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서일지 #8. 『죄와 벌』, 두 번째 기억
탐서일지(耽書日知)는 카페지기 커피사유가 어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두고 나누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나갈 동기를 약속하기 위한 장으로써 마련된 독서 일지 시리즈입니다.
개요
지난 탐서일지부터 나는 이 『죄와 벌』이라는 상당히 훌륭하고도 잘 쓰여진 소설을 읽어가고 있으며 그 과정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지난 탐서일지와 동일한 책을 읽어가고 있는데, 이 책은 총 2권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제 제1권을 마침내 다 읽고 나니 일종의 전율과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 같다.
일전의 탐서일지에서 나는 형벌과 관련된 모순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 책에 대해서 내용의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사실은 내가 이 소설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 불쌍한 대학생의 처지, 그리고 그 주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가 꽤 오랫동안 공을 들여서 기술한 부분들을 읽은 것 뿐이었다. 뒤쪽에 가니까 결국 이 대학생이 사람을 죽이고 어떻게 변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던데 – 주로 그의 병적인 감정적 혼돈과 또한 한편으로는 병적인 지나치게 차분한 이성적 판단이 병기되어 있어 더욱 소름이 돋게 만드는 듯 하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느끼기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살인을 저지른 이 대학생인 듯 싶다. 그의 심리 상태가 상당한 죄책감과 증오로 얼룩져 있으며 이성적인 판단은 자신의 범죄 행위를 변호하고 또한 증거를 숨기고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모순적인 주장을 펼치는 그의 범죄에 관한 논문의 내용이 상당한 아이러니를 일으킨다. 그는 꿈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그리고 일상의 곳곳에서 자신이 일으킨 범죄를 다시 회상하며 – 그렇게 병들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하므로 이러한 불쌍한 대학생의 다음 2권에서의 행보를 내가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대학생의 심리 묘사와 그 행보, 주변 기술을 통하여 범죄를 저지르기 전후 대학생의 변화, 그리고 그의 범죄 이후의 행보와 자기 변명적 서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법학도인 이 대학생의 입을 통하여 자기 변명적 성격 또한 띠고 있는 어떠한 한 논문에서의 역설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1(커피사유 주) 물론 이 부분은 뒤에 제시할 예정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논리 또한 가지고 있지만 저자가 제시할 그 해답이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난 번 첫 번째 기억에 이은 오늘 두 번째 기억에서는 총 9개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려고 한다. 지난 번에는 10개였던 것에 비하면 한 개가 적은 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분량이 좀 기므로…… 아마도 전체 양은 이번이 조금 더 많지 않을까 하고 생각된다.
기억의 영역: 문과 답, 주석들
#11.
“야, 그럼 진지하게 뭐 하나 물어보자.” 대학생이 열을 올렸다. “물론 방금 한 얘기는 농담이지만, 한번 봐. 한쪽에 멍청하고 무의미하고 하찮고 못됐고 병든 노파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필요도 없거니와 오히려 모두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모를뿐더러 내일이라도 저절로 죽을지도 모르는 노파야. 알겠어? 알겠냐고?”
“뭐, 알겠어.” 장교가 열을 올리는 친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계속 들어 봐. 다른 한쪽에는 지원을 받지 못해 허무하게 스러져 가는 젊고 싱싱한 힘들이 있어, 그것도 수천씩 지천에 널려 있어! 수도원에 들어갈 노파의 돈만 있으면 백 개, 천 개의 선한 일과 기획을 추진하고 손볼 수 있단 말이야! 어쩌면 수백, 수천의 존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도 있겠지. 수십 개의 가정을 가난과 해체와 파멸과 방탕과 성병 병원에서 구해 낼 수도 있어. 이 모든 것을 그녀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라, 그리고 그 돈의 도움으로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해체에서 구하는 거지.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서로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蝨)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얼마 전에도 홧김에 리자베타의 손가락을 깨물었는데,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려 나갈 뻔했지!”
“물론 노파는 살 가치가 없지.” 장교가 지적했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잖아.”
“에이, 이봐, 그러니까 자연을 수정하고 방향을 틀어 주는 건데, 그렇지 않았다면 편견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단 한 명의 위인도 나오지 못했을 테고. 말로는 ‘의무다, 양심이다.’하고 떠들어대지만 – 의무와 양심에 토를 달 생각은 나도 전혀 없지만 – 사실 우리가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지? 잠깐만, 하나만 더 물어보자. 들어 봐!”
“아니, 너야말로 잠깐만 있어 봐. 내가 뭐 하나 물어보자. 들어 봐!”
“해 봐!”
“지금 너는 일장연설에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말이야, 어때, 네가 네 손으로 노파를 죽일 수 있겠어?”
“당연히 아니지! 나는 그냥 정의 차원에서……. 이 일 자체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지…….”
“내 생각에는, 네 손으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바에는 정의는 무슨, 나발이지! 한 판 더 하러 가자!”
… 그러니까 이 부분에 대한 가장 간략한 요약이란, 틀림없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 아닐까. 즉, “대(大)를 위해서라면 소(小)는 희생해도 된다.” 술에 취한 두 남성 중 한 명은, 타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피해를 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노파의 것을 뺏어서 불우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정의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 하고 생각한다. 이 즈음에는 「인본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시점이므로 이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되기는 한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는 그나마 「인본주의」 가 제대로 정착한 오늘날에도 종종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나름의 견해를 달아두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술 취한 남성의 논리에 대하여 달아둘 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하여 타인을 살해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면, 모든 사람들이 살해를 합리화할 가능성이 높다. 즉, 살인의 빈도가 증가하기 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부유한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가장 가난한 사람이 존재할 것인데, 그렇지 않은 즉 가장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그 수가 많을 것인데 이들 모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는 목적으로 이제 타인을 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동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빼고 나머지를 모두 살해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고 실제로 결과가 그러하다면, 그것은 실증적인 측면에서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보인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그 절차, 즉 과정에 오류가 있으면 그것은 분명한 악(惡)이지 선(善)은 아니다. 애초에 한 사람의 목숨의 값을 재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인가?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이들의 생명의 값을 마음대로 매길 수 있는가? 애초에, 생명에는 값이 존재하는 것이 맞는가? 그 사람의 행위나 행실이 아무리 악독하고 사회에 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에 해가 되는 것이란 형법의 기본 원리에 따른 사회의 자기 방어 작용에 의하여 처벌받아야 하지 개인에 의하여 복수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12.
처음에는 – 하긴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지만 – 한 가지 의문에 골몰해 있었다. 즉, 거의 모든 범죄가 왜 그토록 쉽게 발각되고 폭로되는 것이며, 또 거의 모든 범죄자의 흔적이 왜 그토록 뚜렷이 남게 되는 것일까? 그는 점차 다양하고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했는데, 그의 견해에 따르면, 가장 주된 원인은 범죄를 물리적으로 은폐할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범죄자 자신에게 있다. 범죄자는 거의 너 나 할 것 없이 범행을 저지르는 순간, 더욱이 이성과 신중함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의지와 이성의 활동은 저하되는 반면 어린 아이처럼 희한할 만큼 경솔하게 굴게 된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이런 이성의 혼미와 의지력의 저하가 인간을 병마처럼 사로잡아 점차 진전에 진전을 거듭한 뒤 범행 직전에는 최고의 극점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범행의 순간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에 따라서는 그 이후에도 몇 시간은 족히 더 지속된다. 그러고 나면 모든 병과 다름없이 그냥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문제인즉 이렇다. 병이 범죄를 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범죄가 그 특유의 본질상 어떻게든 항상 병과 같은 무엇을 동반하는 것일까? 그는 아직은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음을 느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그는 자기만큼은, 자기의 일에서는 이와 같은 병적인 격동이 있을 수 없다고, 이성과 의지는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기는 내내 자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지었는데, 그 유일한 이유인즉 자기가 계획한 일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최후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겪은 일련의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자. 안 그래도 얘기를 너무 앞질러 버렸으니까……. 그저 일의 실질적이고 순전히 물리적인 난관은 대체로 그의 머릿속에서 가장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만 덧붙이자. ‘그런 것은, 그것을 지배할 의지와 이성만 똑바로 유지하면, 때가 되면, 일의 세세한 부분까지 낱낱이 알게 될 때 전부 저절로 정복될 것이다…….’
고로 그러니까 모든 범죄자들이 이성적으로 완벽했다면 범죄자들은 완전 범죄가 가능했을 것인데, 대부분의 범죄가 그러하지 못하는 것은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후 이성적으로 완벽하지 못해 어리석은 행위를 했기 때문에 발각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 누가 범죄를 한 이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이들은 범죄를 처음으로 저지른 순간에는 반드시 당황하지 않을까? 범죄를 저지르고도 놀라울 정도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반복하여 비슷한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인 것 같다. 많은 범죄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던가. 왜,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살해를 저질렀지만 점차 살해를 저지를수록 일종의 병(病)이 동반되었는지 점차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던 연쇄 살인 사건들이 좋은 예시가 아니던가. 물론 성선설이 맞는지 성악설이 맞는지 성무선악설이 맞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지금도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지금까지의 내 간접 경험들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그저 모든 이들이 범죄를 처음 저지른 이후 완벽히 이성적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찰 결과 때문에 병이 범죄를 동반하는 것도 맞지만 앞의 문구에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즉 범죄가 병을 동반한다고 보는 게 훨씬 적절해 보인다.
