하지 않으며, ‘무엇이다/무엇 아니다’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살펴본 인간의 사물 · 가치 판단에 대한 《장자》의 부정적 평가의 연장선이다. 《장자》는 사람이 언어로써 가치를 평가하거나 사실 판단을 내리는 것을 사물 자체를 인식하는 대신 하나의 측면만으로 사물을 재단하는 편견으로 인식했다. 주관적인 평가가 사물의 본질, 즉 도(道)를 왜곡하는 것을 경계하는 《장자》에게 있어 ‘극복’이란 이분적 판단과 평가를 넘어서서 사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진인’은 이처럼 사물을 주관적인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인간상이다.

반면 니체가 말하는 ‘극복’이란 전통적 가치관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새로운 판단과 평가를 창조하는 능동적 행위를 말한다. 니체는 이러한 ‘극복’으로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에 관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 … (중략) …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다. 너희 의지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라. 위버멘쉬가 대지의 뜻이 되어야 한다고! 형제들이여, 간청하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 (중략) … 지난날에는 영혼이 신체를 경멸하여 깔보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경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신체가 야위고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허기져 있기를 바랐다. 그럼으로써 그는 신체와 이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중략) … 진정, 사람은 더러운 강물이렷다.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하리라. 보라,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위버멘쉬야말로 너희의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바다다.12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정동호 역. 책세상. (2002): 17-18.

니체는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것들은 자신 이상의 것을 창조해왔다’고 말하면서, 대지와 신체에 충실하기에 사람에 대한 경멸마저 받아들이고 가라앉혀 사라질 수 있는 바다가 ‘위버멘쉬’라고 정의하고 있다. 니체는 대지와 신체에 충실한 ‘위버멘쉬’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하늘나라와 영혼을 제시하고 있다. 육체는 변화하고 썩어 없어지는 저열한 것으로 본 반면 영혼은 유지 · 보존되므로 고귀한 것으로 간주해온 전통 서양철학의 심신이원론을 생각할 때, 니체의 ‘위버멘쉬’란 변화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인간이며, 세계 바깥의 일정한 존재를 상정하고 여기에 가치를 부과하여 ‘대지와 신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기성의 가치 질서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여러 사물들이 생성/소멸하며 경쟁 · 병존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가치 평가 · 판단을 창조하며 제시하는 인간상이라고 할 것이다.

니체와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은 ‘자기 극복’의 경지를 다르게 정의한다. 《장자》는 자의적으로 한쪽 면만을 바라보는 대상 · 가치 판단에서 벗어나 대도(大道)에 입각하여 만물의 동일함을 지각하는 것을 ‘자기 극복’으로 보는 반면, 니체는 기존 질서 · 가치를 넘어서서 경쟁과 병존으로서의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따라 주도적이고 의욕적으로 가치 창조를 행하는 것을 ‘자기 극복’으로 본다. 두 철학에서 ‘극복’은 기존의 세계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변화로서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장자의 입장에서 진정한 극복이란 판단 중지의 상태를 일컫는 반면 니체의 경우 다원성을 부정하는 일원론적 가치들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기에 이른 상태를 진정한 극복으로 보는 것이다.


IV. 결론

지금까지 《장자》와 니체의 저서를 중심으로 장자 철학과 니체 철학의 ‘자기 극복’의 구체적인 의미를 비교하였다.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가치 판단을 니체와 장자는 반대 방향으로 평가한다. 장자는 중립적 시각에서 있는 그대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중시했기에 사물을 특정 관점으로 재단하는 판단 · 가치 평가에 부정적이었던 반면, 니체는 해석과 관점들의 병존성을 중시했기에 완전한 중립적 시각의 존재를 부정하고 기성 가치 체계를 전도하며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하는 창조적 판단 ·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두 철학의 사물 판단 · 평가에 대한 견해차는 이상적 인간상의 차이로도 투영되었다. 장자의 이상적 인간상인 ‘진인’은 판단 중지의 상태에서 모든 사물이 ‘하나’인 차원을 지각하는 것을 중시하지만,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인 ‘위버멘쉬’는 기성의 체계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판단을 만들어내는 것을 중시한다. 장자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이 사물에 인위적인 판단 잣대를 들이대는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라면, 니체 철학에서의 ‘자기 극복’은 세계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기성 가치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론에서 논의하였듯, 장자와 니체의 사상은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적인 인식에 기반하여 기존 가치 체계에 대한 전도 · 부정을 꾀하는 ‘우화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비교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 다룬 ‘자기 극복’에 대한 시각차 등, 두 철학의 상세한 차이점들은 비교적 정밀히 연구되지 못했다. 니체 철학과 장자 철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 어떤 함의를 가지며,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가져다줄 수 있는 가능성들을 보다 온전히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니체 철학과 장자 철학이 의견을 달리 하는 지점들에 대한 철학적 규명은 계속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
    이해영. “장자의 (莊子) 비판의식 I.” 동양철학연구 9. (1988): 5-31.
  • 2
    김상래. “장자(莊子)의 해체주의적 윤리설.” 한국철학논집 32. (2011): 277-308.
  • 3
    이상옥. “도가의 철학성 소고 – 니체와의 비교를 중심으로.” 도교문화연구 35. (2011): 201-237.
  • 4
    양승권. “노장(老莊)사상에서 ‘비움’을 통한 ‘자기 극복’과 타자와의 공존 – 니체(F. Nietzsche)의 ‘거리를 두는 파토스’(Pathos der Distanz)와 칼 융(C. G. Jung)의 ‘무의식’에 입각하여.’ 동양철학연구 108. (2021): 275-307.
  • 5
    강신주. “망(忘) 혹은 잊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왜 우리는 동양 사유에 주목해야만 하는가?.” 인문학연구10. (2006): 81-93.
  • 6
    《장자》. 오강남 역. 현암사. (1999): 81-82.
  • 7
    Ibid.: 105.
  • 8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134-135.
  • 9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Jenseits von Gut und Böse · Zur Genealogie der Moral)》. 김정현 역. 책세상. (2002): 188-189.
  • 10
    오강남 역. op. cit.: 264-265.
  • 11
    오강남 역. op. cit.: 271.
  • 12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정동호 역. 책세상. (2002): 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