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닦고 장을 보고 삶을 불리기

2025-06-24 0 By 커피사유

기옥 씨는 오전에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며칠 전 업체에서 ‘그날도 할 수 있느냐’는 전화가 왔을 때 망설이다 ‘어렵겠다’ 말해둔 덕이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명절 때까지……’ 싶어 둘러댔던 거다. 그리고 기옥 씨는 그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같은 알바 자리를 두고 경쟁 중인 십대 아이들이 의식됐지만, 자신이 이 세상의 풍습에 속하고, 풍속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게 좋아서였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리놀렌,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시간에게, 자연에게, 삶에게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너도 나랑 사이 좋게 지내보자’ 제안하듯 말이다. 기옥 씨는 그걸 ‘말’이 아닌 ‘감’으로 알았다. 그래서 오늘 상가와 주택가를 돌며 대출 전단지를 돌리는 대신, 방을 닦고 장을 보고 떡쌀을 불린 거였다. 기옥 씨는 해마다 해오던 걸 올해도 하고 싶었따. 그리고 이웃에 음식 냄새를 풍기고 싶었다.

김애란, 〈하루의 축〉.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pp. 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