#13.
그는 멍하면서도 분노에 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걸었다. 지금 그의 생각은 온통 어떤 한 가지 핵심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으며, 이것이 정말로 핵심이며 지금, 바로 지금에야 이 핵심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음을, 그리고 이것이 요 두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임을 그 스스로도 느꼈다.
‘에잇, 빌어먹을, 엿이나 먹어라!’ 그는 갑자기 한없는 분노의 발작에 사로잡혀 생각했다. ‘일단 시작됐다면 시작된 것이다, 노파든 새로운 삶이든 전부 엿 먹어라! 맙소사, 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인가……! 오늘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얼마나 많은 비열한 짓을 저질렀는가! 아까도 저 추잡하기 짝이 없는 일리야 페트로비피 앞에서 얼마나 치사하게 알랑방귀를 끼고 병신춤을 추었던가! 하긴 이것도 허튼수작이다! 그놈들 모두에게 침을 뱉어주자, 내가 알랑방귀를 끼고 병신춤을 추었다는 사실도 퉤퉤! 정말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이다……!’
갑자기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새롭고도 굉장히 단순한 질문이 떠올라, 일시에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참혹할 정도로 경악하고 말았다.
‘만약 이 모든 일을 정말로 바보 같은 방식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만약 정말로 너에게 특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다면, 대체 어째서 여태껏 지갑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며 네가 손에 넣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그 때문에 온갖 고통을 감수하고 그토록 비열하고 더럽고 천박한 일도 의식적으로 감행했건만? 실상 너는 그것을, 그러니까 그 지갑을 지금 물속에 던져 버리려고 했잖은가, 역시나 네가 아직 보지도 않은 모든 물건과 함께…… 이건 대체 뭔가?’
그렇다, 정말 그렇다. 정말 전부 그렇지 않은가. 하긴 이것은 전에도 알았던 만큼 그렇게 전혀 새로운 의문은 아니었다. 간밤에 물속에 던져 버리기로 결정됐을 때도 어떤 망설임도, 반발심도 없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달리 수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결정됐다……. 그렇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미 어제, 트렁크를 붙들고 앉아 케이스를 꺼내던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 결국 제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여 그 범죄의 정당성을 입증해도 범죄는 범죄인 것이고, 이는 아마도 우리의 심리가 판별하는 모종의 기능을 가지는 듯하다. 만약 라스콜니코프가 그의 말대로 의식적으로, 철저하게 어떠한 죄의식도 없이 노파의 살해를 행하고 금품을 훔쳤다면 그는 당황이나 일종의 심리적 공포에 의하여 경황없이 물건을 숨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스콜니코프가 그러한 충동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적어도 그가 그 스스로도 용납하지 못하는 범죄를 저지른 것임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14.
“카프탄을 반으로 잘라 이웃과 나눈 결과 우리 둘 다 반쯤 헐벗은 꼴, 러시아의 속담로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라는 꼴이 됐겠지요. 한편 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너 자신만을 사랑하라, 세상의 모든 것이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니까, 라고요. 자신만을 사랑하면 자신의 일도 무난히 잘 처리하고 카프탄도 온전할 겁니다. 경제적 진리에 따르면 또한, 사회에서 개별 사업이 많이 성사될수록, 말하자면 온전한 카프탄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를 위한 기반도 더 공고해지고 사회 내의 공공사업도 더 많이 성사됩니다. 고로, 그야말로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한 카프탄을 획득함으로써, 바로 그로써 저는 모두를 위해 카프탄을 획득하자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웃에게 찢어진 카프탄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이 떨어지도록 하자는 것인데, 이는 이미 사적이고 개별적인 관대함이 아니라 총체적인 번영의 결과물인 셈입니다. 참 단순한 사상이지만, 불행히도 열광과 몽상의 그늘에 가려져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고, 그걸 깨달으려면 재치가 좀 있어야 할 것 같군요…….”
이러한 사상은 적어도… 자본가 계층에게는 편리한 사상이다. 문제는 그러한 카프탄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격차가 이러한 논리에 아래에서 역사적으로 벌어져 왔다는 뜻이다. 대체로 이러한 사상 아래에는 가난하거나 빈곤한 이들은 그에 걸맞지 않은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이 『죄와 벌』의 작품을 조금만 읽어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노력을 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전제 자체가 붕괴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상이 과연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고 끝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나에게는 다소 의문스럽다. 물론 성격이 괴팍해서, 술에 찌들어서, 음탕굴에 현혹되어서, 도박에 빠져서…… 와 같은 다양한 반론거리도 존재한다. 그러한 이상한 일들에 그 사람들이 전신이 감염되어 지배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자업자득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는 주장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인가? 그들이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그들이 그러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 먼저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15.
“왜 채권을 위조했냐는 질문에 당신이 말한 그 모스크바의 강사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다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는 판에 나도 어서 빨리 부유해지고 싶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의미인즉 노력도 하지 않고 공짜로 어서 빨리라는 것이었죠! 다 갖춰진 상태에서 살고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고 남이 씹어 준 음식을 먹는 데 익숙해진 겁니다. 뭐, 그러다 위대한 시간이 도래하자 당장 온갖 것들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고요…….”
“아무리 그래도 도덕성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말하자면 원칙이라는 것이…….”
“뭘 그리 신경을 쓰십니까?” 느닷없이 라스콜니코프가 끼어들었다. “당신의 이론에 따른 결과인걸요!”
“아니, 제 이론에 따른 결과라뇨?”
“아까 당신이 설파한 내용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람을 찔러 죽여도 된다는 결론이 나올걸요……”
“무슨 그런 말씀을!” 루쥔이 소리쳤다.
“아니, 그건 그렇지 않아요!” 조시모프가 응수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누워 윗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에는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루쥔이 오만불손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경제적인 사상만으로 살인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냥 그런 가정을 해 본다면……”
루쥔의 이론에 해당하는 #14의 내용에 따르면 각자 개인적인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이 전체 이익으로 가는 길이므로,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스스로만을 사랑하여 다른 사람을 해하여도 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지점에서의 라스콜니코프의 비판 내용이다. 이 지점에 대하여 루쥔은 자신의 이론에 그러한 사익의 추구에는 한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대답을 하고 있는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루쥔의 이러한 대답을 떠나, 맨 앞의 말은 주목할 만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는 판에 나도 빨리’ 라는 논리는 아마도 이 소설이 쓰여지던 당시 러시아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흔히 말하는 ‘개미 투자자들’과 ‘도지코인’ 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보면, 이러한 현상은 적어도 1세기 이상은 지속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은 따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러한 욕구가 정도를 넘으면, 즉 사익의 추구가 타인의 정당한 이익 행위를 해치는 정도까지 이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리라…….
#16.
‘어디서 읽었더라.’ 라스콜니코프는 더 걸어가며 생각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하든가 생각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대체 어디서 읽었더라. 만약 자기가 어디 절벽 같은 높은 곳, 더욱이 두 발만 간신히 디딜 수 있을 만큼 비좁은 공간에, 사방이 낭떠러지,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립, 영원한 폭풍우로 둘러싸인 공간에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1아르쉰밖에 안 되는 그 공간에 그렇게 선 채로 평생, 천년만년 영원토록 머물러야 할지라도 여하튼 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는 것보다 그렇게라도 사는 것이 더 낫다, 하는 내용이었지! 오직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오직 살 수만 있다면…..! 참, 잘난 진리야! 맙소사, 얼마나 대단한 진리인가! 인간이란 비열한 놈이다! 그런다고 해서 인간을 비열한 놈이라고 부르는 놈도 비열한 놈이다.’ 그는 잠시 뒤에 덧붙였다.
라스콜니코프는 러시아의 식자층이었으므로, 일종의 명예, 그러니까 자존심을 상대적으로 생명보다 우월한 가치로 두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존심을 포기하면서까지 끝까지 삶을 추구하려는 그러한 사형수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맞을까? 자신의 명예가 더 중요할까, 자신의 생명이 더 중요할까? 처음에는 물론 이 사형수의 이야기를 명예와 생명의 대립 구도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조금 더 읽었을 때 사실 대립 구도는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확한 대립의 구도는 생명의 포기와 자기 자신의 포기였다는 것을, 작품 말미의 라스콜니코프가 말해주기 때문이었다.
#17.
