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issance

Jouissance

2025-01-12 0 By 커피사유


말하는 주체는 그것을 통해 성에 대한 관계를 맺는 이 기관이 가진 죽음의 의미를 폭로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시니피앙 자체가 주체에 빗금을 치면서 최초의 의도화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주체에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문자가 죽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조차 문자를 통해서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충동은 잠재적으로 죽음의 충동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에크리(Écrits)》, 〈무의식의 위치〉 中

이야기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주이상스(Jouissance)〉는 쾌락 원리를 ‘넘어서는’ 쾌락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쾌락 원리’라 함은 인간이 고통 등의 부정적 감정을 최대한 적게 두고 빠르게 방출 · 제거하고자 하는 심리적 본성을 가리키기에 〈삶〉의 영역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쾌락 원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이상스〉는 종종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Todestrieb)〉과 견주어진다. 그러나 둘은 그 출발점은 유사할 수 있어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개념이다. 〈죽음 충동〉은 쾌락 원리의 극단으로, 생물학적 죽음을 통해 아예 외부 자극을 중단시켜 부정적인 감정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충동을 가리킨다. 라캉의 〈주이상스〉는 자극의 중단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 구조로 인해 주체로부터 분리되어버린 ‘실재(Real)’, 즉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으로 계속해서 향하고자 하면서 그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즘적인 욕구에 가깝다.

인간 정신 구조가 만약 20세기 쿠르트 괴델이 불완전함을 증명한 ― 즉, “자기 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무모순인 체계” ― 수론 체계와 유사하다면, 위험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추를 통해 인간의 정신 또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한계, 자신이 영원히 알 수 없을 〈무언가〉를 향한 불꽃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란 말인가? 인간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과연 니체의 함의대로 한 사람의 정신에게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는가?”

… 그러나 여기서 멈추어 서기에는 그 불꽃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불가능을 향하는 인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한 번 더 기꺼이 밀어올리는 이 인간의 정신. 끝없이 되풀이되어 울려퍼지는 의미와의 투쟁, 잃어버린 대상을 향한 포효와 그 허망함을 채우기 위한 필사의 생(生).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주이상스〉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들, 그런 위험한 직감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한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썼다. 시지프스를 나는 다시 생각한다. 결국 굴러떨어져 원점으로 되돌아갈 바위를 계속해서 밀어올리는 시지프스. 그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그의 땀방울 사이로 작은 미소가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렇기에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이 바로 이 비유 속에 자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용히 깊은 흔적을 남기며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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