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

2026-01-13 0 By 커피사유

요컨대 문헌학은 지극히 섬세하고 신중한 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천천히 수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Wort의 금 세공술’이자 ‘말에 정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문헌학은 다음의 한 가지 사항, 즉 그것의 숭배자들에게 우회해서 가고 여유를 갖고 조용해지고 느려지는 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요구하는 저 존중할만한 기술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문헌학은 지금까지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 오늘날은 ‘노동’의 시대, 즉 모든 것을 곧바로 ‘해치우고’, 오래된 책이든 새로운 책이든 성급하고 품위 없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곧장 해치우는 속전속결의 시대다. 문헌학은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고 매료시킨다. 문헌학 그 자체는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해치우지 않는다. 그것은 잘 읽을 것을 가르친다. 즉 문헌학은 깊이 생각하면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고, 섬세한 손과 눈으로, 천천히, 깊이, 전후를 고려하면서 읽을 것을 가르친다……. 인내심 강한 나의 벗들이여, 이 책은 오직 완벽한 독자와 문헌학자만을 원한다. 나를 읽는 것을 배우라.

프리드리히 니체(F. Nietzsche), 《아침놀(Morgenröte)》, 박찬국 역, 책세상, 2004. pp. 17-18.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익숙하게 해 온 것이 읽기와 쓰기 이 둘밖에 없는 나로서는 일종의 대면이라고 쓰고 싶어진다. 눈이 종이 위에 쓰인 글씨만을 오가는 기계적인 동작을 읽기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시신경으로 들어온 상이 내면에서 표상 내지는 기호로 환원되고, 그 기호들이 이미 내가 가지고 있던 결합을 격발시키거나 그것과 충돌하여 새로운 결합을 형성하는 과정이 동원되어야지 이 동작은 비로소 읽기라고 부를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즉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소위 ‘나의 세계를 두드리는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내면적 갈등이 없는 ― 소위 ‘편안한 읽기’라고 표현되곤 하는 그 동작은 ‘읽기’가 아니다. 이미 나의 안에 속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되새기는 행위는 낯선 타자로 구성된 세계와의 대면이라기보다는 그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으로 침잠하는 행위가 아닐까? 나는 읽는다는 것을 하나의 투쟁이며, 고통스러운 전진이고, 자신과 타자의 간극 속에서 그 틈을 메우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성인 독서율이 해마다 집계되고 그것이 올랐느니 내렸느니 하는 것이 신문 사회 또는 문화면의 어느 꼭지에 연말연시마다 다루어지는 것이 일상인 시대다. 그러나 ‘책을 몇 권 읽었는지’를 집계의 기준으로 놓는 것은 꽤 이상해보인다. 물론 이러한 통계가 아예 책을 보지 않은 것과 본 것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기는 하지만, 책을 본 것과 읽은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지는 않을까?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저 책들이 만약 어느 날의 일회성 눈요깃거리로 소비되는 상품이라 한다면, 즉 저 독서율이 만약 치열한 내면적 붕괴와 재창조 없이 집계되는 어떤 숫자에 불과한다고 한다면 그 숫자만큼 “비지땀을 흘리면서 곧장 해치우는 속전속결의 시대”를 잘 보여주는 지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읽는다는 것은 보는 것과 같지 않다. “깊이 생각하면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고, 섬세한 손과 눈으로, 천천히, 깊이, 전후를 고려하면서” 단어 사이를, 문장 사이를, 문단 사이를, 장(章)과 부(部) 그리고 권(券) 사이를 오가는 정신의 활동이야말로 읽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다.