“아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라주미힌이 점점 더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제가 저놈들이 거짓말을 지껄이는 것 때문에 이런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요! 저는 저놈들이 저렇게 거짓말을 지껄일 때가 좋습니다! 거짓말은 모든 유기체 앞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보유한 특권이거든요. 거짓말을 지껄이다가 진리에 도달하는 법! 나는 인간이므로 거짓말을 지껄이노라. 우선 열네 번쯤, 아니 백열네 번쯤 거짓말을 지껄이지 않고는 단 하나의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하거니와 이건 그 나름대로 훌륭한 일이죠. 하지만 우리는 자기머리로는 거짓말을 지껄일 줄도 모른단 말입니다! 자, 나에게 거짓말을 지껄이되 제발 좀 자기 식으로 지껄여 봐라, 그러면 내 너에게 키스를 해 주마. 자기 식으로 거짓말을 지껄이는 것이 무작정 남을 따라하는 진리보다 거의 더 낫다고 할 수 있지요. 전자의 경우에는 인간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겨우 앵무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진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생명은 때려잡을 수도 있고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었죠. 자, 그럼, 지금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전부, 전부 다 예외 없이 과학과 발전과 사유와 발명과 이상과 소망과 자유주의와 경험과 모든, 모든, 모든, 모든, 모든 분야에서 아직 김나지움의 예과 1학년 수준에 머물러 있잖습니까! 남의 머리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가 먹혀 버린 거죠! 그렇잖습니까?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라주미힌은 두 여인의 손을 꼭 잡고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렇잖습니까?”
“세상에,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가엾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했다.
“그야 그렇지요, 예…… 물론 전부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이런 말을 진지하게 덧붙이며 당장 비명을 질렀는데, 그가 이번에 그녀의 손을 너무 우악스럽게 움켜쥐어 정말 아팠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별로 라주미힌의 견해에는 찬성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식과 사상은 내가 관찰하기로는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경험에서 비롯한 귀납적 추론이 모이고 다양한 견해가 붙으면서 완성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달의 과정에서 거짓말이 첨가되는 경우 그러한 지식 혹은 사상이란 현실을 잘 기술할 수 없는 형태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거짓말을 첨가하여 이론의 완성을 방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론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 아닐까?
#18.
라스콜니코프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를 어디로 몰아붙이려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자신의 논문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제 논문의 내용이 완전히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솔하고 겸손하게 말을 시작했다. “하긴, 솔직히 말해, 당신은 내용을 거의 정확하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달까요…….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정확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유쾌한 모양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오로지, 저는 당신의 말씀처럼 비범한 사람은 항상 온갖 무법 행위를 자행해야 되고 반드시 그럴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제 생각으론 그런 논문이라면 아예 발표도 못하게 했을 것 같군요. 저는 그저 ‘비범한 사람’이 모종의 권리를 갖는다고…… 다시 말해 공식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 스스로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한……. 어떤 장애물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다고 암시했을 따름이며, 더욱이 오로지 자신의 사상(때로는 전 인류에게 구원적인 것 될 수도 있고요.)을 실행하는데 그것이 요구될 경우에만 그렇다는 겁니다. 제 논문이 불분명하다고 말씀하시는데요, 가능한 한 명확히 정리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저의 어림짐작으로는 당신도 그러길 바라시는 것 같으니, 예, 좋습니다. 제 생각에, 케플러나 뉴턴의 발견이 어떤 복잡한 요인 때문에 그 발견에 방해가 되거나 그 여정에 장애물처럼 서 있는 사람, 한 명이든 열 명이든 백 명이든 하여간 그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면, 뉴턴은 자신의 발견을 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 이 열 명 혹은 백 명을…… 제거할 권리가 있으며 심지어 그럴 의무마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뉴턴이 이놈 저놈 아무나 내키는 대로 죽이거나 시장에서 매일 도둑질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아가, 제 기억으로, 제가 그 논문에서 개진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뭐, 예컨대, 아주 고대부터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입법자나 제정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범죄자였다, 새로운 법률을 내놓고 그럼으로써 사회에서 신성시되고 자자손손 대대로 전해져 온 오랜 법률을 파괴하고, 유혈 사태가 (때로는 오랜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아무 죄 없이, 떳떳하게 행해진 유혈 사태도 있지만) 자기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물론 그 피 앞에서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범죄자였다, 라는 겁니다. 이런 인류의 은인과 제정자들 대부분이 유달리 소름끼치는 살인마였다는 사실은 실로 주목할 만하죠. 한마디로, 저의 결론인즉, 위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궤도에서 조금이라도 일탈한 사람들, 즉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말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 본성상 반드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쨌거나 그렇다, 라는 겁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는 궤도에서 일탈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궤도에 머물러 있는 것도 그 본성상 동의할 수 없고, 제 생각으론, 동의하지 않을 의무마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보시다시피, 지금까지는 여기에 특별히 새로운 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내용은 천 번은 족히 쓰였고 또 읽혔지요. 사람들을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한 것에 관한 한, 다소간 자의적이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실 제가 정확한 수치에 근거하여 주장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저는 다만 저의 주된 사상을 믿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급 부류(평범한 사람들), 즉 오로지 자신과 비슷한 자들을 생산하는 데만 기여하는, 말하자면 재료이며,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사람들, 즉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세분하자면 물론 끝도 없겠지만, 두 부류를 구분 짓는 특징은 상당히 명확합니다. 첫 번째 부류, 즉 재료는, 대체적으로 말해, 그 본성상 보수적이고 점잖은 데다가 순종하며 살고 또 순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은 순종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사명이며 그런다고 굴욕감을 느낄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전부 법률을 넘어서는 자들, 그 능력에 따라 파괴자이거나 그런 경향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대게의 경우, 그들은 극히 다양한 성명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범죄는 물론 상대적이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극히 다양한 성명을 통해 보다 더 나은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것을 파괴하길 요구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념을 위해 시체라도, 피라도 뛰어넘어야 한다면 그는, 제 생각으로는, 내면의 양심에 따라 스스로에게 피를 뛰어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으되 그건 어디까지나 이념과 그것의 규모에 따른 것이라는 점 – 이 점을 유념하십시오. 오직 이런 의미로 저는 제 논문에서 범죄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논하는 겁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의 논의는 법률적인 문제에서 시작됐잖습니까.) 그래도 많이 불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대중은 그들의 이러한 권리를 거의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그들을 처형하고 목매달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그로써, 완전히 옳은 일인데, 자신의 보수적인 사명을 이행하는 반면, 다음 세대에 가서는 바로 그 대중이 처형된 자들을 단상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경배하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첫 번째 부류는 항상 현재의 주인이며 두 번째 부류는 미래의 주인입니다. 전자는 세계를 보존하고 수적으로 증대시킵니다. 후자는 세계를 움직이고 목표를 향해 이끌고 갑니다. 이쪽저쪽 다 존재할 권리를 완전히 똑같이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 논문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며 vive la guerre eternelle (영원한 투쟁 만세)라고 할 만하죠, 물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할 때까지만!”
“그럼 어쨌거나 새 예루살렘을 믿으시는군요?”
“예, 믿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확고하게 대답했다 이 말을 하면서, 또 자신의 기나긴 일장연설이 진행되는 내내 그는 양탄자의 한 지점을 골라 그렇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그-럼 신도 믿으십니까? 실례지만 궁금해지는군요.”
“예, 믿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말을 반복하며 포르피리를 향해 눈을 들어 올렸다.
“그-그럼 라자로의 부활도 믿으십니까?”
“믿-믿습니다. 왜 그런 것을 자꾸 물어보시죠?”
“문자 그대로 믿으십니까?”
“예, 문자 그대로.”
“그렇군요…… 그냥 궁금해져서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말이죠, 아까 그 문제로 돌아가자면, 사실 그들이 항상 처형된 건 아니잖습니까.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살아생전에 승승장구한다? 아, 예, 어떤 자들은. 살아생전에 목적을 달성하고 그때는…….”
“그들 쪽에서 처형하기 시작한다는 건가요?”
“필요할 경우에는 심지어 대부분이 그럴걸요. 대체로 당신의 지적은 예리하군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또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대체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죠? 태어날 때 무슨 표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예? 제 말인즉,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정확한 특징이, 말하자면 보다 더 외적으로 명확한 특징이 있어야 할 것 같거든요. 실제적이고 호의적인 인간으로서 자연스레 이런 불안을 갖는 점, 좀 양해해 주시고요, 어쨌거나 이 경우에는 예컨대 특수한 옷을 마련해 준다거나 뭐 저어기 무슨 낙인을 찍어 준다거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인정하시겠지만, 혹시 몽땅 뒤죽박죽돼서 한쪽 부류의 사람이 자기는 다른 쪽 부류에 속한다고 상상하여, 당신이 극히 적절히 표현하신 대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기 시작하면 그 경우에는 그야말로…….”
“오, 그거야말로 극히 자주 일어나는 일이죠! 당신의 그 지적은 방금 전보다 더 예리한데요…….”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런 실수는 오직 첫 번째 부류, 즉 ‘평범한 사람’ (이 명칭이 썩 적절치 않은지도 모르겠군요.) 부류에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들은 타고나길 순종적인 경향을 띠지만 그럼에도, 암소도 더러 보이는 자연의 장난기로 인해 그들 중 극히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선각자로, ‘파괴자’로 상상하길, ‘새로운 말’을 내뱉으려 안달하길 좋아합니다, 더군다나 그야말로 진심으로 말이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작 새로운 자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심지어 사고방식이 비굴한 구닥다리로 취급하며 경멸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 경우에 그다지 큰 위험이 있을 리도 없고 사실 당신이 걱정하실 건 전혀 없는데요, 그들은 절대 멀리 나가지 못하거든요. 그들이 지나치게 몰입하면 자기 분수를 알라고 더러 채찍질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이 경우에는 숫제 집행자도 필요 없습니다. 워낙에 착실한 자들이라, 그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채찍질할 테니까요. 어떤 자들은 서로를 위해 이 수고를 덜어 줄 것이고, 또 어떤 자들은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할 테고요…… 그러면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여러 방식으로 회개하기 때문에 결국 아름답고 교훈적인 결과가 나오고, 한마디로, 당신이 걱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것도 그 나름의 법칙이죠.”
“그럼, 적어도 그쪽으론 저도 얼마간은 안심이 됩니다. 하지만 또 큰 문제가 있군요. 저어기 말이죠, 다른 사람들을 찔러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 즉 저 ‘비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저야 물론 얼마든지 경배할 용의가 있지만, 사실 그런 자들이 아주 많으면 기분이 상당히 더럽지 않을까요, 그렇잖습니까, 예?”
“오, 그 점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똑같은 어조를 말을 이어 갔다. “대체로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뭐든 조금이나마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례적일 만큼 적게 태어납니다,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적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부류와 세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태어나는 질서가 필경 어떤 자연법칙에 따라 극히 확실하고 정확하게 규정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물론 지금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는 그것이 분명히 존재하며 나중에는 밝혀질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거대한 인간 집단, 즉 재료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침내 어떤 노력을 통해, 또 지금도 신비에 싸인 어떤 과정, 즉 종족과 이족의 교배 같은 것을 통해 열심히 애를 써서 뭐, 천 명에 한 명이라도 다소나마 자주적인 인간을 낳기 위해서입니다. 보다 폭넓은 자주성을 갖춘 자는 아마 만 명에 한 명쯤 (일목요연하도록 대충 예를 들어 말하는 겁니다.) 태어날까 말까겠지요. 천재적인 사람은 백만 명에 한 명쯤, 위대한 천재나 인류의 완수자는 아마 지구상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거쳐 간 다음에야 한 명쯤 나올까 싶군요. 한마디로, 이 모든 작용이 일어나는 증류기 속을 제가 직접 들여다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정한 법칙은 반드시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이 경우,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지금 둘이 뭐야, 농담 따 먹기 하냐?” 라주미힌이 마침내 소리를 질렀다. “서로를 속여 먹는 중인가, 어? 마주 앉아서 서로를 놀려 먹고 있잖아! 너, 진담이야, 로쟈?”
라스콜니코프는 창백하고 거의 서글픈 얼굴을 말없이 들어 그를 쳐다볼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라주미힌은 슬픔에 잠긴 이 조용한 얼굴과 나란히 공존하는, 포르피리의 거침없고 집요하고 신경질적이고 무례한 독살스러움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야, 그래, 그게 정말로 진담이라면……. 이것이 새로울 것도 없고 우리가 천 번은 족히 읽고 들은 것과 전부 비슷하다고 한 네 말은 물론 옳아. 하지만 이 모든 얘기에서 정말로 독창적인 것, 정말로 너만의 전유물인 것은, 나로서는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일인데, 그건 어쨌거나 양심에 따라 피를 허용한다는 점, 미안하지만, 더군다나 그토록 광신적이라는 점이야…….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네 논문의 주된 사상인 셈이지. 실상 이렇게 양심에 따라 피를 허용하는 것은, 이것은….. 이것은 내 생각에는,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유혈을 허용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야…….”
“정말 옳은 말씀, 더 무섭고말고.” 포르피리가 응수해 주었다.
“아니, 어쩌다 그만 흠뻑 빠진 거야! 여기에는 오류가 있어. 한번 읽어 봐야겠는걸……. 너는 너무 흠뻑 빠져 버렸어! 네가 그렇게 생각할 리 없는데……. 아무래도 한번 읽어 봐야겠다.”
“논문에는 그런 내용은 전혀 없어, 거기에는 그냥 암시만 있을 뿐이야.”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포르피리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이제는 당신이 범죄를 어떤 시각으로 보시는지 거의 분명히 알겠습니다만…… 이렇게 끈덕지게 굴어서 죄송하네요. (왜 이렇게 폐를 끼치는지, 원, 저 스스로도 창피하군요!) 아시다시피, 아까 두 부류가 실수로 그만 뒤섞일 경우에 관해서는 덕분에 저도 몹시 안심이 됐지만…… 여기서 이런저런 실제적인 경우들이 여전히 또 마음에 걸리는군요! 뭐, 어떤 사내 녀석이나 젊은 녀석이 자기가 리쿠르고스나 마호메트라고 – 물론 미래에 그리 될 거라고 – 상상하여…… 그렇게 되기 위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머나먼 원정이 임박했고 그 원정에는 돈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뭐, 원정을 위해 이것저것 손에 넣기 시작할 테고…… 아시겠죠?”
한구석에 앉아 있던 자묘토프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 경우가 정말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리석고 허영심 많은 자들이라면 특히나 더 그런 술수에 잘 걸려들죠. 젊은 층은 특히나 더.”
“거 보십시오. 그럼 어떡합니까?”
“그냥 그런 거죠.” 라스콜니코프가 피식 웃었다. “그게 제 잘못은 아니니까요. 그냥 그런 거고 항상 그럴 겁니다. 방금 이 녀석은 (그는 라주미힌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제가 피를 허용한다고 말했잖습니까. 아니, 그래서 뭐요? 사회에는 유형이니 감옥이니 예심판사니 강제 노동이니 징역이니 하는 것이 얼마든지 갖춰져 있는데,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도둑이나 찾아보시죠……!”
“그래서 찾아낸다면?”
“그쪽이 그자의 길이죠.”
“참 논리적이시군요. 그럼, 그의 양심은?”
“아니,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뭐, 그냥, 인도적인 차원에서 물어보는 겁니다.”
“양심이 있는 자는, 자신의 오류를 의식한다면, 괴로워하겠죠. 이게 그에겐 벌입니다, 징역과는 별개로.”
“그럼, 정말로 천재적인 자들은” 하고 라주미힌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남을 찔러 죽여도 되는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 그자들은 자기가 초래한 유혈에 대해서도 전혀 괴로워하지 말아야 된단 말이야?”
“대체 왜 여기에 말아야 된다라는 말이 들어가지? 여기에는 허용도, 금지도 없어. 희생양이 불쌍하면 괴로워하라 그래……. 폭넓은 의식과 심오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고뇌와 고통은 항상 필수적인 법이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이라면, 내 생각으로는, 세상의 위대한 슬픔을 느끼지 않으면 안 돼.” 그는 갑자기 생각에 잠긴 듯 이렇게 덧붙였는데,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어조도 아니었다.
그는 눈을 들어 올려 생각에 골몰한 표정으로 일동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학생모를 집어 들었다. 아까 들어올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침착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다들 일어섰다.
“뭐, 저를 욕하실지, 화를 내실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참을 수가 없군요.” 포르피리 페트로비치가 또 말을 종합했다. “하나만 더 여쭤보고 싶은데요 (정말 폐를 끼치는군요! 그저 자그마한 생각 하나를 슬쩍 비추어 봤으면 싶어서요, 오로지 그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좋습니다, 그 생각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죠.” 라스콜니코프는 진지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선 채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표현해야 더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라는 것이 너무나 장난스럽고…… 심리적인 것이라서…….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논문을 쓰실 무렵, 혹시 당신 자신을 그러니까, 헤-헤, 뭐, 아주 조금이라도 ‘비범한 사람’으로, 새로운 말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리는 없을까요, – 즉 당신이 말씀하신 그 의미로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랬을 수 있죠.” 라스콜니코프가 경멸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라주미힌이 몸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혹시 당신 스스로 모종의 결심을, 그러니까 저어기 무슨 생활상의 애로 사항과 압박 때문이든 어떻게든 인류 전체에 공헌하기 위해서든 여하튼 장애물을 뛰어넘기로 결심했을 리는 없을까요……? 뭐, 예를 들면 살인이나 강도나……?”
그러고서 그는 어쩐지 갑자기 또 왼쪽 눈을 찡긋하며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는데, 아까와 똑같았다.
“만약 그렇게 뛰어넘었더라면, 물론, 당신에게 말하지는 않았겠죠.” 도전적이고 오만한 경멸이 담긴 어조로 라스콜니코프가 대답했다.
“아니, 저는 그냥, 원래 당신의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관심을 보였을 따름입니다, 오직 학적인 의미에서…….”
‘쳇, 속이 빤히 보이는 뻔뻔한 수작이군!’ 라스콜니코프는 혐오감을 느끼며 이렇게 생각했다.
“한 말씀 드리자면” 하고 그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저는 스스로를 마호메트나 나폴레옹 같은 인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 비슷한 어떤 인물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저 자신이 그들이 되지 않는 이상 제가 어떻게 행동했을지 만족스러운 설명을 해 드릴 수 없군요.”
“뭐, 됐습니다, 지금 우리 루시에서 스스로를 나폴레옹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포르피리는 갑자기 소름 끼치도록 허물없는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그 목소리의 억양에도 뭔가 유달리 분명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라스콜니코프의 주장은 결국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어떤 이들의 ‘범죄’를 옹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의 주장에서는 크게 2가지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그는 우선 사람들을 두 부류로 범주화하는 실수를 범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비범하지 않은 사람’인가? 그런 기준을 나눌 수 있는가? 애초에 그러한 기준 자체가 너무 주관적이지 않은가? 라스콜니코프는 명확한 기준은 자신이 제시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기준은 존재하는 것 같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 지점이 그의 믿음이다. 즉, 라스콜니코프의 이론은 바로 이러한 규범화하기 어려운 것에 대하여 굳이 규범화를 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에서부터 모든 것이 일그러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라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성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가?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각자의 경험과 환경에 의하여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의 스펙트럼이란 매우 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분류에 관해서는 이분법적인, 그리고 명확하게 구분되는 어떠한 지각적인 작용 보다는 보다 폭넓은 시각이 요구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각적으로 선을 긋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한 선을 긋는 행위 – 즉 정확히 경계선이 나누어진다고 믿는 행위란 실제와 맞지 않으므로 많은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라스콜니코프는 애초에 현실과 맞지 않은, 무리한 지각의 출발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구축했으므로 현실과 오류를 낳은 것이다.
둘째로 그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비범한 사람’이 그의 대의(大義)를 행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어, 불가피하게 박해하지 않을 수 없는 ‘비범하지 않은 사람’이 생기는 경우 ‘비범한 사람’은 그 양심과 판단에 따라 그러한 박해를 허용해도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질문은 이것이다. ‘비범한 사람’은 ‘대의’를 행한다면 ‘비범하지 않은 사람’에게 박해를 해도 되는가? 라스콜니코프의 대답은 ‘그렇다’이고, 아마 그 근거는 그 박해자가 ‘비범한 사람’이며 ‘대의’를 행하기 때문에, ‘비범하지 않은 사람’을 조금 박해하더라도 그 ‘대의’의 실현으로 인해 얻는 전 인류적 이익이 그 사람에 대한 박해로 인해 형성되는 손해를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라는 것일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라는 논리가 옳은가 – 라는 그 부분에 있다. 소의 희생이 대를 위하여 항상 강요되는 것은 결국 다수에 의한 폭력일 뿐이지 않은가? 소의 의견이 무시되는 사회가 항상 옳은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는가? 라스콜니코프의 논리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내적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다. 이 질문을 던져서 나는 그의 논리가 역사적으로 이미 틀렸음이 검증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수의 폭동, 다수에 의한 압제, 다수에 의한 의사결정절차의 한계에 관하여 우리는 너무 많은 역사적 실증을 보지 않았던가. 심지어 개중에는 로마의 경우가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경우도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러한 역사적 실증을 일부러 보지 않았던 것일까?
#19.
라스콜니코프는 곧장 소냐가 사는 운하 위의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낡은 3층짜리 초록색 건물이었다. 그는 문지기를 찾아내어 재봉사 카페르나우모프가 어디에 사는지 대충 알아냈다. 마당 한쪽 구석에 비좁고 어두운 계단으로 이어지는 출구가 있는 것을 발견하자, 마침내 2층으로 올라가 마당 쪽에서 그 층을 두르고 있는 복도로 나갔다. 카페르나우모프 집의 출구가 어딜까 기웃거리며 어둠 속을 헤매는 동안, 갑자기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문이 하나 열렸다. 그는 기계적으로 그 문을 붙잡았다.
“거기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불안에 떨며 물어 왔다.
“접니다……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자그마한 현관으로 들어섰다. 거기 망가진 의자 위에 놓인 찌그러진 놋쇠 촛대에는 촛불이 밝혀져 있었다.
“당신이었군요! 맙소사!” 소냐는 가냘픈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우뚝 섰다.
“당신 방은 어디죠? 이쪽인가요?”
그러고서 라스콜니코프는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소냐도 촛불을 들고 들어와 촛불을 내려놓고 그의 앞에 섰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고 어쩔 줄 몰라 절절매는 모습이 그의 뜻밖의 방문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확 붉어졌고 눈에는 눈물마저 고였다……. 그녀는 메스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빨리 몸을 돌려,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동안에 힐끔 방을 훑어볼 수 있었다.
방은 크기는 컸지만 천장이 굉장히 낮았으며 카페르나우모프 가족이 내준 유일한 셋방으로서 그 집으로 통하는, 왼쪽 벽의 문은 잠겨 있었다. 맞은편의 오른쪽 벽에도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역시나 항상 굳게 잠겨 있었다. 그곳은 아예 다른 사람 집으로 호수도 달랐다. 소냐의 방은 어쩐지 창고 같았고 몹시 비뚤한 사각형 모양이어서 방 자체가 어딘가 불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운하 쪽으로 세 개의 창문이 나 있는 벽은 어쩐지 방을 비스듬히 잘라 놓았고, 그 때문에 한쪽 구석은 지나친 예각이 되어 어딘가로 깊숙이 푹 꺼져 버렸고 흐릿한 불빛 아래서는 잘 분간도 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쪽 구석은 아예 너무도 흉한 둔각이 돼 버렸다. 이 커다란 방 안에 가구는 거의 없었다. 오른쪽 구석에 침대가 있고 그 옆, 문 가까이에 의자가 있었다. 침대가 있는 벽 쪽, 남의 집으로 통하는 문 바로 옆에는 푸른 식탁보를 씌워 놓은, 허름한 판자를 엮어 만든 탁자가 있었다. 탁자 주위에는 두 개의 왕골 의자가 있었다. 그다음, 맞은편 벽, 예각을 이루는 구석에서 가까운 쪽에 크지 않은, 허름한 목재 장롱이 허공 속에 묻힌 양 서 있었다. 이 정도가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누르스름한 벽지는 구석구석이 시커메져 있었다. 분명히 겨울이면 습기가 차고 탄산가스가 배어들기 때문이리라. 눈에 훤히 보이는 가난이었다. 오죽하면 침대에 커튼도 없었다.
소냐는 그토록 유심히, 또 염치없이 방 안을 뜯어보고 있는 손님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무서워하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지요……. 11시인가요?” 그는 이렇게 물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향해 눈을 들지는 못했다.
“그래요.” 소냐가 중얼거렸다. “아, 예, 그렇군요!” 그녀는 여기에 자기가 빠져나갈 출구라도 있는 양 갑자기 서둘러 댔다. “방금 주인댁의 시계가 울렸고…… 나도 들었어요……. 그래요.”
“마지막으로 온 겁니다.” 지금 처음 온 것임에도 라스코리코프는 음울한 얼굴로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을 더 이상 못 볼지도 모르겠어요…….”
“어디…… 가세요?”
“모르겠어요…… 내일이면 전부 다…….”
“그럼 내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댁에도 못 오시나요?” 소냐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르겠어요. 전부 다 내일 아침에…….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실은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생각에 잠긴 시선을 들어 올렸고, 그러다 갑자기 자기는 앉아 있는데 그녀는 계속 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 왜 서 있어요? 앉아요.” 그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앉았다. 그는 상냥한, 거의 연민이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잠깐 동안 바라보았다.
“왜 이리 말랐을까! 이 손 좀 봐요! 완전히 투명하군요. 손가락은 죽은 사람 같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냐는 가냘픈 미소를 지었다.
“항상 이랬는걸요.” 그녀가 말했다.
“집에 살 때도?”
“예.”
“하긴 물론 그랬겠죠!” 그는 툭툭 끊기는 말투로 말했는데, 얼굴 표정과 목소리가 갑자기 또다시 바뀌었다. 그는 한 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카페르나우모프에게 방을 빌려 쓰는 건가요?”
“예…….”
“저들은 저쪽, 저 문 건너편에 삽니까?”
“예……. 저쪽에도 똑같은 방이 있어요.”
“온 식구가 한 방에?”
“예, 그래요.”
“나라면 이 방에 있으면 밤에는 무서울 것 같군요.” 그가 음울하게 지적했다.
“주인들이 아주 좋아요,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에요.” 소냐는 이렇게 대답했는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상황이 잘 납득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가구도 전부…… 모든 것이 주인 거예요. 아주 착한 사람들이에요, 아이들도 종종 나한테 놀러 오고…….”
“그 말더듬이 부부 말이죠?”
“예……. 그분은 말을 더듬고 다리도 절어요. 아내도 그렇죠……. 더듬는다기보다는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요. 아주 착한 여자예요. 남편은 옛날에는 문지기였어요. 아이들은 일곱인데…… 맏아들만 말을 더듬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몸이 좀 약할 뿐…… 말을 더듬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분들 얘기를 알고 있는 거죠?” 그녀가 다소 놀라며 덧붙였다.
“당신의 아버지가 그때 모두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당신 예기를 전부 해주셨죠……. 당신이 6시에 나가서 8시가 지날 무렵 돌아왔다는 얘기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의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얘기도.”
소냐는 당혹스러워했다.
“나는 오늘 꼭 그분을 뵌 것 같았어요.” 그녀가 주저하며 속삭였다.
“누구를요?”
“아버지 말이에요. 그쪽 근처 골목, 거리를 걷고 있는데, 9시가 좀 지났을까, 아버지가 앞에서 걸어가시는 것 같더라고요. 어찌나 아버지 같던지. 원래 카체리나 이바노브에게 들를 생각이었는데…….”
“그냥 걷고 있었나요?”
“예.” 소냐가 툭툭 끊기는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또다시 당혹스러워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을 거의 때리다시피 했다면서요, 아버지 집에 살 때?”
“아휴, 아니에요, 무슨 말씀,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에요!” 소냐가 왠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분을 좋아합니까?”
“그분요? 그야 물-론-이-죠!” 소냐는 애처롭게 말끝을 길게 빼고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며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아휴! 당신은 그분을……. 당신이 알기만 한다면. 사실 완전히 어린애 같은 분이거든요……. 정신이 완전히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요…… 너무 괴로워서요. 원래는 참 현명하고…… 마음도 참 넓고…… 참 착했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휴!”
소냐는 이 말을 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흥분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두 손을 비벼 댔다. 그녀의 창백한 뺨이 또다시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에는 고뇌의 빛이 어렸다. 그녀 내부에 쌓여 있던 것이 너무나 많은 자극을 받은 탓에 뭔가를 표현하고 말하고 또 옹호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어떤 채워지지 않는 연민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갑자기 그녀의 얼굴선 하나하나에 어리었다.
“때렸다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상에, 때렸다니! 설령 때렸다고 한들, 아니, 그래서요!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얼마나 불행한 분인데, 아휴, 정말 너무 불행한 분이에요! 몸도 편치 않고……. 그분은 정의를 추구해요……. 순결한 분이죠. 모든 일에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고 또 그걸 요구하고……. 그분은 남이 아무리 괴롭혀도 정의롭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거에요. 그분은 세상만사가 왜 마냥 정의로울 수는 없는지 깨닫지 못하고 그래서 짜증을 내는 거예요……. 어린애, 어린애 같다니까요! 그분이 정의로운, 정의로운 분이니까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될까요?”
소냐는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저들은 당신에게 매달려 있잖아요. 사실 그 전에도 계속 그랬고, 고인은 술값을 얻으려고 당신을 찾아가곤 했죠. 자, 그럼 이제는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어요.” 소냐가 슬픈 듯 말했다.
“저들은 그 집에 계속 있을 건가요?”
“모르겠어요, 식구들은 그 집에 있어야 하는데, 주인아주머니는 오늘 내쫓고 싶다고 말했고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또 자기도 일 분도 더 있고 싶지 않다고 말한 모양이에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호기를 부리는 거죠? 당신을 믿는 건가요?”
“아휴, 아니에요, 그렇게 좀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한가족이고 같이 살고 있는 걸요.” 소냐는 갑자기 또 흥분하고 짜증까지 냈는데, 그 모습이 카나리아나 그렇게 작은 무슨 새가 성질을 부리며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정말 그분은 어떻게 해야 되죠? 예,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녀가 열을 올리고 흥분하며 물었다. “오늘 그분은 얼마나,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정신도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알아채지 못했어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요. 내일은 모든 것이 점잖아야 하고 음식도 있어야 한다면서 어린애처럼 불안에 떠는가 하면…… 또 계속 두 손을 비벼대고 피를 토하고 울고 갑자기 절망에 찬 듯 머리를 벽에 찧기 시작하죠. 그런가 하면 또 위안을 얻고 줄곧 당신만 믿고 있어요. 이제 당신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어디서든 돈을 좀 빌려 나와 함께 고향 도시로 가서 귀족 처자들을 위한 기숙사를 설립하고 나를 사감으로 쓸 것이고 우리에겐 완전히 새롭고 아름다운 삶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입을 맞추고 껴안고 위로를 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다니까요! 이런 공상을 굳게 믿고 있어요! 아니, 이런 분한테 무슨 반박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도 오늘도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수선하고 가뜩이나 힘도 없는 양반이 혼자서 빨래통을 방 안으로 끌고 들어오고, 결국 숨을 헐떡이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어요. 안 그래도 아침에는 나와 함께 시장을 다녀왔는데, 폴레치카와 레냐의 신발이 너무 닳아서 새로 사려고요. 다만, 계산을 해 보니 우리 돈이 모자라는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많이 모자랐죠. 한데 그분은 너무 귀여운 신발을 고른 거예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보는 눈이 있는 양반이거든요……. 대뜸 상점 안에서, 상인들도 다 있는 데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지 뭐예요, 돈이 모자란다고……. 아휴, 그냥 보기도 어찌나 딱하던지.”
“뭐, 그렇게 나오니 알 만하군요, 당신이…… 왜 이렇게 사는지.” 씁쓸한 냉소를 보이며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그럼 딱하지 않나요? 딱하지 않냐고요?” 소냐가 또다시 달려들었다. “당신도, 당신이야말로 아무것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것까지 내주었잖아요, 나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봤더라면, 오, 맙소사! 그분이 나 때문에 얼마나,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지난주만 해도! 아, 나도 참! 아버지가 돌가시기 겨우 일주일 전이었어요. 정말 매정하게 굴었지 뭐예요! 그것도 여러 번이나 그랬어요. 아휴, 지금도 하루 종일 그 일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파 죽겠어요!”
소냐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 마음이 아파서 말을 할 때도 두 손을 비벼 댔다.
“그러니까 당신이 매정했다고요?”
“예, 내가, 내가 그랬다고요! 내가 그때 가니까” 하고 울면서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요. ‘이거 좀 읽어다오, 소냐, 왠지 머리가 아프구나……. 여기 이 책 좀 읽어 주렴.’ 아버지에게는 어떤 책이 있었는데,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즉 같은 집에 사는 레베쟈트니코프에게 빌려 오신 것이었어요, 항상 그렇게 웃긴 책을 빌려 오셨죠. 나는 ‘그만 가 봐야겠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냥 읽어 주기도 싫은 데다가 집에 들른 이유도 무엇보다도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에게 옷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거든요. 장사를 하는 리자베타가 나에게 옷깃과 덧소매를 헐값에 가져왔는데, 당초무늬가 들어간, 훌륭한 새 물건이었어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그게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 달아 보고는 거울에 비추어 보더군요, 정말, 정말 마음에 들었던 거죠. ‘이거, 나 주렴, 소냐, 제발.’ 제발 하고 부탁했으니 정말 탐이 났던 거예요. 하지만 그걸 달고 뭘 하겠어요? 그냥 행복했던 옛날이 떠오를 뿐이겠죠!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며 도취되지만, 그분에게는 멀쩡한 원피스는커녕 아예 물건이랄 것이 전혀 없는걸요, 더욱이 벌써 몇 년째! 그래도 절대 누구에게 뭐 하나 부탁하는 법이 없는 분이에요. 워낙 오만한 성격이라 차라리 마지막 남은 것마저 내줄 분이지만,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부탁을 하더라고요,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나도 그냥 주고 싶었지만 ‘이걸 어디다 쓰시려고요,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라고 말해 버렸어요. 예, ‘어디다 쓰시려고요.’라고 했지 뭐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분은 그냥 나를 바라볼 뿐이었는데, 내가 거절한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나 봐요, 보기도 딱하더라고요…… 옷깃 때문이 아니라 내가 거절했기 때문에, 또 내가 봤기 때문에 괴로웠던 거죠. 아휴, 이제라도 전부 되돌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전에 한 모든 말을 바꿀 수 있다면…… 이런, 나도 참…… 이게 뭐람……!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인데!”
“그 장사하는 리자베타를 알고 있었단 말이죠?”
“예……. 설마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다소 놀라며 소냐가 되물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는 폐병에 걸렸어요, 그것도 지독하게. 곧 죽을 테죠.” 라스콜니코프가 잠깐 침묵했다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저런, 아니,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소냐는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그의 두 손을 꼭 잡았는데, 꼭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애원하는 것 같았다.
“사실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아니에요, 낫기는 뭐가 더 나아요!” 그녀는 경악한 나머지 무턱대고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럼 아이들은? 그때는 저 아이들을 어디다 맡길 건가요, 당신이 직접 거두지 않는다면?”
“아, 모르겠어요!” 소냐가 거의 절망에 사로잡혀 이렇게 소리치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 스스로도 벌써 수없이 이런 생각에 시달렸음이 분명했고, 그는 그저 이 생각을 또 화들짝 일깨웠을 따름이었다.
“그럼 지금처럼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있는 상황이라도 당신이 병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가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그가 무자비하고 집요하게 나왔다.
“아휴,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소냐의 얼굴이 섬뜩한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있을 수 없다니요?” 라스콜니코프가 잔인한 냉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라고 뭐가 보장된 것도 아니잖아요? 그때는 저들은 어떻게 될까요? 온 식구가 몽땅 거리에 나앉을 테고, 부인은 연신 기침을 해 대며 구걸하고 오늘처럼 어디 벽에 머리를 찧을 테고 아이들은 울고불고…… 그러다 쓰러지면 경찰서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죽을 테고 아이들은…….”
“아, 아니에요……!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거예요!” 결국, 소냐의 미어터질 것 같은 가슴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모든 것이 그에게 달려 있는 양 무언의 간청을 담아 두 손을 꼭 모아 쥔 채 귀를 기울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일 분 정도가 지났다. 소냐는 무서운 우수에 젖어 두 손과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서 있었다.
“저축은 할 수 없나요? 힘들 때를 대비해 따로 좀 떼 둔다거나?” 그가 갑자기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니요.” 소냐가 속삭였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시도는 해 봤던가요?” 그가 거의 냉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예, 시도는 해 봤어요.”
그러고서 또다시 그는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일 분 정도가 더 지났다.
“매일 받지는 않는 거죠?”
소냐는 아까보다 더 당황하며 또다시 얼굴을 확 붉혔다.
“예.”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며 마지못해 속삭였다.
“폴레치카도 분명히 똑같은 신세가 될걸요.” 그가 갑자기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럴 리 없어요, 절대로!” 절망에 사로잡힌 소냐는 갑자기 칼에 베인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그런 끔찍한 일은 용납하지 않으실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용납하시죠.”
“아니, 아니에요! 그 애는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거예요, 하느님께서……!” 그녀가 앞뒤를 잃고 되뇌었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은 아예 없을지도 몰라요.” 라스콜니코프는 어떤 심술궂은 쾌감마저 느끼며 이렇게 대답하고는 웃으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소냐의 얼굴이 무섭도록 심하게 변했고 그 위로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책망이 담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갑자기 서럽고 또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말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어요.” 얼마간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오 분 정도가 지났다. 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말없이 계속 앞뒤를 서성였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더니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건조하게, 날카롭게 이글거렸으며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재빨리 온몸을 숙여 마룻바닥에 엎드리더니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소냐는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미친 사람을 피하듯 뒤로 움찔 물러났다. 정말로 그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무슨 짓이에요? 나 같은 사람에게!”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이렇게 중얼거렸는데, 갑자기 가슴이 너무도 아프게 되어 왔다.
그는 당장 일어났다.
“나는 당신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고통 앞에 절을 한 거야.” 그는 어쩐지 기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는 창문 쪽으로 물러났다.
“들어 봐.” 곧 되돌아온 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아까 나를 모욕한 어떤 놈에게 말해 줬어, 당신의 새끼손가락만 한 가치도 없는 놈이라고…… 또 오늘 내 여동생에게 당신과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했다고.”
“아휴, 왜 그런 말을 했어요! 그것도 동생분이 있는 자리에서?” 소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나와 나란히 앉다니! 영광이라니! 아니, 나는……. 치욕스럽고…… 죄 많은, 정말 죄 많은 여자인걸요! 아휴, 왜 그런 말을 했어요!”
“당신을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치욕과 죄악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그 크나큰 고통 때문이야. 당신이 죄 많은 여자라는 건, 그건 그렇지.” 그가 거의 열광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죄인인 것은 무엇보다도 아무 쓸모없이 스스로를 죽이고 배반했기 때문이야. 이거야말로 끔찍한 일 아닐까! 자기가 그토록 증오하는 진흙탕 속에 살면서 동시에 (눈만 똑바로 뜬다면) 그래 본들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고, 또 아무도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더 잘 아는 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니냔 말이야! 그리고 끝으로 말이야.” 하고 그가 거의 미친 듯 흥분하여 말했다. “이따위 치욕과 천함이 당신의. 내부에서 어떻게 정반대되는 다른 성스러운 감정들과 공존할 수 있는 거지? 차라리 곧장 물속에 몸을 던져 단번에 끝장을 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것이 천배는 더 정의롭고 더 이성적이지 않을까 말이야!”
“그럼 저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소냐가 고통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힘없이 물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제안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녀에게도 이미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절망에 빠진 나머지 단번에 끝장을 내 버리자고 수도 없이, 또 진지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을 것이며,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지금 그의 제안에 거의 놀라지도 않은 것이리라. 그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인지하지 못했다.(그의 질책과 그녀의 치욕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각이 지닌 의미도 물론 인지하지 못했으며, 이것이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의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신세를 생각할 때마다 벌써 오래전부터 기괴할 정도로 큰 고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즉, 대체 무엇, 무엇 때문에 그녀는 단번에 끝장을 내버리자는 결의를 여태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까? 그러자 비로소 저 불쌍한 어린 고아들과 반쯤 미쳐 버린, 벽에다 머리를 찧어 대는 저 가엾은 폐병 환자 카체리나 이바노브나가 그녀에게 어던 의미를 지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 소냐가 타고난 성품에 덧붙여 어쨌거나 교육도 받은 만큼 어떤 경우에도 계속 이대로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분명해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물속에 몸을 던질 힘은 없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이토록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있으면서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물론, 그는 소냐의 처지가 불행히도 그녀 혼자만 겪는 예외적인 현상은 아닐지라도 어떻든 이 사회에서 우연한 현상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 우연성과 이 얼마간의 교육과 그 전까지의 삶 때문에 그녀는 이 혐오스러운 길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단번에 죽어버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무엇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던 것일까? 설마 음탕은 아니었을 테지? 이 모든 치욕은 분명히 그녀를 기계적으로만 건드렸을 뿐, 진짜 음탕은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 단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생시에 이렇게 그 앞에 서 있지 않는가…….
‘그녀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그는 생각했다. ‘운하에 몸을 던지거나 정신병원에 떨어지거나 혹은…… 혹은, 끝으로, 정신을 혼탁하게 하고 가슴을 돌처럼 굳게 하는 음탕에 몸을 던지거나.’ 마지막 생각이 그는 제일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미 회의주의자였고, 젊고 추상적이고 그렇기에 잔인했으며, 따라서 마지막 출구, 즉 음탕이야말로 제일 그럴듯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사실일까.’ 그는 속으로 외쳤다. ‘과연 아직까지 순결한 정신을 간직한 이 존재도 결국 이 더럽고 구린내 나는 수렁 속에 의식적으로 빨려 들가고 말 것인가? 아니, 벌써 그러기 시작했고 정녕 죄악이 그녀에겐 이미 별로 혐오스럽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지금까지 참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는 좀 전의 소냐처럼 울부짖었다. ‘아니다, 지금까지 운하에 몸을 던지지 못하도록 그녀를 붙들어준 것은 죄에 대한 생각 때문이며 저들, 저자들 때문이다……. 그녀가 아직까지 미치지 않았다면 그것도……. 하지만 누가 그녀가 아직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던가? 아니, 그녀가 지금 멀쩡한 정신인가? 아니, 멀쩡한 사람이 그녀처럼 말할 수 있을까? 멀쩡한 사람이 그녀처럼 판단할 수 있을까? 아니, 파멸 속에, 벌써 그녀를 빨아들인 구린내 나는 수렁 속에 들어앉아, 위험하다는 말이 들려오는 데도 두 손을 내젓고 귀를 틀어막을 수 있을까? 아니, 설마 그녀는 기적을 기다리는 것일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과연 이 모든 것이야말로 정신이상의 징후가 아닐까?’
그는 이 생각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심지어 이런 귀결이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녀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럼 하느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하겠지, 소냐?”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소냐는 침묵했고, 그는 그녀 옆에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하느님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겠어요?” 그녀는 빨리, 정력적으로 이렇게 속삭인 다음,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 역시 그렇군!’ 그가 생각했다.
“하느님이 그 대가로 당신에게 뭘 해 주지?” 그는 계속 그녀를 고문하며 캐물었다.
소냐는 대답할 수가 없는지 오랫동안 침묵했다. 흥분한 탓에 그녀의 연약한 가슴이 온통 들썩였다.
“아무 말도 말아요! 묻지도 말고요! 당신은 그럴 자격도 없어요……!” 그녀가 갑자기 엄중하고 분노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역시 그렇군! 바로 이거야!’ 그는 속으로 집요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든 것을 해 주신단 말이에요!” 그녀는 또다시 눈을 내리깔며 빨리 속삭였다.
‘바로 이게 결론이다! 이걸로 그 귀결이 다 설명된다!’ 그는 호기심에 차 게걸스럽게 그녀를 뜯어보며 속으로 이렇게 단정 지었다.
새롭고 이상한, 거의 병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는 창백하고 여윈, 고르지 못하고 각진 이 얼굴을, 이와 같은 불꽃과 냉혹하고 정력적인 감정을 뿜어낼 수 있는 이 온순한 푸른 눈을, 아직도 설움과 분노에 사로잡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 작은 몸을 들여다보았다. ‘유로지브이! 유로지브이!’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서랍장 위에는 어떤 책이 놓여 있었다. 방을 앞뒤로 서성일 때마다 알아보았지만, 이제야 손에 들고 제대로 살펴보았다. 그것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이었다. 가죽 장정을 한, 손때가 묻은 낡은 책이었다.
“어디서 났어?” 그는 한쪽 구석에서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계속 같은 자리에, 탁자에서 세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누가 갖다 줬어요.” 그녀는 내키지 않는지 그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누가 갖다 줬지?”
“리자베타가요, 내가 부탁했거든요.”
‘리자베타! 이상하군!’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소냐와 관련된 모든 것이 어쩐지 더욱더 이상하고 절묘하게 여겨졌다. 그는 책을 촛불 쪽으로 가져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소냐는 집요하게 바닥만 내려다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옆에 약간 비스듬히 서 있었다.
“라자로의 부활 부분이 어디 있지? 좀 찾아 줘, 소냐.”
그는 그를 곁눈질로 훔쳐왔다.
“그쪽이 아니에요…… 제4복음서예요…….” 그를 향해 몸도 꿈쩍 않고 그녀가 냉혹하게 속삭였다.
“좀 찾아서 나에게 읽어 줘.” 이렇게 말한 뒤 그는 자리에 앉아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더니 들을 준비를 하며 음울한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삼 주쯤 뒤면, 정신병원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가 되겠군! 더 나쁜 일만 없으면 나도 거기 있겠지만.’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의 이상한 바람을 듣고 미심쩍어하며 머뭇머뭇 탁자 쪽으로 왔다. 그래도 책을 집어 들긴 했다.
“설마 안 읽었어요?” 그녀는 탁자 너머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냉혹하고 또 냉혹해졌다.
“읽은 지 오래됐어……. 학교 다닐 때 읽었으니까. 읽어 줘!”
“교회에서 들은 적도 없고요?”
“나는…… 교회는 나가지 않았어. 당신은 자주 다녀?”
“아-아니요.” 소냐가 중얼거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씩 웃었다.
“알 만하군……. 그럼 내일 아버지 장례식에도 안 갈 건가?”
“가요. 지난주에도 갔어요…… 추도 미사를 드리느라.”
“누구의 추도 미사였지?”
“리자베타요. 도끼에 맞아 죽었어요.”
그는 신경이 점점 더 예민해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리자베타와 친한 사이였어?”
“예……. 정의로운 분이었어요……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어쩌다 한번씩…… 오기가 힘들어서요. 우리는 함께 읽고…… 얘기를 나누곤 했어요. 그분은 하느님을 볼 거예요.”
이 문어적인 말들이 그에게는 이상한 울림을 냈으며, 새로운 얘기도 있었다. 리자베타와 어딘가 신비스러운 만남을 가졌고 또 둘 다 유로지브이라니.
‘이러다가는 나도 유로지브이가 되겠는걸! 전염성이 있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읽어 줘!” 갑자기 그가 고집스레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소냐는 계속 망설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쩐지 그에게 읽어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거의 고통에 찬 눈으로 ‘정신 나간 이 불행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읽어 달라는 거예요? 믿지도 않잖아요……?” 그녀가 어쩐지 숨을 헐떡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읽어 줘! 그랬으면 좋겠거든!” 그가 고집을 부렸다. “리자베타한테는 읽어 줬잖아!”
소냐는 책을 펼치고 그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오고 목이 턱턱 막혀 왔다. 두 번이나 시작을 했지만 계속 첫 구절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베타니아 마을에…….” 마침내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읽어 나갔으나 세 번째 단어에서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울리더니 너무 팽팽하게 조여진 현처럼 탁 끊겨 버렸다. 숨이 멎고 가슴이 죄어 왔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가 왜 선뜻 읽어 줄 결심을 못했는지 조금은 이해했으나, 그 이유는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더 거칠고 신경질적으로 읽어 달라고 졸랐다. 그는 지금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고 폭로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지 너무도 잘 이해했다. 정말로 이런 감정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비밀, 즉 아마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추악한 비명과 질책이 가득한 가운데 불행한 아버지, 괴로움 때문에 미쳐 버린 계모, 배를 곯는 아이들 등 가족과 함께 살 때부터 생겨난 해묵은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에야, 또 확실히 알게 된 것인데, 지금 읽기를 시작하면서 번민하고 뭔가를 끔찍이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번민과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다름 아닌 이 사람에게, 그것도 지금 들려주고 읽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는 그녀의 눈에서 이런 말을 읽어 냈고, 그녀의 환희에 찬 흥분을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추스른 다음, 그 절을 막 읽기 시작할 때 그녀의 목소리를 끊어 놓은 목의 경련을 억누르며 요한복음 11장을 계속 읽어 나갔다. 그렇게 19절에 이르렀다.
“많은 유대인이 오빠를 잃은 슬픔에 젖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그때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다시 멈추었는데, 또 목소리가 떨려 와 탁 끊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부끄러웠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소냐는 고통스러운지 숨을 몰아쉬며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주어 읽었는데, 만인이 듣고 있는 가운데 그녀 자신이 고백을 하는 것 같았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녀는 또 멈추고 재빨리 그를 향해 눈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서둘러 스스로를 억누르고 계속 읽어 갔다. 라스콜니코프는 자리에 앉아 몸을 돌리지도 않고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꿈쩍도 않고 딴 곳을 바라보며 듣고만 있었다. 32절까지 왔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흥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 그렇다! 그녀는 정말 진짜로 열병에 걸린 것처럼 진즉부터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바로 그가 기대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들어 본 적도 없는 이 위대한 기적의 말에 다가가고 있었으며 위대한 승리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금속처럼 낭랑해졌다. 승리감과 기쁨이 밴 목소리는 한층 더 다부졌다. 눈앞이 캄캄해졌기 때문에 그 앞의 글귀들이 서로 뒤엉켰지만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은 다 외우다시피 잘 알고 있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라는 마지막 절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서 믿음이 없는 자들, 이제 일 분 후면 곧 벼락이라도 맞은 양 쓰러져 울부짖으면서 믿게 될 저 눈먼 자들과 유대인들의 의심과 질책과 비방을 열렬하고 열정적인 어조로 전달했다……. ‘이 사람, 역시나 눈멀고 믿음이 없는 이 사람도 지금 듣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지금 당장, 이제 곧.’ 이런 꿈이 생겨나자 그녀는 기쁜 기대에 차 몸을 벌벌 떨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더믄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그녀는 나흘이라는 단어에 한껏 힘을 주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서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실 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그녀는 이 장면이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것처럼 오한을 느기고 몸을 떨며 큰 소리로, 열광적으로 읽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인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은 읽지 않았고 읽을 수도 없었기에 책을 덮고 재발리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자로의 부할은 이게 전부예요.” 그녀는 툭툭 끊기는 냉혹한 어조로 이렇게 속삭이더니 꿈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부끄러운지 차마 그를 쳐다보지는 못했다. 열병이 난 것 같은 전율도 계속되었다. 우그러진 촛대에 꽃힌 양초 토막은 이미 오래전부터 꺼져 가면서, 이 가난에 찌는 방에서 영원한 책을 읽으며 이상하게 가까워진 살인자와 매춘부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 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 이 살인자와 매춘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둘 다 가난이라는 어떠한 공통적인 요인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죽인, 즉 파멸에 이르게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그러한 파멸의 과정과 그 원인을 매우 잘 지각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자기-파멸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매춘부인 소냐의 경우는 사실상 천운이 아니고서는 음탕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이며, 살인자인 라스콜니코프는 아무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그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물어야 할 것 같다. 살인자와 매춘부에게 죄가 있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몸을 판 여성과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두 사람을 비난할 수 있는가? 물론 비난할 수 있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느냐고 비난해볼 수 있다. 실제로 소냐의 경우는 매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금전을 획득했을 수도 있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으며, 라스콜니코프의 경우 살인과 절도가 아닌 그의 친구 라주미힌이 제시한 번역 작업 등을 통하여 금전을 획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두 사람은 모두 급했으며 그들에게 가까운 가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이란 그들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기대는 사람만 있었지 정작 그들이 기댈 곳이 없었다. 그러한 기대 속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받을 수 밖에 없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 맞는가? 사실 사회적 책임 또한 그러한 그들의 범죄와 파멸 속에 함께 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라자로의 부활을 읽으며 소냐는 스스로가 애써 부정해오던, 그렇게 하여 내면화한 자신의 희생에 대한 당연성을 폭로해버린다. 라자로의 부활의 중간에는 이런 구절이 제시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바로 이 말이야 말로 소냐와 라스콜니코프가 소리치려고 하는 말이었으며 그러한 말에 오직 ‘하느님’이 대답했으며 그 대답이란 침묵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절망적이다. 그러나 라자로의 부활 마지막에서 나는 소냐와 라스콜니코프가 일련의 희망을 갖는다는 사실, 즉 하느님이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주신다는 소냐의 진술에 일종의 이상한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지나친 절망 속에서 인간이 끝까지 버티는 최후의 보루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보루는 사실 논리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듯 하다. 소냐와 라스콜니코프는 그들의 파멸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탈출구란 사실상 없는 것을 명확히 알기 때문에, 사실 이러한 보루가 논리적인 말들로 구축되어 있었다면 그 보루는 진작에 무너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보루란 사실상 근거 없는 믿음의 보루일 것이나, 그 보루가 존재했기 때문에 소냐는 여전히 버틸 수 있었으며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보루는 죄의식으로 묶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 보루의 ‘희망’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보루는 제 역할을 하는 듯 하다.
후기
분량이 아주 길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문구들이 나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익숙치 않은 범죄, 매춘부와 살인자의 이상한 동질성,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되는 생각들에 대한 섬뜩한 사유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그러나 명백히 마음 속에 존재하는 어떤 불안감과 불편함.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므로, 아마도 나 자신의 어떤 영역을 개방시켰을 것이며 나의 사상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소중한 간접 경험의 의미를 획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나는 『죄와 벌』의 첫 번째 권을 다 읽었다. 이제는, 그러므로 제2권의 차례일 것이다. 단숨에 읽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기억해둘 것이다. 그러한 기억들이 나를 구성한다고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주석 및 참고문헌
- 1(커피사유 주) 물론 이 부분은 뒤에 제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